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람들의 일본열도 정복: 건국설화의 유사성
The Japanese Islands Conquered by the Paekche People the foundation myth: trinity
자료출처 : <업코리아> 2005. 04. 14.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바로보기
고고학적인 물증을 분석한 다음, 사료에 근거해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과정에서, 에가미는 전적으로 위서 동이전 기록에 의존 해 미마키를 영도자로 하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고, 레드야드는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기록에만 의존을 해 만주로부터 곧장 내려온 부여인 정복설을 주장했다. 나는 고사기-일본서기의 호무다(오오진) 이후 기록들을 근거로 백제 왕실의 일원인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무리가, 백제 근초고왕의 축복을 받으며, 큐슈를 거쳐 야마도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에 대한 신화적인 기록은 니니기(邇邇藝)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이하레=진무(伊波禮, 神武)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호무다= 오오진(褒武多,品陀,譽田,應神)부분이담당하고있다.호무다=이하레=니니기는,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 속에서, 한 사람의 시조의 세가지 측면을 나누어 그리는 삼위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며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은 백제 사람들이고, 일본 천황족의 뿌리는 백제 왕실이며, 그 근원은 고구려 시조 주몽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필자의 이론과 부합한다. 근초고왕 (346-75)과 근구수왕(375-84) 재위 중의 백제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큰 영토적 확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마한의 전 지역뿐 아니라, 일본열도 역시 백제의 군사적 전성기인 4세기 후반 중 (좀더 구체적으로는 370-390년 기간 중) 백제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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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람들의 일본열도 정복: 건국설화의 유사성
니니기(邇邇藝) - 이하레(伊波禮, 神武)
–호무다(褒武多, 品陀, 譽田, 應神): 삼위일체
서울대 교수 洪元卓
야마도 왕국 창건 이론의 진화
북중국-내몽골 지역의 기마 유목민족 전문가인 동경대학 교수 에가미(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은 야마도 왕국의 근원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騎馬) 민족에 의한 정복에서 찾으려 했다.
에가미(1962, 1964)는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 중부 만주의 부여족 같은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으로부터 유래했으며, 이들은 일본열도를 침공하기 직전에 한반도 남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고 믿었다. 에가미는 이들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큐슈를 점령했으며, 그들의 후손인 호무다(오오진)가 4세기 말경에 근기(近畿) 지역을 향한 동정(東征) 에 올라, 마침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도 왕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에가미 기마민족설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대략 “4세기 후반 중간쯤”의 시기 이후의 고분들로부터 급작스럽게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1
에가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미마키(御間城, 崇神)라는 존재가 바로 기마 침공군의 지휘자이었으며, 한반도 남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미마나(彌摩那)라는 지역으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왔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여,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고고학적 발굴물뿐만 아니라, 사료에서도 찾으려 했다. 위서 동이전은 당시 마한의 월지국에서 변진 24개국 중 12개국을 지배한 진왕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2 에가미는 기마민족 지도자들이 3세기 말까지 진왕 노릇을 하다가, 그 후손의 하나인 미마키가 4세기 초에 미마나를 떠나 일본열도를 정복하게 된 것이라고 믿는다. 3
에가미 이론의 결함은, 4세기 말경에 근기(近畿)지역으로 동정(東征)을 떠났다는 호무다(오오진) 만이 고고학적으로 보아 기마 정복자에 속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4세기 초의 미마키도 기마민족에 속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에가미는 미마키를 4세기 초의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침공 역시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4세기 말)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반세기 이상을 소급시켜야 했다. 만약 에가미의 주장이 옳다면, 최소한 정복이 시작되는 큐슈 지역에서 만이라도 중기-후기 고분시대의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해야 한다. 에가미는 이와 같은 증거물이 아직 발견 안된 연결고리(missing link)이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발견이 될 것으로 믿었다. 4
에가미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일본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그 기마 정복민족의 정체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또 신비하게 만들었다. 즉, 구체성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학설에대한일본 대중의 거부감을 최소화 하려 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을 타고 건너온 왕자와 그 일행에 의해 야마도 왕국이 창건되었다면, 오히려 낭만과 신비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마(騎馬)민족설이란 바로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귀에 익은 (고사기-일본서기) 얘기에다,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한 꼴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Ledyard) 교수는 에가미의 이론을 수정 해서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과 좀더 일치 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레드야드(1975)는 352-372년 기간 중 언제인가 만주지역으로부터 부여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 백제를 세우고, 그 직후에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 한다. 이 주장은 고분 발굴물의 성격이 크게 바뀌는 시기와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레드야드 학설의 핵심적인 근거는, 부여가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깨졌다는 기록과,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대략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366년(2주갑 수정 없이는 246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국의 왕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난 364년 어느 날, 구저, 미주류, 막고라는 이름의 백제 사람 3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방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제 왕[근초고]께서 신들을 귀국 조정에 보낸 것 입니다. 그러 하오니 우리가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요. 우리가 그 곳에 도달 할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 임금님께서 틀림 없이 후한 사례를 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기에, 나[탁순 왕]는 구저 일행에게, ‘나도 바다 건너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들어 왔소만, 우리는 아직 그 나라와 직접적인 왕래가 없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을 정확히 모르오. 아무튼 우리와 그 나라 사이에는 험한 파도가 치는 넓은 바다가 있기 때문에, 큰 배를 가지고도 건너가기가 힘들 것이요. 그러니, 설령 그곳으로 오가는 나루터가 있다고 한들, 배도 준비를 안 하고 어떻게 갈 작정이요?’라고 말을 해 주었소. 그러자 구저 일행은, ‘그렇다면 당분간은 그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겠습니다. 돌아가서 선박을 확보할 방도를 마련한 다음, 차후에 시도를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소.” 5
독자는 이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부터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364년 당시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고, 마한은 한반도의 서남부를 아직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일행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탐색대를 보냈던 364년으로부터 그리 먼 훗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 장군”들이 이끄는 야마도 군사에 의한 대규모 한반도 침공 얘기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에 파병을 한 것이 바로 신공왕후라는 것이다. 말인즉, 야마도 군대가 탁순에 도착했을 때, 그들 군대 규모가 너무 적다는 것을 깨닫고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으며, 얼마 후, 분명히 백제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신라를 정복하고, 탁순을 비롯해 6개의 나라를 평정한다. 여기서 그들 군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방 야만 족을 정복하고, 그 정복한 땅들을 모두 백제에게 하사 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백제의 근초고왕과 태자 수가 합류를 하고, 또 4개의 지역이 제물에 함락 된다는 얘기다. 6
만약 독자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 군사적 활약을 야마도 사람들의 작품으로 이해 한다면, 도대체 백제 장수들이 야마도 군대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없다. 레드야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야마도 군이 차후에 그들이 정복했다는 지역을 어떻게 먼저 통과 해 탁순에 도달을 했다는 것인지, 또 야마도 군이 어떻게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 가면서 정복을 했다는 것인지를 이해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독자가 일단 이들 군사행동을 백제 사람들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상당히 일관성이 있는 얘기가 된다. 레드야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하면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모든 얘기가 실제로 있었던 백제 군대의 남방 진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단계에서 레드야드는 전혀 불필요한 오류를 범 해, 백제 왕과 그 일행을 부여의 전사들이라 부른다.
