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동아시아 역사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2]

자연정화 2013. 9. 16. 15:06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2)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람스테드는 1912년부터 이 지역을 여행하며 두 언어를 비교한 결과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고, 두 언어를 알타이산맥의 이름을 따서 ‘알타이어족’으로 명명했다. 이로써 람스테드는 우랄-알타이어족에서 알타이어족을 떼내는 공적을 쌓게 됐다. 지금 러시아 알타이산맥 부근에 ‘알타이공화국’이 있는데, 이 공화국에도 알타이어계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람스테드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11년간 일본 주재 핀란드대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일본어와 한국어, 만주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세 언어가 몽골어,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해 세 언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시켰다.

몽골공화국(외몽고)과 중국 내몽고자치구 사이에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이 있다. 대흥안령산맥은 홍산문화가 일어난 적봉 북쪽까지 내려와 있다. 대흥안령산맥 서쪽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열이 있고 동쪽(동남쪽)에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좌우의 언어가 유사하다는 것을 먼저 발견했다면, 그는 이 언어집단을 ‘대흥안령 어족’으로 명명하고 이어 터키어 계열을 이 어족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

람스테드의 실수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주변을 알타이산맥 좌우보다 늦게 살펴본 것이 혼란을 만들었다. 대흥안령산맥보다는 알타이산맥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고향이라는 ‘상(像)’을 만들어준 것이다. 람스테드가 활동할 당시 대흥안령산맥 서쪽인 일본과 조선(한국), 만주는 꽤 많은 사람이 살고 문화도 번성했다.

그러나 알타이산맥 좌우는 유목문화만 남아 있는 황량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발전한 곳보다는 목가적인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적잖은 사람들은 알타이 지역을 한민족 문화의 발원지로 보려고 했다. 람스테드는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 ‘알타이어족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하여, 알타이산맥 쪽에서 생겨난 언어가 대흥안령산맥 쪽으로 퍼져나갔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주목하지 않았다.

유목민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오르도스 청동기가 대량 출토된 황하 만곡부.

알타이는 터키·몽골어로 황금을 뜻하는 ‘알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 왕족의 상당수는 금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가졌고, 신라 고분에는 금관 등 많은 금 장식품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일부 학자들은 신라 지배층은 황금의 산인 알타이산맥 쪽에서 이동해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알타이산맥은 몽골의 서쪽에 있는데, 몽골은 적봉지역보다 높은 해발 1000여m의 초원지역이다. 그리고 알타이산맥을 지나면 동유럽까지 끝없는 평원이 이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적으니, 말(馬)만 있으면 1000~2000㎞도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다. 초원은 바다보다 이동하기가 좋은 공간이다.

서기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 지금의 이란 북쪽 지역에 말을 잘 다루는 스키타이족이 일어나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했다. 스키타이족은 금 공예술이 발달했고, 청동기 제작술이 뛰어났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서기전 480~420년쯤)는 스키타이 지역을 방문한 후 기록을 남겨놓았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스키타이문명에 주목해, 스키타이족은 최초로 청동기문명을 연 종족으로 이해됐다. 이란 북쪽도 대평원 지대이기에 유목 문화가 존재했다. 스키타이 청동기는 말방울 등 기마민족의 특성을 띠는 것이 많았는데 이 문명은 초원을 통해 산지사방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르도스 청동기 만든 흉노족

화하족은 황하 중류에서 서기전 16세기부터 초기 청동기문명인 ‘이리두문화’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夏)나라다. 이리두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함께 석기를 주로 사용하고 청동기를 장식품 등 보조로 사용하는 동석(銅石) 병용기 문화였다. 그리고 상(商)나라가 등장해 보다 발전한 청동기문화인 ‘이리강문화’를 열었다. 중국의 청동기문명은 상나라 때부터 본격화했다.

 

이러한 이리두문화에 이어 주(周)나라가 가장 발달한 후기 청동기문명을 열고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황하는 화하족이 포진한 낙양 인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상류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내몽고자치구의 ‘오르도스(鄂爾多斯)’시에서 ∩자 모양으로 꺾인다. 오르도스는 ∩ 모양으로 꺾이는 황하 바로 남쪽에 있기에 황하에 푹 둘러싸인 형태다.

