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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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초고대왕과 왜여왕 히미코의 증손자 신무천황

자연정화 2018. 7. 23. 14:50

5장. 초고대왕과 왜여왕 히미코의 증손자 신무천황

肖古大王과 倭女王 卑彌呼의 曾孫子 神武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262

 

[記]神倭伊波禮毗古命 /[紀]神日本磐余彦天皇

 

 

1. 히미코의 손자 니니기의 강림

卑彌呼 孫子 邇邇藝 降臨

 

이즈모의 팔중궁에서 탈출한 세오녀는 큐슈로 피난하여 큐슈에 여인왕국 야마타이국을 세우고 히미코 여왕이 된다.

왜여왕 히미코는 신라와 교류하고 가야에 자신과 초고대왕의 아들을 아메노오시호미를 보내 결혼시키고 손자 알알이를 얻어서 큐슈의 왕으로 데려오니,

오늘날 천손이라 추앙되는 알알이의 큐슈 강림신화로 전해진다.

 

초고대왕은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을 정복하고, 160년에는 대화大和 수진국秀眞國의 왜여왕인 세오녀細烏女 히미코卑彌呼 여왕을 사로잡아 일본 열도를 차지했다.

 

초고대왕이 히미코의 여동생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를 160년에 죽였는데, 바로 그 160년이 초고대왕이 일본 큐슈를 정복한 해다. 초고대왕은 히미코 여왕 등 8신녀들을 정복하여 다섯 왕자와 세 공주를 얻었다.

 

히미코 여왕 자신의 왕자는 아메노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 왕자로서 니니기邇邇藝(174~220?) 왕자를 낳았고, 그는 최초로 일본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을 낳았다.

 

오시호미의 아들 니니기邇邇藝는 우리말로 알알이다.

 

천손 니니기를 가야로부터 큐슈로 인도했던 이시호리도히메伊斯許理度賣命(141~174)의 고분에서 밝혀진 연대로 보아서, 니니기의 출생은 174년경이며, 오시호미가 태어난 것은 히미코가 정복당한 1년후인 161년경이 된다.

 

초고대왕의 일본생 둘째 왕자는 첫째 신녀인 모치코持子 마수희麻須姫가 낳은 아메노호히天之菩卑命 왕자로서 출운신出雲臣 등 시마네현 귀족의 선조가 되었다.

 

셋째 왕자는 아키코秋子・하야아키쯔速開津姫 신녀가 낳은 아마쯔히꼬네天之津根命로서 후꾸오카의 자성국조茨城國造 등의 선조가 되었다.

 

넷째 왕자는 미치코道子・오오미야大宮姫가 낳은 이꾸쯔히꼬네活津日子根命이고,

 

다섯째 왕자는 아야코紋子・토요히메豊姫가 낳은 쿠마노쿠스비熊野久須毘命이었다. 이 때 5왕자의 순서는 신녀의 순서다.

 

히미코 여왕은 출운 팔중궁의 포로 신세에서 탈출하여 큐슈九州에 새로운 왜국倭國인 여왕국을 세웠다. 이를 야마대국邪馬壹國이라고 한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都牟刈大刀를 규수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

 

대구大邱 평리동坪里洞과 비산동飛山洞에서 출토된 청동검과 비교된다.

 

대구 평리동 청동검과 대구 비산동 청동검

 

고구려 백제 공동시조인 고주몽을 일본에서 쯔모왕都牟王(=都慕王)이라고 했으므로, 초고대왕은 일본에 고주몽신사를 세워 고주몽을 제사 지내도록 주몽왕검朱蒙王劍을 보내준 것이며, 이는 히미코에게 왜국 왕권을 수여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주몽왕검은 일본 황실의 삼보三寶 중의 첫째가 되었다. 이 주몽왕검의 형식은 한국형韓國形 세형동검細形銅劍이다.

 

히미코여왕은 초고대왕과 자신의 아들 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가 일본의 대화大和를 통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첫째 신녀의 아들 아메노호히天菩比神를 야마대국의 사자로서 백제 본토의 구수대왕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복형인 구수대왕으로부터 영지를 받고 이즈모出雲에 정착하였다.

 

히미코여왕은 그후 다시 아메쓰쿠니다마天津國玉命(122~178)의 아들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구수대왕에게 보냈는데, 역시 구수대왕의 사위가 되어서 돌아와 큐슈에 영토를 받았다.

 

히미코여왕은 다시 세번째로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160~210년)을 아메노토리후메天鳥船命(149~206)와 함께 파견하였다.

