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 우리 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4>토문강 둘러싼 쟁점들
출처 : 동아일보 200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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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간도는 오랜 세월 조선과 청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중간지대로 존재했다. 간도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서울대 백충현 교수의 말처럼 ‘영토협상은 쌍방이 과거의 사실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국제법으로 엮어서 주장하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 土門과 豆滿의 혼용과 구별
중국측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조선과 청 모두 토문이 두만강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청은 토문과 두만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도 토문과 두만을 같은 것으로 표기한 것이 있다. 이 점은 한국측에 불리한 대목.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토문과 두만을 명확히 구분해 그리는 조선의 지도가 늘어났다. 179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여지도(輿地圖)에는 두만강과 분명히 다른 물줄기가 정계비에서부터 표시돼 있다. 역시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도도는 백두산 동쪽에서 나와 북류하는 물길을 ‘토문강원’으로 명기하고 있다.
또한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全圖)는 정계비에서 갈라지는 물줄기가 두만강 북쪽의 ‘분계강(分界江)’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두만강과 합쳐지는 것으로 돼있다.
● 영토의식에 눈뜨는 조선
조선은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개척했으나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은 뒤 이 지역을 방치했다. 군사방어선도 남쪽으로 후퇴했다. 인천교육대 강석화 교수는 “정계비를 세울 때만 해도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강변지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북방의 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중흥기인 영·정조대였다. 영조 때인 1767년부터는 백두산을 ‘조선의 종산(宗山)’으로 인정해 매년 세 차례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나아가 폐사군(廢四郡) 복구론, 요동수복론 등과 같은 논의가 일기도 했다. 토문은 두만이 아니고 쑹화(松花)강이라는 주장이 본격 제기된 것도 이때였다.
● ‘사기극’이라는 주장의 맹점
“1880년대 조선정부는 국경쟁의를 일으켰다. 투먼강(圖們江·두만강의 이칭) 북쪽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위증과 망언을 이용해 역사상 보기 드문 국제 외교사기극을 도모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산둥(山東)대 쉬더위안(徐德源) 교수는 1998년 ‘토문, 두만이 각각 다른 두 강이라는 망언에 관한 반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이 백두산정계비를 비밀리에 옮겼으며 △그에 맞춰 돌더미와 흙더미도 쑹화강 쪽으로 축조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정계비 위치를 바꾸고 국경축조물을 날조했다는 얘기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현재의 정계비 터를 기준으로 하면 간도는 분쟁의 소지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실수라 해도 면책될 순 없다
국경 정계(定界) 합의의 청측 대표인 목극등(穆克登)이 저지른 실수는 중국측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대목이다. 현지 역사학자 A씨는 목극등의 실수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두만강을 경계로 생각했다면 정계비 위치를 두만강이 안 보이는 곳에 잘못 잡았고, 둘째 두만을 토문으로 오기(誤記)했으며, 셋째 두만강 상류가 아닌 물줄기에 국경축조물을 쌓게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1885년, 1887년 감계(勘界)담판에서 조선은 “목극등이 주장해 세워진 축조물대로 쑹화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충현 교수는 “비석의 위치가 잘못됐거나 비문에 오기가 있다면 국제법적으로 청의 중대과실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이일걸 박사(성균관대 강사)도 “과실 책임은 일방적으로 청에 있다”고 논문을 통해 주장해 왔다.
● 소백산정계비설은 타당한가
이를 뒤집기 위해 중국학계는 “정계비가 당초 압록강과 두만강이 다 보이는 소백산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조선이 정계비를 옮겼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정계비 건립 당시 목극등과 동행한 청의 화가가 작성해 청과 조선 정부에 제출한 지도를 보면 토문은 백두산의 대각봉보다 위쪽에 표기돼 있다. 현재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소백산보다도 북쪽에 그려진 것이다. 강석화 교수는 “당시 조선측 통역관으로 동행했던 김지남(金指南)이 남긴 ‘북정록(北征錄)’의 답사경로를 보아도 소백산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 간도는 조선인이 개척했다
간도지역의 개척자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삶터를 옮긴 후에도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 지역에 대흉작이 들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 농경지를 개간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조선의 지방관이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조장하기도 했다. 회령부사는 주민들이 개간청원서를 내면 이를 허용해주는 방식으로 이주를 지원했다. 강계군수는 자신의 권한 아래서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면으로 나눠 7개면은 강계군, 8개면은 초산군, 9개면은 자성군, 4개면은 후창군에 분속시켰다.
반면 청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청이 두만강 대안(對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관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1860년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도 변발하고 호복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 주민들은 청원도 조선에 했다
청은 1882년에야 간도주민들을 자국인으로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고시했다.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므로 두만강 이북지역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를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청원하기도 했다. 1885년과 1887년에 조선이 청과 회담에 나선 것도 간도주민들의 이 같은 청원 때문이었다.
백두산=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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