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4)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
이와 똑같은 논리를 적용하는 곳이 티베트인이 많이 사는 서장(西藏)자치구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인들이 보여준 콘셉트는 ‘강한성당(强漢盛唐)으로의 회귀’였다. 강한성당은 강력한 한나라와 성대한 당나라 시절을 가리키는데, 두 나라는 중국인이 세운 유이한 정복왕조였다. 이러한 한·당을 보란 듯이 두들긴 나라가 흉노와 티베트였다. 중국인들은 티베트를 ‘토번국(吐藩國)’이라고 폄하해 기록했는데, 당나라 극성기인 당 태종 때 토번국을 이끈 인물은 송찬간포(松贊干布)였다. 송찬간포는 5호16국 시대에 활동하다 서쪽으로 밀려난 선비족이 지금의 청해성 쯤에 세운 토곡혼(吐谷渾)을 멸망시키고 이어 당나라로 쳐들어갔다. 이 공격에 놀란 당 태종이 협상을 제의하자 송찬간포는 당나라 공주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당 태종은 후비의 딸인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보냈다. 독립을 바라는 티베트인들은 당시 당나라가 티베트의 공격에 굴복해 공주를 바쳤다며 그때부터 이미 티베트와 중국은 별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사실인지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중국은 문성공주가 시집가서 티베트 왕실의 자녀를 낳았으니 티베트 왕실은 중국계이고, 그에 따라 티베트도 중국의 일부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티베트 지역을 상대로 한 서남공정(西南工程)의 핵심 논리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경우에는 부계사회의 전통을 내밀고, 왕소군과 문성공주 사례에서는 모계사회 전통을 내밀어 주변국을 모두 중국 역사의 울타리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 중국의 역사 공작이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등장하는 아틸라 적봉에서 갈려 나간 흉노족은 주나라 시절과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 그리고 한나라라는 최전성기까지 1000여 년간 화하족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화하족은 도처에 성을 쌓아 흉노의 공격에 대비했다. 시황이 이끈 진나라는 이 임무를 몽염에게 맡겼는데, 몽염이 전국 시대 각 나라가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을 연결해 완성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초원은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흉노의 번성은 곧 흉노의 분열을 가져왔다. 한나라 시기 흉노는 중국과 가깝게 지내려는 남흉노와 계속 유목 생활을 하려는 북흉노로 갈리는데, 남흉노의 리더가 바로 왕소군과 결혼한 호한사선우다. 그 후 남흉노는 중국으로 들어와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본래 땅에 남은 북흉노는 동흉노와 서흉노로 나뉘는데, 동흉노는 제 자리에 남고 서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해 동유럽에 도달한다. 이 서흉노를 유럽에서는 ‘훈’으로 기록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은 대혼란에 빠진다. 서기 450년쯤 아틸라가 이끄는 서흉노 일파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는데, 아틸라는 독일 노래인 ‘니벨룽겐의 반지’에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서흉노가 유럽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헝가리까지는 대평원 지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몽골 초원보다 더 거칠 것이 없다. 이러한 흉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흉노의 지배층은 어린아이 때부터 돌로 머리를 눌러 머리뼈를 위로 삐죽하게 만드는 편두(偏頭)를 했다. 편두를 한 두골은 가야와 신라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이 사실은 흉노가 오르도스 지역에 머물지 않고 산지사방으로 움직였음을 의미한다. 흉노가 맹위를 떨칠 때 적봉지역에서 활동한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가 중국 기록에 ‘산융(山戎)’으로 기록된 종족이다. 중국 사서인 ‘관자’는 ‘춘추 시대 가장 강력했던 제(齊)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을 지나 고죽국을 짓밟고 산융과 맞닥뜨렸다’라며 처음으로 산융을 언급한다. 산융도 화하족의 후예와 자주 싸웠는데, ‘사기’는 산융을 흉노의 일파로 기록해놓았다. 산융에 이어 적봉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은 중국 기록에 ‘동호(東胡)’로 표현된 세력이다. 동호는 산융의 후예인데, 중국인들은 이들이 흉노의 동쪽(홍산지역)에 산다고 하여 동호로 불렀다. 동호와 산융은 중국 전국 시대의 연(燕)나라와 자주 싸웠다. 연나라는 동호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곳곳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 장성은 만리장성보다 북쪽에 있어 ‘연 장성’으로 불린다. 진(秦)나라 시절 동호는 아주 강성해져서 서쪽에 있는 흉노를 쳐, 말과 토지 그리고 흉노족 족장의 부인까지 빼앗아 왔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모돈선우(冒頓單于)가 이끄는 흉노족의 역습을 받아 부족연맹이 해체되는 패배를 당했다. 적봉지역에서 패배한 세력은 대개 대흥안령산맥 안으로 피신해 세력을 키운다. 패배한 동호족은 오환산과 선비산 일대로 도주했는데, 오환산 지역으로 들어간 세력을 ‘오환(烏桓)’, 선비산 지역으로 간 세력을 ‘선비(鮮卑)’로 부르게 되었다. 오환과 선비 가운데 세력이 강성해진 것은 선비족이다. 한나라가 있던 서기 2세기 무렵 선비족은 단석괴(檀石槐)를 중심으로 우문(宇文)·모용(慕容)·탁발(拓跋)·단(段)·걸복(乞伏) 등의 세력이 모여 군사연맹체를 이루었다. 이때 요하 부근에서 고구려가 강성해졌으므로 이들은 고구려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충돌한 선비족은 ‘모용(慕容)선비족’인데, 모용선비족은 전국 시대의 연(燕)나라와 한자가 같은 나라를 만들었다. |
