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4. 태조대왕 구려국 시대ad54~ad146

자연정화 2013. 7. 31. 16:20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4. 태조대왕 구려국 시대ad54~ad146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이름은 궁宮이다. 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하였다.
태조대왕의 연호는 융무融武라고 알려졌다.

 

태조대왕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사직을 주관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궁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남보다 뛰어났다.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서기 53년 모본왕이 죽고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 당시 부왕인 재사가 살아있었으나 왕위를 사양한 것으로 80년조에 나와있다.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태조대왕이나 국조대왕은 나라의 건국자를 가리킨다. 태조대왕 때에 고구려가 영토를 많이 넓혔다.

 

<후한서/동이전>에는 고구려 뿐아니라 구려국도 별개의 나라로서 소개되며 태조대왕은 바로 구려의 왕이었다.
 
<후한서/고구려전>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故其俗節於飲食,而好修宮室.東夷相傳以為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腳,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一]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二]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三]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絜淨自,暮夜輒男女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四]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營送終之具.金銀財幣盡於厚葬,積石為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

 

<후한서/ 구려전>에 의하면 구려의 위치는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이므로 소수가 소요수를 의미한다.
또한 현도군이 구려 서북에 설치되었으므로 현도군의 동남방이 된다. 이 구려는 환웅시대 사해문화의 후손인 구려-예맥족과 관련된다. 유리왕의 여달성이나 개마국 위치와도 관련된다.

 

<후한서/구려전>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戰死.莽令其將嚴尤擊之,誘
句驪侯騶入塞,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是歲宮死,子遂成立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議者皆以為可許.尚書陳忠曰:「宮前桀黠,光不能討,死而擊之,非義也.宜遣弔問,因責讓前罪,赦不加誅,取其後善.」安帝從之.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葅醢,以示百姓,幸會赦令,乞罪請降.鮮卑、濊貊連年寇鈔,驅略小民,動以千數,而裁送數十百人,非向化之心也.自今已後,不與縣官戰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一]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云.

 

<후한서/ 부여전>은 고주몽신화를 적고 있다. 고주몽이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졸본천의 졸본성을 차지한 것이다.
한편, 고주몽이 비류수의 최초 현도군 고구려 지방을 공략해서 다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세웠다. 홀본성이라고도 했다.

 

<후한서>의 현도군 고구려라는 이름은 본래 해모수의 차자였던 고구려후 고진에서 비롯된다.
고우루 단군 때에 고진을 발탁하여 bc120년에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는데, 이 고리군 위치는 서압록하(지금의 柳河)로서 창무시였다.
중국의 1차 현도군이 고두막한 동명왕의 공략으로 구려 서북으로 물러간 뒤에, 처음 현도군이 세워진 옥저현 자리는 환도성이 되었고, 현도군 고구려현 자리는 홀본성이었다. 홀본성은 바로 단군 왕검이 개국했던 곳이기도 하다.

<후한서>에서 구려왕추(鄒)가 처음으로 구려의 왕으로 소개되는데 <유리왕기>에는 연비(延飛)라고 하였다. 
왕망 때에 구려후 연비가 엄우에게 죽고 대신 유리왕의 아들 재사再思가 구려성을 지킨 것이 된다. 대무신왕, 해우루왕, 모본왕 때에도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그후 재사의 아들 태조가 구려성의 북쪽인 국내위나암성으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이 된 것이다.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여기서 요서 10성은 요서군이 있던 의주시 부근에서 산해관까지로 고려된다. 산해관과 수중현 육주하 사이에 구려하가 있었다. 이 구려하까지 구려가 진출했을 것이다.

 

4년(서기 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후한서>동옥저편에서 동옥저는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개마대산은 평양왕검성 서쪽이라고 하였다.
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 /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후한서가 기록된 당시에 평양왕검성은 철령시 서쪽 조병산시에 있었고, 동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이 될 수 없다.
대략 의무려산 동쪽 해안에 동옥저가 있었다고 고려된다.

동옥저의 창해는 의무려산 동쪽일 것이다. 중국의 창해군은 천진시 남쪽에 있으니 황해바다가 창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의무려산 서쪽 의주시 만불당의 북위시대 석굴에서 옥려지서 沃黎之西라는 지명 설명이 남아있다. 의무려산이 본래 옥려산이고 그 동쪽이 동옥저였을 것이다. 옥저에서 조기를 생산하여 중국 황실에 진상하였는데 조기가 발해만에서 알을 낳고 회귀한다.
뒤에 아리모려 묘지에서 보면 70년에 현재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의 비류소국을 친다. 따라서 한반도 동해안 진출은 아직 생각할 수 없다.