오르도스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시가 나온다. 오르도스 시를 감싸고 황하가 돌아가는 것을 ‘황하 만곡부(彎曲部)’라고 한다. ‘황하 만곡부’ 또는 ‘오르도스’에서 서기전 8세기 무렵 제작된 유목민계 청동기가 많이 발굴됐다.

오르도스는 알타이산맥의 동남쪽에 있는데, 초원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오르도스와 알타이산맥 사이는 먼 거리가 아니다. 화하족이 만든 중국 청동기의 특징은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긴 가설이 스키타이에서 일어난 청동기문명이 초원길을 통해 오르도스와 능하지역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등장한 배후에도 알타이 지역이 한민족의 원류일 것이라는 시각이 작용했다.

사람이 살려면 반드시 물과 소금이 있어야 한다. 알타이 지역 북동쪽인 바이칼호 부근은 물이 많다. 바이칼 호수에는 알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지금도 고대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알흔섬을 중심으로 한 바이칼호 일대에서 한민족 문화가 일어나 동남쪽으로 전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생겨났다. 이 또한 알타이를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알타이는 원형을 보존한 곳

알타이 지역은 대표적인 과우(寡雨)지역이다. 그로 인해 고비사막이라는 아주 황량한 곳까지 생겨났다. 이런 곳에서는 오래전에 도입된 문화가 존재할 수는 있어도 독자적으로 문화가 일어나긴 힘들다. 그렇다면 알타이산맥을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볼 것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을 뿌리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대흥안령산맥 바로 남쪽이 해발 600여m의 적봉지역이고, 이곳에는 1만여 년 전부터 대단한 신석기문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청동기문화도 잉태했으나 건조한 곳으로 바뀐 탓인지 서기전 8세기 이후에는 유목문화의 특성만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유목문화가 초원길을 따라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확산됐을 수도 있다.

적봉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말을 가축화했을지도 모른다. 말이 있었다면 이들은 적봉이 건조해지기 전에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갔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갖는다면 적봉은 하가점 하층문화-능하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정주문화’를 전파하고,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를 거쳐 몽골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서쪽으로는 유목문화를 전파한 중심이 된다. 홍산문화를 일으킨 적봉이 한민족 문화의 원류이자 일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온 세력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는 흉노의 분파인 훈족이 동유럽까지 진출한 것과, 돌궐에서 갈려 나온 투르크가 소아시아로 진출해 터키를 세운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소아시아에는 이란계 사람들이 이룬 스키타이문화가 있었다.

스키타이족도 초원길을 통해 사방으로 문화를 전파했다. 그렇다면 오르도스는 스키타이와 하가점 상층문화가 만난 접점일 수 있다. 이란계 문화가 동쪽으로 영향을 준 증거로는 중동에서 일어난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영하(寧夏)회족 자치구까지 전파된 점을 들 수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유럽인의 피를 전파한 것은 예니세이 강 상류인 미누신스크(Minusinsk) 지역에서 발굴된 카라스크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카라스크에서 발굴되는 돌무덤은 유럽의 돌무덤과 흡사하다. 중앙아시아는 적봉에서 일어난 홍산문화와 이란에서 일어난 중동문화, 미누신스크에서 일어난 유럽문화가 섞인 곳이지, 한국 문화의 원류일 수는 없다. 종족에게 언어는 종교나 혈통보다 우세한 것이므로 중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홍산문화로 봐야 한다.

 

홍산은 동북-중앙亞의 뿌리

홍산이 동쪽에 있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 서쪽에 있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통에 영향을 줬다면, 알타이어족 대신 ‘홍산어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람스테드의 예를 따른다면 ‘대흥안령어족’이란 말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홍산문화가 널리 쓰이고 있으니 ‘홍산어족’이 더 나을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단국대 몽골학과 이성규 교수 등이 이미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능하문화가 바로 고조선 문화라는 주장은 능하문화는 물론이고 하가점 하층문화, 홍산문화가 발굴되기 이전에도 있었다. 1931년 단재 신채호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이 원고는 훗날 하나로 묶여 ‘조선상고사’라는 책이 됐다)’ 첫머리에서 ‘조선족과 흉노족은 우랄어족에 속하는데,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鮮卑)·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적시했다.