적봉지대 장악한 광개토태왕
중국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를 화하족이 세운 연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모용연국(慕容燕國)’으로 표기한다. 모용연국의 리더인 모용황은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유린해 고구려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이 이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모용연국 군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태후를 붙잡아 갔다. 고구려는 이 위기를 외교로 극복하려고 했다.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은 모용연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며 유화관계를 갖고자 했다. 그리고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태왕 때 모용연국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광개토태왕비문으로 확인된다. 이 비문에는 광개토태왕 5년(395년)에 있었던 ‘비려(稗麗)’로 표현된 모용선비족 정벌에 관해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여기서 염수는 소금이 나는 호수를 말하는데, 지금도 적봉 북쪽 지역에는 군데군데 염호(鹽湖)가 있다. 염호가 있는 지역까지 가려면 요하는 물론이고 적봉 중앙을 가로지르는 요하 상류 ‘시라무렌 강’을 지나야 한다. 광개토태왕이 염호까지 가서 수백개의 군영을 깨뜨렸다는 것은 홍산지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뜻이 된다.
모용연국은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와, 훗날 북위(北魏)를 만드는 탁발선비족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모용연국이 사라진 적봉지역에선 탁발선비족이 패권을 잡았다. 탁발선비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중국을 장악하고 몽골 전역을 지배했다. 북위를 세운 것이다. 북중국의 패자인 북위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고구려였다.
흉노에 이어 중국화 택한 선비족
북위가 북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중국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여러 국가가 명멸하던 5호16국 시대였다. 이상하게도 만리장성 남쪽으로 내려간 유목민은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돌파한 탁발선비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화하고 말았다. 5호16국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것은 수(隋)나라였다.
수나라는 만주에 버티고 있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선비족 출신 장수를 동원했다. 모용선비가 활약하던 시절 우문선비가 있었다. 우문선비족은 모용선비와의 경쟁에서 패해 사라졌는데, 그 후예가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 정권에 참여했다. 그리고 수나라가 통일하자 수나라 조정에도 참여했다. 수나라는 우문술과 우중문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가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는데, 우문술과 우중문이 바로 우문선비의 후예였다.
터키까지 이동한 돌궐
전체 선비족을 통일하고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이 사라진 곳에서 모용선비의 후예로 보이는 거란족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엔 위세가 약했으므로 이들은 북위의 명멸에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거란이 힘을 키우기 전 몽골 서쪽에 남은 동흉노는 북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북위가 사라진 서기 6세기쯤 돌궐족이 초원의 방식에 따라 바람처럼 일어났다. 투르크는 ‘투구’를 뜻하는데, 이를 중국인들은 돌궐(突厥)로 적었다. 돌궐족은 곧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북위가 사라진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와 10년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일부는 무주공산인 서쪽으로 뻗어나가 흑해 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때 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것이 정복왕조인 당나라다. 당나라는 두 나라를 모두 공격했는데, 이에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이 싸움에서 먼저 고구려가 패망했으나 돌궐은 계속해서 당나라와 싸웠다. 당나라가 돌궐과의 싸움에 진력하느라 힘의 공백이 생기자 고구려 땅에서 발해가 건국했고, 이어 거란이 일어났다.