태조대왕의 살수는 수중현 강녀분姜女墳 동쪽의 급수하急水河였을 것이다.

 

7년(서기 59) 여름 4월에 왕은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10년(서기 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누리가 날아 곡식을 해쳤다.

 

16년(서기 68) 가을 8월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여기서 <아리모려 묘지>를 본다.

先祖 隨王錚 於鴨綠水之上源 戰 於[爲]野 
선조는 왕을 따라 압록수 상원의 들에서 싸워 깨트리고
而破 人臣服 王威大赫 衆來賀[軗]王
인신이 왕에게 복종하여 무리가 왕의 수레를 끌어 사면받았다.

압록수 상원 전투는 마자수압록강(현재 유하柳河)와 달리 서요하로 고려되고 그중 신개하(新開河)라는 북쪽 가지와 관련되어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갈사국 도두왕의 항복 기록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위치는 통료시 북쪽이 될 것이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현의 육가자향의 금은 유물이 갈사국 유물일 수도 있는데 이는 <해모수웅심산문화>에 그 유물이 있다.

 

赦 又庚午 盖馬國東 彈弩攻城 賊見大敗
경오년(서기 70년)에 개마국 동쪽에서 쇠활을 쏘아 공성하며 적을 만나 대패시켰다.
개마국은 현도군 서개마에서 쫓겨나서 다시 세운 개마국으로 고려되며 이는 적봉시 오한기진敖漢旗鎭의 살리파향薩力把鄕에 위치한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으로 고려된다. 오한기에는 환나부가 있었다. 환나우태의 이름이 설유
薛儒인데 오한기진 북쪽 살리파향에 성자산산성이 있다. 설유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 환나부 살리파향 성자산산성내 거북조각 거석

 

先祖 隨王 又戰 婆猪江上 沸流小國 再伐 荇人
선조는 왕을 따라 파저강상의 비류소국과 싸우고, 행인국을 다시 정벌하고 돌아왔다.
파저강은 압록강의 동북 가지로서 환인현을 지나는 강이다. 비류소국은 백제 온조왕의 형인 비류왕의 후손이 만든 소국으로 고려된다.
파저강의 서북 가지인 부이르강의 어원이다. 행인국은 요원시 남부에 있었다. 파저강에서 귀환하는 길에 행인국을 정벌한 것이다.

 
國 來之 遣 貫那沛者 達賈 伐 藻那

관나패자 달가를 보내어 조나를 쳤다.(72년) 
田 自給 智慮淵深 傳至 十世子孫 承繼
스스로 갈고닦아 지혜가 깊고 십세손에 전해졌다.

위에 소개한 아리모려 비문을 보면 태조대왕의 정벌 과정을 알 수가 있는데 68년 서요하 상류 갈사국을 정복하고, 다시 교려하의 개마국을 정벌하였다. 개마국은 현도군 서개마에서 후퇴한 유리왕의 아들 여율의 후손이 항복해서 이어간 구택도로 고려한다. 2차 개마국이다.

뒤이어서 70년에 압록강 상류의 파저강변 백제 비류소국을 깨트린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비류소국은 고구려 홀본성의 비류국과 구별하여 백제 비류왕자의 후손들을 비류소국이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초기에 패대강 사이에 흉년으로 백제인이 고구려로 망명해 가는데 바로 이 지역으로부터 망명해간 것이다.

 

 

20년(서기 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주나는 온조 백제의 초기 동쪽 경계였던 주양朱壤과 관련되며, 지금의 압록강 강계군江界郡이다. 고구려 고분 도시인 집안集安의 동편이다. 
강계에는 설렬한령薛列罕嶺이 남아있는데 고구려 환나부패자 설유薛儒의 흔적이거나 그의 후손이 남아서 강계를 다스린 흔적이다.  
 
따라서 조나
藻那는 주나 이전이며 현재의 집안集安으로 고려된다.

