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금) 오후 02:53
용과 새는 동이족 상징 아닐까
‘사기 고조본기’에 한나라 창업주 고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고조(유방)의 어머니 유오가 연못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때 아버지 태공이 달려가보니 교룡(蛟龍·큰 물을 일으킨다는 용)이 부인의 몸에 올라가 있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하여 고조를 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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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새가 한꺼번에 표현된 유물(지팡이)가 출토된 선양 신러유적. 사진은 유적을 복원해놓은 모습이다. 새는 홍산문화의 옥에서도 잘 표현됐다. 신러/김문석기자 |
한마디로 한고조 유방은 용(교룡)의 자손인 셈이다. 고조본기는 한술 더 떠 “고조는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 용을 닮았다(隆準而龍顔)”고 했다. 임금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의 유래다. 젊었을 때 무뢰배였던 고조는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먹고 술에 취해 드러눕기 일쑤였는데,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고조가 외상술을 먹는 날이면 그 주막의 매상이 몇 배나 올랐다.
비단 고조뿐이 아니다.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염제)의 탄생 전설 가운데도 용이 나타난다.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은 볕을 쬐려고 나들이에 나섰다가 신비로운 용을 보았다. 여등은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임신한 것이다. 여등은 열달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염제 신농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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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을 쌓은 이유
예를 더 들 것도 없이 ‘용=황제’이며, 중국 민족은 용의 자손으로 굳게 믿어왔다. 용은 봉황과 기린, 거북과 함께 ‘4령(靈)’의 하나였는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의 제왕이며, 농경중심사회에서 치수를 담당하는 지배자는 용으로 비유됐다.
중국문헌인 ‘광아(廣雅·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자전)’의 익조(翼條)를 보면 아홉가지 짐승의 장점만을 다 땄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입 주위에 긴 수염, 턱 밑에 명주, 목 아래는 역린이… 있다.”
용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상나라(BC 1600~BC 1046년) 때는 악어와 뱀, 제비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서주(BC 1046~BC 771년) 때는 입을 벌리고 있고,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의 특징이 나타난다. 진나라(BC 221~BC 206년) 때는 봉황, 악어, 도롱뇽, 뱀이 복합된 응룡(應龍)이 등장한다.
‘용의 후손’인 고조가 세운 한대(BC 206~AD 220년)에는 사방신(청룡·백호·주작·현무)의 하나인 청룡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발톱이 세 개인 용의 모습이 고착화한다. 이렇게 용은 중국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 차하이 용의 수수께끼
그런데 8000년 전 마을인 차하이에서, 즉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고향인 발해만 연안에서 용 형상 돌무더기와 용이 부조된 토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중국의 마지노선으로 여겼어요. 만리장성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장성을 넘으면 그것은 중원이 아니고 오랑캐의 땅이라 여겼거든….”(이형구 선문대 교수)
그런 가운데 8000년 전 유적인 차하이에서 용이 발견되니, 숱한 격론을 벌인 끝에 차하이를 ‘중화 제1촌’, 즉 중화의 본향으로 인정하는 고육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용신앙은 중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용과의 관계는 뿌리 깊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용이 설화의 중요한 화소(話素)로 등장하며 물의 신, 시조의 어버이, 제왕, 호국·호법의 신, 예시·예언자적인 존재로 나타난다”면서 “천후(天候)의 다스림이 절대 필요한 농경문화권에서는 용과 군왕이 자연스레 결합된다”고 말했다.
우선 삼국유사 북부여조를 보면 “BC 58년 4월8일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창업했다”고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을 낳은 것은 계룡(鷄龍)이며,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 왕의 아들이었다.(
삼국유사)
또 백제 30대 무왕은 과부(寡婦)인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삼국유사)이며, 소정방은
백마강의 용을 잡고서야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 우리나라 용이 호국·호법의 상징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가장 특이한 점이다. 삼한 통일의 대업을 문무왕은 평소 “죽으면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 문무왕은 그 말대로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됐으며, 아들 신문왕은 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다. 용(문무왕)의 출입문으로 말이다.(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수호신으로서 용 이야기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만도 86편이나 기록돼 있을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최소한 23건, 삼국유사엔 24건의 용 관련 기록들이 나타난다. 고려 창업주 왕건도 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려사)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바다 한복판에서 부처로 변신한 여우에게 핍박을 당하는 용왕을 구해주고 그의 딸 용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이다. 그러니까 왕건의 할머니가 용인 것이다. 용이 국가 권력의 신성성을 인정해주는 보증수표였던 것이다.
