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정복자들 : 일본열도 정복자들에 관한 몇 가지 추측
The Paekche Conquerors
자료출처 : <업코리아> 2005. 07. 08.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바로보기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尔)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다. 고이 계열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첫째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유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 기록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 일 것이라는 추측뿐 아니라, 바로 이 비류-고이 계열이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를 떠나 신세계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설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고이 계열의 지도자가 바로 390년경에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호무다라고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백제 정복자들
일본열도 정복자들에 관한 몇 가지 추측
홍원탁 (서울대 교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정복자들이 어떻게 정복 계획을 세웠고, 누가 지도자이었고, 그 정복자 일행이 언제, 어떻게 바다를 건넜고, 어느 장소에 상륙을 했고,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하고, 어떻게 역사(役事)를 했는지, 등등 정복자들 “실제” 생애 이야기를 재구성 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암시적 기록들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정복자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몇몇 암시적 기록들이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는 (이쯔세 식으로) 실패한 형 비류와 (이하레 식으로) 성공한 동생 온조가 등장한다. 1 실제로 백제의 왕위는 상당 기간 동안 소위 4대 개루왕(蓋婁, 128-66)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尔)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375-84)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다. 166-346년 동안, 이 두 계열은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였다. 초고(肖古, 166-214)-구수(仇首, 214-34)-사반(沙伴, 234)-비류(比流, 304-44)가 초고 계열 왕들이고, 고이(古尔, 234-86)-책계(責稽, 286-98)-분서(汾西, 298-304)-계(契, 344-46)가 고이 계열 왕들이다. 고이 계열의 마지막 왕인 계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부 한국 역사학자들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에 속한다고 믿는다. 2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첫째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유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 기록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 일 것이라는 추측뿐 아니라, 바로 이 비류 계열이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를 떠나 신세계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설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백제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추종자들과 함께 한성을 떠나는 고이 계열의 지도자는 바로 390년경에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호무다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364년에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에 정찰대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3 탁순은 낙동강 상류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부산지역을 향해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은 (한성) 백제에서 (문경, 새재를 넘어)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최단 지름길이었다. 당시 백제 조정은 호무다가 이끄는 원정대를 보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원정대와 연합하여,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도 정복할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호무다 일행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369년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그 해 백제는 마한 전체를 정복하였다. 4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 369년에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호무다의 모친이라는 가공의 존재) 신공왕후이다. 야마도 군대는 목라근자(木羅斤資)라는 백제장(百濟將)의 인솔 하에 탁순국에 도착한다 그들은 신라를 공격하며, 탁순과 다른 6개국을 평정한다. 그들은 또다시 곧바로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남부의 야만족들을 평정하고, 그 땅을 백제에게 하사(以賜百濟)한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肖古及王子貴須)가 그들과 합류하며, 그 사품에 주변 네 개의 읍이 저절로 항복을 한다. 백제왕과 태자는 목라근자 일행과 의류촌(意流村)에서 만나 전공을 축하하고 정중하게 떠나 보낸다. 작별하기 전에 백제왕과 야마도 장수들은 피지(辟支)산에 올라 엄숙히 선서를 한다. 또, 일행과 고사산에 올라 바위 위에 앉아 백제왕은 “우리의 동맹관계는 영원히 변치 않고 유지될 것이며 항상 공물을 보내 줄 것이다”라고 맹서를 한다 근초고왕은 구저(久氐) 등을 시켜 야마도 군사를 환송하게 한다. 5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를 하면서 Ledyard(1975)는 일본서기 369년 조에 기록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백제의 군대가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한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일본열도로 떠나는 “야마도 장군들”이 영원한 우의를 맹서하고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우리가 여기서 떠나가는 “야마도 군사”를 백제의 왕자인 호무다가 이끄는 백제 전사들로 본다면, 일본서기 이야기 전체가 일관성을 갖게 된다.
