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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차대왕, 신대왕, 고국천왕의 현도성 시대
5-1. 차대왕의 현도성 시대ad146~ad164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遂成 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굳세며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이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수성遂成은 낙랑군에 있던 현이름 지명이다. 발해 고주였다가 요나라 수주遂州로 이름을 바꾼 단주 서쪽 200리, 즉 사평산四平山 동록의 성으로 고려되는데 고주몽 홀본성의 북성이다. 사평산이라는 이름은 요나라 한주韓州 시평군(始平軍)의 시평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장지葬地에 따라 시호를 붙이기도 하지만 수성왕의 이름은 121년부터 나타나므로 장지가 아닌 지방왕의 봉호封號로 보아야 한다.
(중국 만리장성 안으로 후퇴된 후한시대 낙랑군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군 북쪽 갈석산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수성은 고구려 땅이며 한문제가 세운 낙랑군 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태조대왕이 워낙이 장수했고, 또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자가 되려면 수성왕 때에는 현실적으로 한 세대를 반드시 내려가야만 한다. 수성왕 신대왕이 모두 태조대왕과 같은 항렬이면 신대왕 백고의 아들 이이모의 아들인 동천왕이 손자가 되며 기록과 같이 태조대왕의 증손자가 될 수 없다.
수성왕은 146년 초에 졸본부를 공격하여 태조대왕을 도망하게 하고 고구려왕에 올랐다. 태조대왕 양위 전에 신대왕 백고가 이미 구려왕이 되기 때문이다.
2년(147) 봄 2월에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 3월에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음에 임하여 탄식하며 말하였다.
“원통합니다. 내가 그 때 선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을 보고도 어떻게 묵묵히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스럽게도 선왕께서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은 이제 막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터인데, 옳지 않은 것으로써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도(道)가 없는 때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리고는 처형당하니 원근 사람들이 듣고 모두 분하고 애석해 하였다.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칭하고 은퇴하였으므로, 환나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비류나 양신陽神을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았다. 모두 왕의 오랜 친구들이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3년(148) 여름 4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메었다.
4년(149) 여름 4월 그믐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기록에 의하면 149년 6월 23일 9시 11분에 2분간 개기일식이 있었다. 0149 Jun 23 00:11 T 68 0.652 1.035 64.3N 175.3W 49 157 02m29s
만주에서는 부분 일식이었다.
4년 5월에 다섯 별(토성,목성,화성,금성,수성)이 동쪽에 모였다. 五星聚於東方
당시 중국 날자대로 보면 양력6월 24일부터 한달간이다.
149년 일식 기록은 중국 기록에도 있다. 그러나 오성취 기록은 중국 기록에 없다.
그러나 차대왕 4년, 149년 5월 31일 새벽 6시 15분경의 천문도는 아래와 같다.
차대왕 4년 149년 5월 31일 새벽 6시 15분경 천문도...태양이 구름 등에 가렸을 경우에 5성이 약하게 보일 수 있었을 것...
위의 천문도로 보면 이미 해가 4시반경에 뜨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오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지구가 혜성의 흔적을 통과하는 때에는 이변으로 태양빛이 약해져서 오성이 보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5월 27일경부터 6월초 사이에 우연히 하루 오성취가 새벽에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미 태조대왕 일식 기록에서 보았지만 고구려는 독자관측을 하였고 이를 기록하는 사관이 있었으며, 또한 121년 사건에서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 한달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윤달 삽입을 독자적으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4월이 고구려에서는 5월일 수 있고 고구려에서 단지 5월에 일식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김부식이 중국 기록과 비교하여서 4월 그믐 정묘로 수정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구려 5월 오성취 기록은 중국에 대조 기록이 없으므로 그냥 옮겨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 오성취 기록으로 인하여 <삼국사기> 고구려 연대는 천문학적 배경으로 그 정확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일자(日者)가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오성취의 해석을) 속여서 “이것은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고 고하였다. 왕은 기뻐하였다.
