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간도 되찾기 운동본부
우리는 왜 간도를 되찾아야 하나? 우리 땅 간도는 우리 민족, 건국의 이념이 잉태되어진 곳으로 간도를 잃어버리면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1. 우리 땅 간도는 민족, 건국의 발상지이다.
간도지역의 백두산·송화강·흑룡강 일대는 애초 우리 민족건국의 발상지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이 지역은 우리 민족 고조선·부여 이래로 재세이화(在世理化), 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을 실현시켰던 곳이다.
특히 영문국명인 KOREA의 발원지인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서간도지역에 있으며 발해 옛도읍지는 북간도지역에 있다. 특히, 이 지역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 민족이 3,352년을 지배하였지만, 한족(漢族)의 지배기간은 5백년 정도에 불과하다.
2. 고래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흘려 개간하였다.
- 만리장성 동쪽끝과 잇닿는 심요지역은 한족(漢族)의 진입을 엄금한 바 있다.
- 1909년 청일간 소위 간도협약은 무효이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간도는 분쟁상태에 있다.
(간도협약의 근거인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원천적 무효이고 1952년 중일간 평화조약에서 ‘중일 양국은 1941년 12월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1909년에 체결한 간도협약 역시 무효이다.)
3. 민족의 역사, 문화 및 동질성의 회복
간도회복은 남북통일과 재중동포는 물론 재외동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의미한다. 반세기 이상의 남북분단은 모든 분야에서 이질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간도지역에 거주하는 재중동포들도 지금까지는 우리의 언어와 전통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지만 3·4세 후손들은 중국에 동화되어 민족의식이 조금씩 이완되어 가고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 중의 하나가 간도영유권 주장이다.
간도 연표
기원전 2333. 단군 고조선 개국
1286 부여 건국
277 고구려건국(북한 강인숙설)
기원후 668 고구려 멸망
899 발해 건국
916 거란(요) 건국
926 발해 멸망
1115 여진(금) 건국
1225 몽골(원) 건국
1368 명 건국
1616 후금(청) 건국
1626 유조변책 압록강 부근 축조시작
유조변책 노변(老邊, 봉황성-흥경-위원보) 1643-1661에 축조
유조변책 신변(新邊, 위원보-길림불법특의 동량자산) 1670-1681에 축조
1627 조선과 후금과 강도회맹 맺음
1668 청 산해관 이북 한족 출입 금지
1689 청과 러시아간에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08-1718 레지, 부베, 자르트 등의 선교사 중국, 만주일대 측량 후 지도제작
1710 이만건외 8명이 월경 후 청인 5명 살해 사건 발생
1712 청 강희제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 정계비 일방적으로 세움
1858. 청과 러시아간에 애훈조약 체결, 러시아 연해주 공동관리권 획득
1860. 북경조약으로 청은 러시아에 연해주 할양
1861. 청-러 간 흥계호 계약 체결로 오소리강- 두만강구에 8개 계비(界碑)설치
1886. 청-러 간 훈춘계약으로 국경선 확정
1869. 대흉년이 발생하여 월경 거주자 증가
조선 정부 양전관 파견하여 토지대장, 야초 작성
1869. 러시아 유민에 대한 청의 주선으로 쇄환 문제 일어남
1872 군관 최종범,김태흥 봉금지역 답사, 간도지역은 “회상제” 자치기구 조직
1875 청 한족에게 이민증명서 발급
1878 압록강 이북지역 봉금지역 개방
1880 회령부사 홍남주의 “경신개척”으로 개간지 확장
1881. 조선의 간도지방 봉금해제
1882. 청의 조선인 쇄환 요청
1882. 김우식, 오원정 정계비, 분계강원 탐사
1885. 9.30. 을유감계담판
1887. 4.18. 정해감계담판
1890. 일본 제국의회는 조선을 일본의 주권선, 만주를 이익선으로 주장
1890. 간도한인에 대한 변발역복 강요
1891. 청 훈춘의 초간국을 국자가로 옮김
1894. 청 간도지역을 4대보 39사를 설치하고 향약사장과 촌장 설치
1897. 사상무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
1897. 조존우 간도 감계문제 조사후, “담변5조”를 조정에 보고
1898. 오삼갑 간도문제 상소
1898. 박일헌, 김응룡 국계답사보고 : 토문강-송화강-흑룡강 이동은 조선영토
1900. 이도재 평북관찰사 서간도지역을 각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 조직
두만강 6진에 진위대 설치
1901. 회령에 변계경무서 설치
1902. 6. 23. 이범윤 간도시찰사 파견
1903. 이범윤 간도관리사 승진
1904. 2 .23. 한일의정서 체결, 일본의 한국의 보호권 확보.