돌궐은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일부는 굴복했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흉노는 정서진(正西進)해서 동유럽으로 갔으나, 서돌궐은 서남진(西南進)해서 흑해가 있는 소아시아 반도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이란계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섞였다.
이 투르크 세력은 13세기 말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일으켜 1453년 동로마의 수도를 정복하고 강대한 제국을 세웠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600년간 계속되다 1922년에 무너지고 터키만 남게 되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CIS 국가 등이 독립하고 러시아가 소련의 지위를 이었듯,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많은 나라를 독립시키고 적통을 터키로 이어주었다.
이러한 투르크가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터키와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의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 러시아의 알타이공화국에서 쓰는 언어를 터키어 계열로 보고 있다. 신강위구르자치구는 1954년 동(東)투르크메니스탄을 자처하며 독립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위구르인들이 투르크 계열에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서돌궐과 결별한 동돌궐은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서기 734년쯤 무너진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동돌궐을 무너뜨렸지만 이들의 땅을 통치하진 못했다.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 도호부를 세웠지만 이곳은 당나라가 통치하기에 너무 멀었다.
당나라가 쇠약해지자 알타이산맥 남쪽에서는 돌궐의 지파인 위구르족이 일어나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몽골 초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위구르제국은 같은 투르크계인 키르기스의 공격을 받아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지역으로 쫓겨 들어갔다. 위구르를 패퇴시킨 키르기스는 몽골 초원으로 세력을 넓히지 않고 그들이 살아온 곳(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렀다. 그로 이해 몽골 초원은 다시 무주공산이 되었다.
위구르가 일어나기 전 만주지역에서 흥성한 홍산문화의 후예가 발해다. 그러나 발해는 대흥안령산맥에서 일어난 거란에 무너졌다.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시절 국호를 요(遼)로 고치고 발해 땅은 물론이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몽골 초원 전체를 장악했다. 흉노·북·위 돌궐에 이어 몽골초원을 지배한 대제국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과 친연성 강한 거란과 金나라
거란은 송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고려와 전쟁을 세 차례 치르는데 이때 거란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 중에는 장구의 원형인 요고(腰鼓)를 그린 것이 있는데, 거란의 무덤 벽화에도 우리의 장구와 똑같은 북이 그려져 있다. 장구는 고려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데, 고구려에서 시작된 장구가 요나라를 거쳐 고려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거란은 예상외로 우리와 유사성이 많다.
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된 것이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다. 그런데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는 아골타의 6대조를 고려에서 온 김함보(金函普)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나라와 한국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요나라를 무너뜨린 금나라는 몽골 초원으로 몰려가 그곳을 장악했다.
거란이 일어날 무렵 대흥안령산맥 북쪽인 중-러 국경 부근에서 ‘실위(室韋)족’이 세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곳은 너무 변방인지라 실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초원에서 세력이 커지면 반드시 쪼개진다. 실위족은 남(南)실위, 북(北)실위, 발(鉢)실위, 대(大)실위, 심말항(深末恒)실위의 다섯 종족으로 나누어졌다.
여진족은 몽골족을 잘 다룬 민족이다. 요나라를 대체한 금나라는 실위족을 장악해 몽골 초원을 지배해 들어갔다. 그리고 송나라와 전쟁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몽골 초원에 대한 금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졌다. 이러한 때 대실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몽올(蒙兀)실위’가 몽골 초원에서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몽올실위는 ‘구당서’에 처음 나오는 종족 이름인데, 학자들은 몽올에서 몽골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몽올실위 족에서 바람처럼 일어선 영웅이 바로 중국 기록에는 ‘성길사한(成吉思汗)’으로 기록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그들을 지배한 금나라를 제압하고 이어 송나라도 무너뜨렸다. 그리고 광활한 서쪽 초원으로 진출해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칭기즈 칸 정벌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그의 동생인 카사르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큰아들에게는 킵차크한국, 둘째아들에게는 차카타이한국, 셋째아들에게는 오고타이한국, 그리고 손자에게는 일한국을 물려주었으나 동생인 카사르에게는 그러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
중국을 점령한 몽골족은 그들이 사는 곳과 가까운 베이징(당시 이름은 大都)을 수도로 정하고, 칭기즈 칸의 적통에게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로 인해 원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카사르와 그 후예들이 불만을 품었다. 카사르와 그 후예가 이끄는 ‘호르친부(部)’는 칭기즈 칸 직계와 달리 몽골 초원에 머물렀다. 이러한 갈등이 훗날 몽골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몽골족의 내분은 잠시 뒤 정리하고 동북공정과 관련된 문제에 포커스를 맞춰보자. 작금의 중국 역사 판도를 넓혀준 두 민족은 몽골족과 여진족이다. 한·당보다 훨씬 더 강한 정복왕조를 세운 몽골과 여진족 덕분에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역사를 갖게 됐다. 먼저 몽골족이 중국에 기여한 면면을 살펴보자.