 

이 다케미카즈끼는 206년경에, 오사카에 있던 4살박이 사대주신事代主神(202~268)을 힘으로 밀어냈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사대주신事代主神은 효소천황孝昭天皇인데, 효소천황을 [고사기]에서 미마쯔히코카에시네御眞津日子詞惠志泥命라고 하였고, 그 이름의 앞머리가 미마쯔히코御眞津日子이니, [고사기]에서 큐슈의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가 굴복시킨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즈모出雲에 있던 효소천황孝昭天皇은 후퇴시켰지만 대마도對馬島, 그리고 오사카大阪인 대화大和의 백제 왕자들이 모두 굴복한 것은 아니다. 특히 대화大和(오오사카)에는 역시 구수대왕의 아들인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이 강력하게 지키고 있었다.

 

히미코여왕은 큰 아들 오시호미忍穗耳를 불러 일본의 중심 오사카大阪인 대화大和에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시호미는 가야에 가서 김수로왕의 딸과 결혼하더니 돌아오지 않고, 그 아들 니니기邇邇藝(174~220?)가 대신 강보에 싸여서 큐슈로 돌아왔다.

 

니니기는 우리말로 알알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경경저瓊瓊杵라고도 쓴다. 즉 원래 발음은 알알이邇邇藝, 뜻은 경경저瓊瓊杵인 것이다.

 

오시호미의 귀국을 안내한 이시호리도히메伊斯許理度賣命(141~174)의 고분으로 추정하면 강림한 때가 174년이다.

 

이때 니니기의 형이라고 기록된 아마노호아카리天火明命(165~210)는 오시호미의 출생년도가 161년경이므로 니니기의 형이 될 수 없다.

 

아마노호데天火明命(165~210)는 니니기의 형이 아니라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우가미신宇迦美神이었고, 백제계 1대 대마도주對馬島主 불합존不合尊였으며, 동시에 단군시대 대마도주 언파불합彦波弗合 이후로 51세 대마도주(궁하문서宮下文書에 의함)였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야마토오弥眞都男王命 즉 왜남왕倭男王이다.

 

니니기는 히미코여왕의 손자이고, 히미코여왕의 가야계 동생벌인 대마도주 대산진신大山津神의 딸이 낳은 우가미신인 아마노호데天火明命(165~210)는 니니기와 서로 육촌간이라서 형이라고 기록했다.

 

불합不合은 대마도對馬島를 의미한다. 대마도는 한 개의 섬 이름이면서 실상은 두 개의 섬이다. 파도? 때문에 섬의 중간에서 아주 조금 합치지 못한 두 개의 섬이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뜻이 불합不合이다. 궁하문서宮下文書에서는 불이합不二合으로도 썼다.

 

35세 단군 사벌 때인 bc723년에,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웅습熊襲(=큐슈九州)을 평정했다고 하는데, 언파불합이 대마도 출신 장수였던 것이고, 그의 후예들이 대대로 대마도의 불합존不合尊이다.

 

[궁하문서宮下文書]에 기록된 51대 우가야불이합왕조宇家澗不二合須世 기록도 언파불합이후의 대마도왕조 기록이다.

 

초고대왕의 막내아들 아마노호아카리天火明命, 구수대왕의 아들 호데火照命, 니니기의 아들 회오리火遠理命(=火火出見) 등은 모두 우가야-대마도주-불합왕不合尊을 의미하거나 불합왕을 지냈다.

 

대산진신大山津神과 그 딸, 토요타마히메豊玉姬와 타마요리히메玉依姬, 타마요리히메의 아들 이쯔세五瀨命도 모두 대마도의 인물이며 대마도에 토요타마히메豊玉姬(신무천황의 첫번째 왕비)의 묘가 남아있다.

 

일본의 [상기上記]에서 1대 대마도주불합왕(사실은 51세 불합왕, 즉 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은 구수대왕인 대국주신의 권유로 대마도의 대산진신의 딸 타마요리히메玉依姬를 이즈모出雲으로 초청하여 결혼하였고 이쯔세五瀬命(184~238)를 낳았다.

 

 

2. 초고대왕의 증손자 신무천황의 즉위

肖古大王 曾孫子 神武天皇 卽位

 

[記]神倭伊波禮毗古命 /[紀]神日本磐余彦天皇

 

천손 알알이는 큐슈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사쿠야히메와 결혼하였고 칠삭동이 신무천황을 낳았다. 사쿠야히메와 구수대왕의 큰 아들인 호데가 신무천황을 대마도로 쫓아냈다.