신채호의 주장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을 필두로 한 조선 북학파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북학파는 소중화(小中華)를 추구한 성리학자들과 대립했다. 소중화를 표방한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의 후예인, 중국의 아류로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북학파는 실학을 중시해 중국이 중심이고 나머지는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중국과 오랑캐는 똑같다는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세계관을 갖고자 했다.

북학파의 ‘화이일야’ 세계관

화이관을 따르면 한국은 항상 중국에 눌려 지내야 하는데, 이러한 사관이야말로 동북공정이 바라는 바다. 그러나 중국이 오랑캐로 표기한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역사관을 가진다면, 동북공정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화이관은 노예적인 역사의식이고, 화야일야는 황제적인 역사관을 갖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물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신석기문명의 주역을 3황(皇)5제(帝)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적봉지역에서 일어난 거대한 신석기문명인 홍산문명에 대해서는 한 자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홍산문명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 쪽 기록에 흐릿한 형태로 남아 있다.

화하족이 홍산문화의 후예를 만나 기록을 남긴 것은, 청동기 문화가 활짝 핀 서기전 7세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후 2500년 이상, 홍산문화의 후예를 그들과 다른 역사 존재로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홍산문화의 후예가 살던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홍산문화를 화화족 문화에 접목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홍산문화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동북공정을 부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품는다면 홍산문화의 A to Z를 추적해야 한다. 고대사회에서 종족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따라서 한국인의 역사관은 반도를 극복해야 한다. 이제 홍산으로 뛰어들어가 보기로 하자.

 

▼ 제2부 찰흙밭, 玉밭, 광물밭, 그러나 高原이라는 약점이…

홍산은 도대체 어떤 조건을 갖췄기에 후기 신석기문화인 흥륭와문화(서기전 6000년쯤)-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 무렵)-홍산문화(서기전 4000년 전후)-소하연문화(서기전 3000년경), 그리고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200~1500년)와 유목문화인 하가점 상층문화(서기전 1300년경), 정주문화인 능하문화(서기전 800년경)를 낳을 수 있었는가.

내몽고자치구의 면적은 22만㎢인 한반도의 5배, 9만9000여 ㎢인 한국의 11배가 넘는 110만㎢다. 그러나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인 2350여만에 불과하다. 내몽고자치구의 지방조직은 자치구-시(市)·맹(盟) -현(縣)·기(旗)-향(鄕)·진(鎭)·촌(村)으로 이어진다. 과거 몽고족은 ‘맹(盟)’과 ‘기(旗)’로 부족을 엮었기에, 내몽고자치구에는 아직도 시와 동급인 ‘맹’, 현과 격이 같은 ‘기’가 있다.

적봉시 행정구역도

내몽고자치구에는 수도인 호화호특시를 비롯해 9개 시(市)와 3개 맹(盟)이 있는데, 적봉시는 9개 시 가운데 하나다. 적봉시의 면적은 한국에 육박하는 9만㎢이지만 인구는 450만에 불과하다. 한국의 부산광역시는 초량구 등을 거느린 순수 부산시 지역과 순수 부산시 바깥에 있는 기장군 등의 군(郡)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적봉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순수 적봉시 지역에는 ‘홍산(紅山)문화’란 이름을 낳은 홍산구 등 3개 구가 있고, 그 외곽에 7개 기(旗)와 2개 현(縣)이 있다. 이 적봉시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 순수 적봉시 동쪽에 있는 ‘오한기(敖漢旗)’다. 오한기에는 흥륭와, 조보구, 소하연, 하가점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기와 함께 옥으로 만든 수많은 장식물(玉器)이 출토됐다.

충북 크기에서 한반도보다 많은 유적

오한기의 면적은 충청북도보다 약간 작은 8300㎢인데 이 오한기에서 발굴된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됐거나 발견된 유적보다 훨씬 많다.