일본서기의 얘기는 백제왕과 일본열도를 향해 떠나는 야마도 군대의 지휘자가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느닷없이 부여를 끌어드릴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로 향해 출발하는 야마도 군사를 (백제왕족의 일원인) 호무다가 이끄는 일단의 백제 전사들로 간주하면 모든 얘기가 일관성이 있게 된다.
사료에 근거 해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시도에서 에가미는 전적으로 동이전 기록에 의존 해 미마키를 영도자로 하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고, 레드야드는 전적으로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기록에만 의존을 해 만주에서 곧장 내려온 부여인 정복설을 주장했다. 나는 고사기-일본서기의 호무다(오오진) 이후 기록을 근거로, 백제 왕실의 일원인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무리가, 백제 근초고왕의 축복을 받으며, 큐슈를 거쳐 야마도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마한의 전 지역뿐 아니라, 일본열도 역시 백제의 군사적 전성기인 4세기 후반 중 (좀더 구체적으로는 370-90년 기간 중) 백제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의 유사성: 니니기-이하레-호무다 삼위일체
고구려와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 간의 유사성은 이미 많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지적이 되었다.7 나는 이들 건국설화 기록이,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은 백제 사람들이고, 일본 천황족의 뿌리는 백제 왕실이며, 그 근원은 고구려 시조 주몽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필자의 이론과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규보의 구 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그 핵심적인 주제(motives)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고구려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를 보면, 하늘나라에서 천신 혹은 일신(日 神)의 아들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되지 않은 장소로) 내려오고, 그 땅의 토착 통치자는 자리를 피해준다. 8 이 천제(天帝) 혹은 천신의 아들은 물의 신, 즉 하신(河神) 혹은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다. 천제의 아들 혹은 천손(天孫)이, 명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내려(降)와 지상의 세계를 다니다가 (물의 딸인) 미인을 만나고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정말로 신의 아들인가 시험을 받은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양쪽의 표현 기법까지도 똑 같다. 그런데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은, 완전히 인간화 된 아들을 낳은 다음,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한다. 건국 시조를 낳는 역사적인 역할이 끝나면, 이들 남녀가 각기 제 고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숙명 역시 똑같은 구도인 것이다. 그들의 로맨스는 지상 인간세계 왕국의 시조를 낳아주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신대(神代)에 속하는 신화가 된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이(혹은 그의 아들)가 자라나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장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이 부분이, 완전히 인간화 된, 인대(人代)의 전설이 된다. 인간세계의 시조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된 장소로 가는 도중에, 거북들 혹은 거북을 탄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9
오오바야시(1977)는 고사기 설화 중 거북, 까마귀, 곰 등 세 종류의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육지 동물인 곰 만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또 마찬가지로 주몽의 설화에서도 거북, 비둘기, 짐승 중 육지 동물 만이 부정적 역할을 한다. 오오바야시는 “두 설화를 부호로 바꾸어 보면 그 구조적 유사성이 분명해 진다”고 말한다.
설화의 끝부분을 보면,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는 백제의 전설과도 일치한다. 즉, 형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에 실패를 하고, 동생이 성공을 한다는 공통 주제를 발견한다. 백제의 건국 설화를 보면, 형 비류는 해변가로 가서 실패를 하지만, 동생 온조는 내륙 산악 주변에 정착을 해, 새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고사기-일본서기에서는 진무의 할아버지가 둘째 아들인데 산과 잘 어울리고, 그 형은 물과 잘 어울리는데 결국 실패 해 동생에게 신속(臣屬)을 하게 된다. 진무 자신도 아래 동생이고, 형은 동정(東征) 중 첫 번째 육지 전투에서 전사한다. 호무다(오오진) 역시 두 번째 아들이고, 그 형에 대해서는 고사기-일본서기에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10 백제 건국 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후에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를 쓴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영감의 출처가 되었을 수 있다. 에가미에 의하면, 부여-고구려와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한 건국설화가 일본열도로 도입되어, 최소의 수정을 가 한 후,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11 오오바야시(1977)는 고구려와 백제 왕국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 사이의 놀라운 상호 대응 구조는 일본의 지배층문화의 원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군주제 문화는 5세기에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 왔으며, 이러한 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알타이 유목문화를 상당부분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해 일체화 시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본질적인 사고의 틀을 분석해 보면, 동일한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서술한, 같은 유형의 건국 설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를 해 본다면, 현란하게 피어 있는 꽃들과 무수한 잔가지들을 다 처 버리고, 나무의 원형(原形)을 쳐다보면, 두 개의 나무 모양이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즉, 누군지 부여-고구려 건국 설화에 아주 친숙한 사람들이, 일본 땅에 신천지를 개척한 다음에,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서 독창적인 건국 설화를 쓴다고 쓴 것 같은데, 결과를 보니 그 근본이 되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부여- 고구려-백제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12
고사기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神代)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데라스의 손자인 니니기(邇邇藝)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고사기 상권에 의하면 니니기가 신화(神話)상의 시조이다. 고사기 중권 인대(人代)는 속세 왕국의 시조 진무(이하레, 伊波禮)로부터 시작을 해, 15대 왕 호무다(오오진)로 끝을 맺는다. 고사기 서문은 “니니기가 최초로 다카치호 산봉우리에 내려오고, 이하레 (진무)가 아키츠 섬을 통과해 간다”라고 단숨에 말한다. 13 고사기 중권 첫 부분에서는 큐슈에서 태어난 이하레(진무)가 동정의 장도에 오르고, 끝부분에서는 한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막 일본열도에 상륙한 신공왕후와 큐슈에서 태어난 그녀의 갓난 아기 호무다가 축소판 동정(東征)에 오른다.