1904. 내부대신 이용태, 외부대신 이하영은 황우영 의견서를 첨부하여 청과 회감 후 국경
을 획정하고 강토의 회복과 유민의 보호를 청원
1904. 5. 1. 청의 파견감계를 요청함.
1904. 5. 30. 일본 원로회의 “대한방침에 관한 결정” 의결, 한국의 국방, 외교,
재정에 더 확실한 조약과 제도의 성취를 결정.
1904. 6. 15. 양국 변계관리들이 임의대로 “한청변게선후장정” 약정
1904. 8. 3. 주한청국 허대신 공사는 노일전쟁으로 인해 한중간의 국경 획정 회담의 지연
을 한국에 권고하였음, 이것은 주한일본공 사의 권고에 따른 것이며, 간도
문제가 한중간에 먼저 타결될 것을 우려하였음.
두산만(頭山滿), 국우중장(國友重章) 등의 대륙진출론자는 노일전쟁 시에
간도점거를 제창.
1904. 8. 22. 한일협약 조인, 고문정치 실시
1905. 9. 5. 노일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에서의 탁월한 이이가 한국의 보호화에 대한
러시아의 불간섭을 약속받음
1905. 11. 17. 을사보호조약 강제체결, 외교관 박탈.
1906, 2. “대러육군작전계획”에서 북부만주를 주작전지역으로, 함경도 방면에서 길림성
동북부 및 남부 연해주를 지작전지역으로 설정하여 길장철도의 한국북부와의
연장과 간도문제의 유리한 해결을 전제.
1906. 일본 육군 간도장악을 기본 방침으로 결정, 일본낭인 집단인 흑룡회원들은 일본
정계와 이등박문 조선 통감에게 간도진입촉구.
1906. 11. 16. 이등박문의 조작으로 참정대신 박제순 일본통감부에 간도문제의 외교교섭
요청함.
1907. 4. 18-4.29. 통감부는 간도 상항을 파악하기 위해 소전치책(篠田治策) 일행 4명을
간도에 밀파시킴.
1907. 8. 23. 간도 용정에 간도통감부파출소 설치. 일본은 간도는 조선 영토이며, 파출소
의 목적은 간도조선인 보호라고 천명, 일본과 청 간에 외교교섭 시작.
1908. 4. 7. 일본 정부는 주청공사에게 대청교섭의 정책전환을 훈령함.
“백두산 정계비를 기초하여 간도를 미확정지라고 주장할 것”
1909. 1. 두산만(頭山滿), 국우중장(國友重章) 등의 대륙진출론자는 간도문제의 착수가
일본의 대동아제국정책의 발동이라고 하면서 요충지인 간도를 점거해야 만주를
억압할 수 있다는 간도문제에 관한 견해를 일본 정부에 제출함
1909. 2. 6. 일본은 청에 “동삼성 6안을 제출”
1909. 9. 4. 일본은 동삼성 5안건을 승낙 받는 대신에 청에 간도를 넘겨주는 간도협약
체결.
1909.. 10. 26. 안중근의사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 사살.
1910. 8. 29. 한일병합
1912. 중화민국 성립
1918. 11. 노령 만주의 한인 40명이 무오독립선언서 작성
1919. 3. 13. 용정 3.13 독립축하시위
1920. 5. 28. 홍범도 대한군북로독군부 조직
1920. 6. 7.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
1920. 10. 21. 청산리 대첩
1920. 일제의 독립군 토벌작전과 병행하여 간도한인을 참살(3,664명 피살)
1922. 참의부 조직
1924. 정의부 조직
1925. 신민부 조직
1925. 6. 11 삼시(三矢)협정 체결로 재만주 조선인에 대한 제한이 가해짐
1929. 12. 조선혁명당 창당
1930. 한국독립당 발족
1930. 5. 30. 간도 대폭동
1931. 7. 28-29. 백두산 정계비 실종
1931. 9. 18. 일제의 만주침략
1931. 조선혁명군과 중국항일군이 연합하여 무장투쟁 전개
1931. 한인의 항일유격대 무장 결성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
1932. 3. 만주국 건국
1936-37. 동북항일연군 항일무장투쟁 전개
1949.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간도 점유
1952. 9. 3.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
1954. 12.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편
1962. 조중변계조약 체결로 천지 분할
2004. 고구려유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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