오성취는 한고조가 승리할 때 나타났던 별이다. 따라서 수성왕에 대한 혁명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일자는 속였던 것이다.
겨울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153)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그믐에 객성(客星)이 달을 범하였다.
이때 차대왕의 현도성이 건국되어 수도로 삼았다.
이는 수성왕의 천도교서 팔릉갈석에 기록되어있다.
[수성왕 천도 교서 팔릉갈석 / 遂成王 遷都敎書 八稜碣石]
시조지손 일월지자 부여고읍의 계승자,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수는,
현도를 다스리는 호영동백수로서
비류에 도읍했던 유리명제 축다(수성왕의 조부)를 계승하고,
안구태장세의 예악으로서 백제, 고구려왕은 민태국안하려던 천부의 시조 추모왕의 뜻을 대신한다.
백수(수성왕)는 수년 공을 들여 현도군에 국도를 세운다.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 明帝 逐多 护寧東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 繼祖 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 建國都 玄菟郡 紒継...
고부여故夫余는 처음 나오는 말인데 졸본부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부여고읍은 졸본성일 것이다. <후한서/부여전>에 기록된 고주몽이 도망한 부여이기도 하다. 동서남북수는 오방의 장인 욕살을 가리키고, 유리명왕은 중국으로부터 영동백수寧東百殊라는 작호를 받았던 것으로 고려된다.
유리왕은 고주몽의 홀본성에 찾아와서 칼을 내밀고 내쫓았으며, 그리하여 비류수에 정도하였다가 나중에 위나암으로 옮겼다. 그러나 왕망 때에 다시 홀본성으로 후퇴했을 것이며 대무신왕의 공격으로 개마국 두곡 별궁에 쫓겨갔다가 죽었다.
수성왕 비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성왕 10년에 현도군에 새로이 국도를 세운 것이다. 이는 국내성의 지진 때문이었던 것이다.
수성왕을 일러서 차대왕(次大王)이라고 했는데 지명과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부신시에 차하얼산이 있다. 앞에서 현도군성으로 비정한 곳으로부터 동남방이고 요수가 발원하여 나오는 말갈 서남산의 줄기다.
이 차하얼산의 서남쪽에 백왕도(白王都)라는 지명이 있다. 백왕은 맥왕貊王-->맥왕陌王-->백왕白王으로 한자가 변했을 것이다. 백왕도는 바로 이 수성왕성의 입구가 된다. 그런데 백고왕의 확장으로 백왕성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현도군 수성왕성의 규모는 한변이 대략 4km정도다. 중심축의 도로는 7km에 가깝다.
성 서남쪽의 지명이 백왕도(白王都)인데, 수성왕의 동생 백고왕이 확장한 것이 아니면 맥왕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남쪽 차하얼산은 차대왕(수성왕)과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훗날 조국을 팔았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그 아들 천헌성이 오골성에서 도망하여 쫓겨들어간 국내고도성(천헌성비문에 따름)도 이 성으로 고려되는데, 천헌성이 본래 소맥(小水貊)에서 태어났고, 당시 당나라가 연남생에게 현도군개국공이라고 책봉했기 때문이다.
즉 소수맥구려는 이 국내고도성이었던 수성왕국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발해 때에는 현도주라는 곳을 두었는데 일본사신이 발해의 안내로 당나라에 들어갈 때에 거쳤던 곳이다.
13년(158) 봄 2월에 살별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측정 기록 0158 Jul 13 08:22 T 87 0.623 1.021 61.1N 58.0E 51 90 01m33s
20년(165)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측정 기록 0165 Feb 28 07:25 T 81 0.516 1.047 19.3N 57.7E 59 179 03m54s
3월에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죽었다.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월에 연나(椽那)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므로 왕을 죽였다. 왕호를 차대왕이라고 하였다.