백제의 진(眞)씨 왕비들과 야마도 왕족의 마히또(眞人) 씨족
근초고왕은 347년에 그의 처남인 진정(眞淨)을 조정 좌평(佐平)으로 임명했다. 6 백제 왕위의 승계는 초고 계열과 고이 계열 사이를 오가다가, 근초고왕(346-75)때에 와 비로서 초고 계열에 정착되고, 부자승계 관행이 굳어진다. 근초고는 진(眞) 씨족에서 왕비를 데려왔다. “진씨 왕비”의 관행은 근초고왕 이후에도 이어져,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진 씨족에서 왕비를 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이왕(234-86)은 240년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내외 병마사 일체를 맡겼으며, 247년에는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임명하였다. 7 고이왕은 262년에 진가(眞可)를 재무를 관장하는 내두(內頭)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진 씨족은 초고 계열만이 아니라, 근초고왕 훨씬 이전에 이미 고이 계열에게도 왕비를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찬성씨록의 서문은 마히또(眞人)가 야마도 왕족 중에서 으뜸이라고 기록한다. 백제의 왕비들의 친가이었던 진(眞) 씨족과 야마도 왕족의 진인(마히또) 씨족 사이에 어떠한 연고(緣故)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근초고왕 치세 이후 고이 계열은 한반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고이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인 호무다가 일본열도에서 새로운 왕국의 시조로 재등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끔 만든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아마데라스와 다카기 사이와 마찬가지로, 근초고왕과 진정은 사돈 간이다. 야마도 건국신화에서 니니기는 아마데라스의 친손자이고, 다카기의 외손자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열도에 지상왕국을 세워 니니기를 지배자로 앉히는데 아마데라스 보다 다카기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8 아마도 백제의 진씨 일족은 초고 계열뿐만이 아니라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배한 고이 계열과도 사돈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런 연유로 호무다의 건국 시도에 강한 모성적 동정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정으로 대표되는) 진 씨족은 (초고 계열뿐 아니라) 고이 계열에게도 (왕비를 공급하는) 처가이면서, 동시에 (니니기의 외조부가 다카기인 식으로)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의 외가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는 주몽의 조정에서 벌어진 왕위계승 경쟁에서 한쪽이 패배한 후에 탄생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후에, 백제의 지배자들은 주몽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고, 오히려 매년 그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시조의 모친인 소서노(召西奴)는 일본서기에 묘사된 호무다의 모친(신공황후)에 견줄만한 역할을 한다. 9 호무다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비류-온조의) 개척정신을 물려받았을 것이며, 야마도 왕족의 으뜸가는 씨족이 바로 진인(마히또)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은 호무다 자신이 (진정으로 대표되는 백제 진씨) 외가의 신세를 많이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은유: “이 땅은 우리 하늘나라의 강역을 넓히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의 은유를 본다: [어느 날, 한성 백제 조정에서 좌평 진정이 호무다와 그의 형 이쓰세 왕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바다를 잘 아는 노인들에게 들으니, 동쪽으로 가면 사방이 청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외진 땅은 아직 왕의 통치를 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모든 읍과 촌락에 제각기 우두머리들이 있어 서로들 싸움질만 하고 있다 한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은 틀림없이 우리 하늘나라의 강역을 넓히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영광이 온 누리에 퍼지게 해야 한다. 이곳은 확실히 지상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 그곳에 내려가서 도읍을 세우지 않겠느냐?” “왕자들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우리가 그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해가 바로 갑인[甲寅, 354]년이었다.” 10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다카기와 아마데라스는 800만 신을 [한강] 강변에 집합시켜놓고, ‘중부의 갈대밭 평원은 우리 아이가 다스리라고 내려준 땅이다’라고 말한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알아오도록 두 명의 천신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얼마 후 돌아와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다키기와 아마데라스는 니니기에게 지상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하였다.” 11
일본열도 원정 길에 오르다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호무다가 바다를 건너갈 때 “그는 해협에서 거북이 등을 타고 오는 사람을 만났다. [호무다가]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땅의 (토착)신이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호무다가] ‘그대는 바닷길을 잘 아는가?’라고 물으니, 그는‘아주 잘 안다’고 대답했다 이에 다시 [호무다는] ‘당신은 내 시종이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12