해의 신 아마데라스는 손자에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가 일본열도를 다스릴 것을 명하는데, 속세의 어머니인 신공은 그녀의 갓난 아기를 데리고 동정에 올라 그 아들이 야마도 지역의 이하레라는 도읍지에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 돌본다. 14 고사기에 의하면, 신탁(神託)을 했을 때, 호무다의 모친인 신공왕후는 “해의 신 아마데라스의 뜻은 바로 그녀가 이제 낳으려는 아기에게 그 나라를 주는 것이다. 네 아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라 … 그러니 진정 그 나라를 원 한다면 … 바다를 건너라!”라는 계시를 듣는다. 15
나는 고사기 상권에 해의 여신의 자손이라고 기록된 니니기와, 중권의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각각 지상왕국의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로 기록된,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도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한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에 대한 신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호무다-이하레-니니기는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 속에서 한 사람의 시조의 세가지 측면을 나누어 그리는 삼위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 가미(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
Ledyard(1975)는 (야마도 왕국의 공식적 시조인) 진무의 칭호에서뿐만 아니라, 호무다의 도읍지 명칭에서도 나타나는 “이하레”라는 표현에 주의를 환기한다. 16 일본서기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譽田)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磐余)에 정했다고 말한다. 고사기는 이하레를 이파례(伊波禮)라고 쓴다. 백제의 첫 번째 도읍지의 이름은 위례(慰禮)성이다.17 이파례의 세 번째 글자와 위례의 두 번째 글자가 동일한 것을 보면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Ledyard(1975)는 이하레의 한국식 표현은 “이파르”이며 거발(居拔)이라 쓴다고 말한다. 북사(北史), 수서(隋書), 통전(通典)은 거발성이 백제의 수도라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있을 거”라는 한자의 훈독은 “이”이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은 “거발”이 아니라 “이발”로 읽었을 것이다. 1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을 해 왔을 당시에는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비류수 언저리(渾江邊 桓仁)에 적당히 집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왕위를 계승한 유리명왕은 “국내 위나암”을 시찰한 다음, 서기 4년에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尉那巖) 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19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 20 도수희(1972)에 의하면, 위나(암), 어라(하), 위례 등이 모두 동일한 표현이며, 이기동(1990)은 위례가 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위례성이나 위나암성은 모두 왕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1
따라서, 호무다의 도읍지 이하레는 백제의 최초 도읍지 위례를 의미하고, 이는 곧 북서의 이발(居拔), 주서의 어라하와 상응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즉, 호무다는 야마도 왕국 세우고 나서, 백제의 첫 도읍지 이름을 본받아 자신의 첫 도읍지를 “이하레” 라고 불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마도 왕국 시조(진무)의 공식 명칭인 카미(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는 「신성한 야마도의 왕」을 뜻하며, 그 속에는 사람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는다. 즉, 호무다 라는 실명을 넣어야만 「신성한 야마도의 왕 호무다」 라는, 새 왕국을 창건한 시조의 완전(complete) 한 명칭(full name)이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호무다 치세 이래로”라는 표현은 가끔 사용하지만, “진무 치세 이래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22
대흥안령 산맥의 동쪽, (서쪽의 선비-거란 지역과 동쪽 말갈-여진족 지역 중간에 위치한) 만주 송화강 유역 평원에서 밭농사를 짓고 있던 (예-맥 계통의) 반 유목국가인 부여국 (북부여 혹은 동부여) 왕실의 특이한 구성원인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 졸본 부여 지역으로 내려와, 장백산맥의 끝자락 압록강 변에, 고구려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주몽의 아들 중 온조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마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정주 농경사회를 영위하고 있었던 한강변에, 백제(남부여)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그로부터 4백여 년이 지난 후, 백제 왕족인 호무다는,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남쪽 바다를 건너, 일찍이 가야(변한)에서 건너와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 선주민들과어울려) 정착을 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야요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다.
근초고왕 (346-375)과 근구수왕(375-384) 재위 중의 백제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큰 영토적 확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요서에 진출하고, 평양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371), 마한 전체를 복속시키고, 일본열도로 진출 해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도 모두 이 시대에 이루어 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2 (2005. 4. 16.)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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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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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즉, 대략 375년경을 기준으로 그 이전 시기의 고분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혀 발굴되지 않지만, 그 이후 시기의 고분에서는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을 위시해 전혀 다른 성격의 유물들이 출토된다는 고고학적 단절(archeological break) 현상을 근거로,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는 이론을 주장한 것이다. 3세기 말 경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당시 일본열도에는 말이 없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2. Egami (1964: 66) 참조.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東夷傳 …辰王治月支國 . . .弁辰韓合二十四國. .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後漢書 東夷列傳 第七十五 馬韓 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3. Egami (1962: 16) 참조.