5 -2. 신대왕 ad165~ad179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은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라고도 썼다.>이다.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으로서 용모와 자태가 뛰어나고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이전에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화란이 있어 해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마침내 산골로 숨었다. 차대왕이 피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支留)가 여러 사람과 함께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였다. 그가 이르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였다. “선왕이 불행히 나라를 버리고 비록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진 이에게 돌아가니, 삼가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기를 청합니다.” 이리하여 그는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백고왕은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위지동이전>과 <북사>에 각각 보인다. 동천왕 위궁이 태조대왕의 증손이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77세의 신대왕 백고가 119세의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 아니라 막내 아들이 되어야 한다. 수성왕이 본래 이름이 아니라 지명, 즉 지방왕 왕호였던 것처럼, 백고왕도 지명에 의한 지방왕 왕호로 고려된다.
백고성은 단군 시대 천년 수도였던 <소밀랑 아사달>로 고려되고 부근에 고구려 신성이 있었으므로 신대왕이라는 시호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대전자향 소밀랑 아사달 백고성(당시 신성)
신대왕을 세운 신하 명림답부의 연나도 소밀랑 아사달의 명월성 부근으로 고려된다.
한편 후한시대 기록인 <채읍집蔡邑集>에서는 고구려왕의 핵자(적자가 아닌 깃털이라는 의미로 해석됨)인 백고가 수성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대왕, 즉 백고왕이 166년에 즉위하지만, 중국 기록은 146년 전쟁 때에 고구려왕이 백고왕으로 알려져 있다. 즉 <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은 수성왕에 이어서 신대왕 때에 또다시 최소 20년의 기록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 역시 중국 기록은 백고왕의 구려왕으로서 즉위 연도가 되고, 삼국사기 기록은 고구려왕의 즉위 기록이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신대왕이 구려왕으로 즉위했을 때 구려왕 도성은 위나암성이었을 것이지만, 수성왕이 10년에 현도성을 지어서 천도한 이후에는 신대왕이 서북 변경인 신성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고려된다. 그래서 이를 두고서 수성왕 대에 신대왕이 구려왕을 버리고 멀리 도망가 숨었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2년(166)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욕되게도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될 덕망이 없다. 저번에 형제의 우애로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아우는 그 끼쳐준 대업(大業)을 어그러지게 하였다. 과인은 해를 입을 것이 두렵고 편안하지 못하여서 무리를 떠나 멀리 숨었다가, 왕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만 극도로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기꺼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왕위에 나아가도록 권할 줄을 생각했겠는가? 보잘 것 없는 몸이 잘못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편안할 겨를이 없고 마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멀리 미치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을 베풀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사면의 명령을 듣고, 모두 기뻐 소리지르고 손뼉 치며 “신대왕의 덕이 크다.”고 하였다. 이전에 명림답부의 난이 있었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하여 숨어 있었는데, 새 왕의 사면령을 듣고 궁문에 나아와 아뢰었다.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을 수 없어서 산골로 숨었습니다. 지금 새 정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정죄하여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버리더라도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만약 죽이지 않고 멀리 쫓아보내신다면 이것은 죽은 자를 살려 뼈에 살이 돋게 하는 은혜며, 신의 소원이나 감히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곧 구산뢰(狗山瀨)·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였다.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패자로 삼아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이라 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양국군 추안의 구산뢰는 개원시開原市 구하拘河변으로 추정되어 지금의 서풍현(西豊縣)으로 고려된다. 성자산산성이 있다.
3년(167) 가을 9월에 왕은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 왔다.
신대왕의 수도는 옮겨갔던 차대왕과 달리 구려왕의 도성이었던 현도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졸본부 행차가 기록된다.
4년(168)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이 무렵 부여가 167년에 만리장성 안쪽의 중국 현도군을 쳤고 중국은 현도태수 공손역을 보내어 부여를 쳤다. 또 고구려가 중국의 요동을 치자 다시 현도태수 경림을 보내어 고구려를 쳤다. 이때 현도는 만리장성 안쪽이었는데 요동군은 경림의 고구려 침략 때에 만리장성 바깥에 다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탁이 공손탁을 요동태수로 임명하였다.
