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28)중산국의 위대한 문명
ㆍ전쟁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했던 ‘강소국’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재위 BC 325~BC 299년)이 신료들을 부른다.
“…지금 중산국이 우리나라 한가운데 버티고 있고(我腹心)…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사기 조세가)
벌집을 쑤셔놓은 발언이었다. 호복이라니.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 중산국을 타도하라!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법(호복기사·胡服騎射)을 가르치려 하는데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조 무령왕이 중산을 오랑캐(이족)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숙부님,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병을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입해 짓밟았으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조카의 간곡한 설명에 감화를 받은 공자 성은 이튿날 스스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 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으로 전국7웅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전국책 ‘제책·齊策’)
하지만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시행한 뒤(BC 307년)부터 BC 296년까지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 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BC 406년) 20여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BC 296년)
■ 집단 따돌림 극복한 강소국
중산국은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강대국들의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70~80년간, 즉 위나라로부터 해방된 때(BC 380년)부터 최종 조나라에 멸망(BC 296년)할 때까지 강대국 조나라와 연나라를 괴롭히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강소국’이었지. 오죽했으면 조 무령왕이 이를 갈며 오랑캐의 옷까지 입고 ‘타도 중산국!’의 기치를 올렸을까.”(이형구 교수)
1974년 허베이성(河北省) 핑안(平安) 싼지셴(三汲縣)에서 확인된 중산국 유적(왕릉+성터)의 위용은 우리의 역사를 빼닮은 ‘강소국’ 중산의 찬란한 문화를 대변해준다.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 바로 중산왕 착(錯)의 무덤에서 확인된 철족대정(鐵足大鼎·다리는 쇠, 몸통은 청동으로 만든 예기) 및 방호(方壺·사각 항아리형의 예기)에 새겨진 명문이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저 방호의 명문을 살펴보면 “14년, 중산왕 착(錯)이 재상인 사마주(司馬주)에게 명을 내려 ‘연(燕)나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구리)으로 제기를 만들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무려 469자(77행)가 새겨진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쾌·재위 BC 321~BC 316년)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명문은 기존 역사서를 보충하고 오류를 잡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당시) 연왕 쾌는 재상 자지를 너무도 신임한 나머지 3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주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지는 마침내 국왕의 직권을 행사한다.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BC 314년)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사기 연소공세가)
제나라 선왕(宣王·재위 BC 320~BC 301년)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 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입니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중산국의 연나라·조나라 정벌은 아마도 제나라와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 2300년 된 술, 개목걸이 장식까지
“왕릉 3기는 착왕(錯王)과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 할아버지 무공(武公)의 것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 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위·한·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이형구 교수)
또하나 착왕의 철족대정 속을 분석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착왕은 애견가였겠지. 문헌에 따르면 중산에서는 북견(北犬)을 생산했고,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출토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예약제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전국 12웅에 들 만큼 강국이었고 조와 연나라를 떨게 했던 중산국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무기들이 쏟아졌다. 청동검과 청동도끼, 청동꺾창, 노기(弩機·화살을 연발로 쏘는 장치), 철촉은 물론 천승의 나라에 걸맞은 전차가 8량, 그리고 24필의 말이 부장됐다.
“이렇듯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 아홉구멍에 넣은 옥(玉)
특히나 금은으로 상감하는 솜씨를 보면 중산국의 찬란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옥석(玉石)제품은 또 어떻고. 옥으로 만든 구슬과 옥결(귀고리), 황(璜·반원형의 패옥) 등을 합쳐 3000여점이나 쏟아졌어요. 옥은 예로부터 불멸의 상징이잖아요. 옥제품도 인물·용·봉황·뱀·거북이·호랑이·누에·달팽이 등 얼마나 다양한지….”(이교수)
그런데 이 옥장식품들은 장식으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박자(抱朴子·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 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재위 BC 325~BC 299년)이 신료들을 부른다.
“…지금 중산국이 우리나라 한가운데 버티고 있고(我腹心)…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사기 조세가)
벌집을 쑤셔놓은 발언이었다. 호복이라니.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 중산국을 타도하라!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법(호복기사·胡服騎射)을 가르치려 하는데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조 무령왕이 중산을 오랑캐(이족)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숙부님,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병을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입해 짓밟았으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조카의 간곡한 설명에 감화를 받은 공자 성은 이튿날 스스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 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으로 전국7웅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전국책 ‘제책·齊策’)
하지만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시행한 뒤(BC 307년)부터 BC 296년까지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 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BC 406년) 20여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BC 296년)
■ 집단 따돌림 극복한 강소국
중산국은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강대국들의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잔 15개를 장식한 촛대
1974년 허베이성(河北省) 핑안(平安) 싼지셴(三汲縣)에서 확인된 중산국 유적(왕릉+성터)의 위용은 우리의 역사를 빼닮은 ‘강소국’ 중산의 찬란한 문화를 대변해준다.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 바로 중산왕 착(錯)의 무덤에서 확인된 철족대정(鐵足大鼎·다리는 쇠, 몸통은 청동으로 만든 예기) 및 방호(方壺·사각 항아리형의 예기)에 새겨진 명문이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저 방호의 명문을 살펴보면 “14년, 중산왕 착(錯)이 재상인 사마주(司馬주)에게 명을 내려 ‘연(燕)나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구리)으로 제기를 만들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무려 469자(77행)가 새겨진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쾌·재위 BC 321~BC 316년)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명문은 기존 역사서를 보충하고 오류를 잡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당시) 연왕 쾌는 재상 자지를 너무도 신임한 나머지 3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주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지는 마침내 국왕의 직권을 행사한다.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BC 314년)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사기 연소공세가)
제나라 선왕(宣王·재위 BC 320~BC 301년)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 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입니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중산국의 연나라·조나라 정벌은 아마도 제나라와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 2300년 된 술, 개목걸이 장식까지
“왕릉 3기는 착왕(錯王)과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 할아버지 무공(武公)의 것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 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위·한·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이형구 교수)
또하나 착왕의 철족대정 속을 분석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착왕은 애견가였겠지. 문헌에 따르면 중산에서는 북견(北犬)을 생산했고,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출토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예약제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전국 12웅에 들 만큼 강국이었고 조와 연나라를 떨게 했던 중산국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무기들이 쏟아졌다. 청동검과 청동도끼, 청동꺾창, 노기(弩機·화살을 연발로 쏘는 장치), 철촉은 물론 천승의 나라에 걸맞은 전차가 8량, 그리고 24필의 말이 부장됐다.
“이렇듯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 아홉구멍에 넣은 옥(玉)
특히나 금은으로 상감하는 솜씨를 보면 중산국의 찬란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옥석(玉石)제품은 또 어떻고. 옥으로 만든 구슬과 옥결(귀고리), 황(璜·반원형의 패옥) 등을 합쳐 3000여점이나 쏟아졌어요. 옥은 예로부터 불멸의 상징이잖아요. 옥제품도 인물·용·봉황·뱀·거북이·호랑이·누에·달팽이 등 얼마나 다양한지….”(이교수)
그런데 이 옥장식품들은 장식으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박자(抱朴子·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 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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