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금(金), 청(淸) 황실이 믿고 있던 그들 조상의 원류 | ||||||||||||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강의(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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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편집자 주
The Qing rulers had identified themselves as the direct heirs of the Jin (1115-1234), calling their own dynasty by the name of Later Jin until 1636. In an imperial edict (dated September 20, 1777) commissioning the “Researches on Manchu Origins” (Man-zhou Yuan-liu Gao, completed six years later in 1783), emperor Qian-long presented his own disquisition on the history of Manchuria. According to his reading of Jin history, the ancestors of the Jin imperial clan had lived among the Mohe confederation, within the territory of the ancient Su-shens where were found the Long White Mountain and the Black Water. This was the very scene of the rise of the Manchus.1 The imperial lineage of the Qing is referred to as the Aisin Gioro. In Manchu, Aisin means “gold,” and this was sufficient proof for the emperor Qian-long that the Qing imperial lineage was a branch of the original Jin Ruzhens (see Crossley, 1999, p. 303). The Qing rulers traced the Manchu origins not onl y to the Sushen-Mohe-Ruzhen Tungus, but also to the Three Han, Silla and Paekche of the Ye-maek Tungus, as well as to the Parhae, the Macro-Tungus. As a common denominator, the reputation of all those Tungusic people for their excellent archery marksmanship (on horseback) and fighting capabilities was very much amplified. The Man-zhou Yuan-liu Gao, however, conspicuously excludes the Qidan and the Koguryeo because the Xianbei, on the one hand, had obviously nothing to do with the Manchu origins while the presence of Koguryeo (the Ye-maek Tungus), on the other hand, might inflict serious damage on their effort to nurture a hegemonic image of the Sushen-Mohe Tungus in Manchurian history. Neither the Western nor the Han Chinese specialists in the history of China ever mention the following fact recorded in Man-zhou Yuan-liu Gao: the History of Jin states that the founder of the Jin dynasty came from Koguryeo; but the Chronicle of Great Jin notes that he had originally come from Silla with the clan name of Wan-yan. Since the Silla royal surname of Kim (implying Golden) has been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over many dozens of generations, the Chronicle continues, the royal surname of Silla without doubt became its dynastic name.2 Both the Western and the Han Chinese specialists in the history of China also fail to mention the fact that the emperor Qian-long addressed a quarter of his edict to the people of the Korean peninsula. 1 欽定 滿洲源流考 卷首諭旨 乾隆四十二年八月十九日 2 The statement that the founder of the Jin dynasty came from Silla is repeated several times in the Man-zhou Yuan-liu Gao. It was the Geography Section of the History of Jin which says that the dynastic name Jin was based on the Ruzhen name of the river Ashi, a southern tributary of the Lower Song-hua. ⓒ2005 by wthong@wontackhong.pe.kr">Wontack Hong
East Asian History: A Korean Perspective Vol. 1. No. 2. 2005. 1. 1. 금(金), 청(淸) 황실은 그들 조상의 원류(源流)를 어디서 찾았는가? 청(淸)의 건륭제(1736-96)는 삼한(三韓)의 명칭에 대한 중국 기록들의 혼란상에 주목하였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한(韓)"은 분명히 지도자-통치자라는 의미의 칸(汗, Khan)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중국 역사가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건륭제는 “중국대륙 동북방의 만주족과 그들의 선조들은 중국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이런 식의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고 역설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1636년까지도 그들 자신의 왕조를 후금(後金)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금(1115-1234) 왕실의 직계 후예라 천명했다. 건륭제는 1777년 9월 20일 자로 유지(諭旨)를 내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토록 했다. (6년 후인 1783년에 완성.) 건륭제는 그 유지에서 만주족의 유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신이 읽은바 금나라 역사(金史)에 의하면, 금 왕실의 선조들은 옛 숙신(肅愼)지역 내에서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지역은 장백산과 흑룡강이 위치한 곳이고, 바로 만주족이 일어선 고토(古土)라는 것이다. 청나라 황족은 자신들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쓴다. 만주어로 아이신(愛新)은 "금(金)"을 뜻하는데, 건륭제 생각에는 바로 이 사실만 해도 청 황실을 여진족 금나라 황실의 직계후손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청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족의 원류를 숙신-말갈-여진 퉁구스족은 물론, 예맥 퉁구스족의 삼한(三韓), 신라, 백제뿐만이 아니라, 범 퉁구스의 발해까지 포함시켜 추적을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퉁구스족의 공통점으로서, 뛰어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와 싸움 잘하는 능력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선비-거란과 고구려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선비족들은 청조 통치자들이 생각하는 만주족의 원류와 명백히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발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 존재로 팽창했었던 고구려를 만주원류고에서 배제한 이유는 다르다. 예맥 퉁구스인 고구려의 부각은 숙신-말갈-여진 퉁구스가 만주역사를 주도했다는 그들의 이념에 상당한 손상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2 (2005. 1.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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