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우리는 지금/우리 땅(간도)

<2> 간도지역의 역사

자연정화 2008. 8. 16. 18:43

 

출처 : 간도 되찾기 운동본부


1. 이 지역에 최초로 환국(桓國)이 존재하였음이 나타난다(삼국유사 정덕본의 檀君古記에는 昔有桓國이라 하였다)

 

2.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 - 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 - 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3. 우리 민족은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이 나타난다. 단군고기의 “백산흑수(白山黑水)” 지역은 백두산과 흑룡강이다(환단고기)

 

4. B.C. 3천년에 숙신(肅愼), 이(夷)이라 불렸으며, 산해경에는 ‘불함산이 있는 나라가 숙신국이며 동북지역의 국가원수들이 모두 숙신 출신이라 하였다. 주(周) 시기에는 이적(夷狄), 험윤(??)이라 하였고, 춘추(春秋), 한 (漢) 시기에는 호(胡), 맥맥(貊?), 흉노(匈奴)라 하였으며, 이후의 위진(魏晋) 시대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하였다.

 

5. 동이(東夷)에는 아홉 겨레(九夷)가 있는데, 황하 이북과 몽골 사막 이동의 만주지역과 흑룡강 일대 및 연해주 지역에, 황, 백, 현, 적, 남, 양, 우, 방, 견이라는 종족이 살았다.

 

6. B.C.2333년에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을 건립하였으며 북만주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대능하, 요하지역인 발해 연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7. 고조선은 하-은-주시대에 하르빈-농안-장춘-봉천지역과 요하 및 압록강 부근의 진(眞)조선과 대능하와 요하 사이 지방에 존재했던 번(番)조선으로 발전하였다.

 

8. 고조선시기의 발전된 문화는 창힐(蒼?)의 문자(漢字) 발명과 더불어 홍범(洪範)의 창제 및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발전하였다.

 

9. 고조선 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대부터 발견되어진 대·소능하 유역의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 발견으로 입증되었으며, 중국의 황화문화 보다도 2천년 내지 천오백년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10. 중국이 부르는 청구국(靑邱國)은 황제시대 이전에 산해관 북방지역인 번조선지역에 존재한 국가였으며, 동이문화를 심화 발전시킨 국가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맟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동이민족의 서방 진출의 전초 기지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천년 가량 존속하였다.

 

11. 위만조선이 B.C. 108년에 망하니 漢은 진조선과 대능하 유역의 번조선 지역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을 설치하였다.

 

12. 고조선 말기에 송화강 유역의 하르빈 지역에서 부여가 건국되었으며, 여기에서 동부여가 파생되었으며, 고구려의 지배층인 주몽이 동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부여를 압록강 유역에 세우게 되니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13. 고구려의 역사는 왜곡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7백년 설을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김부식 자신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도 “고구려비기왈 불급 구백년(高句麗秘記曰不及九百年)”이라 하였으며, 당회요(唐會要)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며 이를 근거로 북한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277년으로 간주하여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94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14. 고구려는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를 이어 동북아의 패자(覇者) 역할을 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발해 역시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은 만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277년간 존속하였다.

 

15. 발해 멸망후 동이족의 후예인 거란과 여진이 199년, 109년을 통치하였다, 그 후 몽골이 134년을 지배하였다. 한족인 명이 277년간 지배한 후 동이족의 후예인 청이 1912년까지 269년간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간도지역 반만년의 역사중 한족이 지배한 역사는 십분지 일인 5백년도 되지 않는다.

 

16. 간도지역이 위치한 만주지역은 만리장성 이북 및 산해관 이동지역으로 명 이후로는 관외지역으로 불렸다. 만주(滿洲)의 명칭은 원래 만주(滿珠)라고 불렀다. 만주에 속한 지역을 주신(珠申)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후에 개칭되어 만주(滿珠)가 되고 한자의 모양이 와전되어 만주(滿洲)가 되었다. 만주족은 숙신족의 한 일파이며 근세에 와서 형성된 종족의 통칭이다. 여러 문헌을 고찰한 결과 만주는 대추장의 명칭이 종족의 총칭으로 와전되 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17. 현재의 만주지역은 청의 초기에는 길림지역을 오라(烏喇), 흑룡강일대를 영고탑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청 말기에 동삼성이라 부르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며, 1932년 만주국 성립 으로 이 지역은 더욱 세분화시켰다. 즉 안동성, 봉천성, 금주성, 통화성, 간도성, 길림성, 빈강성, 목단강성, 동안성, 삼강성, 북안성, 흑하성, 흥안 동·서·남·북성, 사평성, 신경특별시로 구분하였다. 이 중 간도성은 두만강 북쪽의 북간도 지역에 한정하였다.