신무천황은 가야 군대를 얻어서 큐슈에 복귀하고

왜여왕 히미코의 사절로 중국에 다녀온 후에 대화를 정벌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구수대왕의 손녀인 이스케요리와 결혼하여 히미코의 사후에 일본 최초의 천황에 오른다.

 

히미코 여왕의 손자 니니기邇邇藝(174~220?)는 대마도의 해신海神, 즉 오카미宇迦美신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와 처음 결혼하였는데, 사쿠야히메는 이미 구수대왕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었다.

 

사쿠야히메의 큰아들은 호데火照命(187~241)인데, [고사기]에서는 스사노오의 손자인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의 장자인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大國主神(八島士奴美神者=八千矛神)은 대산진견신大山津見神의 딸 고노하나노루木花之流姬를 통해서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를 낳은 기록이 있다. 후하布波=후하不合으로 보면 후하의 지방왕이라는 것인데, 不合이라는 지명과 합치되는 것으로서 대마도의 지방왕이다.

 

후하노모지-구노수노신久奴須奴神은 구수남久須男 즉, 귀수남貴首男의 의미이니 당시 문법 상식으로 구수대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또한 [위지왜인전]에서 왜여왕 히미코와 불화했던 구노국남왕 비미궁호소弓呼素에 해당한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니니기邇邇藝(174~220?)는 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의 여러 아들들을 국진신國津神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고사기]에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국진신의 아이다. 此胎必非我子 而為國津神之子”고 말했다. 국진신은 대국주신이라고 했던 백제 구수대왕이다.

 

사쿠야히메의 네 아들 중에 마지막 넷째인 호오리명火遠理命, 즉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만이 그의 유일한 친아들로 추정된다. 그나마 7개월만에 낳아서 칠뜨기라고 했으니 과연 니니기의 아들인지 구수대왕의 아들인지 알 수 없지만 역사에는 니니기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신무천황의 시호諡號에 사용된 이와례伊波禮는 “이파리”라는 순우리말이다. 니니기邇邇藝(=경경지瓊瓊枝, 알알이)와 그 아들 신무천황이 이파리伊波禮, 옥엽玉葉으로서 합치면 천손天孫 부자父子가 합쳐져서 [경지옥엽瓊枝玉葉]이라는 왕손 혈통을 의미하는 고사성어가 된다.

 

초고대왕의 아들 우가미신, 불합왕-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165~210)이 죽자, 구수대왕은 자신과 사쿠야히메의 아들 호데火照命(187~241)에게 그 뒤를 잇도록 하여, 새로운 대마도주 불합왕 우미사치海佐知로 임명하였다.

 

이때, 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와 타마요리히메가 낳은 이트세五瀬命(184~238)는 대마도주로 즉위하지 못하고, 새로운 불합왕 구수대왕의 아들 호데火照命의 신하가 되었다.

 

그후 214년에 대국주왕이었던 구수대왕이 평양의 백제대왕으로 즉위하니, 호데火照命는 대마도로부터 큐슈九州로 출정나와서 니니기의 아들인 호오리火遠理命(=신무천황)가 이어받아야 할 큐슈 영토를 차지하였다. 니니기는 이미 죽은 것이다.

 

대신에 호데火照命는 신무천황을 대마도로 보내어 신무천황이 불합왕이 되었고, 타마요리히메의 동생인 토요타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살았다. 이것이 낚시바늘 시비로 인한 야마사치山幸와 우미사치海幸 간의 영토 바꾸기 신화이다.

 

이때 왜여왕 히미코는 말로만 왜왕이고 실제는 큐슈의 구노국狗奴國을 차지한 호데火照命에 의하여 연금된다.

 

히미코가 있던 곳은 큐슈의 동남부인 야마대국邪馬臺國인데 그 바로 아래에 구노국狗奴國이 있어서 궁호소弓呼素와 불화하였다. 이 궁호소가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 즉 호데火照命(187~241)이며 구수대왕과 사쿠야히메의 첫 아들이다.

 

[위지왜인전]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이부형인 호데火照命에게 큐슈를 뺏기고 쫓겨나 대마도로 물러난 3년 뒤에, 신무천황은 가야(久米 = 金海김해) 군대와 대마도의 힘을 빌어서 불합왕으로서 큐슈로 돌아와 호데火照命을 타도하고, 큐슈를 되찾은 후에, 대마도와 큐슈, 그리고 가야(久米)의 힘을 합쳐서, 일본 본토를 정복한다.