중국은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역사서가 25종인데, 중국은 이를 ‘25사’로 부른다. 송을 무너뜨린 원나라 조정은 몽골인인 탁극탁(托克托) 등에게 명하여 ‘송사(宋史)’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편찬케 했다. 그리고 몽골인인 탈탈(脫脫)로 하여금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도 만들게 했다.
요·금 역사를 중국에 바친 元
몽골족이 자신을 지배한 요나라와 금나라 역사를 집필하게 한 것은 두 나라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다. 원나라로서는 몽골족뿐만 아니라 같은 북방족인 거란족과 여진족도 중국을 지배했다는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요사’와 ‘금사’를 서술케 한 것이다. 원나라의 이러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홍산문화의 후예인 요나라와 금나라를 화하족 역사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는 ‘원사(元史)’를 썼으므로 요·금·원사는 25사에 고스란히‘편입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홍산문화의 후예가 화하족에게 역사를 뺏긴 첫 번째 사건이다.
5호16국이 일어났던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낸 당나라는 이연수(李延壽)로 하여금 북중국에서 명멸한 주요 국가인 위·제·주·수(魏·齊·周·隋)의 역사를 모은 ‘북사(北史)’와 남중국에서 일어난 주요 국가인 송·제·양·진(宋·齊·梁·陳)의 역사를 묶어 ‘남사(南史)’를 편찬케 했다. 남사와 북사도 25사의 하나로 꼽히는데, 북사에 선비족이 만든 북위의 역사가 들어가 있다.
‘북사’로 인해 북위의 역사는 화하족의 역사에 편입됐다. 그러나 ‘북사’는 화하족이 만들었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몽골족은 스스로 ‘요사’와 ‘금사’를 편찬함으로써 홍산문화의 후예사를 중국사로 들어가게 했다. 몽골은 중국을 지배했지만 결과적으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에 가장 많이 헌납했다.
현재 중국은 청나라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고 있으나 중국이 청나라 역사서를 편찬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렇게 되면 ‘청사(淸史)’마저 중국 역사로 편입된다. 중국이 편입했거나 편입시킬 것이 분명한 북위-요-금-원-청사와 흉노-돌궐사를, 홍산문화의 후예인 한국과 몽골 터키가 자국 역사로 편입시킬 수 있느냐는 중국의 역사 공작에 대응하는 출발선이 된다.
칭기즈 칸의 후예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몽골 초원을 버리진 않았다. 여름이 오면 원 황제는 몽골 초원에 만든 별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러한 원나라는 곧 모순에 봉착해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쫓기게 됐다. 그러나 수도를 몽골 초원에서 가까운 베이징으로 정했고, 몽골 초원도 버리지 않았기에 몽골로 퇴각할 수 있었다.
동생을 분노케 한 칭기즈 칸의 실책
몽골족을 몰아낸 명나라는 화하족이 세운 송나라에 비해 영향력이 더 확대됐다. 그러나 적봉을 포함한 몽골 초원과 만주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명군이 장악한 곳은 능하지역이었는데, 능하지역에 있던 명나라 군벌(軍閥)의 후손이 훗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이여송이다.
몽골 초원으로 퇴각한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곧 부족을 통일해 일어서려고 했는데, 카사르의 후예인 호르친부는 완강히 합세를 거부했다. 이러한 때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일어나 ‘후금(後金)’을 세웠다. 금나라도 그랬지만 후금도 몽골족을 잘 다뤘다. 후금은 호르친부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호르친부가 칭기즈 칸의 후예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칭기즈 칸의 적통이 사라졌다.
