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코리안루트

‘코리안 루트 탐사’ 취재기 발해의 혼이 우리를 부른다

자연정화 2012. 8. 14. 13:06

 

[커버스토리]

발해의 혼이 우리를 부른다


2007 10/16뉴스메이커 745호

‘코리안 루트 탐사’ 취재기, 고대 강국의 역사 현장엔 아직도 흔적이…

대순 호를농장의 제분소. 생산품을 공장 안에서 적재해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운송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춰져 있다. <김문석 기자>


한마당 농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70㎞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로 한 시간여 달리면 왼편에 넓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데, 언덕 바로 아래 차로와 나란히 달리는 철로를 만난다. 이것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나아가 파리까지 연결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다. 긴 여정을 준비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졸음을 떨치고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다. ‘코리안 루트’의 수많은 지점 가운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가장 극적으로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억하기 까다롭기만 한 러시아어 지명 속에서 ‘한마당’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거기에는 기구한 역사가 숨어 있다. 이번 탐사가 수천, 수만 년까지 넘나드는 것이지만 그 첫 시간 여행은 70년 전의 아주 가까운 과거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동승한 연해주 영농법인 아그로상생(대표 김순옥)의 안치영 전무가 우리를 70년 전으로 안내했다.

연해주 고려인 이주역사는 진행형

“한마당 농장은 고려인들의 땀과 눈물과 한이 서린 곳이지요.”
1937년 9월, 이곳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기근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고려인’들이 피땀 흘려 일군 1만ha(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황금 벌판이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먼저 떨어진 것은 날벼락이었다. 옛 소련 스탈린 정부의 이주 명령이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한마당 농장의 가장자리를 달리다가 라즈돌노예라는 작은 마을의 역에 닿는다. 70년 전 고려인들은 거의 빈 몸으로 이 역에 집결해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 정부가 일본과 고려인이 내통하지 못하게 이런 강압책을 썼다. 이주 전 고려인 지식인 2500여 명이 총살형을 당했고, 이주인 17만여 명 가운데 5분의 1이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고 한다.

라즈돌노예에서 바이칼 호수 입구인 이르쿠츠크까지 1만 리(약 4000㎞)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철도는 가장 최근에,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한인들의 집단 이주로인 셈이다.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가슴 아픈 ‘코리안 루트’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중앙아시아까지는 약 2000㎞를 더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대장정의 첫 경유지를 연해주로 잡은 데는 보이지 않는 역사적 필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었다. 연해주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과거형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형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미래형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도 북한을 거쳐 서울, 부산까지 이어야 할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자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은 또 다른 설움을 겪어야 했다. 독립한 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 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대우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기를 원하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다. 까다로워진 국적법 통과는 물론 정착지 확보 문제에다 환율 격차 때문에 되돌아올 기차표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가 된 것이다.
“2005년 아그로상생이 한마당 농장의 일부를 인수했습니다.”

안치영 전무의 말에 70년 전에서 순식간에 현재로 돌아왔다. 버스는 이미 라즈돌노예 역을 지나 우수리크로 내달리고 있었다. 연해주 발해·옥저 유적을 발굴 중인 정석배 교수와 우수리스크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그로상생, 고려인 재이주 지원

아그로상생의 한마당 농장 인수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코리안 루트의 개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아그로상생은 민족종단 대순진리회(종무원장 이유종, 이하 대순)가 연해주에 설립한 영농법인이다. ‘아그로’는 러시아어로 농장을 뜻하고, ‘상생’은 대순의 종지(宗旨) 가운데 하나인 해원상생(解寃相生)에서 따온 말이다. 대순은 2000년부터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들어 2002년 젬추쥐느 농장 인수(49년 임대계약)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9개 농장을 확보한 상태다. 연해주에서는 농장 한 단위가 보통 7000ha(2100만 평)라고 한다.