남북한 전체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지는 300곳 정도이고, 유물이 발굴된 곳은 60개소 정도다. 청동기 유적지는 600곳 정도이고, 발굴지는 200곳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오한기에서 조사된 신석기 유적지는 1000여 곳이 넘고, 청동기 유적지는 2000여 곳이 넘는다.

오한기의 인구는 60만에 불과하므로 아직 ‘파보지 못한 땅’이 많다. 대부분의 지역이 농지나 초지이므로 개발을 위해 파보면 더 많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인들은 산 중턱의 동굴에서 살았기에 ‘동굴인’으로 불리지만 신석기인, 특히 후기 신석기인은 물이 가까이 있는 평지에 내려와 움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오한기를 포함한 적봉시 전체가 해발 600여 m의 고원 평지라는 사실은 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명은 물이 있는 평지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로 이 곳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췄다. 기자는 이곳에서 많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우연히 발견했다.

적봉시 오한기 왕가영자(王家營子)향의 서대(西臺)마을에서 서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서대(西臺) 유적지’가 있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소하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그리고 중국 전국 시대 때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고 한다. 조보구문화를 제외하고는 적봉지역에서 발흥한 모든 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서기전 5세기~3세기인 전국 시대 유물을 끝으로 이후의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는데, 이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났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을 떠난 이유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질병일 수도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춥고 건조한 고원에서는 농경이 불가능하고 유목만 가능하다. 유목민은 가축이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일정한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유목을 하더라도 중심지는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서대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목축이 불편해지면 이들은 살던 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이주한다.

 

서대마을에 쏟아진 비

이렇게 되면 중심지도 흙으로 덮이게 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정주민의 중심지였고 유목이 시작된 후로도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철기 시대를 맞을 무렵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이 서대마을이다.

지금 적봉지역의 연 강수량은 300㎜에 불과해 사시사철 건조하다. 서대유적지를 찾아가던 날, 하늘이 꾸물꾸물해지더니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소낙비가 내렸다. 번개를 동반한 큰 비였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내몽고 지역에는 예년과 달리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이 크게 고민한 것은 대기오염과 더위였다. 중국은 이 문제를 ‘인공강우’로 해결하려고 했다. ‘구름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비가 내리게 한 것이다. 비가 내리려면 대기 중에 있는 수증기를 잡아당겨 물방울을 만드는 결정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름씨’다. 중국은 드라이아이스 입자로 만든 구름씨를 항공기로 뿌리거나 포탄으로 발사했다는데, 정작 오라는 베이징 지역에는 비가 적게 오고, 북쪽인 내몽고지역에 자주 내렸다는 것이다.

목마른 토지라면 모처럼 쏟아진 빗물을 재빨리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랜만의 해후라서 그랬는지, 땅은 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몽고에서 인마(人馬)가 다니는 도로는 비가 오면 대개 물길이 된다. 물이 흐르는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는 뜻인데, 낮은 곳은 대부분 흙이 씻겨 내려가 자동차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단단한 것만 남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것만 남았기에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일까?

신석기 후기문화부터 초기 철기 시대 사이의 문화가 꽃폈던 서대 유적지. 그러나 철기문화가 시작될 즈음 이곳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흘러간 물은 얕은 곳에 모여들어 증발될 때까지 물웅덩이를 만든다. 이 웅덩이가 바로 오아시스다. 칭기즈 칸은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는 등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물은 이 곳에서 생명과 다를 바 없다.

