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한민족 고대사

➁ 한족에 패망한 흉노, 서진해 터키를 세우다

자연정화 2018. 7. 31. 07:16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➁

한족에 패망한 흉노, 서진해 터키를 세우다

한국 고대사와 터키(上)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3. 11. 19.

 

 

1. 터키는 어떤 나라인가, 역사적 배경은?

 

터키는 우리 고대사와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국가다. 터키는 국토의 3%가 유럽인 발칸반도 남단에, 그리고 97%는 아시아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인구 8천만명, 면적 78만㎢ (우리나라의 약 8배), 8대 자원국, 6대 관광국, 그리고 6·25 참전국가로 튀르크족의 후예가 세운 국가다.

 

흉노의 후손으로 알려진 튀르크족은 최초의 스텝제국인 흉노(Hunnu Empire)가 한과의 전쟁 등으로 분열·멸망한 후 (AD 155) 「부민카간」이란 영걸이 나타나 552년 돌궐을 건국한다. 돌궐은 기마민족국가의 전형으로 기마유목문화의 완성기에 해당하며 최초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면적은 1040만㎢에 달했다. 이후 동·서돌궐로 분리되고 각각 당나라와 위구르에 패망한 이후 일부세력은 아랍권과 연맹하여 이슬람세력화하면서 당나라에 대항했고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탈라스강에서 격파하여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이슬람세력이 뿌리 내리게된다. 이후 동돌궐부족은 유목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다가 불교화하고 元의 지배로 이어진다.

 

서돌궐부족 일부는 서진을 계속했고, 960년경 셀주크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한다. 셀주크튀르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했고 「콘야」를 수도로 룸셀주크를 건국했다. 셀주크제국이 바로 십자군 전쟁의 주인공이며 후에 몽골제국에 복속하게된다.(1243년)

셀주크제국을 계승한 나라가 1299년 Osman 1세가 건국한 오스만 튀르크다.

 

오스만튀르크는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흑해, 헝가리, 이집트는 물론 지중해를 장악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발칸반도는 16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가 400년간 지배했는데 395년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 될 당시 이 지역을 경계로 하여 서부는 서로마의 카톨릭, 동부는 동로마의 정교 영향권에 있다가 오스만 튀르크 지배로 이슬람화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종교와 민족이 복잡하게 혼재된 문명충돌의 화약고라 불리우다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에서 1990년대까지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최대영토가 560만㎢(한국56배) 달했으나 에스파냐·베네치아·교황청 연합함대와 싸운 레판토해전(1571) 패전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오늘날 터키지역 이외의 지역을 대부분 상실하고, 1923 케말 아타튀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늘날 터키로 계승하게 되었다.

 

2. 터키와 한국

 

터키는 1950년 6·25 당시 1개 여단병력을 파병했으며 UN군 가운데 네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참전 결정당시 터키 신문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피를 흘리러 간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출정식 터키군 여단장은 “장병여러분, 한국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혈맹국‥”이라고 하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즉 UN군으로 참전하여 형제국가가 된 것이 아니며, 형제국가이므로 참전한다는 선후관계를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터키군은 1만 5천명 참전하여 3번째로 많은 741명이 전사했고 UN군 중 가장 용맹했던 군대로 알려져 있다. 터키군은 6·25의 10대전투 중 2개 전투를 해낸 강군이다. 즉,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을 저지하고 UN군의 후퇴를 지원한 「군우리 전투」, 그리고 지금 용인시 김량장역 인근에서 중공군이 구축한 진지를 백병전으로 돌격·분쇄하여 중공군 1900명을 섬멸한 「금양장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세계에 과시했다.

 

과거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기마민족국가는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로 이어지면서 하루에 200㎞를 달리는 놀라운 기동력과 강궁으로 무장한 공포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이후 거란․여진․몽골도 이를 유감없이 이어받아 중세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과거 레판토해전에서 기마민족세력인 오스만튀르크가 패배한 것은 아무래도 기마군단이 해전에는 취약하다는 전통과 관계있다 하겠다.

 

내가 터키 여행시에 들은 얘기다. 터키 국민들은 축구를 너무 사랑하며, 혼자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장 같은데서 모두 모여 응원을 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이들은 유럽리그에 참가하고 있고 터키게임은 대다수 국민이 열광적으로 응원한다고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예선전인 터키-브라질전이 한국에서 개최되고 한국인이 주심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유럽리그에서 편파적인(?) 대우로 가슴앓이를 해온 터키 국민은 이 소식을 접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전반전 터키가 브라질에 리드하던 경기가 후반 동점골이 나왔고 종료직전 브라질 선수의 헐리우드액션으로 한국주심이 터키선수를 퇴장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터키는 역전패하게 된다. 터키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며 한국에 대해 극도의 서운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이 터키는 사상 처음 4강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전 터키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터키간의 3·4위전이 시작되었다. 터키국가와 함께 초대형 터키국기가 한국관중석을 덮으면서 내려왔고 한국관중은 열화와 같이 터키를 응원했다. 바로 이 순간 모든 TV앞의 터키인들이 기립하여 울었다 한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아무튼 터키 사람들은 한국민과 한국문화에 대해 가지는 심정적 태도가 애틋하고 특별하며,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고 본다. 이제 그 배경이 되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과 같은 형제라는 의식이 있어서 애정이 남다르다./조선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