建武中,東夷諸國皆來獻見.二十五年,夫餘王遣使奉貢,光武厚荅報之,於是使命歲通.至安帝永初五年(111),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殺傷吏民,後復歸附.永寧元年(120) ,乃遣嗣子尉仇台詣闕貢獻,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順帝永和元年 (136),其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永康元年 (167),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斬首千餘級.至靈帝熹平三年,復奉章貢獻.夫餘本屬玄菟,獻帝時,其王求屬遼東云
建寧二年(169년),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云.
[통감] 169년 十一月,鮮卑寇并州。 高句驪王伯固寇遼東,玄菟太守耿臨討降之。
5년(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부산은 대릉하 상류인 건평진建平鎭으로 고려된다. 객좌진 북쪽 건평진에 부산富山이 있다. 한편 공손탁은 당시 현도군 태수가 아니라 그 보좌였다. 훗날 동탁이 공손탁을 요동태수로 임명한다.
8년(172)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2년(176) 봄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다.
14년(178) 겨울 10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정 기록 0178 Nov 27 03:27 A 74 0.278 0.963 5.8S 130.5E 74 137 04m18s
15년(179) 가을 9월에 국상 명림답부가 죽었는데 나이가 113세였다. 왕은 스스로 애통해 하며 7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마침내 질산에 예로써 장사지내고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신대왕이라고 하였다.
고구려고국은 졸본부이다. 개원시 북쪽 창도현의 천두진泉頭鎭에 있다.
5-3. 고국천왕의 현도성 시대ad179~ad198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196-220)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왕은 키가 아홉 척이고 자태와 겉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 일에 임하여는 남의 말을 듣고 결단하였으며 관대하고 엄함에 있어 중용을 지켰다.
남무男武는 고구려왕 이름이고, 이이모伊夷謨는 중국에 알려진 구려왕의 이름이다. 이이모는 이이모성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기는 비류왕이었고 연우는 졸본부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를 네 왕자가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그외 양국군 추안의 구산뢰도 있다.
중국 기록은 아래와 같다.
백고(신대왕)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 사람들이 이이모를 왕으로 세웠다. 197년에 공손강(요동왕 공손탁의 태자)이 출군하여 불태웠다. 발기가 소노가 3만여호와 함께 공손강에게 항복하고 비류수에 가서 살았다. 다시 항호(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했던 사람들)들이 반란하여 이이모는 다시 신국을 세웠는데 금일의 도성(환도성)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왔고 그 아들 박위거는 구려국에 남아 고추가라고 하였다.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196-) 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부신시 청하문 동북에 이마도伊瑪圖라는 곳이 바로 고국천왕의 아우로서 수도 현도성을 지키던 전방의 이이모성이다.
이이모성 서남쪽에는 설인귀가 세운 요동신성이 있고, 동남쪽에는 고구려 요동성이 있다. 발해 동평부 이주伊州 위치다.
2년(180) 봄 2월에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고국천왕 남무왕의 수도도 수성왕 이래의 현도성이다.
4년(182) 봄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뱀처럼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살별[星]이 태미를 지나갔다.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좌원의 좌坐는 제왕을 뜻하므로 바로 수도인 현도성 부근에서 싸운 것이다. 이때 이이모가 구려왕으로서 전투에 참여해서 중국에 구려왕으로 알려진다.
요동태수 공손탁 이전에는 양평령 공손소가 있었고, 184년에 현도군소사였던 공손탁이 동탁의 발탁으로 요동태수로 부임하였다.
즉 후한시대 184년 이전에는 요동군이 없고, 현도군에 속한 양평현이 있었다.
그러나 공손탁은 190년에 스스로 요동왕 평주목사로 즉위하였고, 요동군을 요동군과 중요군으로 나누었다. 요동성을 평주라고 했고, 또한 190년에는 바다건너 산동 청주에 영주까지 설치하였다. 이후 공손강이 204년에 즉위하였고 대방군을 두었다.
따라서 이 184년 전투에서 비로소 요동군의 영역이 확보된 것이며 고구려는 패전한 것이다.
