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대릉하 유역 ‘사해·흥륭와’ 유적지서 출토… "신석기시대 두 지역은 동일한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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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년 전 주거지인 사해 유적에서 발굴된 용 형상의 돌무더기. 중국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에 해당한다. <김문석 기자> |
중국 ‘사해·흥륭와’도 발해문명권
발해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BC 6000년)쯤의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발해연안에서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으로는 요하 하류의 발해연안 서부, 즉 황하 하류의 자산(磁山)·배리강(裴李崗) 문화, 북부의 대릉하(大凌河) 상류의 사해(査海)·흥륭와(興隆窪) 문화 그리고 신락문화, 광록도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 요동반도 압록강 하류 후와(後窪) 문화가 있다. 한반도에는 대동강 유역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 유역의 지탑리유적, 한강 유역의 암사동유적, 한반도 동북부의 서포항유적, 그리고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유적,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유적 등이 있다. 이들 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기원전 6000~4000년쯤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가고,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몽골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경향신문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라는 기치 아래 탐사를 떠났다. 필자가 합류한 첫날 답사는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시 사해(査海)와 내몽골 적봉시 흥륭와(興隆窪)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중국에서는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국부적인 개념이다. 이들 문화는 요하뿐 아니라 대릉하 유역과 요동반도의 발해연안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사해·흥륭와도 대릉하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발해문명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해는 지금부터 8000년 전의 유적이다. 1982년 중국 정부가 전국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때 발견되었다. 흥륭와는 지금은 내몽골이지만 1979년 재편되기 전까지만 해도 적봉도 요녕성이었다.
용 형상 "중원문화의 시작은 동방”
사해유지발문관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와 옥귀고리. 한반도의 토기·옥 문화와 직접 연결된다. <김문석 기자> |
사해 유적은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문화 가운데 하나로 빗살무늬토기가 특징이다. 그 전에는 자산·배리강의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았는데, 사해와 흥륭와에서도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
두 번째는 옥기(玉器)였다. 중국은 옥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귀고리 장식품인 옥결( 玉 )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이 이와 똑같다(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도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의 옥결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옥결은 일본에서도 나왔다.
세 번째는 용이다. 중국은 용 토템이고 동이족은 새 토템이다. 중국에서는 중원에서 용 신앙이 있었는데 요녕에서 용이 나왔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마지노선이었는데 연산산맥(만리장성) 넘어 사해에서 용이 나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명나라까지는 만리장성 이동은 동이(東夷)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 사해에서 나오면서 이곳이 동양문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사해 유적은 요녕성 부신시 대릉하 상류 사해촌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 여신상이 세워져 있고,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 )’이라고 씌어 있다. 이곳을 중화제일촌이라고 명명한 것은 중국 최초의 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해 유적은 주거유적 60여 기가 도시계획된 것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아주 규격화되어 있다. 방형주거지 사이에 주먹만한 할석(割石)으로 덮은 19.7m에 이르는 용의 형상이 발견되었다. 이 용의 형상은 지하 1.2m 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들어올려 지상에 같은 모양으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사해 유적의 용 형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원 문화의 시작이 중원이 아니라 동방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농업 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다. 사해 유적에서 이런 용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최초의 사람이 동이인(東夷人)이다.
흥륭와 유적은 행정상으로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興隆窪)촌이다. 지리상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지류인 망우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의 지표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1983년 발굴조사 시 170여 기의 반지하식 집자리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되었다.
흥륭와문화 농업경제 중심 사회
경향신문 답사단의 일원으로 흥륭와 유적을 찾아 감회가 새로웠다. 흥륭와는 필자가 이제까지 3번 답사를 시도했는데 두 번 실패하고 이번에 비로소 성공했다. 직접 실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흥륭와는 사해 유적으로부터 100㎞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사해와 흥륭와는 대릉하 상류다. 문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흥륭와 유적은 간혹 홍산문화의 유존이 흥륭와 문화층을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흥륭와 문화와 홍산문화의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주로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채색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는 주로 빗살무늬 계통으로 지(之) 자형 빗살무늬와 인(人) 자형 빗살무늬, 그리고 사선 빗살무늬 및 교차형 빗살무늬 등이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늬는 지(之) 자형 빗살무늬다. 교차형 빗살무늬는 삿자리를 짜듯이 교차하면서 베푼 삿자리형 빗살무늬로,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심선문(深線紋) 빗살무늬와 매우 유사하다.
흥륭와 유적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이 가는 모래가 섞인 표면이 거친 붉은색 혹은 갈색계의 토기로, 그릇 모양은 주로 큰 독(罐)류와 단지(鉢)류 등이다. 그리고 이들 토기의 소성(燒成) 온도는 그리 높지 않고, 모두 수제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이외에 소량의 석편석기와 타제석기 및 마제석기류의 석마봉, 석마반, 반상기 등 곡식 가공 도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밖에 낚시 바늘, 골추(骨錐) 등 어로기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흥륭와 문화는 발해연안 서남부의 자산·배리강 문화와 마찬가지로 농업 경제 생활을 위주로 하면서 수렵 생활을 겸하는 사회로 추정된다.
국내 언론에서 처음으로 답사에 성공한 흥륭와 유적에서. 필자(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두번의 실패 끝에 이번에 탐사취재단의 일원으로 비로소 이 유적을 찾게 됐다. <김문석 기자> |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발생은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쯤에 출현하는 동유럽이나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선다. 그뿐 아니라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방법이나 그릇 모양이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와는 계통이 서로 다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유형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오랫동안(기원전 6000년쯤부터 2000년쯤까지) 유행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의 동질성은 민족의 동질성과도 통한다.
<이형구 :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