여진족은 호르친부와 ‘만몽(滿蒙)동맹’을 맺고 여진8기군과 몽고8기군을 동원해 명나라로 쳐들어가 청나라를 열었다. 호르친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나라 조정은 몽골족을 포함한 북방족을 우대했다. 이러한 청나라는 강희제 때 몽골 전역을 지배했다.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몽골 초원을 중국 영역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복속되지 않은 티베트도 지배했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키르키스에 패한 후 지금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포진한 위구르족을 장악했다. 건륭제는 미얀마와 베트남 접경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해 지금의 운남성과 광서장족자치구도 확실한 청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원나라 이후 중국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것이다.
청나라의 몽골 말살정책
이러한 청나라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화했다. 강희제 때만 해도 팔팔하게 살아 있던 여진의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 일색이 된 것이다. 중국화한 청나라는 몽골족을 몰살하려고 했다. 당시 몽골 초원의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남쪽에 있는 친청(親淸)의 호르친부 후예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적개심을 품은 채 북쪽에서 흩어져 있는 다른 몽골족이었다.
청나라는 독립을 추구하는 북쪽의 몽골족을 궤멸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라마불교를 전파시켰다. 라마불교에선 장자(長子)를 제외한 모든 아들은 출가해야 하므로 몽골의 인구 증가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청나라는 매독을 퍼뜨렸다. 중국인들이 몽골인을 궤멸시키기 위해 고의로 매독을 퍼뜨렸다는 것은, 중국인이 없는 자리에서 몽골인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로 인해 독립을 추구하던 몽골족은 종족이 거의 끊어지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때인 1911년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열었다. 중화민국은 정변(政變)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렸기에 청나라 영토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몽골과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을 중화민국의 영토로 삼게 된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은 중화민국의 국경선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신해혁명 1년 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원 왕조가 요사·금사를 만들어 몽골은 물론이고 거란과 후금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켰다면, 청나라는 몽골과 여진·위구르·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집어넣어준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일어난 중국은 외세에 찢기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투는 바람에 통제력을 상실했다. 몽골 등 피지배 민족으로서는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러한 때인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벌어졌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은 혁명을 일으킨 홍군에 패해 몽골 초원으로 도주해왔는데, 이때 홍군이 따라 들어왔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홍군이 입성하자 독립을 바라던 몽골인들은 러시아의 후광을 입고 독립을 하자고 했다.
러시아의 홍군은 이들에게 큰 선물을 제공했다. 페니실린 등을 보급해 전인구의 5할까지 퍼진 매독을 고쳐준 것이다. 이것이 북부 몽골인을 감동시켰다. 수흐바타르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1921년 독립을 선포하고 1924년 헌법을 제정해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
그러나 호르친부의 후예는 독립에 가담하지 않았다. 내분에 휩싸인 중국은 독립을 선언한 몽골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손문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소련의 도움을 받았고,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도 공산종주국의 행동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불러들여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원나라가 무너진 후 몽골인들은 자력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와 비슷하게 청나라가 무너진 후 타력(他力)이긴 하지만 여진인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명나라 시절 몽골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웠지만, 여진은 외세인 일본에 의해 나라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본이 1937년 중국을 공격해 중일전쟁을 벌이고 1941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을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7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종전(終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1억 옥쇄’를 외치며 끝까지 항전했다. 이에 따라 얄타에서 미·영·소 연합국의 3 거두가 모여 일본을 패망시키는 방안과 일본 패망 후의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몽골인의 反中·反러 의식
이때 미국은 소련에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요구했다. 소련과 일본은 1941년 중립조약을 맺었기에 연합국과 주축국으로 갈렸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충돌을 회피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몽골 독립을 요구했고 미국과 영국은 이를 수용했다. 대신 일본이 점령한 만주는 소련이 빼앗아 중국에 돌려준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연합국은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패전한 일본에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결정도 내렸다.
1945년 8월 일본은 미군이 투하한 원폭 두 발을 맞고 항복했다. 연합국은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지도를 그렸다. 조선과 몽골은 독립시키고, 만주를 중국에 돌려준 것이다. 이때 호르친부의 후예는 독립몽골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았는데, 이들이 바로 내몽고자치구를 만들었다.