垂仁二年 … 御間城天皇之世. . .意富加羅國王之子. . .是時遇天皇崩 便留之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 . .欲歸汝國耶. . .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NI: 257-9)
4. 에가미(1964: 69)는 “가야의 작전 기지로부터 미마나의 왕들에 의한 북큐슈 침공은, 가야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협조를 받았다”거나, “미마나와 큐슈로 구성된 일본-한국 연맹국이 수립되었다”는 말들을 하는가 하면, “그 연맹국의 왕은 왜왕이라 하며 그들의 수도는 큐슈에 위치했다. … 오오진 천황 때에는 왜군이 한반도 내부 깊숙이 진출 했으며 … 바로 이 대륙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근기(近畿)지역의 정복도 이루어졌다. … 일본의 천황들은 일본-한국 연맹국을 통치하는 왜왕들이었다. 덴지 천황 대에 이르러, 일본의 천황은 일본열도 만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라는 말도 한다. 에가미(1964: 65-66)는 또 “왜왕은 전 남한(南韓)을 통치할 역사적 근거 혹은 내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모든 남한의 국가들 모양 백제 역시 왜의 종속 국가 이었다”라고 말한다. 에가미는 학문적으로 손색이 없는 자신의 기마민족설을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포장을 한 덕분에 (1991년에) 천황으로부터 문화 훈장을 받았다.
5. 神功 攝政卌六年.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卓淳王末錦旱岐.. .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 .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環之備船舶 以後通矣 (NI: 353)
6. 神功 攝政卌九年 .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 .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 . . 更復 奉上 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 .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而送之 (NI: 355-357)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 . 王曰 馬韓漸弱 . . . 冬十月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 . . 二十七年 . . . 馬韓遂滅 (S2: 16)
7. 오오바야시(1977) 참조.
8. 고사기 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인 “니니기-진무”와 직접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들에게, 천신의 아들 혹은 일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북 위서(北魏書)에 의하면, 주몽은 자기 자신을 해의 아들(日子)이며 강의 신 하백의 외손자라고 불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무의 할아버지는 천신이고, 어머니는 해신이다. 진무의 형은, 자신이 일신의 아들(日...子) 혹은 일신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9. 曰 將使吾子孫 立於此 汝其避之. . . 解慕漱 . . . 河伯之女. . . 誘. . .於. . . 卽往不返 .. .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 . 因而. . . 有一男兒. . .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 . 行至淹遞水. . .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 .. 魚鼈浮出成橋 (S1: 260-261)
解慕漱 . . .天之子. . .天帝遣太子 降遊扶余王古都. . . 世謂之天王郞 . ..河伯三女美 . . .可有後胤 . . .長女曰柳花. . .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唯在所試 . . .以禮成婚. . .獨出升天 . . .王知慕漱妃 仍以別宮置 懷日生朱蒙 . . . 南行至淹滯. . . 天孫河伯甥 避難至於此. . .魚鼈騈首尾 (東國李相國集 : 33-36)
三國志 魏書 夫餘傳 魏略曰. . .有高離之國者 其王者. . .婢云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後生子. . .王疑以爲天子也 . . .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 .魚鼈浮爲橋. . .東明因都王夫餘之地
廣開土王碑文 始祖鄒牟王. . .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 . . 剖卵降世 . . . 巡行南下 路有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 . .爲我連葭浮龜 . . .造渡
[北]魏書 列傳 高句麗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伊奘諾尊 伊奘冉尊. . . 共生日神. . .一書云 天照大神 (NI: 87) 五瀨命. . .日神之御子 (K: 150) 五瀨命. . . 日神子孫 (NI: 193)
皇祖高皇産靈 . . . 遂欲立皇孫 . . . 以爲葦原中國之主 . . . 而問大己貴神曰 . . . 欲降皇孫 君臨此地 . . . 如意何如當須避不 . . . 使降之 (NI: 139)
幸行筑紫 . . . 乘龜甲爲釣乍打羽擧來人 遇于 . . . 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148)
See Ōbayashi (1977: 1-23).
10. 長曰沸流 . . . 欲居於海濱 . . .彌鄒忽以居之 溫祖都河南慰禮城. . . 沸流以彌鄒土濕水鹹 . . . 遂慙悔而死 (S2: 15)
天照大御神. . .詔太子. . .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 . .生子. . .次日子. . .邇邇藝. . .隨命以可天降 (K:124-126)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I: 151) 遂生. . .兄. . .自有海幸 弟. . .自有山幸 (NI: 163) 沈之于海. . .至海神之宮. . .有一美人 [海神聞之曰 試以察之. . .乃知是天神之孫 (NI: 183)] 因娶海神女. . .仍留住海宮 (NI: 165) 天孫. . .還上國 (NI: 171) 兄知弟有神德 遂以伏事其弟 (NI: 175) 豐玉姬自馭大龜. . .海來到. . .其兒生之後. . .海俓去 (NI: 178-181) 以其姨. . .爲妃 生彦五瀨命. . .次. . .次. . .次神日本磐余 (NI: 185) 一書曰 先生彦五瀨命 次磐余彦 (NI: 187)
帶中日子天皇 . . . 又娶息長帶比賣命 生御子 . . . 次. . .品陀和氣命 . . . 故著其御名 是以知坐腹中國也 (K: 226)
11.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보면, 부여의 시조가 바로 동명이고, 고구려 주몽의 건국설화는 바로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략의 부여 시조에 관한 얘기는 이러하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은 시녀를 죽이려 했는데, 그녀는 “계란과 같은 기운이 내려 와서 그 때문에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은 삼국사기-구삼국사 에서 기록하는 유화의 얘기와 아주 흡사하다.) 그녀 아들의 이름이 바로 “동명”인데,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송화강?)를 건너 부여의 땅에 도읍을 하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야요이 시대의 주역이 가야 (가락) 사람들 이었기 때문에, 야마도 왕국의 건국 설화 내용에서 가락국 건국설화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천신으로부터 지상왕국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니니기가 큐슈의 「구지」봉우리로 내려오는데, 「구지」는 가락 시조가 내려왔다는 장소의 지명과 동일 한 것이다.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K: 128)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149)
首露. . .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S2: 290)
三國遺事 駕洛國記 . . .所居北龜旨. . .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 . .故降矣 . . . 始現故諱首露 . . .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13.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 (K: 42)
14. 息長帶日賣命 於倭還上之時 因疑人心 一具喪船 御子載其喪船. . .思將待取 進出於. . . 興軍待向之時 . . .爾自其喪船下軍相戰 . . .難波. . .故追退到山代之時 還立 各不退相戰. . .更張追擊 故逃退逢坂 對立亦戰 爾追迫敗於. . .悉斬其軍. . .共被追迫. . . 故. . .率其太子. . .造假宮而坐 (K: 232-234)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 因以 都於磐余 (NI: 349)
