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고구려, 북연, 북위 간의 관계...?

자연정화 2020. 9. 17. 17:39

고구려, 북연, 북위 간의 관계...?

 

출처 : 어제의 꿈, 오늘의 노력, 내일의 실현 / 글쓴이 : 타메를란 /  2006. 12. 16.

- 이 지도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기록, 유물, 당시의 정황을 참고하여

고구려, 북연, 북위의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1.북한 덕흥리에 있는 유주 자사 진의 무덤에는 '(유주를) 지금은 연나라(북연)가 맡아 다스리고 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연도를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유주를 북연에 넘겨준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그 때가 어느 때인가 하는 것과, 어째서 유주를 연의 관할 하에 넘겨주었나 하는 것이다.

 

'어째서'는 기록의 불충분으로 알 수 없지만, '어느 때'인지는 정황을 따져 볼 때 대략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유주 자사 진이 408년 12월 25일(크리스마스...-.-;)에 죽었으므로,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요서, 북경 일대를 유주라는 중국식의 지방 행정 구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2.기존 유주의 지배자였던 유주 자사 진이 408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고구려계이던 북연 왕 고운이 409년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북연은 408년 이전에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고운의 뒤를 이어 북연의 왕이 된 풍발을 인정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대왕이 북연 방면 대신에 동부여를 공략한 것으로 보아 암묵적으로 인정한 듯 하다.(애당초 고운을 즉위시킨 것이 풍발이었고, 풍발이 직접 고운을 죽인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풍발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413년 이전까지는 고구려 세력권으로부터 이탈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을 따져 보면, 유주는 풍발이 즉위한 409년에서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413년 사이에 북연의 관할 하로 들어갔다는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추론들은 고구려가 북연에게 유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북연이 고구려로부터 유주를 위임받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물론 그가 전면적으로 고구려에게서 자립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전 왕 고운처럼 고구려의 충실한 제후국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3. 풍발은 거란족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유목민족인 거란을 농경민족으로 만듦으로써, 북연 북부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했겠지만,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거란족을 북연의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북연이 이전처럼 단순한 고구려의 제후국이라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시도이다. 풍발은 분명 고구려의 세력 아래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쳤을 것이다.

 

한편, 중원 대륙의 북부에서는 북위가, 남부에서는 동진이 후연 멸망 이후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풍발은 430년 사망했고, 동생 풍홍이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한편, 대륙 북부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위는 432년 5월, 평성(오늘날의 대동) 근교에서 북연을 위협하는 군사 훈련을 개시했다.

 

4. 436년, 북위는 고구려에 와서 장수왕에게 북연을 칠 것임을 알렸다.

 

북연이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로서, 고구려와 북연이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면 굳이 이런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이미 북연이 고구려의 제후국이 아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북연이 고구려의 제후국이었기에 알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위는 고구려에게 자신들이 북연을 치는 것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한 것이다.

 

같은 해, 북위는 요서의 주요한 성인 백랑성을 함락시키면서 북연을 침공했다.

 

5. 436년 4월, 장수왕은 북연왕 풍홍의 요청을 받고 장수 갈로, 맹광(혹은 한사람인 갈로맹광)을 그에게 보냈다. 5월, 북위는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고구려는 거절했다.

 

결국 북위는 북연의 도읍 용성을 점령했으나, 풍홍과 성 안의 재물, 군사는 갈로,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인도 하에 고구려에게로 넘어갔다.

 

고구려는 자칫 완전히 잃을 수도 있었던 요하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며, 용성 근처까지는 고구려의 세력권임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풍홍은 고구려에서 다소 문제를 일으키다가 438년 장수왕이 보낸 장수 손수, 고구에게 사망했다.

 

前燕

 

後燕
前秦滅前燕圖
西燕, 後燕, 南燕, 北燕

 

 

 

 

 

성헌식의 ‘대고구리’…동성대왕 ‘북위’ 격파

북위 격파한 ‘동성왕’…중국 하남성일대, ‘백제 강역’

북위, 선비족으로 ‘기마병’ 주력부대…‘송서’·‘남제서’ 등 ‘정사’ 명확한 기록

 

출처 : 스카이데일리 2016. 01. 25.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동성왕 10년(488년) 북위(魏)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치다가 패했다”는 기록만으로는 백제가 격파한 북위의 병력규모를 알 수가 없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자치통감> 영명 6년(488년)의 기록과 <북위서 고조기> 태화 12년(488)의 기록에도 병력규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다만 <남제서> 영명 8년(490)조에 백제 동성대왕이 무제에게 보냈다는 표문에 “영삭장군 저근 등 4명은 힘써 충성을 다해 나라의 환란을 없앴으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명장의 반열에 들 만하므로 공로를 논해 마땅히 높은 자리를 주어야한다”라고 하며 4인의 장군을 승진시켜 각각 관군장군 도한왕, 영삭장군 아착왕, 용양장군 매로왕, 건위장군 불사후라는 왕(제후)으로 봉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가 격파한 북위의 병력규모가 상당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같은 표문에 동성대왕이 3명의 장군 겸 태수를 사신으로 보내면서 언급한 관직이 있는데, 그 지명으로부터 당시 백제가 과연 어디까지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건위장군 광양(廣陽)태수 고달을 요양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를 광무장군 청하(淸河)태수로 임명했는데 이 지역들이 어디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일인학자가 그린 중국 남북조시대의 강자 북위와 한반도로 치우친 백제. [이미지=필자제공]