일본서기의 은유를 본다: “그 해 겨울 10월 5일에 [호무다가] 왕자들과 수군을 이끌고 [일본열도] 원정 길에 올랐다 그가 막 출발하려 할 때, 배를 타고 오는 어부를 만났다. [호무다가] ‘그대는 나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리하여 그 어부는 바다 길 잡이가 되었다.” 13
위에서 보았듯이 고사기,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을 읽어보면, 정복자들이 어떻게 정복 계획을 세웠고, 누가 지도자며, 그 정복자 일행이 언제, 어떻게 바다를 건넜고, 어느 장소에 상륙을 했고,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하고, 어떻게 역사(役事)를 했는지, 등등 정복자들 이야기를 재구성 해 볼 수 있는 온갖 암시적 기록들을 발견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4 (2005. 7. 9.)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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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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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百濟 始祖溫祚王...沸流溫祚…遂與…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沸流欲居於海濱…分其民歸 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沸流以彌鄒土濕水…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改號百濟 (S2: 15)
2.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肖古王 蓋婁王之子... 百濟本紀 第二 仇首王 或云貴須 肖古王之長子... 古尔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薨 長子沙伴嗣位而 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尔卽位... 責稽王 古尒王子..汾西王 責稽王長子.. 比流王仇首王第二子... 契王汾西王之長子也... 近肖古王比流王第二子也... 近仇首王近肖古王之子 枕流王近仇首王之元子... 辰斯王近仇首王之仲子 阿莘王枕流王之元子... 賟支王 阿莘之元子 (S2: 18, 29-32) 이기동 (1996: 132, 143) 참조. 초고-구수 계열이 근초고-근구수 대에 와서 왕위승계권을 확실하게 차지했기 때문에 근(近)이라는 칭호가 부쳐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3. 神功 攝政卌六年 .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 卓淳王末錦旱岐. . .曰 甲子年…百濟人…三人到於我土曰 百濟王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令朝其貴國 故求道路 (NI: 353)
고사기에 의하면, 아마데라스와 다카기가 “중부의 갈대밭 평원은 우리 아이에게 주어 다스리라고 한 땅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두 명의 천신을 파견하여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조사시켰으며, 얼마 후 그 두 명의 천신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한다.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 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 詔 此葦原中國者 我御子之所知國…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K: 112, 118, 120, 124)
4.삼국사기는 백제의 마한 정복을 AD 9년으로 기록하였다. Ledyard (1975)는, 삼국사기가 백제의 마한 정복을 오래된 일로 만들기 위해 6주갑(周甲)을 앞당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병도 (S2: 34n) 역시 동일한 해석을 하였다. 모두 일본서기 369년 조 기록을 읽어보고 그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된 것 같다.
5. 神功 攝政卌九年.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 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磐石上…而盟者… 無絶無窮…而送之 (NI: 355-57)
Aston (N1: 248-9) 참조.
三國史記 百濟本紀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王曰馬韓漸弱. .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二十七年. . .
馬韓遂滅 (S2: 16)
6.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近肖古王二年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S2: 32)
近仇首王 二年 以王舅眞高道爲 內臣佐平 委以政事 (S2: 32)
阿莘王 二年 拜眞武爲左將 委 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S2: 45)
7.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古尒 王 七年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十三年 魏幽州刺史毌 丘儉與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 弓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十四年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二十八年 拜眞可爲內頭佐平 (S2: 29-31)
8. 天照大神之子..娶高皇産靈尊之女..生…瓊瓊杵…故皇祖高皇産靈尊 特鍾憐愛 以崇養焉 遂欲立皇孫..以爲葦原中國之主 然彼地多有螢火光神 及蠅聲邪神...故高皇産靈尊 召集八十諸神 而問之曰 吾欲令撥平葦原中國之邪鬼 當遣誰者宜也 (NI: 135)
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者..高皇産靈尊 以眞床追衾覆於皇孫..使降之 皇孫乃離天磐座.. 天降於 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39-141)
神武天皇 卽位前紀 神日本磐余彦天皇..曰...昔我天神 高皇産靈尊…尊 擧此豐葦原瑞穗國 而授我天祖 彦火瓊瓊杵 (NI: 189)
9. 진정은 다카기의 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니니기가 하늘나라를 떠나야 한다면, 다카기는 자신의 그 외손주를 지상왕국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이 계열의 마지막 후손이 한반도를 떠나야 한다면, 진정은 호무다를 일본열도에 이룩할 새로운 왕국의 시조로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는 (외가로서의 모성적)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다.