[통감 190년] 中郎將徐榮薦同郡故冀州刺史公孫度於董卓,卓以為遼東太守。度到官,以法誅滅郡中名豪大姓百餘家,郡中震栗,乃東伐高句驪,西擊烏桓,語所親吏柳毅、陽儀等曰:「漢祚將絕,當與諸卿圖王耳。」於是分遼東為遼西、中遼郡,各置太守,越海收東萊諸縣,置營州刺史。自立為遼東侯、平州牧,立漢二祖廟,承製,郊祀天地,藉田,乘鸞路,設旄頭、羽騎。
즉, 190년에는 공손탁이 이미 고구려를 동벌했고, 산동 동래도 정벌하여 영주를 설치했고, 스스로 요동태수보다 한 급 위인 평주목사로 올랐다. 204년에 원술을 물리친 조조로부터 인정받는다. 따라서 184년 전쟁은 고구려에게 큰 패배였었다.
공손탁은 금주시 의현義縣 남쪽 전성자北磚城子에 양평성을 다시 만들어 평주平州라 칭하고, 그 북쪽 200리에는 훗날에 현도군을 복원하여 원도군元菟郡이라고 칭했다.
금나라 때 만들어진 거린지리도에 요동성과 양평성 위치가 나와 있다.
이때 고구려 국도인 현도성의 좌원은 요동국과 국경이 되어 버렸다.
184년 이후 좌원의 구려국에는 비류왕 발기의 아들 박위거가 구려에 남아서 항복한 고추가로서 다스리고,
비류수에 있던 발기는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복속하였다.
고국천왕의 고구려 수도는 멀리 졸본성으로 후퇴한 것이 된다.
한편 이이모는 184년에 이이모성에서 물러나 서북쪽의 신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현도성 서북에 요동국 현도군이 설치되기 때문이다.
신성은 현도군의 서북쪽에 있었고 이이모의 부왕으로 알려진 신대왕의 터전인 백고성이기도 하다.
8년(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이 심성을 지켰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정 기록 0186 Jul 04 06:53 Tm 78 0.030 1.079 25.1N 77.1E 88 254 06m46s
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於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죽이려고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와 더불어 반란을 꾀하였다.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하였다. 왕은 기내(畿內)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근래에 총애하는 바에 따라 관직을 주고 덕이 없어도 [벼슬]자리에 나아가니,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흔드니,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제 너희 4부는 각각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서 아래에 있는 자를 천거하여라.” 이에 따라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자, 왕은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였다.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서,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모셔,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고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업을 이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오.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궁색하게 시골에서 지낸 지 오래 되었오. 이제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왔으니, 이것은 나의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으려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를 바라오.” 을파소가 뜻은 비록 나라에 허락하였으나 받는 관직이 일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신의 둔하고 느린 것으로는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십시오.” 왕은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을파소가 신진으로서 구신(舊臣)들을 이간한다고 하며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고 말하였다.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지금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써 대하니 이전에 숨어 지내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안류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나는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리고는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사론(史論): 옛날의 밝은 임금이 어진 이를 대할 때, 등용하는 데에 구애됨이 없고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부열(傅說)에 대한 것이나, 촉(蜀)나라 선주(先主)의 공명(孔明)에 대한 것이나, 진(秦)나라 부견(符堅)의 왕맹(王猛)에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후에야 어진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분을 맡아 정교가 밝게 닦아져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뽑아 여러 사람의 입놀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관료의 윗자리에 두었으며, 또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주었으니 선왕의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16년(194)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쳐서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질양으로 사냥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신은 가난하고 궁해서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올해 흉년이 들어 품 팔 데가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왕은 말하기를 “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런 극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다.”고 하고는 옷과 음식을 주어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 늙어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 구휼하게 하였다. 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를 때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 대여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례(恒例)로 삼게 삼았다.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19년(197)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이 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고국천왕이라고 하였다.
이때 조조와 원소가 하북성에서 쟁패중일 무렵이다. 202년에 원소가 패해서 죽었다. 197년 망명해 들어온 항호들이 살던 곳은 고구려 서북변경이 신성 부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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