대순의 연해주 농장 총면적은 현재 16만㏊(5억 평)에 육박하고 있다. 이번 탐사의 연해주 일정에 참여한 대순 김진원 총무부장에 따르면 러시아 측에서 농장 인수를 계속 권유하는 상황이다. 대순 측도 항카호 동편의 몇 개 농장을 추가로 인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 부장은 “인수가 완료되면 모두 26만㏊(8억 평)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순이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든 이유 중에는 70년 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재이주와 정착을 돕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러시아 당국은 1990년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한 고려인을 3만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아그로상생은 이들의 고용과 정착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순이 수십 년 동안 버려진 땅이었던 한마당 농장을 인수한 데는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픈 역사를 ‘해원’하고 고려인과 한국인 그리고 연해주 러시아인를 아울러 ‘상생’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오후 4시 40분쯤 우수리스크 호텔에 도착하자 얼굴이 새까맣게 탄 정석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탐사단을 두 팀으로 나눠야 했다. 2박3일로 짜인 빡빡한 연해주 일정상 함께 움직였다가는 계획한 취재를 다 마칠 수 없어서다.
이번 탐사단에는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윤명철 동국대 교수, 양민종 부산대 교수, 주채혁 세종대 교수,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나중에 심양에서 합류했다).

취재단은 필자(단장) 외에 이기환 선임기자, 김문석 기자(사진), 이다일·김기연씨(동영상) 등으로 구성됐고, 윤석원 뉴스메이커 편집장과 김진원 대순 총무부장 등은 연해주 일정에만 참여했다. 유전인류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올린 이홍규 서울의대 교수는 다른 일정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광활한 연해주에서 영농사업은 기계농을 할 수밖에 없다. 대순 농장의 수확 장면. <대순 진리회>


연해주인 “일본은 만만찮고 중국은 싫다”

이번 탐사의 애초 목적은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사전 세미나와 한 차례의 예비답사 등을 거치면서 ‘민족’과 ‘시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우리 민족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자는 뜻에서 ‘코리안 루트 탐사’로 개념을 재설정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좁은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이니 배달민족이니 하며 갇힌 눈으로만 볼 게 아니라 과거 우리의 활동무대였거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던 넓은 대륙에서 여러 분야의 폭넓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자는 쪽으로 취재단의 내부 합의가 이루어졌고, 자문한 관계자들의 조언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식의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도사관, 식민사관도 버려야 하겠지만 지나친 민족주의적 사관도 경계해야 한다는 데도 모두 공감했다. 그래서 유전학·민속학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 지역과 역사 전개 과정에서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 등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요하·대릉하 유역, 동몽골 대초원 지대, 대흥안령 산맥 지대, 북만주, 연해주 등을 탐사 지역으로 정했다.

이 모든 지역이 지금의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한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 그곳에서 한반도로 내려오기도 했고, 한반도에서 그곳으로 올라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사이좋게 살기도 했을 것이다. 초원지대, 타이가 지대, 만주지역의 우리 또는 우리와 비슷한 많은 종족의 이동로를 취재단은 ‘코리안 루트’로 명명했다. ‘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이라는 이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해졌다.

우수리스크에서 팀을 나눈 뒤 우리는 곧바로 각자 목적지로 향했다. 이기환 기자가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동영상을 담당한 이다일씨와 함께 정석배 교수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유적을 탐사한 뒤 정 교수의 발굴 현장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나머지 취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을 떨궈놓은 버스는 우수리스크 인근 ‘우정마을’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가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가끔씩 평지에 돌출된 것도 산이라기보다 낮고 완만한 구릉지였다. 이 넓은 땅의 대부분이 개간이나 개발이 안 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 연해주는 한반도의 3분의 2가 넘는 면적(16만5900㎢)이지만 인구는 200만 명을 조금 웃도는 규모다. 이마저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도시에 집중돼 있다.

소련 해체 후 연해주의 지역공동체는 러시아인의 이농과 이주로 공동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이 대순과 같은 외국의 투자였다. 연해주 러시아인에게는 ‘일본은 만만하지 않고 중국은 싫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고 한다. 특히 가까운 중국인들이 연해주에 유입하는 것을 꺼려해서 대순과 같은 한국의 투자를 반기고 있다고 김진원 부장이 귀띔했다.

러시아인은 중국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거란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요나라 시기에 쓰던 이름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Cathay)’도 거란의 영어식 발음에서 유래됐다.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거저 먹다시피 한 러시아로서는 빈 땅이지만 ‘키타이’가 들어와서 사는 것만큼은 싫을 법하다.