10. 본문 중 인용문들은, 각진 괄호 [ ] 부분을 제외하고, Aston이 번역한 일본서기와 Philippi가 번역한 고사기에서 인용을 한 것이다.
神武 卽位前紀 ... 而遼邈之地 猶未霑於王澤 遂使邑有君村有長 各自分疆 用相凌躒..抑又聞於鹽土老翁曰 東有美地 靑山四周…必當足以恢弘大業...蓋六合之中心乎…何不就而都之乎 諸皇子對曰 理實灼然 我亦恒以爲念 宜早行之 是年也 太歲甲寅 (NI: 189-191) 倭之靑垣東山 (K: 108)
臣安萬侶言..懸鏡吐珠而百王相續…以萬神蕃息與 議議安河而平天下 論小濱而淸國土 是以 番仁岐命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所以稱賢后 望烟而撫黎元 (K: 42)
旣而天照大神..令降之於葦原中國 是時..彼地未平矣 不須也頗傾凶目杵之國歟 (NI: 147)
11.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 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爾天照大御神 高木神之命以 詔太子..爾其太子..將降裝束之間 子出生…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生子…次日子…邇邇藝… 科詔…邇邇藝…此豐葦原水穗國者 汝將知國言依賜 故隨命以可天降 (K: 112, 120, 124-126)
12. 幸行筑紫…故從其國上幸之時 乘龜甲爲釣乍打羽擧來人 遇于速吸門..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 148)
13. 神武天皇 卽位前紀..天皇親帥諸皇子舟師東征 至速吸之門時有一漁人 乘艇而至..又問之曰 汝能爲我導耶 對曰導之矣...爲海導者…行至筑紫國 (NI: 191)
The Paekche Conquerors
some speculations on
the conquerors of the japanese islands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re are suggestive records in the accounts of Kojiki and Nihongi from which to construct the true life story of the conquerors, telling how they masterminded the conquest, who was the leader, when they crossed the sea, where they landed, and in what manner they fought and wrought. There are also suggestive records in the Samguk-sagi from which to obtain some idea about the identity of the conquerors.
The foundation legend of the Paekche kingdom presents the elder brother Biryu who had failed (a la Itsuse) and the younger brother onjo who had succeeded (a la Ihare).1 The kingship in Paekche had indeed alternated between two royal clans, allegedly an elder brother Chogo clan and a younger brother Koi clan of the 4th King Kae-ru (128-66), until the time of Keun Chogo (346-75) and his son Keun Kusu (375-84) when the succession was at last consolidated into the Chogo line. During 166-346, the two royal clans had produced four kings each: Chogo (166-214)-Kusu (214-34)-Saban (234)-Biryu (304-44) from the Chogo line, and Koi (234-86)-Chaekkye (286-98)-Bunseo (298-304)-Kye (344-46) from the Koi line. The last of the Koi line (Kye) was succeeded by the Chogo line (Keun Chogo), and thereafter the Koi line did not return to the throne, and vanished out of the Paekche history. Some Korean historians believe that the (vanished) Koi clan belonged to the (failed) Biryu line.2
The founder of Koguryeo, Chumong, had one son, Yuri, by his first wife and two sons, Biryu and onjo, by his second wife. After Yuri came to the throne, Biryu and onjo left Koguryeo and came down to the Ma-han area to found a new kingdom. It is indeed tempting to speculate that the (vanished) Koi clan may have been the failed Biryu line, and they might have been persuaded in the late fourth century by Keun Chogo to leave the Korean peninsula and open a new dynasty in the new world. Homuda could have been the leader of Koi clan who had agreed to leave Han-seong with his followers and, with the full support of the Paekche court, succeeded in founding the Yamato kingdom in the Japanese islands by 390.
