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 ||||||||||||||||||||||||||||||||||||||||||||||||||||||||||||
Hongshan Culture and the Proto-Altaic Speech Community of Xianbei and Tung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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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포함하는 범 만주『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요서의 신석기 홍산(紅山, 4000-3000 BC)문화를 공유하고,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알타이계통 언어권의 홍산문화는 한장(漢藏) 언어권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은 고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夏家店)하층(下層) 문화(2000-1500 BC)에서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지역의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 출현한 유목문화가 전파되면서, 하층문화가 본격적 청동기인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요하 유역에 이르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융합했고,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역에 청동기시대를 전개했다. 기원전 400년경, 연나라는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파했다. Janhunen은 연나라가 애당초 (漢族의) 중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Di Cosmo는 소위 연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한족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사기(史記)는, 서주의 무왕(武王)이 소공(召公)을 북연(北燕)에 봉해주었다며, 남연(南燕)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후연, 서연, 남연, 북연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홍산-하가점 문화를 이어 받은 연나라는 소공의 북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연나라의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편집자 주
정복왕조의 본고장 만주
흉노족의 본고장인 몽골 초원 몽골초원은, 돌궐(터키)족의 선조이며 아마도 몽골족의 선조일 가능성도 있는 흉노의 본고장이다.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 1 몽골고원은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하며,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초원은 군데군데 높은 산들에 의해 단절이 되기도 하면서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산산맥의 북쪽 끝자락과 타르바가타이 준령 사이의 중가르 관문은 카자크 초원지대로 통하는 중앙아시아의 최남단 통로이다. 알타이산과 타르바가타이 사이의 이르티쉬 계곡 역시 서쪽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었다. 이 초원의 통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의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동후(東胡)라 칭하는 선비족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는 몽골에 가까웠다. 송화강 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의 울창한 삼림을 보면서 시베리아 끝자락으로부터 한반도 북변 산악지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홍산문화-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3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 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을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회전판 위에서 완성된)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본토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즐문(櫛紋)-인각(印刻)문 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반지, 칼, 손잡이 등과 같이 소형 동제품을 사용하는 초기 청동기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4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 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사슴을 사냥하며 살았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48-9)은 옛 연나라 (燕, c. 1027?-222 BC)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곽대순(1995: 17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서주-동주 시대)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려 넣은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6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를 상층문화(1100-300 BC)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북방형-남방형 고인돌 기원전 1300년경 까지는 요동과 요서 지역의 청동검들이 칼날과 손잡이가 분명하게 분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7 그러나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8 한바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뒤늦게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9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체를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특이한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길림성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밀집된 형태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한반도이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시대 말기쯤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말기쯤 나타난 것 같으나, 이 두 형태의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상당히 중복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기원전 300년경에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10 돌을 사용하는 매장 방법, 토기의 형태, 청동제품 등의 유사성은 만주를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으로 연결시킨다. Di Cosmo(2002: 67)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으로부터 