버스는 우수리스크에서 북쪽으로 100㎞를 더 달려 아그로상생의 본부 격인 호롤 농장에 도착했다. 취재단은 농장에서 제공한 빵과 음료로 허기를 달랜 뒤 제분소를 방문했다. 연해주에서 농장을 인수하면 농지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정미소, 제분소, 관개시설 등의 부대 설비도 자동적으로 딸려온다고 한다. 소연방 시절에 지어진 호롤 제분소에는 생산품을 그 자리에서 실어나를 화물열차가 공장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된다.

연해주 영농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종단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이 콩 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옛 소련의 연해주 농업인프라 우수

옛 소련 공산체제가 구축한 연해주 농업 인프라는 감탄이 나올 만했다. 취재단은 호롤 농장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항카호 남단의 관개시설을 방문했다. 연방 수자원공사 소유의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이다. 항카호는 우리나라 전라북도 정도 크기의 호수로서, 북쪽은 중국 땅이다. 중국에서는 싱카이호, 한자로 흥개호(興凱湖)라고 부른다.

호수의 물이 나가는 강이 중국 쪽에 있어 연해주에서는 항카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려면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은 1초에 5t의 물을 펌핑할 수 있는 양수 시스템을 7개 갖추고 있는데, 현재 6500ha의 관개수로에 물을 대고 있다. 그런데 보수를 하면 10만ha의 농지에 관개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벼농사 면적의 약 10분의 1 규모다.

옛 소련이 이런 엄청난 농업 인프라를 구축한 것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미국이 가난한 우방국에 밀가루 일색의 원조를 하자 소련은 위성국가에다 그들이 주식으로 하는 식량을 지원했다”며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쌀농사에 막대한 투자를 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연해주 전체의 벼농사 면적은 4만5000ha에 불과하다.

취재단은 항카호 서쪽에 있는 루비노브카 농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겨우 어스름이 깔릴 무렵인데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연해주 시간은 우리보다 1시간 빠르지만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어 2시간 차이가 났다. 우리는 농장 숙소에서 짧은 밤을 보내고 다음 일정에 들어가야 했다.

7월 10일, 발해 유적 발굴 현장으로 가는 길에 농장을 두어 군데 더 둘러보았다. 숙소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의 야트막한 산악지대에 루비노브카 사슴농장이 있었다. 농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넓은 초지에 군데군데 나무 군락이 있는 풍경이었지만 농장 울타리를 지나자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전개됐다. 아프리카 언어를 연구했던 시미즈 키요시 교수는 “아프리카 스텝과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며 “다른 점이라면 귀코리가 없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이 서툴러 코끼리가 ‘귀코리’로 둔갑한 것이다.

현재 사슴농장에는 약 450마리의 사슴이 방목되고 있다. 2002년 인수 당시 200마리였던 것이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과거 연해주에는 사슴농장이 발달(10만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했지만 소련 해체 후 그 수가 격감했다. 루비노브카 사슴농장만 해도 면적이 2만ha이고, 8000마리의 사슴을 방목할 수 있다.

녹용은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채취한다. 취재단은 운 좋게도 녹용 채취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슴을 채취장으로 몰아서 그 가운데 뿔이 있는 수컷만 채취 시설로 통과시키는 방식이었다. 채취한 녹용은 음지에서 1달 동안 자연 건조를 한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사슴농장에서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약 2주 동안 송이가 난다는 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주변에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했다. 안치영 전무가 “50년 전에 이 일대에 소나무가 있었다”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여러 농장을 둘러본 취재단은 연해주 영농사업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지를 임대하는 비용은 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면 그 10배의 투자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그것을 개·보수하고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여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연해주다. 취재단은 네스테로프카 농장에서 7억 원짜리 캐나다산 트랙터를 보았다. 하루 100㏊(30만 평)의 농지를 갈고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장비다.

연해주 농장의 주요 생산품은 콩이다. 이곳이 콩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메밀, 우리의 주식인 쌀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대순은 멜구노브카 농장에서 3000ha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앞으로 논을 더욱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내년부터는 최근 바이오디젤의 원료로 각광받는 유채를 재배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좁은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버스가 더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벌써 정석배 교수와 이기환 기자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과거 여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옥저, 고구려, 발해로의 시간 여행이….