몽골족은 고유한 문자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몽골문자를 가져가 일부를 고친 후 자기 문자로 만든 것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다. 얄타회담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할 당시 몽골인들의 반중(反中) 의식은 대단했다. 이들은 소련의 힘에 의지해 다시는 중국에 먹히지 않겠다며 몽골문자를 버리고 러시아 알파벳으로 몽골어를 적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호르친부의 후예는 몽골문자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몽고자치구는 급속히 한화(漢化)됐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의 인구는 2350만 정도인데 이 중 90% 정도가 한족(漢族)이다. 내몽고자치구에서도 몽골인은 소수민족인 것이다. 하지만 내몽고자치구의 몽골인들은 몽골문자를 지켰다.
소련이 무너지고 난 다음인 1992년 몽골공화국(외몽고)은 공산주의를 포기하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했다. 민주화 이후 몽골인들이 발견한 것은 ‘소련은 제2의 중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몽골인들은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 이 때문에 몽골은 반중과 반러를 위해 친미(親美)노선을 선택하고 몽골문자 부활을 추진했다. 이러한 몽골이 ‘롤 모델’로 삼는 나라가 친미노선을 통해 G-10 수준으로 도약한 한국이다.
얄타회담에 따라 똑같이 독립했는데 왜 몽골은 뒤처졌는가. 이것이 요즘 몽골 사회의 화두다. 몽골의 친한(親韓) 분위기는 외몽고와 내몽고를 가리지 않고 정말 대단하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몽골과 국가연합을 맺자는 다소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게 됐다. 덕분에 수천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홍산문화의 두 후예가 만나게 됐다. 또 다른 만남도 이뤄졌다. 터키와 한국의 만남이다.
역사를 잊지 않은 터키
터키는 오래전부터 한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철저한 ‘소중화’를 추구했기에 이를 알지 못했다. 터키 역시 형제국가인 한국을 발전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은 K-9 자주포에 이어 KT-1 기본훈련기, K-2 전차를 터키에 수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기 수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이민족을 많이 다뤄봤다. 지금도 55개 민족을 국경선 안에 끌어안고 있다. 이민족을 상대하다 보면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모순을 풀어가며 동화시켜온 것이 중국이다. 이러한 힘에 무릎을 꿇은 가장 큰 이민족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이다. 만주족은 자기 말과 글을 잃고 거의 중국인이 돼가고 있다.
중국은 여진족을 굴복시킴으로써 홍산문화를 자기네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잡았다. 적봉을 지배한 마지막 홍산문화의 후예가 여진족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홍산문화를 인접한 강의 이름을 따서 ‘요하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이 합쳐진 것이 지금의 중국문명을 만들었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 펼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요하문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 중국은 원과 청이 누락시킨 다른 홍산문화 후예의 역사도 중국사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기자조선(중국은 ‘기씨조선’이라고 한다)과 부여, 모용연국의 역사도 중국사에 집어넣으려 한다. 그리고 홍산의 또 다른 일파인 위구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과 원나라의 후손인 몽골이 독립국가로 있으므로 ‘고구려사’와 ‘원사’만은 마음대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이 두 나라와는 고구려사 원사를 공유하겠다는 뜻으로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중국이 원나라 역사에 대해서만 일사양용의 태도를 취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중국은 ‘만주에 도읍한 고구려는 중국 고구려이고 평양에 도읍한 고구려는 한국 고구려’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일사양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제는 서북공정이다
중국의 처지에서 본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주변 나라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대단한 행사일 것이다. 온갖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치른 중국은 전 국민을 모아 대국굴기(大國·#54366;起)의 모습을 보이려고 할 것이다. 대국굴기를 위한 거대한 사전 포석이 홍산문화를 삼키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고구려사나 고조선사를 가져가려는 것으로 좁게 바라봐서는 제대로 된 대처 방안을 세울 수 없다. 한국은 국사(國史)가 아닌 동북아 관계사의 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홍산문화를 연구해 이를 고조선사에 접목시키고, 홍산문화에서 파생된 여러 나라와 한국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동북공정에 대한 첫 번째 대응책이다.
한국이 중국과 전혀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중국과 전혀 다른 문명에서 나왔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한국이 중국에 종속되는 세계관을 갖는 것은 모순이다. 북학파가 주장했듯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화이일야’의 세계관을 갖고 홍산을 연구해야 동북공정을 무너뜨린다. 한국은 한반도의 서북에 있는 홍산을 연구하는 ‘서북공정’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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