상층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실상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북쪽의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 사이의 연관성이 완전히 구명될 때까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흑룡강, 눈(嫩)강, 송화강, 요하 등을 연결하는 만주대륙의 물길(水路)이 이들 전 지역에 철 제조 확산 과정을 포함하는 천연의 교통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lson(1995: 252, 14)에 의하면,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소공(召公)의 북연(北燕, 1027 BC), 한족(漢族 馮氏)의 북연(409-36), 선비족(慕容 鮮卑)의 남연(南燕)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 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소공의 연나라 수도는 오늘날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연나라가 진시황제에게 멸망되기 90년 전인 기원전 311년,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鮮卑)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혔다 한다. 12 한 고조(r. 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기 각주에 나타난 남연이라는 존재,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사실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며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5 (2005. 1. 22.)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Lamb(1995: 150)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대략 기원전 1,100-800년 기간 중, 빙하기 이후 가장 온화했던 기후가 끝나는 동시에, 가뭄도 왔다. Huntington의 기후-맥박율동 이론(1907)에 따르면, 기후 조건의 변화가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활동을 야기하는데, 건조 주기가 심화되어 목초지가 말라버리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다니다가 다른 유목민과 싸우게 되고, 결국은 이웃한 정착 농경민족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Lattimore (1961: 331) 참조. Toynbee(1947: Vol. I-VI, 170)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건기와 습기가 반복되는데,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건조하게 되면, 유목민들은 주변의 문명사회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접근 방법에 반발하는 Di Cosmo(2002: 67)는 각 지역 특유의 발전과정을 무시하는, 기후변화라든지 한족(漢族)의 영향이라는, 백해무익한 기계적 설명을 삼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바이칼호 주변지역으로부터 퍼져나간 종족들의 강인한 유전적 특성은, 혹한의 긴 겨울과 혹서의 짧은 여름, 강풍이 불어대는 최악의 기후조건에서 목축과, 수렵, 그리고 원시적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해 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몽골고원 토종 말들 또한, 자연도태-적자생존 원칙의 결과, 짧고 굵은 다리와 조밀한 털로 덥힌 작으면서도 강인한 몸집에, 인내력과 생존능력이 뛰어난 유전적 유사성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영역은, 북으로는 샤랴무렌강을 넘어 몽골고원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요하의 하류, 그리고 남으로는 발해만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연산산맥을 넘어간다.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지는 주로 노합하(老哈河) 주변, 적봉(赤峯)시 교외의 영금(英金)강 계곡, 샤라무렌강 유역 등에 위치한다. 앙소문화 유적지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인 여자의 입상과 전신(全身)조각상, 제사의식을 행하던 공동신전(共同神殿)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 Nelson (1995: 14, 25) 참조. 4. Nelson(1995: 148-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는 바로 그 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하가점 상층문화로 이어진다. 5. Di Cosmo (2002: 32-43) 참조. 6. Di Cosmo (2002: 64) 참조. 7. Nelson (1995: 198-9) 참조. 8. Barnes (1993: 162) 과 Nelson (1993: 133) 참조. 9. Nelson (1995: 175-7) 참조. 한반도 최초의 무문 토기는 기원전 2000년경에 나타났다. Nelson (1993: 113-6) 과 Barnes (1993: 160-1) 참조. 하가점 상층 문화는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약 8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Di Cosmo (2002: 62) 참조. 10. Nelson (1995: 16, 147) 와 Barnes (1993: 166-7) 참조. 11.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周武王之滅紂 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史記 卷九十三 韓信盧?列傳 第三十三 …盧?親與高祖 … 漢五年 …?立盧?爲燕王…故燕王臧?子衍出亡在胡 … 高祖崩 盧?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爲東胡盧王 … 孝景中六年 盧?孫他之 以東胡王降… 爲東胡王來降也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 五十 …燕北有東胡山戎 … 臨胡? … 燕有 賢將秦開 爲質於胡…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 置 … 遼西遼東郡而拒胡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c. BC 403]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오늘날의 북경 서쪽 방산(房山)에서 연후(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몇 개의 청동제품이 발굴되었다. 연후라는 명칭이 새겨진 청동제품은 오늘날의 요녕성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Loewe and Shaughnessy(1999: 410)는 연나라의 영향력이 요녕성에 이르렀거나, 아니면 북경 부근의 청동제품들이 노획되어 요녕성 지역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349-70), 후연(後燕, 384-408), 서연(西燕, 385-94), 남연(南燕, 398-410), 북연(北燕, 409-36)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어째서 한족 풍씨는 북연이라는 명칭을 택했을까? 12. 무왕이 소공을 북연에 봉해 주었다는 기록 이후, 기원전 334년까지 북연에 대한 의미 있는 기록은 사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027-334 BC 기간을 북연 역사의 공백기로 간주할 수 있다. 13. Janhunen (1996: 224, 238) 참조.