15. 大后歸神 言敎覺詔者 西方有國 . . . 吾今歸賜其國 . . . 凡此國者 坐汝命御腹之御子 所知國者也 . . . 是天照大神之御心者 . . . 今寔思求其國者 . . . 大海以可度 (K: 228-230)
16.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因以都於磐余 (NI: 349)
일본서기에서는, 진무가 다카오하리 라는 곳에서 쓰찌구모 무리들을 크게 무찌르자, 그 땅의 이름이 이하레(磐余)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하레 라는 지역은 오늘날의 나라현 사쿠라이 시의 중심부로부터 아스카를 지나 카시하라 시의 동부에 걸쳐있는 (우네비 산 동남쪽의 카시하라 궁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17.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은 한수 북쪽 위례(慰禮)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기원전 5년에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 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南慰禮城 (S2: 16)
18.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차돈(異次頓)을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쓰지만, 읽기는 이차돈 이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사례이다.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 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 固麻城
19. 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 本記 第一 始祖東眀聖王... 而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琉璃眀王 二十一年...至 國內尉那巖…王若移都 (S1: 261) 二十二年 王遷都於國內 築尉那 巖城 (S1: 262)
20. 周書卷四十九 列傳第四十一 異域上 百濟者…夫餘之別種 ... 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 鞬吉支 …言竝王也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 …都漢城 (S2: 233)
21. “이하레”란 왕 또는 왕성(王城)을 의미하며, “이발,” “어라하,” “위례,” “위나암” 등과 동일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국내 위나암 성”, “하북 위례성”, “하남 위례성” 등의 표현들을 보면, 고구려의 “위나암”성과 백제의 “위례”성이라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읍지 즉 왕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이 된 것 같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시조라는 진무의 명칭에 “야마도 이하레”라고 “이하레”를 삽입했는데, “야마도의 왕(王)”이라는 뜻 일 것이다.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 와께(譽田 別) 왕자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에 정했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성(城)이라는 글자가 없지만 왕성(王城)을 의미 할 것이다. 당시 야마도 왕국에는 성(城)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22. 繼體 二十三年 任那王己能末多干岐來朝…曰 夫海表諸蕃 自胎中天皇… (NII: 37)
繼體 二十四年 詔曰 自磐余彦之帝 ... (NII: 43)
The Japanese Islands Conquered by the Paekche People
the foundation myth: trinity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 evolution of egami-ledyard-hong models
Egami (1962, 1964) believes that the Japanese imperial ancestors came from a horseriding race of Northeast Asian provenance, possibly from among the Puyeo of central Manchuria, and that immediately prior to their invasion of the Japanese islands, they were based in the southern peninsula. Egami contends that the horseriders occupied Kyūshū in the early fourth century, and their descendant Homuda (Oujin) carried out the conquest eastward to the Kinki region at the end of the fourth century, establishing the Yamato kingdom, the first unified state on the Japanese islands. The most crucial evidence for his theory is the sudden appearance of various horse-related archeological findings dated to the period after “the middle of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Egami has attempted to ground his thesis on historical sources by identifying a Nihongi figure called Mima-ki (Emperor Sujin), who presumably came to the Japanese islands from a southeastern corner of the Korean peninsula called Mima-na, as the leader of the horseriding invasion force. The Dongyi-zhuan records that there were kings of Chin in southern Korea who ruled in the state of Yue-shi in Ma-han and brought under sway twelve out of a total of twenty-four Han states.1 Egami believes that the leader of horseriders became the kings of Chin up to the late third century, and Mima-ki, one of the descendants of the third century Chin kings, left Mima-na to conquer the Japanese islands in the early fourth century.2
A flaw in Egami’s argument is his contention that Mima-ki belonged to the horseriding conquerors, while archeologically it appears that only Homuda could have belonged to them. Since Egami places Mima-ki in the early fourth century, he has to backdate the invasion to around that time, at least half a century or more before the advent of archeological discontinuity. If Egami’s hypothesis is correct, we should be able to observe an introduction of Middle and Late Tomb materials in the early fourth century, at least in Kyūshū where Egami contends the invasion began. According to Egami, such evidence constitutes a missing link which, he believes, will certainly be found in the future.3
Ledyard (1975) has attempted to reformulate Egami’s theory in order to make it more consistent with the appearance of the archeological break. Ledyard contends that the Paekche kingdom in the sou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was founded by the Puyeo refugees from Manchuria sometime in the twenty-year period between 352 and 372, and immediately thereafter, the Puyeo warriors reached the sea, boarded boats and founded the Yamato kingdom in the Japanese islands. The core evidence for Ledyard’s thesis is twofold: the historical fact that Puyeo was destroyed in 346, and the chaotic stories of the period between 350 and 380 recorded in Nihongi.