연해주는 고고학 분야에서도 유서 깊은 곳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무르강 하류 가샤 유적에서 출토된 1만3000년 전의 토기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캄사몰스크와 가까운 곳이다. 이 토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로 알려져 있다.

발굴현장의 숲과 초지 친숙한 느낌

체르냐치노 2유적의 발해 쪽구들 앞에서 정석배 교수가 취재단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하바로브스크에서 아무르강 하류 쪽으로 200㎞ 떨어진 사카치얄란 유적에서 나온 ‘아무르의 비너스’는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4000년 전의 이 토우 여인상은 이마 부분이 뒤로 누운 편두(偏頭)를 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진한(훗날 신라)의 편두 풍속과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편두 유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발해 이전의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연해주는 한반도와 많은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정석배 교수의 얘기다. 특히 융기문토기, 번개무늬토기, 도끼, 화살촉 등은 한반도의 것과 닮은 점이 많다. 정 교수는 “러시아 고고학계에서는 얀콥스키 문화는 읍루, 크로우노브카 문화는 옥저, 뽈제 문화는 숙신 혹은 읍루가 남긴 문화로 본다”고 설명했다.

낡은 군용 트럭을 개조한 발굴용 차량에 옮겨타고 발굴 현장인 ‘체르냐치노 2 유적’으로 향했다. 오래된 차이긴 하나 험한 산악지형을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함께 탄 발굴단원은 나뭇가지가 환기창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찌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발굴 현장 주변은 초지와 숲, 평지와 구릉, 바위, 산 등이 혼재한 지형이었다. 한반도와 다르면서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지 입구에 있는 시넬니코보 마을은 일제시대에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시넬니코보라는 장군이 한인들을 받아들여 그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발굴 현장 가까운 곳에 가슴 높이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저기에 고려인 집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시넬니코보, 체르냐치노 마을 일대에는 70년 전만 해도 고려인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토기편들. 발해·말갈계 토기가 혼재해 있다. <김문석 기자>

숲길을 빠져나오니 거짓말처럼 확 트인 초지가 펼쳐졌다.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가 공동 발굴하고 있는 체르냐치노 2 유적이 초지 입구의 개울가에 있었다. 우리는 발굴단이 제공한 점심을 먹고 곧바로 발굴현장으로 갔다. 이번 발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해의 주거유적에서 발견한 쪽구들이다. 정 교수는 아직 다 발굴하지 않은 쪽구들의 드러난 부분으로 취재단을 안내했다. 구들이 유적의 낭떠러지 부분에 걸려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연도가 대부분 남아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말이었다.

구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해주, 그것도 깊숙한 변방 오지에서 1300여 년 전 발해인이 사용했던 구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 구들방에서 온기를 느끼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후손을 남겼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혹시 취재단 중에 그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 일대의 표층에는 한인 이주민이 거주한 흔적이 있고, 그 아래 발해 문화층이 있습니다. 더 아래에는 옥저-크로우노브카 문화층이 있지요.”

정 교수의 설명에 흥분 상태에서 깨어났다. 70년 전, 1300년 전 그리고 2300년 전의 우리 민족의 흔적이 한 곳에서 겹겹이 쌓여 있다는 말이었다. 정 교수는 취재단이 떠난 뒤에 발해 쪽구들 아래층에서 옥저시대의 ㄱ자형 쪽구들도 발굴했다. 예전에 구들의 기원을 고구려로 보았는데 현재 연해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등으로 그 연대가 옥저까지 올라가는 추세다. 정 교수는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문화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3세기이고,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5세기까지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체르냐치노 2 유적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체르냐치노 5유적으로 향했다. 체로냐치노 유적은 솔빈강(라즈돌라야강) 주변에 16개가 산재해 있다. 5유적은 정 교수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Yu. G. 니키친 교수와 공동으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4차에 걸쳐 발굴한 유적이다. 주로 고분들이 나왔는데, 160기가 발굴됐고 모두 3500여 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실묘, 부석묘(돌깐무덤), 위석묘(돌 돌림무덤), 토광묘 등 다양한 묘제가 한 곳에서 나와 발해시기의 주민 구성과 신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즉 돌을 사용한 무덤(주로 고구려계)과 흙을 사용한 무덤(주로 말갈계)이 같은 시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계통의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고, 이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에서 내려다 본 솔빈강.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체르냐치노이고, 그 앞의 넓은 농지가 발해의 주거지였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강 왼쪽에 있다. <김문석 기자>