Hongshan Culture and the manchuria: the Conquerors’ Homelands Wontack Hong the Mongolian steppe: home of the Xiong-nu The Mongolian steppe was the home of the Xiong-nu, the ancestors of the Turks and possibly also of the Mongols. Fagan (2004: 201) notes: “the grassland steppe acted like a pump, sucking in nomadic peoples during periods of higher rainfall, pushing them out to the margins and ont o neighboring lands when drought came. During the ninth century BC, the climate of the steppe suddenly became colder and drier. … The Mongolian steppe appears to have been the first region affected. … In the eighth century BC, the drought on the steppe sent nomads pouring into China. They were repulsed, setting in motion a domino effect of population movements that brought some horse-using nomads to the Danube Basin and the eastern frontier of the Celtic world.”1 The Mongolian plateau is the eastern half of the great Eurasian steppes that extend from the borders of Manchuria to the plains of Hungary in rolling plains of grass punctuated by high mountains. The Zungarian Gate between the northern edge of the Tien-shan and the Tarbagatai Range is the lowest pass in all Central Asia, and a gateway to the Kazakh Steppe. The Irtysh valley between the Tarbagatai and the Altai is another gateway to the west, and the Turko-Mongol horsemen from the banks of the Orkhon, a tributary of Lake Baikal, could ride all the way through Kazakstan and the Russian steppes to reach the Hungarian plains. The Mongolian steppes average 1500 meters in elevation, with hot summers reaching 38° C and severe winters reaching -42° C. The Turkic steppes west of Balkhash lie at near sea level. The Gobi is a dry steppe, dividing Inner and Outer Mongolia. The grazing areas in the north are the regions drained by the tributaries of Lake Baikal and the upper Amur River as well as the slopes of the Altai Mountains. The Altai area reaches 40° C with 18 hours of sunlight in summer. The Transbaikalia involves a transition between the Mongolian steppe and the Siberian forest. Inner Mongolia bordering the Ordos Plains (enclosed by the great loop of Yellow River), Damaqun Mountains, and western Manchuria had also supported large numbers of nomads.2 The Mongols and Turks were sheep-eaters, raising goats, camels, cattle and horses as well. Manchuria: Home of the Xianbei-Tungus Manchuria is separated from the Mongolian steppe by the Greater Xing’an Range in the north, and the Qilaotu and Yan Mountains to the south. Extending from the Shara-muren (Xar Moron) and Lao-ha basins to the West Liao River basin lay the Liao-xi steppe which is surrounded by the steep eastern slopes of Greater Xing’an Range and the Nulu’erhu Mountains. It was the home of Xianbei (Dong-hu) with a rather Mongolic culture. The Manchurian plain around the Song-hua River basin, flanked by the heavily forested areas in the east, extends from Siberia down to the mountainous Korean border area, and merges with the Liao River basin in the southwest. The so-called Eastern “Barbarians” (Dong-yi) of central and eastern Manchuria were pig-eaters, and this fact, notes Janhunen (1996: 221), “has given rise to the widespread, though linguistically untenable, ‘etymology’ explaining the ethnonym Tungus as a distortion of the Turkic word for ‘pig’ (tonguz).” Hong-shan culture and Xia-jia-dian Culture The Neolithic Hong-shan Culture (c. 4000-3000 BC) was centered in the Liao-xi area.3 It was the product of people ethnically different from the populations of the Yang-shao complex around the central Yellow and Wei River valleys and the Long-shan complex at the Lower Yellow River basin. From the Hong-shan complex, various ritual artifacts including clay human figurines, jade animal carvings, and painted cylinders were recovered, with evidence of both plow There is a clear continuity from the Hong-shan Culture towards the early Bronze Age Lower Xia-jia-dian Culture (c. 2000-1500 BC) that still used pottery decorated with cord marks and incised patterns, but produced small bronze objects such as rings, knives, and handles. 4 Barnes (1993: 109) notes that the Fuhe, Hong-shan and Xin-le shared a textured-pottery tradition similar to the incised Chulmun of the Korean peninsula than to the Neolithic tradition of mainland China. To supplement their millet production, people raised stock and hunted deer. Guo Da-shun (Nelson, 1995: 148-9) traces the culture of Old Yan (c. 1027?