 

25년(서기 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기고 크게 사면하였다. 11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46년(서기 98)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는데, 책성의 서쪽 계산(~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책성은 발해 용원부의 다른 이름이었으므로, 훈춘시琿春市로 고려되고 계산은 백두산일 것이다.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 두 자나 되었고 털 색깔이 매우 밝았으나 꼬리가 없었다.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여기서 부여는 유리왕의 출신지인 서쪽 부여다. 맥인貊人은 선비족, 부여족, 구려족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소수맥에 옮겨와서 살던 유리왕의 후손인 구려인도 맥인이다.
태조왕의 모후나 유리왕의 모후인 예씨부인이 다 부여인인데, 서쪽 부여로서 노합하 부근의 구택이나 영고탑으로 고려된다.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은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땅이 벌거숭이가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은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兎)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 111년, 春 夫餘王 寇 樂浪。 高句驪王 宮與 濊貊 寇 玄菟。

 

111년 <삼국사기> 기록에 문제가 있다. 부여왕이 낙랑을 치고 고구려왕은 예맥을 거느리고 현도를 쳤다.
낙랑은 이때 만리장성 안쪽인 하북성 노룡 지역으로 후퇴해 있었을 것이고 부여가 그 동북쪽에서 공략한 것이 된다.
고구려는 동쪽에서 산해관에 후퇴해 있던 현도군을 공략한 것이다.
이때 현도군을 노룡-유성 지간이라고 하였는데, 유성은 산해관 동쪽 영주 유성이고 노룡은 하북성 노룡현이며 현도군은 대략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위치가 된다.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고구려 최초의 일식 기록이다. 고구려에 사관史官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천문기록을 남긴 것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날자를 기록하지 않고 일식이 일어난 월만 기록했던 것으로 보이고 김부식이 중국 기록과 합치하면 그 날자를 맞춘 것으로 본다.  
미국의 나사(NASA)의 계산에 의하면 일식의 실현은 아래와 같다.
0114 May 22 00:55 T 78 -0.266 1.075 4.7N 166.5E 75 253 07m05s.
114년 양력 5월22일 한국시간 9시55분에 개기일식이 동경166.5도에서 7분간 있었다.
0116 Mar 31 22:10 A 60 0.863 0.983 59.1N 177.7E 30 119 01m19s.  
116년 양력 3월 31일 한국시간 7시 10분에 금환일식이 동경 177.7도를 중심으로 1분간 있었다.

위 기록은 중국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당시 중국 기록은 아래와 같다.

元初元年(114년) 十月戊子朔,日有蝕之 在尾十度  
0114 Nov 15  06:04   A   83   0.572  0.915  16.1N  91.6E  55  394  11m53s
二年(115년)九月壬午晦,日有蝕之 在心四度
 0115 Nov 04  06:22   P   93   1.229  0.569  70.3N 122.0E   0 
三年(116년)三月二日辛亥,日有蝕之,在婁五度.史官不見,
遼東以聞

 0116 Mar 31  22:10   A   60   0.863  0.983  59.1N 177.7E  30  119  01m19s

四年(117년)二月乙巳朔,日有蝕之,在奎九度.史官不見,七郡以聞
 0117 Mar 21  02:24   A   70   0.129  0.945   6.7N 143.7E  83  205  06m58s
五年(118년)八月丙申朔,日有蝕之,在翼十八度.史官不見,張掖以聞
0118 Sep 03 09:25 T 85 0.528 1.037 38.8N 49.7E 58 145 03m02s

 

따라서 114년 봄 고구려 일식 기록이 중국에 없다. 또한 현재 천문학 지식으로는 당시의 일식이 마샬군도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에서 관찰할 수가 없다. 일단은 고구려 당시에 사관이 일식을 추산한 것으로 본다.
특이한 것은 116년 기록이 중국 대부분 지방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요동에서만 관측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국 기록에서 在婁五度라고 한 것은 루성婁星의 방위인 동쪽 지역에서 관측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단고기 오성취루 기록도 단군시대 관측지에서 볼 때에 동방 하늘에 오성이 모였다가 아니라, 단군시대 기록지에서 볼 때에 동방 땅에 오성취루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4년 일식은 고구려, 요동에서만 관측되고 증국에는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고구려 일식 기록의 의미는 수성왕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남겨진 것이 된다.
그전의 일식이나 그후의 일식 기록이 매우 적은데, 이때는 수성왕의 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후한서] 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
華麗
[통감] 夏,六月,高句驪與濊貊寇玄菟。

예맥
은 맹우하의 소밀랑아사달과 교려하의 개마국 부근의 부족일 것이다.

가을 7월에 누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자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 용단龍端,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隋書/地理志》北平郡卢龍縣下云;“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卢龍 즉, 하북성 노룡이 본래 요동군 신창新昌이었다.