 

[위지왜인전]에서 야마대국 북부에 사치국佐治國이 있어서 남제男弟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외할머니인 야마대국 히미코 여왕을 보호하였다. 신무천황은 형제중에서 막내동생이고 관직이 본래 히미코여왕을 수호하는 야마사치山幸(左知)였는데, 호데왕에게 밀려나서 대마도에서 우미사치를 하다가 큐슈로 돌아와서 사치국이라고 한 것이다.

 

[위지왜인전] 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

 

[위지왜인전]에는 또 왜여왕 히미코가 238년부터 중국과 교류한 기록이 있다.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를 대방군에 보냈다.

 

[위지왜인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대부 난승미難升米는 우리말 되 승升의 훈訓 “되”를 취하면 “난-되미”의 借字가 되는데 신무천황의 이름인 호호-데미火火出見의 데미를 옮겨적은 것이다. 화화火火는 재난災難을 의미하고 그래서 난難이 재災로 바뀌고 또 화화火火로 고상하게 바뀐 것이다.

 

그런데 난難은 본래 우리 고대말에서, 또 현재 일본말에서 숫자 7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난은별難隱別이 칠중현七重縣이다.

 

즉, 난승미難升米는 칠데미, 우리말로 “칠뜨기”, 즉 칠삭七朔동이였다. 칠개월만에 태어난 아이 칠뜨기이다 보니 과연 니니기의 아들인지 구수대왕의 아들인지 니니기로부터 의심받은 것이다.

 

신무천황이 칠삭동이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난데미難升米를 호호데미火火出見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신무천황이 중국에 왜여왕의 사자로 다녀온 238년에, 신무천황은 대화大和의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초고대왕의 아들인 대년신의 아들로서 쿠니타마신大國御魂神이자 안녕천황安寧天皇이다.)와 전쟁을 벌이는데, 신무천황과 함께 대화大和 정벌에 나선 이트세五瀬命(184~238)가 전사한다.

 

결국 신무천황이 244년에 대화大和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와 싸워서 에시키를 전사시키고 승리한다.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의 아들로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이다.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으로 기록되었다.

 

이 대화 정벌 전쟁에서 244년에 마침내 승리하니, 안녕천황安寧天皇,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이 항복하였고, 그 후예는 물부련物部連이 되었다. 같은 초고대왕의 후손으로서 구수대왕계를 배반하고 협력한 것일 수도 있다.

 

신무천황은 이때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이었던 효소천황의 딸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황후로 취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외적인 왜여왕은 큐슈에 있던 히미코였고, 실제 통치는 증손자인 칠뜨기 신무천황이 대화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후 247년에 히미코가 죽으니 신무천황이 왜왕으로 즉위하면서 히미코의 능을 거대하게 꾸미고, 무려 백명의 노비를 순장하였다.

 

[위지왜인전] 卑彌呼以死 大作塚 逕百餘步 徇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주) 249년 신라를 공격하여 각간 우로를 죽인 왜왕은 신무천황이다.

 

(주) 아직 일본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아니지만, -아마도 기원전 700년으로 왜곡한 천조대신의 능으로 전방후원분이 부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미코 여왕의 거대한 산능은 시코쿠四國地方의 덕도현德島縣 기연산氣延山에 있다. 전방후원고분이며 후원부 정상에는 특이한 오각형의 제단이 있다.

 

기연산氣延山은 히미코의 가야 남편이자 본래 천조대신이었던 연오랑延烏郞을 기린 산이름으로서 기연산紀延山이었을 것이다. 기연산에 야쿠라히메八倉比賣 신사가 있고 그 뒤에 히미코의 능이 모셔져있다. 야쿠라는 큰 카라스烏, 대오大烏에서 유래된 것이다. 야쿠라히메 신사에는 247년 당시의 아마테라스(히미코)를 위한 장례식 장의葬儀 행렬에 대한 신사 기록이 남아 있다.

 

当八倉比賣大神御本記の古文書は、天照大神の葬儀執行の詳細な記録で、道案内の先導伊魔離神、葬儀委員長大地主神、木股神、松熊二神、神衣を縫った広浜神が記され、八百萬神のカグラは、「嘘楽」と表記、葬儀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기연산의 다른 이름은 기연산 이외에 스기오杉尾산, 시야矢野산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세오녀細烏女, 세오리츠히메瀬織津姫穗의 세오細烏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앞 바다는 세호瀨戶 내해內海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