According to Nihongi, King Keun Chogo of Paekche dispatched scouts to a Kaya state (Tak-sun) in order to gather information about the passages to the Japanese islands in 364.3 Tak-sun seems to have been located in an area along the Nak-tong River which, flowing south to the modern Pusan area, constituted the shortest route from Paekche to the Japanese islands. At that time, the Paekche court was apparently planning not only the conquest of the Japanese islands by sending an expeditionary force led by Homuda but also the conquest of the Ma-han states in the sou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by a force led by King Keun Chogo himself in collaboration with the expeditionary force on its way to the Japanese islands. The movement of Homuda and his followers towards the Japanese islands seems to have occurred in 369, the year the Paekche conquered the entire Ma-han states.4
According to Nihongi, it was Jingū who dispatched an army to the Korean peninsula in 369 to invade Silla. It is said that the Yamato army arrived at Tak-sun led by a Paekche general named Mong-na Keun-ja. They then invaded and conquered Silla and pacified Tak-sun and six other places. From here they turned west, conquered the southern savages and then granted those conquered lands to Paekche. At this point they were joined by the Paekche King Keun Chogo and his son Keun Kusu, whereupon four more localities spontaneously surrendered. Thereupon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of Paekche met Mong-na Keun-ja and the rest at the village Ui-ryu, and at an interview offered their congratulations and sent them off with cordial courtesy. Before the farewell, the King of Paekche and the Yamato generals ascended Mount Pi-ji and made a solemn declaration. They also ascended Mount Ko-sa, where they sat together upon a rock, and the King of Paekche made a solemn declaration, saying:--“I make this solemn declaration of alliance to show that it will remain undecayed to distant ages [and] … we … will attend your Court with tribute.” The King also made Ku-zeo and the others escort the Yamato soldiers.5
By crosschecking the records of Samguk-sagi, Ledyard (1975) logically deduces that all those stories recorded in Nihongi represent the historical records of Paekche armies moving south. In Nihongi, the story ends with the Paekche King Keun Chogo and the “Yamato generals,” who are heading to the Japanese islands, pledging eternal friendship and bidding farewell. If we take the departing “Yamato soldiers” as a contingent of Paekche warriors led by a Paekche prince named Homuda, then the entire story becomes coherent.
The Jin family queens in Paekche and the Ma-hito clan of the yamato royal family
King Keun Chogo had appointed his brother-in-law, Jin-zeong, as the Chief Minister in 347.6 The succession of Paekche kings stopped oscillating between the Chogo-line and the Koi-line, and became strictly lineal from the reign of King Keun Chogo (346-75), who belonged to the Chogo-line. Keun Chogo took his queen from the Jin clan. The practice of “Jin clan queen” continued after his reign, and his successors kept taking their queens from the Jin clan.
According to Samguk-sagi, King Koi (234-86) appointed Jin Chung as his Commander General in 240, and entrusted him with military affairs. In 247, Jin Mul was appointed as Commander General. In 262, King Koi appointed Jin Ka to the position of Finance Minister.7 The Jin clan could indeed have been providing queens not only to the Cho-go line but also to the Koi line long before the reign of King Keun Chogo.
The preface of Shinsen Shoujiroku states that the Ma-hito (Jin-person) is the sovereign one among the imperial clans. one may well wonder whether there could be any relationship between the Jin clan of Paekche queens and the Jin-person (Ma-hito) clan of the Yamato imperial family.
After the reign of Keun Chogo, the Koi-line vanished from peninsular history. It is hence tempting to speculate that Homuda might have been the last leader of the Koi-line, to reappear in the Japanese islands as the founder of a new kingdom. King Keun Chogo and the Chief Minister Jin Jeong were in-laws, as were Amaterasu and Takagi in the Kojiki-Nihongi story. In the foundation myth, Ninigi was the grandchild of Amaterasu, and Takagi was the maternal grandfather of Ninigi.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Takagi was much more active than Amaterasu in making Ninigi the ruler of the earthly kingdom on the Japanese islands.8 Perhaps the Jin clan had been maintaining the in-law relationship not only with the Chogo line but also with the Koi-line that lost in the succession contests, and hence came to harbor a strong maternal compassion for Homuda’s endeavor. The Jin clan could have been the maternal root of both the Koi clan (a la Jin-family queen) and the founding family of the Yamato kingdom (a la Ninigi’s maternal grandfather, Takagi).