불에 구운 여신상

비가 쏟아진 지 10여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비포장도로는 순식간에 큰 개울이 됐다. 물길을 거스르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 서대마을에 도착하자 비가 뚝 그쳤다. 서대 유적지를 찾아 나선 답사단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길이 왜 그렇게 미끄러운가. 기자는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더욱 미끄럽게 느껴졌다. 서대 유적지는 1987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내몽고 공작대가 발굴했다.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겨갔지만 그 터라도 보려고 간 것인데, 막상 도착해 보니 유난히 많이 온 비 때문인지 풀이 우거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역시 유적지는 서리가 내린 다음에 보아야 한다. 한겨울이 곤란하다면 초봄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여신상(女神像)이 발굴됐다고 한다. 적봉 일대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심심찮게 여신상이 발견된다. 왜 고대인들은 여신상을 만든 것일까. 남신상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후기 신석기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없었다. 짐승처럼, 새끼는 모두 여성이 키우던 시절이었다. 남성은 ‘씨’를 줄 뿐 자녀 양육에는 관여하지 않으니, 새끼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새끼는 같은 ‘씨’에서 나온 것도 있겠지만 다른 씨에서 나온 것도 적지 않으니, 아버지를 따져봤자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성한 아들도 그를 키워준 어머니의 통제를 받는다.

이를 ‘모계(母系)사회’라고 한다. 모계 사회는 다산(多産)을 중시했지만, 다산은 모계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계(父系)사회에서도 다산은 아주 중시됐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 상당수의 신생아는 홍역 등을 앓다가 희생됐다. 홍역을 이겨냈더라도 성장 도중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에 파상풍이 감염돼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성한 후에는 타 부족과의 싸움이나 동족 내의 싸움, 또는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죽기도 했다. 사냥과 싸움에서 이겼더라도 그 과정에서 입은 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도 많았다. 기생충과 전염병에 의한 희생도 무시할 수 없었다.

 

 

 

후기 신석기 시대는 난혼과 근친혼이 성행한 다처다부 사회다. 요녕성 심양시 신락유적지에는 다산을 중시한 이 시대 풍속을 보여주는 인형이 움집 안에 전시돼 있다.

‘병(病)은 곧 죽음’인 사회였으니 생명을 이어가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다. 이 위험은 홍역 예방약을 내놓고, 파상풍은 병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기생충은 사실상 박멸시킨 현대의학이 등장한 후 소멸됐다. 병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 확률이 떨어지자 비로소 인류는 다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모계집단에서 구성원이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경이다. 농경이 잘되려면 비가 적절히 내려야 한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이 중요해지는데, 이 제사는 ‘큰 어머니’로 추앙받는 여성이 치른다. 학자들은 여성 리더가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을 맡던 풍습이 지금은 무녀(巫女)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근친혼과 난혼이 횡횡한 모계사회

제사장이 여성이면 신(神)도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신석기인들은 여신상을 만들어 제를 올렸다. 이러한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여제사장은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제사장은 집단을 이끄는 군장(君長) 역할도 겸했다. 제사장과 군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시절이 후기 신석기 사회다.

여성이 집단을 이끈 후기 신석기 사회는 전형적인 모계사회였다. 이때의 신은 여신이고 제사장도 여성이었다. 여성 제사장이 종족을 이끌고 움집 안에 모신 여신에게 천제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한 내몽고 박물관의 모형.

군장과 제사장 역할을 맡은 여성 리더는 집단 내의 남성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시사회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주 중요했으므로 여성 리더가 집단 내 모든 남성을 독점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집단을 지키려면 다른 여성에게도 출산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계사회는 일처다부(一妻多夫)가 아니라 다처다부(多妻多夫)의 사회다.

‘관계’는 대개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근친혼(近親婚)이 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이니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남매도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부모 자식이 관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난혼(亂婚)이다. 근친혼과 난혼을 다반사로 하는 다처다부 사회이면서 중년 여성이 리더십을 쥐고 제사장 역할도 겸하는 것이 신석기 후기 사회였다.

토기를 만들 수 있는 고운 흙

이러한 집단은 불을 다루며 생활했다. 불을 이용해 난방뿐만 아니라 화식(火食)을 했다. 직접 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 불로 물을 끓이고 그 물의 열기로 음식을 익혀 먹기도 했다. 굽는 것보다는 삶거나 찌는 것이 더 맛이 좋다. 삶거나 찌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도구가 바로 토기다.