1300여 년 전 발해인의 구들 발굴

지난해 발굴이 끝나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5유적을 둘러본 취재단은 초지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섰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을 보기 위해서다. 솔빈강변에 독수리 머리처럼 돌출된 산의 정상에 구축한 성이다. 땀을 흘리며 수풀을 헤쳐 산성에 오르면서 온통 눈에 띄는 것은 검은 자작나무와 도라지 그리고 야생 마늘이었다. 웅녀가 먹은 마늘이 바로 이 야생 마늘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시넬리코보 성은 산꼭대기의 천연 암벽을 이용해 만든 석성이었다. 솔빈강 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다 돌을 쌓아 이은 형태였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연해주에는 발해 성이 30여 개 확인되고 있는데, 논쟁지까지 포함하면 5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솔빈부였다. 이런 변방에까지 이렇게 튼튼한 요새를 촘촘히 건설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절벽 위에 서니 솔빈강 건너 북쪽 멀리 체르냐치노 마을이 보였다. 마을 앞에는 농지로 이용하는 넓은 개활지가 있었는데, 정 교수는 “마을 앞 농지가 전부 발해의 주거지였다”고 말했다. 솔빈강이 빠져나가는 동쪽에도 시넬리코보 마을과의 사이에 광활한 농지가 펼쳐졌다.. 정 교수에 따르면 그곳 역시 발해 시기의 주거지다.

성 안쪽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제법 넓은 평지가 형성돼 있었다. 성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고, 한쪽을 절개해 조사한 흔적이 보였다. 바깥은 돌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메운 방식이었다. 정 교수는 “발해 성이지만 고구려 성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안쪽을 메운 흙 속에는 말갈계 토기가 출토되고 성 내부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가 대기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정됐던 극동박물관 취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아득한 과거와 현재의 질기디 질긴 인연이 배어 있는 현장을 차마 일찍 떠날 수 없는 터였다. 대조영이 세운 동방의 강국 발해, 어느 날 갑자기 미스터리처럼 사라져 우리 역사에서마저 소외됐던 발해는 그 흔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할 뿐이었다. 그들이 뼈를 묻은 연해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인터뷰 | 니키친 국립극동기술대 교수
“사방을 모두 파보고 싶다”

 

정석배 교수와 함께 체르냐치노 2유적을 발굴한 Yu. G. 니키친 극동국립기술대 문화인류학부 교수는 한·러 공동발굴단의 러시아 측 단장이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그가 솔빈강을 따라 지표조사를 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그와 즉석 인터뷰를 했다.

-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94년부터 국경지역 지표조사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체 지역을 걸어서 조사했다. 400개 이상 유적을 발견했다. 그중 100개 정도가 발해, 말갈의 것이었다. 그때 이 유적을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유적이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 중에 한국전통문화학교의 공동 발굴 제안을 받고 기뻐했다.”

- 발굴한 소감은 어떤가.

“체르냐치노 5유적에서 160개 이상의 고분을 발굴했다. 유물과 새로운 유형의 무덤 형식을 발견해서 연구할 게 많이 생겼다. 이곳의 석실분은 연해주에서 가장 북쪽의 발해 석실분이다. 이 석실분과 함께 다른 유적들이 발해 영역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분명한 국경선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 사원, 기와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 러시아에서 발해는 지방사인가, 민족사인가.

“동아시아 역사의 일부다. 말갈이나 발해의 영역 일부가 연해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지금은 일반인도 발해, 말갈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옥타브리스키 군수를 만났는데 그도 이 부분에 관심이 있었고, 언젠가 현장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 앞으로의 발굴 계획은.

“사방을 다 파고 싶다. 매년 발굴할 때마다 새로운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다 하고 싶다. 발굴한 자료를 연구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들을 비교하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신동호<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