The record of Nihongi for the year 366 (246, without the usual two-cycle correction) contains the following statements made by the King of a Kaya state, Tak-sun: “In the course of the year Kinoye Ne [364], three men of Paekche named Ku-zeo, Mi-ju-ryu, and Mak-go came up to my country and said; - ‘The King of Paekche [Keun Chogo], hearing that in the Eastern quarter there is an honorable country [the Japanese islands], has sent thy servants to this honorable country’s court. Therefore, we beg of thee a passage so that we may go to that Land. If you wilt be good enough to instruct thy servants and cause us to pass along the roads, our King will certainly show profound kindness to my Lord the King.’ I (the King of Tak-sun) then said to Ku-zeo and his followers: - ‘I have always heard that there is an honorable country in the East, but I have no communication with it, and do not know the way. There is nothing but far seas and towering billows, so that in a large ship, one can hardly communicate. Even if there were a regular crossing-place, how could you arrive there?’ Hereupon Ku-zeo and the others said: - ‘Well, then for the present we cannot communicate. Our best plan will be to go back again, and prepare ships with which to communicate later.’ ” 4
What are we able to understand from these statements? As of 364, Han-seong was the capital of Paekche, and Ma-han was still occupying the southwestern corner of the Korean peninsula. Hence it was natural that the Paekche people would lack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passages to the Japanese islands. The movement of the Paekche people [Homuda and his followers] to the Japanese islands must have occurred not long after 364, which was the year they had dispatched scouts to gather information about the passages.
In the ensuing narration, however, Nihongi records a large-scale Wa invasion of Korea with “Paekche generals.” According to Nihongi, it was Jingū who dispatched an army to the Korean peninsula in 369 to invade “Silla.” It is said that, when the Wa army arrived at Tak-sun, they discovered that the size of their army was too small and hence had to ask for reinforcements. They were soon joined by troops led by two generals with unmistakably Paekche names. They then all together invaded and conquered “Silla” and pacified Tak-sun and six other places. From here the armies turned west, conquered the southern savages and then “granted” those conquered lands to Paekche. At this point they were joined by the Paekche King Keun Chogo and his son Prince Keun Kusu, whereupon four more localities spontaneously surrendered. 5
If one tries to understand these military activities described in Nihongi as the work of Wa, then there is no way to understand the “Paekche generals” associating with Wa troops. Neither can we understand, as pointed out by Ledyard (1975), the story that the Wa armies somehow got to Tak-sun in the first place without passing through the areas they later conquered, nor the story that Wa armies then turned around and conquered the areas from north to south. But once we take those series of military activities as the work of Paekche, these Nihongi records become quite coherent.
By crosschecking the records of Samguk-sagi, Ledyard logically deduces that all those stories recorded in Nihongi represent the historical records of Paekche armies moving south. At this point, however, Ledyard commits an altogether unnecessary and surprising error, calling the Paekche king and his followers “Puyeo warriors.” In Nihongi, the above story ends with the Paekche King and the “Wa soldiers,” who are heading to the Japanese islands, pledging eternal friendship and biding farewell. If we take the departing “Wa soldiers” as a contingent of Paekche warriors [led by a Paekche prince named Homuda], without invoking Puyeo warriors out of the blue, then the entire story becomes coherent.
In searching for the principal figures in the formation of the Yamato kingdom, Egami resorts almost exclusively to the Dongyi-zhuan and contends the conquest by horse-riding people led by Mimaki. Ledyard resorts almost exclusively to the Jingū’s section of Nihongi, and contends the conquest by the Puyeo people fresh from Manchuria.
Alloting appropriate weight to the post-Oujin records of Kojiki and Nihongi, I contend that a member of the Paekche royal family represented by Homuda and his followers, with the blessing of Paekche’s King Keun Chogo (346-375), carried out the conquest of the Yamato region via Kyūshū in the late fourth century. I contend that not only the entire Mahan area, but also the Japanese islands were conquered by the Paekche people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to be more specific, 370-390) when the Paekche’s military might reached its peak.
The Foundation Myth: Trinity
The close similarity in kingship myths between Koguryeo and the Yamato kingdom has already been suggested by many Japanese scholars (see Ōbayashi, 1977). I believe that the recorded foundation myths in both countries are consistent with my own foundation theory: it was the Paekche people who had established the Yamato kingdom on the Japanese archipelago, and the roots of the Japanese imperial clan were the Paekche royal family whose origin, in turn, can be traced to the founder of the Koguryeo kingdom, Chu-mong.
The foundation myth of Koguryeo as recorded in Samguk-sagi and Old Samguk-sa, on the one hand, and the foundation myth of the Yamato kingdom as recorded in Kojiki and Nihongi, on the other, reveal surprising similarities in essential motives. In both myths, a son of the heavenly god or sun goddess descends to earth from heaven and marries a daughter of the river god or sea god (after being tested for godliness by the bride’s father). Their romance terminates with the birth of a founding forefather of the earthly kingdom (being destined to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and the earthly founder leaves the initial settlement, crossing the river or sea, getting the help of turtles or of a man riding on a turtle.6
Ōbayashi (1977) points out that among the three different types of animals appearing in Kojiki myth, such as tortoise, crow, and bear, only the bear (the land animal) has a negative value and, analogously, among tortoises, birds, and beasts appearing in Chu-mong myth, only the land animals (beasts) have a negative value. Ōbayashi states that “the structural similarity between the two stories becomes apparent when they are codified.”