그런데 토기는 아무 흙으로나 다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지금도 도자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있으니, 고대 사회에도 토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구해야 했다. 모래나 돌이 섞이지 않고 존득존득하게 이겨지는 ‘찰흙’이 그것이다. 이런 흙으로 만든 토기는 불에 올려놓았을 때 터지지 말아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흙이 많은 곳이 신석기인들의 정주지가 된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웃자란 풀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므로 답사팀은 사방을 조망하다가 내려왔다. 바로 그때 서울대 체육교육과의 이애주 교수가 “앗!” 하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중요 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僧舞)’ 보유자 이 교수는 한국 춤의 원류를 찾기 위해 줄기차게 이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서대 유적지로 올라갈 때 기자는 이 교수에게 “교수님이 넘어지면 국보(國寶)가 깨질 수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했었다. 그런데 하산길에 넘어졌으니 답사단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국보 깨진다~”고 소리를 질렀다. 몸이 가벼운 이 교수는 재빨리 일어나 쑥스러워 하며 옷을 털었다. 그런데 흙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단국대 몽골학과의 이성규 교수가 “이것 좀 봐. 이렇게 흙이 고우니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지” 하며 혀를 찼다. 이 교수가 가리킨 곳은 빗물이 흘러 생긴 길 옆 도랑인데, 그곳에는 빗물을 타고 흘러온 아주 고운 흙이 고여 있었다. 문외한이 봐도 도자기를 빗는 데 적합한 흙이었다.

기자는 이 흙물에 샌들 신은 발을 담갔는데, 그때 발톱 밑으로 들어간 흙물은 1주일이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발톱 밑으로 들어갈 정도로 고운 흙이 서대 유적지를 포함한 적봉 일대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우연한 발견…. 비가 오지 않았고 이애주 교수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기자는 이 곳에 토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많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운 흙이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다. 몽고 초원은 가을부터 봄까지 지독한 가뭄이 이어진다. 이른 봄 강한 편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이곳에 깔린 고운 흙이 일제히 떠올라 베이징 지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온다. 이른바 ‘황사(黃砂)’다.

 

워낙 고운 흙 때문에 이곳을 흐르는 강도 누런색을 띤다. 적봉지역을 관류하는 가장 큰 강은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 강(西拉木倫河)’인데, 몽골어로 ‘누런 강’이라는 뜻이다. 동서로 길쭉한 내몽고의 서남쪽인 오르도스를 휘감고 지나가며 누런 흙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강이 바로 황하다.

신석기인들은 움집을 짓고 불을 피워 난방을 했지만, 옷 만드는 기술은 발전하지 못했기에 너무 추우면 살지 못한다. 농경을 할 정도로 따뜻한 계절이 길어야 집단생활을 한다. 적봉지역에 후기 신석기 유적지와 초기 청동기 유적지가 즐비하다는 것은 옛날에는 사람이 살 만했다는 의미다. 비도 적절히 내렸고 지금보다는 따뜻한 계절이 훨씬 길었다.

신석기인들이 끓는 물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다리가 세 개 달렸다고 하여 ‘삼족기(三足器)’란 이름을 얻은 토기다. 신석기인들은 사진에서처럼 삼족기 아랫부분에 물을 넣고 가운데에 뭔가를 걸친 후 그 위에 고기와 곡식을 얹어 삼족기 아래에서 불을 지폈다.

삼족기가 옹기를 낳았다

이 삼족기를 만들면서 신석기인들은 불에 구운 토기인 옹기(甕器) 개념을 터득한다. 옹기는 굽지 않은 토기보다 단단하다. 그래서 귀한 것은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다. 서대 유적지에서 불에 구운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동산취라는 곳에서도 불에 구워 만든 임신한 여성상(孕婦像)이 출토됐는데, 이는 다산을 숭상했다는 증거다.

밑이 편평한 토기는 불에 올리지 않고 곡식 낱알 등을 보관하거나 천제를 올리는 제기(祭器) 등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신석기인은 한마디로 흙의 예술가다. 이들은 흙을 이용해 그릇을 만들고 집을 짓고 성도 쌓았다. 신석기인들이 흙으로 쌓은 성을 ‘토성’이라고 하는데, 진흙을 빚어 반듯한 벽돌을 만들고, 이것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판축(版築)기법을 사용했다.