용 관련 유물들도 차고 넘친다.
고구려의 경우 무용총, 삼실총, 장천1호분, 약수리 벽화분, 덕화리 1호분, 호남리 사신총, 강서중묘 등에 사신도의 일원으로 청룡이 등장한다. 신라의 경우도 고리자루칼, 청동초두, 허리띠 장식, 와당, 서수형 토기 등에 용이 표현됐다. 백제도
무령왕릉의 팔찌, 동탁은잔, 고리자루칼, 금동대향로 등에서 용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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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용 유물들. |
# 용의 몸을 지닌 새(鳥)
그런데 ‘차하이(査海) 용’을 보던 기자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용은 중국 민족의 상징이라고 하고, 동이족의 토템은 ‘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이의 상징이라는 ‘새’는 어찌된 걸까.
2400년 전 유적인 대전 괴정동에서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넣은 농경문청동기가 확인됐는데, 청동기 뒷면엔 새 한 쌍이 마주보는 솟대가 보였다. 그만큼 새 신앙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때까지는 용이 임금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봉황이 대통령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7월30일 선양 신러(新樂) 유적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고 지울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 하나의 단서를 움켜잡았다. 차하이에서 140㎞ 정도 떨어진 신러 유적은 차하이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 유적이다.
“자, 이 유물은 권장(權仗·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라는데, 새 모양이잖아요.”(이형구 교수)
38.5㎝의 나무 지팡이는 신러 유적의 가장 큰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발굴자는 이 유물은 나무로 새의 부리와 머리, 눈, 코, 꼬리를 조각한 것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는 씨족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하이의 ‘용’과 신러의 ‘새’라. 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자는 궈다순(郭大順)의 책, 즉 ‘용은 랴오허에서 태어났다(龍出遼河源)’를 들춰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궈다순은 이 새 모양의 지팡이를 용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새의 몸을 자세히 보면 용의 비늘 같은 문양이다. 즉 용을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은 권장일 수도 있지만 비녀로 볼 수도 있다. 민족지 자료를 보면 비녀는 계급을 나타내는 예기(禮器)이다. 신러에서 발견된 유물은 여인이 실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운 크기다. 예기였다는 증거다.”
# 용과 새는 동이의 상징
궈다순의 해석처럼 이 유물이 권장인지, 아니면 비녀인지, 그리고 그것이 용을 표현한 것인지, 새를 표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용의 몸을 하고 태어난 새. 즉 용과 새를 한꺼번에 표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형구 교수가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7000~8000년 전 발해만에서 살던 사람들은 용과 새를 함께 모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교수는 차하이·싱룽와(興隆窪)-신러문화의 뒤를 잇는 홍산문화에서도 용과 새 문양의 옥제품이 섞여 나오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용과 새를 함께 모신 사람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앞서 우리 민족과 용의 밀접한 관계를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과 새의 관계 또한 두껍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든 부여 창업주 해모수와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 신화는 용은 물론 새가 상징하는 천강(天降·하늘에서 내려오는) 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새가 같은 신화 안에 공존한다는 뜻이다.
백제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는 용이 입을 벌린 채 향로를 받치고 있고, 맨 꼭대기에는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봉황이 서있다.
이형구 교수는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천계를 넘나드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인들은 용을 신앙으로 삼지만 새는 그렇게까지는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진기 과장은 “물론 봉황을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라고 하지만 용처럼 그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동이의 나라인 상나라만이 난생신화를 건국신화로 삼고 있다. ‘사기’ 은본기에는 “은(상)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임신한 뒤 낳은 이가 바로 설(契)이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결국 용과 새를 동시에 신성시한 종족은 중국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는 뜻이다.
〈차하이·신러|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