In the finale, the foundation myth of Kojiki and Nihongi also matches the legend of Paekche itself: the elder brother Biryu went to the seashore and failed while the younger brother onjo stayed inland in a mountain area and succeeded in founding a kingdom in the new world. In Kojiki and Nihongi, Jinmu’s grandfather was a second child who was partial to mountains; the elder brother was partial to the sea and failed, subsequently submitting to his younger brother. Jinmu himself was the younger child, and the elder brother was killed during the first land battle. Oujin was a second child, and the elder brother did not merit so much as a single word of description in Kojiki and Nihongi.7 A historical event in the formation of Paekche might well have been an additional source of inspiration for the writers of the Kojiki-Nihongi myth. According to Egami, the foundation myth derived from the same source as Puyeo and Koguryeo was brought to the Japanese islands by an alien race and, with minor adaptations, became the foundation myth of the Yamato kingdom.8 Ōbayashi (1977: 19) states that the “striking correspondence in structure between the Japanese myths and the kingdom-foundation legends of Koguryeo and Pakeche … provides a clue to the origins of the ruling-class culture in Japan,” and also states that (ibid.: 22) “the monarchial culture … came to Japan from Korea … in the fifth century” and “the people who were responsible for this monarchial culture had absorbed the Altaic pastoral culture to a substantial degree and it had become an integral part of their culture.”
The Age of the God narrated in Book one of Kojiki introduces the mythical founder Ninigi, the grandson of the Sun Goddess Amaterasu. Book Two of Kojiki begins the Age of Man with the earthly founder Ihare (Jinmu) and ends with the fifteenth king Homuda (Oujin). In the preface of Kojiki, one reads that “Ninigi first descended to the peak of Takachiho, and Ihare (Jinmu) passed through the island of Akitsu” in one breath.9 In Book Two of Kojiki, Ihare, who was born in Kyūshū, commences the epic Eastward Conquest while Homuda, who was also born in Kyūshū, wages a miniature Eastward Conquest with his mother (Jingū), who has just crossed over the sea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landed on the Japanese islands.
The Sun Goddess Amaterasu orders her child to descend from heaven to rule the Japanese islands, while the earthly mother Jingū accompanies her child and herself sees her son through becoming the king at the capital city named Ihare in the Yamato area.10 According to Kojiki, the divine oracle tells Homuda’s mother (Jingū) that “it is the intention of the Sun Goddess Amaterasu to bestow the country upon her unborn child and let him rule it … and hence if the country is really desired … cross the sea!” 11
I contend that Ninigi, the scion of the Sun Goddess recorded in Book one, and Ihare the earthly founder, and Homuda the fifteenth king recorded in Book Two (at the beginning and at the end, respectively) of Kojiki portray three different aspects of the real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In Kojiki as well as in Nihongi, the mythological aspect was covered in the Ninigi section, the records of battles and conquest were covered in the Ihare (Jinmu) section, and the massive arrival of the Paekche people was covered in the Homuda (Oujin) section. Homuda, Ihare and Ninigi constitute the trinity in the foundation legend of the Yamato kingdom.
the OFFICIAL title of FOUNDER: Kami Yamato “Ihare”
Ledyard (1975) calls our attention to the expression “Ihare” found in the title of Jinmu (Kami Yamato Ihare) and in the name of the capital for Homuda. According to Nihongi, Homuda was appointed Prince Imperial in the third year of Jingū’s regency, and accordingly, the capital was made at Iha-re. In Kojiki, Iha-re is written Ipa-re. 12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was the Wi-rye Castle. 13 The third character with which I-pa-re is written is also the second character of Wi-rye suggesting a connection between Ipa-re and Wi-rye.
Ledyard (1975) notes that the Korean variant of Ihare is I-par, and is written as Keo-bal. According to Bei-shi, Sui-shu and Tong Dian, the Keo-bal Castle was the name for the capital of Paekche. Since the Korean kun reading of Keo is I, Keo-bal yields the reading of I-bal or I-par. 14
Samguk-sagi records that the second Koguryeo King Yuri established his capital at Kug-nae in AD 4, and constructed the Wi-na(-am) Castle.15 According to Zhou-shu, the king was also called Eo-ra(-ha) in Paekche.16 Do (1972) regards that Wi-na, Eo-ra and Wi-rye represent the same reading, and Yi (1990) further notes that Wi-rye implies king. That is, both the Wi-rye Castle and Wi-na(-am) Castle represent the King’s Castle.
We may now hypothesize that Iha-re, the capital for Homuda, represents Wi-rye,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that may correspond to I-bal in Bei-shi and Eo-ra-ha in Zhou-shu. That is, we may contend that Homuda established the Yamato kingdom and called its first capital Iha-re (Ipa-re) after the name of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Wi-rye (I-bal or Eo-ra-ha).
The official title of the founder (Jinmu) of the Yamato kingdom, “Kami Yamato Ihare,” implies “Divine Yamato King” that lacks the personal name. only by adding Homuda, we get the full title for the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Nihongi often uses the expression “since the days of Homuda,” but never uses the expression “since the days of Jinmu.”17
BIBLIOGRAPHY
[각주]
1 Egami (1964: 66)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東夷傳 …辰王治月支國
. . .弁辰韓合二十四國. .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後漢書 東夷列傳 第七十五 馬韓 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2 Egami (1962: 16)
垂仁二年 御間城天皇之世. . .意富加羅國王之子. . .是時遇天皇崩 便留之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 . .欲歸汝國耶. . .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NI: 257-259)
3 Egami (1064: 69) not only argues “the invasion of Tsukushi by the kings of Mimana . . . from the operational base of Kara . . . with the cooperation of the people of Wo living in that area” as well as “the establishment of a confederated Japanese-Korean state comprising Mimana and Tsukushi,” but also argues that “the kings of this confederated state, the kings of Wo, had their capital . . . in Tsukushi . . [and] in the time of Emperor Oujin . . . the armies of Wo penetrated deeply into the interior of the Korean peninsula . . . [and] while these continental campaigns were being carried on there occurred the conquest of the Kinki region . . .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Yamato court . . . Emperors of Japan were kings of Wo ruling a Japanese-Korean confederation.
[F]rom the time of the Emperor Tenji . . . the Emperor of Japan finally became sovereign over the islands of Japan alone.” Egami (1964: 65-66) also argues that “the kings of Wo still retained a historical basis for ruling, or a latent right to rule, the whole of south Korea . . . Paekche, like all the other states of south Korea, should be considered a dependency of the state of Wo.” Egami seems to have coated his theory of horseriding people with enough sugar to win the Cultural Medal from the Emperor in 1991.