1) 광양(廣陽) : <한서지리지>에 “광양국 : 한나라 고제 때 연국, 소제 원봉 원년(B.C 80)에 광양군으로 되었다가, 선제 본시 원년(B.C7 3)에 국으로 변경됐다. 왕망 때 광유로 20,740호에 70,658명이다. 현은 계현(벌계), 방성현, 광양현, 음향현(음순) 등 4개다”라는 기록과, (원문) “广阳国,高帝燕国,昭帝元凤元年为广阳郡,宣帝本始元年更为国。莽曰广有。户二万七百四十,口七万六百五十八。县四:蓟,故燕国,召公所封。莽曰伐戎。方城,广阳,阴乡,莽曰阴顺。”

 

<수경주>에 광양수는 상곡군에서 발원한 골수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임을 알 수 있다는 문구가 있다. 계(蓟)현이 속하는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이고, 유주(幽州)에 속한 상곡군은 치우천왕이 황제헌원을 굴복시킨 탁록(涿鹿)이 있는 곳으로 운성염지 일대이다. (원문) 圣水(골수)出上谷(상곡),故燕地,秦始皇二十三年,置上谷郡(상곡군)。(중략) 广阳水(광양수)注之,水出小广阳西山,东径广阳县(광양현)故城北;又东,福禄水注焉。水出西山,东南径广阳县故城南,东入广阳水,乱流东南至阳乡县,右注圣水(골수)。

 

2) 대방(帶方)과 조선(朝鮮)은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였던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현임을 알 수 있다.

(대방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2755 참조)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3) 광릉(廣陵)군은 형주(荆州)에 속했다가 속오와 강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서주(徐州)에 속했던 36,773가구에 140,722명의 인구의 군이었다. 광릉현, 강도현, 고우현, 평안현 등 4현이 속한다. 서주는 회수 상류 일대의 하남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广陵国,高帝六年属荆州,十一年更属吴,景帝 年更名江都,武帝 元狩三年(B.C 120)更名广陵。莽曰江平。属徐州。户三万六千七百七十三,口十四万七百二十二。有铁官。县四:广陵,江都易王非、广陵厉王胥皆都此,并得鄣郡,而不得吴。莽曰安定。江都,有江水祠。渠水首受江,北至射阳入湖。高邮,平安。莽曰社乡。

 

4) 청하(淸河)군은 발해군과 함께 기주(冀州)에 속하는 군이다. 중국에서는 청하군을 하북성 형태(邢台)시 임서현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청광여도에 보이듯이 우공의 기주 땅은 분명 산서성 남부이기 때문이다. 발해군은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내륙호수인 대야택 부근의 산서성 동남부 일대이다.

 

▲ 동성대왕 때의 황당한 강역지도. [이미지=필자 제공]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격파한 동성대왕

 

북위는 488년의 대패를 설욕하기 위해 2년 후인 490년에 또 다시 백제로 쳐들어간다. <남제서>에는 쳐들어간 병력규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해에 북위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해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동성대왕)가 사(沙)법명·찬(贊)수류·해(解)례곤·목(木)천나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들을 습격하도록 해 크게 물리쳤다.”고 기록돼 있다.

 

대한민국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위나라 기병 수십만이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 백제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북위가 육로로 백제까지 오려면 반드시 고구리 땅을 거쳐야하는데, 그러려면 고구리와 전쟁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육로로는 오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북위의 기병 수십만명이 백제까지 오려면 해로 밖에는 없다. 수십만 기병이 배타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 100%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배만 해도 만 척이 넘어야 하고, 수십만 기병이 배에다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등 그야말로 실현 불가능한 어불성설의 낭설뿐이다.

 

게다가 북위와 백제는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한반도 충청·전라도 땅에 있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황해바다이다. 그런 경계 안으로 북위의 기병들이 쳐들어오자 백제가 기습으로 들이치니 도망쳤다고 하는데, 북위가 황해바다로 달아났단 말인가. 여하튼 현재 역사이론대로 백제를 한반도에 놓고서는 이런 기록들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명제 건무 2년(495)에 사신을 통해 표문을 보내면서 “지난 경오년(490)에 험윤(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격하여 이를 토벌하게 했는데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묽게 물들였다(僵尸丹野).”고 표현돼 있다.

 

▲ 얼마나 수치스러웠던지 <남제서> 기록이 삭제된 모습. 정황상 백제에 참패한 북위에 대한 기록으로 추정. [이미지=필자 제공]

두 차례나 백제에게 참패해 수십만의 기병을 잃은 북위는 이후 중국 남북조 시대의 최강자에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493년에 도읍을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기게 되는데, 高句麗의 산서성 역사를 지우기 위해 중국학자들은 평성을 산서성 북부 대동시로 비정했으나,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으로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가 백등산에서 포위를 풀기 위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치마끈을 푼 평성은 바로 낙양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맹진(孟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