Paekche was born after the contest for succession had been lost at the Chu-mong’s court. And yet, after successfully founding a new kingdom, the Paekche rulers held no grudge against Chu-mong, but rather maintained annual rites at his shrine. According to Samguk-sagi, the mother of Paekche’s founder played the role comparable to that of Homuda’s mother depicted in Nihongi (Jingū).9 Homuda could have inherited the (Biryu-Onjo) pioneer spirit of opening up a new world, and the preservation of the clan name Jin–person (Ma-hito) by the sovereign Yamato royal family might suggest Homuda’s sense of indebtedness to his maternal roots.
metaphor of kojiki and nihongi: “this land will be suitable for the extension of our Heavenly Realm”
The metaphor of Nihongi reads: [On a day, at the Paekche Court in Han-seong, Minister Jin-zeong told Prince Homuda and his elder brother, Itsuse] -- “Now I have heard from the Ancient of the Sea, that in the East there is a fair land encircled on all sides by blue mountains. The remote region does not yet enjoy the blessings of Imperial rule. Every town has always been allowed to have its lord, and every village its chief, who, each one for himself, makes division of territory and practices mutual aggression and conflict. I think this land will undoubtedly be suitable for the extension of our Heavenly Realm, so that its glory should fill the universe. It is, doubtless, the center of the world. … Why should we not proceed thither, and make it the capital?” “The Imperial Princes answered, and said: --‘The truth of this is manifest. This thought is constantly present to our minds also. We may well proceed thither as soon as possible.’ This was the year Kinoye Tora [354] of the Great Year.” 10
The Metaphor of Kojiki reads: --“Then, by command of Takagi and Amaterasu, the eight-hundred myriad deities assembled in a divine assembly in the river-bed of [Han River], who were told that ‘ This Central Land of the Reed Plains is the land entrusted to our child as the land to be ruled by him.’ Two deities were dispatched to make inquiries into the path to the land, and they in due course returned and reported on their mission. Thereafter, Takagi and Amaterasu caused Ninigi to descend from the heaven.”11
Embarking on an Expedition to the Japanese Islands
The metaphor of Kojiki reads:--When Homuda was journeying across the sea, “he met in the straits a person riding on a tortoise’s back. [Homuda] asked: ‘Who are you?’ He answered: ‘I am an earthly deity.’ Again [Homuda] asked: ‘Do you know the sea-lanes?’ He answered: ‘I know them well.’ Again [Homuda] asked: ‘Will you serve as my attendant?’’’ 12
Nihongi reads:--“In that year, in winter, on the fifth day of the 10th month, [Homuda] in person led the Imperial Princes and a naval force on an expedition against the [Japanese islands]. When he [was to embark] there was there a fisherman who came riding in a boat. [Homuda] asked him: ‘Canst thou act as my guide?’ He was accordingly made pilot.”13
As shown above, one can find all sorts of suggestive records in the accounts of Kojiki, Nihongi and Samguk-sagi from which to reconstruct the story of the conquerors, telling how they masterminded the conquest, who was the leader, when they crossed the sea, where they landed, and in what manner they fought and wrought.
BIBLIOGRAPHY
[각주]
1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百濟 始祖溫祚王...沸流溫祚…遂與…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 山…沸流欲居於海濱…分其民歸 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 城…沸流以彌鄒土濕水…遂慙悔 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改號 百濟 (S2: 15)
2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肖古 王 蓋婁王之子... 百濟本紀 第 二 仇首王 或云貴須 肖古王之 長子... 古尔王 蓋婁王之第二子 也 仇首王...薨 長子沙伴嗣位而 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尔 卽位... 責稽王 古尒王子...汾西 王 責稽王長子... 比流王 仇首 王第二子... 契王 汾西王之長子 也...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 也... 近仇首王 近肖古王之子 枕流王 近仇首王之元子... 辰斯 王 近仇首王之仲子 阿莘王 枕 流王之元子... 賟支王 阿莘之元 子 (S2: 18, 29-32)
See Lee Ki-dong (1996: 132, 143).
3 神功 攝政卌六年 .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 卓淳王末錦旱岐. . .曰 甲子年…百濟人…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NI: 353)
According to Kojiki, Amaterasu and Takagi state that "this Central Land of the Reed Plains is the land entrusted to our child as the land to be ruled by him,” and then two deities were dispatched to make inquiries into the path to the land, and they in due course returned and reported on their mission.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 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 詔 此葦原中國者 我御子之所知國…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 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K: 112, 118, 120, 124)
4 Samguk-sagi records the Paekche’s conquest of Ma-han in 9 AD. According to Ledyard (1975), Samguk-sagi transferred the story backward by six cycles in order to lend antiquity to the date of Paekche’s conquest of Ma-han. Lee Byung-do (S2: 34n) also gives the same interpretation.