-222) to the Lower Xia-jia-dian and ultimately to the Hong-shan culture. Guo believes that one branch of Lower Xia-jia-dian became the Yan, and another the Shang. According to Guo (ibid.: 179), a branch of the Lower Xia-jia-dian culture moved south and originated the Shang culture, “while another remained in the same place for a long time, and became the antecedent of Yan.” Thus, Guo contends, “it might be close to the original historical events if we consider Lower Xia-jia-dian culture as Pre-Yan culture.” According to Guo (Nelson, 1995: 178), there is a transitional relationship between the Yan culture and the Lower Xia-jia-dian culture: “For instance, the animal mask designs on the painted pottery of Lower Xia-jia-dian, which appeared earlier and were well developed, are one of the antecedents of taotie [monster mask] designs in the Shang dynasty, and taotie designs continued in Yan until the end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about 300 BCE.” Guo contends that “the Yan culture of Early Zhou (1122-771 BC) has its own features.” Guo emphasizes the fact that the character for “Yan” already existed in the inscriptions on oracle bones excavated at the Lower Xia-jia-dian, suggesting that the proto-Yan had existed in the Shang period (c. 1766-1122 BC) and its cultural traditions “were still kept in the Yan State culture of Western Zhou.” Nomadism emerged in the early first millennium BC in the Altai and Tien-shan regions, beginning the so-called Altaic-Scythian period. The early nomadic cultures of Scytho-Siberian peoples are represented by the presence of weapons of bronze and iron, horse gear, and artwork in the animal style motifs in the funerary inventory, gold and jewelry acquiring greater relevance after the sixth century BC. The arrival of new pastoral nomadic cultures from the Mongolian steppes was in concomitance with the expansion of the Xiong-nu empire, a completely different ethno-cultural group, in the third century BC (see Di Cosmo, 2002, pp. 32-43). According to Barnes (1993: 157-8), the bronze artifact depicting a mounted horseman and running rabbit, which was excavated at the Upper Xiajia-dian site, is the first evidence for horse-riding in East Asia, though the mounted warfare was not documented until 484 BC (see also Di Cosmo, 2002, p. 64). Barnes suggests that the nomadism which had developed about this time was the cause for such a great change between Lower Xiajia-dian (2000-1500 BC) and Upper Xiajia-dian (1100-300 BC). According to Barnes (1993: 153),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located in the area of former Hong-shan culture (which had the merest hint of bronze), shared a distinctive bronze repertoire (such as animal motifs of Scythian affinities), with the nomads, suggesting cultural contacts across the Eurasian steppes. The Upper Xia-jia-dian tradition reached down into the Korean peninsula, giving rise to the Korean Bronze Age from about 700 BC. Barnes contends that the state of Yan expanded into the lower Manchurian basin, creating a cultural synthesis from the various elements of nomadic, agricultural and state-level societies, and Yan was instrumental in initiating the Korean Iron Age from 400 BC. Chulmun-Mumun pottery, Bronze Dagger, and Dolmen Until about 1300 BC, bronze daggers in the Liao-xi and Liao-dong regions had no clear separation of the hilt from the blade.5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appeared with the broad-bladed bronze dagger which, unlike the Han Chinese daggers, had blade cast separately from the hilt. The broad-bladed bronze dagger in the Korean peninsula derived from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and transformed into the slender one s, continuing into the time of the introduction of iron.6 Unlike the Lower Xiajia-dian,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appeared with undecorated and plain red pottery that might reflect, as Guo contends, the influence of the Mumun pottery users along the both banks of the Liao river.7 Another conspicuous artifact that connects the entire proto-Altaic speech community of Xianbei and Tungus is dolmen. Dolmens, which are numerous in the Liao-dong peninsula and known as far north as Jilin province, are considerably denser in the Korean peninsula than in Dong-bei. The northern-type dolmens seem to have emerged in the late Chulmun period, and the southern-type of dolmens in the late Bronze Age, though the distribution of the two types of dolmens overlaps considerably. The dolmen-building is thought to have been discontinued by 300 BC.8 The similarities in the stone burials, pottery types, and bronze objects link Manchuria to Mongolia and Trnasbaikalia. Di Cosmo (2002: 67) contends that: “a picture of the transition from the Lower to the Upper Xiajia-dian is destined to remain incomplete until the link between Upper Xiajia-dian and the