4 神功 攝政卌六年.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卓淳王末錦旱岐.. .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 .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環之備船舶 以後通矣 (NI: 353)
5 神功 攝政卌九年 .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 .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 . . 更復 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 .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而送之 (NI: 355-357)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 . 王曰 馬韓漸弱 . . . 冬十月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 . . 二十七年 . . . 馬韓遂滅 (S2: 16)
6 曰 將使吾子孫 立於此 汝其避之. . . 解慕漱 . . . 河伯之女. . . 誘. . .於. . . 卽往不返 .. .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 . 因而. . . 有一男兒. . .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 . 行至淹遞水. . .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 .. 魚鼈浮出成橋 (S1: 260-261)
解慕漱 . . .天之子. . .天帝遣太子 降遊扶余王古都. . . 世謂之天王郞 . ..河伯三女美 . . .可有後胤 . . .長女曰柳花. . .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唯在所試 . . .以禮成婚. . .獨出升天 . . .王知慕漱妃 仍以別宮置 懷日生朱蒙 . . . 南行至淹滯. . . 天孫河伯甥 避難至於此. . .魚鼈騈首尾 (東國李相國集 : 33-36)
三國志 魏書 夫餘傳 魏略曰. . .有高離之國者 其王者. . .婢云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後生子. . .王疑以爲天子也 . . .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 .魚鼈浮爲橋. . .東明因都王夫餘之地
廣開土王碑文 始祖鄒牟王. . .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 . . 剖卵降世 . . . 巡行南下 路有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 . .爲我連葭浮龜 . . .造渡
[北]魏書 列傳 高句麗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伊奘諾尊 伊奘冉尊. . . 共生日神. . .一書云 天照大神 (NI: 87) 五瀨命. . .日神之御子 (K: 150) 五瀨命. . . 日神子孫 (NI: 193)
皇祖高皇産靈 . . . 遂欲立皇孫 . . . 以爲葦原中國之主 . . . 而問大己貴神曰 . . . 欲降皇孫 君臨此地 . . . 如意何如當須避不 . . . 使降之 (NI: 139)
幸行筑紫 . . . 乘龜甲爲釣乍打羽擧來人 遇于 . . . 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148)
See Ōbayashi (1977: 1-23).
7 長曰沸流 . . . 欲居於海濱 . . .彌鄒忽以居之 溫祖都河南慰禮城. . . 沸流以彌鄒土濕水鹹 . . . 遂慙悔而死 (S2: 15)
天照大御神. . .詔太子. . .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 . .生子. . .次日子. . .邇邇藝. . .隨命以可天降 (K: 124-126)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I: 151) 遂生. . .兄. . .自有海幸 弟. . .自有山幸 (NI: 163) 沈之于海. . .至海神之宮. . .有一美人 [海神聞之曰 試以察之. . .乃知是天神之孫 (NI: 183)] 因娶海神女. . .仍留住海宮 (NI: 165) 天孫. . .還上國 (NI: 171) 兄知弟有神德 遂以伏事其弟 (NI: 175) 豐玉姬自馭大龜. . .海來到. . .其兒生之後. . .海俓去 (NI: 178-181) 以其姨. . .爲妃 生彦五瀨命. . .次. . .次. . .次神日本磐余 (NI: 185) 一書曰 先生彦五瀨命 次磐余彦 (NI: 187)
帶中日子天皇 . . . 又娶息長帶比賣命 生御子 . . . 次. . .品陀和氣命 . . . 故著其御名 是以知坐腹中國也 (K: 226)
8 Since the principal actor of the Yayoi era was the Karak (Kaya) people, the foundation myth of the Yamato kingdom could not avoid some trace of the Karak foundation myth.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after receiving the order of the heavenly god to rule the land, Ninigi descends on the peak of Kuji-furu (in Kyūshū) that is identical to the name of the place Kuji (in southern Korea) where the founder of Karak descended from heaven. See Egami (1964: 56, 59).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 士布流多氣 (K: 128)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149)
首露. . .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S2: 290)
三國遺事 駕洛國記 . . .所居北龜旨. . .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 . .故降矣 . . . 始現故諱首露 . . .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9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 (K: 42)
10 息長帶日賣命 於倭還上之時 因疑人心 一具喪船 御子載其喪船. . .思將待取 進出於. . . 興軍待向之時 . . .爾自其喪船下軍相戰 . . .難波. . .故追退到山代之時 還立 各不退相戰. . .更張追擊 故逃退逢坂 對立亦戰 爾追迫敗於. . .悉斬其軍. . .共被追迫. . . 故. . .率其太子. . .造假宮而坐 (K: 232-234)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 因以 都於磐余 (NI: 349)
11 大后歸神 言敎覺詔者 西方有國 . . . 吾今歸賜其國 . . . 凡此國者 坐汝命御腹之御子 所知國者也 . . . 是天照大神之御心者 . . . 今寔思求其國者 . . . 大海以可度 (K: 228-230)
12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因以都於磐余 (NI: 349)
13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 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 南慰禮城 (S2: 16)
14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 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 固麻城
15 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 本記 第一 始祖東眀聖王... 而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琉璃眀王 二十一年...至 國內尉那巖…王若移都 (S1: 261) 二十二年 王遷都於國內 築尉那 巖城 (S1: 262)
16周書卷四十九 列傳第四十一 異域上 百濟者…夫餘之別種 ... 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 鞬吉支 …言竝王也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 …都漢城 (S2: 233)
17繼體 二十三年 任那王己能末 多干岐來朝…曰 夫海表諸蕃 自 胎中天皇… (NII: 37)
繼體 二十四年 詔曰 自磐余彦 之帝 ... (NII: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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