요녕성 신락유적지 박물관에 전시된 삼족기(왼쪽)와 삼족기를 이용해 음식을 익히는 원리를 설명한 그림.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깎는 기술이 없었기에 석성(石城)을 쌓아도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돌의 거친 면이 밖으로 나오므로, 적군은 그것을 잡고 성을 타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토성은 표면이 매끈해 타고 넘기 힘들다. 수레에 큰 돌이나 나무를 싣고 와 때림으로써 성을 부는 ‘충거(衝車)’는 신석기 시절엔 없었으니, 토성은 훌륭한 방어수단이었다.

판축기법으로 만든 흙벽돌을 불에 구우면 돌만큼 단단해진다. ‘인조(人造) 돌’이 탄생하는 것이다. 불에 구운 벽돌을 한자로 ‘전(塼)’으로 적는데, 중국인들은 전(塼)을 이용해 성까지 쌓았다. 구운 벽돌은 왕의 무덤과 탑, 그리고 도자기 등을 굽는 가마를 만드는 데 이용됐다. 그러나 인조 돌을 만드는 것은 신석기 시대가 끝난 다음이었다.

장군총으로 이어지는 적석총문화

신석기인들은 들돼지(멧돼지)를 잡아 가축화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무덤에서 껴묻기(副葬)를 한 돼지 뼈가 발굴됨으로써 확인됐다. 적봉지역은 호랑이가 살 만한 곳은 아니다. 초원지대에서는 늑대나 이리가 패권을 행사하는데, 이를 입증하듯 몽골인의 전설에는 늑대가 자주 등장한다.

답사단은 오한기 사가자(四家子)진의 초모산(草帽山) 뒤에 있는 유적지도 방문했다. 초모는 ‘풀로 만든 모자’니 곧 삿갓이다. 이 ‘삿갓산’ 뒤쪽에서 협의의 홍산문화 시절 만든 제사터와 무덤터가 발굴됐다. 홍산문화는 후기 신석기문화 가운데 가장 후기의 것이라 그전의 신석기문화보다 확실히 발전한 모습을 갖는다.

반듯한 돌을 모아 방형(方形) 계단꼴로 쌓아올렸던 초모산 적석총 흔적.(좌) 내몽고 곳곳에서는 지금도 양머리 등을 바치고 천제를 올리는 ‘오보’를 볼 수 있다.(우)

대표적인 것이 적석총(積石?)의 등장이다. 적석총은 신석기인들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전체 모양은 네모꼴인데, 이 네모꼴 위로 한 계단 올라가 작은 네모꼴이 있고, 그 위에 한 계단 더 올라가 더 작은 네모꼴이 있는 형태다. 쉽게 말하면 피라미드 만든 것인데, 피라미드 제단의 가장 발달한 형태가 바로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이다.

무덤터가 곧 천제를 지내는 곳

장군총은 철기 시대에 만든 것이라 엄청나게 큰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그러나 홍산문화인들은 청동기도 만들지 못했으니 반듯한 돌을 주워다 각(角)을 맞춰 쌓아 올렸다. 이러한 적석총은 제사터로 사용됐는데, 적석총은 대개 여성 리더를 매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터 위에 만들어졌다.

실제로 초모산 유적지의 적석총 안에서 적잖은 무덤이 발견됐는데, 시신은 벽돌처럼 반듯한 돌을 쌓아 만든 ‘석관(石棺)’ 안에 놓여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다음에는 구들장처럼 얇고 넓적한 돌로 위를 덮어 석관을 완성한다. 왜 신석기인들은 석관을 안치한 곳에 제사터인 적석총을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하늘과의 소통’에서 찾아야 한다.

후기 신석기인들은 ‘사후(死後)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에 시신을 매장했다. 죽은 사람은 하늘이라고 하는 또 다른 세계로 가는데, 평소 하늘과의 소통을 담당한 것은 여성 리더다. 따라서 여성 리더가 숨지면 정중히 매장하고 그를 묻은 곳을 하늘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삼는다. 자연계에서 하늘과 소통하는 동물은 ‘새’다. 그래서 이곳의 신석기인들은 새를 숭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