Mongolian and Transbaikalioan regions to the north is fully explored.” The waterways of Manchuria connecting the Amur, Nen, Song-hua, and Liao Rivers could have served as natural avenues of communication, including the diffusion of iron metallurgy, between them. According to Nelson (1995: 252, 14), bronze is found in the Dong-bei at a relatively early stage, and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bronze, especially in Liao-xi, is derived from the Yang-shao sites of the Zhong-yuan. Nelson contends that “the notion that the Dong-bei is just a pale and barbarian reflection of central China is erroneous, even at the time of the flowering of Shang,” and that “the sites are different from the Central Plain to be sure, but they are not inferior in any way except for the lack of writing.” Shao-gong’s Northern Yan vs. the Southern Yan According to the Shi-ji, King Wu of the Western Zhou enfeoffed Shao-gong as the ruler of Northern Yan (c. 1027-25 BC). Shi-ji notes that there must have been Southern Yan that did not belong to the territory enfeoffed to Shao-gong. The Yan capital was located in southwest of the modern-day Beijing. According the Shi-ji, a Yan general attacked the Doing-hu (implying the Xianbei) and greatly expanded the Yan territory into the northeast in 311 BC, i.e., just 90 years prior to its downfall in 222 BC. 9 Han Gao-zu (r. 206-195 BC) appointed his long-time friend as the King of Yan, but the latter sought refuge in the Xiong-nu who made him the King of Dong-hu. 10 The fact that “Dong-hu” appears so frequently in the records on Yan may help solving the puzzle of “Southern Yan” noted in Shi-ji, of so many Xianbei founders calling their states “Yan,” and of Gong-sun Yuan (in 237), An Lu-shan (in 756) and Shi Si-ming (in 759), a sort of transgressors who did not want to identify themselves as Han Chinese, having styled themselves the King of Yan. According to Janhunen (1996: 224), “it is unlikely that the ancient kingdom of Yan would originally have contained any Sinitic elements” and “ethnic foundation of the kingdom of Yan … may have incorporated Pre-Proto-Mongolic elements in its ethnic composition.” The proto-Altaic speech community of Xianbei and Tungus, sharing the tradition of dolmens, comb-pattered pottery, and broad-bladed bronze daggers, may all be connected with the Hong-shan culture.11 If one says that the Han Chinese are the heirs of the Yang-shao culture, one indeed has to say that the Xianbei and Tungus are the heirs of the Hong-shan culture. The greater Manchurian ethnohistorical sphere of the Xianbei-Tungus, that encompasses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Japanese islands, shares intimate histories with strong cultural affinity Four out of the five conquest dynasties in China were of Xianbei-Tungus origin. [각주]
There are no female figurines, no human sculptures of the entire body, and nothing comparable to the Hong-shan ceremonial centers in the Yang-shao sites. See Nelson (1995: 14, 25) 4 Nelson (1995: 148-9) notes that the Lower Xia-jia-dian 夏家店下層 is a local development, an outgrowth of the Hong-shan culture. It is followed after a pause by Upper Xia-jia-dian with some continuity between them 5 See Nelson (1995: 198-9). 6 See Barnes (1993: 162) and Nelson (1993: 133). 7 See Nelson (1995: 175-7). The earliest Mumun pottery in the Korean peninsula is dated to about 2000 BC. See Nelson (1993: 113-6) and Barnes (1993: 160-1).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lasted approximately eight centuries, from the 11th to the 4th century BC (see Di Cosmo, 2002, p. 62). 9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周武王之滅紂 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其在成王時… 自陝以西 召公主之 自陝以東 周公主之 … 孝王二十七年 燕見秦 且滅六國… 燕王亡 徙居遼東…秦拔遼東…太史公曰… 燕迫蠻? 內措齊晉 崎嶇彊國之閒 最爲弱小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 五十 …燕北有東胡山戎 … 臨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閒 …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遠人民希 … 北?烏桓夫餘 東?穢?[貊]朝鮮…之利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c. BC 403]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Among the five “Yan” states (Former Yan, 349-70; Later Yan, 384-408; Western Yan, 385-94; Southern Yan, 398-410; and Northern Yan, 409-36) that appeared in the late fourth and early fifth century, onl y the “Northern Yan” was established by the Han Chinese. The rest were established by the Murong Xianbei. 10 After the record of 1027-25 BC, no meaningful record on (Northern) Yan appears in chronicles until 334 BC. 11 See Janhunen (1996: 224,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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