 

18. 만주지역에 공한(空閑)지대가 설치된 것은 명의 1469년 경 요동과 압록강 사이에 몽고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해 변책을 세웠는데 청이 이 요동 변책의 기초위에 유조변책을 1643년부터 1661년 사이에 수축하였다. 이 변책은 봉황성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노변 또는 성경변장으로 불렀다. 1670년에서 1681년 사이에 청이 개원 위원보에서 길림에 이르는 유조변을 신축하였는데 이를 신변이라 불렀다. 이러한 봉금지역이 무주지로서 19세기 초까지 존재하였다.

 

19. 간도 명칭의 유래는 두만강 중간의 종성과 온성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부근의 주민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간도(間島)라 불렀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이곳을 모두 일컬어 간도라 부르게 되었는데 모두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개간하였다 하여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하였다.

 

20. 간도지역은 두만강 대안지역을 동간도라 부르고,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부른다. 특히 동간도는 노령산맥 이동을 동간도 동부 즉 세칭 북간도이며 노령산맥 이서를 동간도 서부로 구분한다. 간도협약시 한·중 양국 민이 잡거구역으로 규정한 곳은 동간도 동부지역이다.

 

21. 1909년 간도협약 이후 간도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22. 광복 이후 간도지역은 만주국 시기의 행정구분을 없애고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 간도“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동북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 간도지역을 동부지역으로 불러서는 안 되며 "고토회복지역” 또는 “북방지역”이라 불러야 타당하다.


간도협약의 무효성
 

1. 을사늑약은 강박 및 원천적으로 조작된 무효조약

 

  간도협약의 무효성은 국제법적 법리상 무효임이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첫째, 분쟁 당사국이 아닌 일본이 청과 맺은 간도협약의 법적 근거인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조작된 무효조약이기 때문에 간도협약 역시 무효이다. 일반적으로 을사늑약이 강박에 의한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되어 왔다. 즉 일본은 1905년 10월 27일에 ‘조선보호권 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하여 “도저히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을 희망이 없을 때에는 최후의 수단을 써서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보호권이 확립되었음을 통고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일본 각의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즉시 서울에 파견하였고 이등박문은 임권조 공사, 장곡천(長谷川) 사령관을 대동하여 11월 17일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을사늑약 조인토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지배가 법적으로 합법적이라는 근거를 삼아온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조약임이 밝혀졌다. 즉 규장각의 을사늑약의 원본에는 고종황제의 서명·날인·위임장이 없이 위조 체결된 것으로 밝혀졌다.

 

  1905년 당시의 국가체제는 군주제였기 때문에 조약의 체결권은 왕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외부대신은 전권 위임장을 휴대하여야 하나 고종의 위임장은 없었다. 또한 을사늑약은 고종의 비준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에 의한 조선지배 등을 규정한 을사늑약이 무효인 것이다. 따라서 통감부 설치의 근거인 조약자체가 무효인 이상 결국 통감부 설치도 불법이었다. 또한 이후 일본이 외국과 체결한 조약과 국내식민지법은 모두 무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을사늑약에 근거하여 체결된 간도협약도 국제법상 무효가 된다.

 

2.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에 의해 무효.

 

  이와 같이 국제법상 무효인 간도협약이 지금까지 존재하여 1909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아니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에 나타난 일련의 조치인 1943년의 카이로선언, 1945년의 포츠담선언에 위배된다. 카이로 선언문의 “만주 … 등 일본이 청으로부터 빼앗은 모든 지역을 반환하며  …… 일본은 폭력 및 강욕에 의하여 약취한 기타 모든 지역으로부터 구축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포츠담 선언의 제8항은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1945년 항복문서에 이 선언들을 수락하였기 때문에 이 두 선언의 구속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일본은 폭력과 강욕으로 약취한 지역에서 구축되어야 하며, 이것은 1895년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며 일본이 이 모든 지역을 탈취하기 위하여 제물로 바친 간도도 1909년 이전의 상태로 반환되어야 된다. 또한 1951년 체결한 中日평화조약 제4조에는 “중일 양국은 전쟁의 결과로서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1909년의 간도조약은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협약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효로 되어야 한다.

 

3. 법적 권원이 없는 제3국에 의한 영토처리

 

  간도협약은 법적 권원이 없는 제3국에 의한 영토처리이므로 무효인 것이다. 이것은 조약의 제3국에 대한 효력 문제로서 국제법상 조약은 당사국에만 효력이 있을 뿐 제3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즉 일반적 성격의 입법조약을 제외하고는 제3국에 의무를 과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약은 그 한도에서 무효이며 또한 국제관습상 비도덕적인 의무를 부과하려는 조약은 국제법상의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간도협약은 제3국의 권한을 중대하게 침해한 국제조약의 성격을 가지며 그 자체로써 주권침해라는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일본은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약체결능력이 없으며, 간도는 일·청간에 논의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간도협약에 의해 한국의 간도영유권이 무효화될 수 없다. 한국영토의 변경은 주권의 속성의 문제로서 오직 정당한 한국주권의 행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간도가 최근까지 중국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권변경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간도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 일이 없으므로 중국에 대하여 간도협약의 무효를 선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