5 See Aston (N1: 248-9). All the statements in the text between quotation marks [except those words in square brackets] are the records of either Nihongi translated by Aston or Kojiki translated by Philippi.
神功 攝政卌九年 .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 .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 .四邑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 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磐石上…而盟者… 無絶無窮…而送之 (NI: 355-357)
三國史記 百濟本紀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王曰馬韓漸弱. .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二十七年. . .馬韓遂滅 (S2: 16)
6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近肖古王二年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S2: 32)
近仇首王 二年 以王舅眞高道爲 內臣佐平 委以政事 (S2: 32)
阿莘王 二年 拜眞武爲左將 委 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S2: 45)
7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古尒 王 七年 拜眞忠爲左將 委以內 外兵馬事 十三年 魏幽州刺史毌 丘儉與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 弓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 忠襲取樂浪邊民 十四年 拜眞忠 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二十八年 拜眞可爲內頭佐平 (S2: 29-31)
8 天照大神之子...娶高皇産靈尊之女...生…瓊瓊杵…故皇祖高皇産靈尊 特鍾憐愛 以崇養焉 遂欲立皇孫...以爲葦原中國之主 然彼地多有螢火光神 及蠅聲邪神...故高皇産靈尊 召集八十諸
神 而問之曰 吾欲令撥平葦原中國之邪鬼 當遣誰者宜也 (NI: 135)
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 者...高皇産靈尊 以眞床追衾覆 於皇孫...使降之 皇孫乃離天磐 座...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39-141)
神武天皇 卽位前紀 神日本磐余 彦天皇...曰...昔我天神 高皇産 靈尊 …尊 擧此豐葦原瑞穗國 而授我天祖彦火瓊瓊杵 (NI: 189)
9 Jin Jeong could have played the role of Takagi. If Ninigi were to leave the Heavenly Kingdom, Takagi had to make Ninigi the ruler of the Earthly Kingdom. Likewise, if the last heir to Koi-line had to leave the Korean peninsula, Jin Jeong had to make Homuda the founder of a new kingdom on the Japanese islands.
9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一云 始祖沸流王. . .北扶餘王解扶婁庶孫…朱蒙...南奔至卒本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及朱蒙 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立之爲 太子... 於是沸流謂弟溫祚曰. . . 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不如奉
母氏南遊卜地別立國都 與弟率黨類. . .至彌鄒忽以居之 (S2: 15)
10 神武 卽位前紀 ... 而遼邈之地 猶未霑於王澤 遂使邑有君村有長 各自分疆 用相凌躒...抑又聞於鹽土老翁曰 東有美地 靑山四周…必當足以恢弘大業...蓋六合之中心乎…何不就而都之乎 諸皇子對曰 理實灼然 我亦恒以爲念 宜早行之 是年也 太歲甲寅 (NI: 189-191) 倭之靑垣東山 (K: 108)
臣安萬侶言...懸鏡吐珠 而百王相續…以萬神蕃息與 議議安河而平天下 論小濱而淸國土 是以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所以稱賢后 望烟而撫黎元 (K: 42)
旣而天照大神...令降之於葦原中國 是時...彼地未平矣 不須也頗傾凶目杵之國歟 (NI: 147)
11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 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 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爾天照大御神 高木神之命以 詔太子...爾其太子...將降裝束之間 子出生…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生子…次日子…邇邇藝… 科詔…邇邇藝…此豐葦原水穗國者 汝將知國 言依賜 故隨命以可天降 (K: 112, 120, 124-126)
12 幸行筑紫…故從其國上幸之時 乘龜甲爲釣乍 打羽擧來人 遇于速吸門...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 148)
13 神武天皇 卽位前紀...天皇親帥諸皇子舟師東征 至速吸之門時有一漁人 乘艇而至...又問之曰 汝能爲我導耶 對曰導之矣...爲海導者…行至筑紫國 (NI: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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