 <후한서> 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곤궁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숙신肅愼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11월에 왕은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왕은 수성이 군무와 정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수성왕은 121년 11월에 태조대왕의 정사를 모두 도맡았다.
그러나 이는 수성왕의 반란이었고 반란은 성공하였다. 태조대왕의 고구려 절반을 갈라서 고구려 서부의 구려국을 장악한 것이다.   
이는 태조대왕의 출신 고향인 부여국과 수성왕 구려의 반목을 일으켰고, 
수성왕이 다음달 중국을 칠 때에 부여군대가 수성왕에 대적하여 가로막게 된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통감>에 의하면 선비군이 먼저 현도군을 치고 12월에 수성의 구려군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군을 쳤으나 부여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태조대왕이 쫓겨나고 수성왕이 즉위했다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마한은 태조대왕이 정벌한 조나, 주나, 비류소국인들이었을 것이다.

[통감 121년] 冬,十一月,鮮卑寇玄菟。十二月,高句驪王宮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與州郡並力討破之。是歲,宮死,子遂成立。
[통감 122년] 秋,七月,
高句驪王遂成
還漢生口,詣玄菟降,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여기서 고구려와 중국의 달력에서 한달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책력을 사용한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대왕의 고구려와 수성왕의 구려 둘로 갈라졌다.
121년에 태조대왕은 국내성에서 고구려 졸본성으로 물러났다가, 고구려 왕위마저도 146년에 수성왕에게 다시 내주었다.


이때, 146년에 수성왕은 고구려왕위에 오르면서 대신에 구려왕위는 동생인 신대왕 백고에게 내주었다.

중국은 국경에서 구려왕만 상대하게 되므로 구려왕의 교체를 고구려왕의 교체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146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살대방령殺帶方領 기사는 중국 <후한서>나 <위지동이전>에서 모두 고구려 백고왕 때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는 태조대왕 94년 때의 일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보면 121년에 수성왕이 나라를 갈라 구려국을 세웠고, 146년에 수성왕이 고구려왕까지 되면서 재통일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이때 관나우태 미유彌儒·, 환나우태 어지류, 비류나조의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당신은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성은 말하였다.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맏아들이 하는 것이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왕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엿보겠느냐?” 미유가 말하였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으니 당신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86년(138) 봄 3월에 수성은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면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데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하였다.
“화복禍福에는 문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아우의 몸으로 모든 벼슬아치의 으뜸이 되어, 지위가 이미 지극하며 공로도 역시 큽니다. 마땅히 충의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절로써 사양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위로는 왕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난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즐거움을 탐하여 근심거리를 잊고 있으니, 나는 은밀히 당신을 위하여 위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성은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의 심정으로 누가 부귀하고도 환락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얻는 자는 만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형편에 있는데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수성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는데 한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깨물어 잘랐다. 깨어서 그 길흉 여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호랑이는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것입니다. 그 뜻은 왕족으로서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음모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복장이 대답하였다.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재앙이 거꾸로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고복장은 태조대왕의 근신이었다. 그리고 태조대왕의 꿈은 수성왕이라는 표범이 태조대왕이라는 호랑이의 꼬리를 깨물었다는 것을 은유하였다.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 밑에서 사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대왕이 늙도록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주위에서 나를 위하여 꾀를 내어라.” 주위사람들은 모두 “삼가 명을 좇겠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아와 말하였다. “저번에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좇겠습니다.’고 말하니 간사하고 아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언을 하려고 하는데 높으신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수성은 말하기를 “그대가 직언을 할 수 있다면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의심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어질어서 서울과 지방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비록 공이 있으나 무리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어진 임금을 폐하려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 실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매어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왕자께서 의도와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선양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수성은 기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 곧음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늙었기 때문에 임금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뒤를 이을 것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언하니 저희들은 비밀이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 입을 막아야 합니다.” 수성은 그 말을 좇았다.

 

(146년)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 요동 공격 기사에 대한 중국 기록은 모두 신대왕 백고의 침략이었다.

<후한서/구려전>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132),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146년),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위지/동이전> 宮死 ,子伯固立 。 順桓之間 ,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 西安平,於道上 殺帶方令 , 略得 樂浪太守妻子.

 

따라서 146년 초에 수성왕이 국내성에서 스스로 차대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태조대왕의 졸본성을 친 것이다. 대신에 국내성의 구려왕 지위는 신대왕 백고에게 양위한 것이다.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터이니 청컨대 먼저 죽이십시오.” 하니, 왕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나는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대는 번거롭게 걱정하지 말라.” 고복장이 말하였다. “수성의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오늘 대왕의 선양을 받으면 내일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은 알고, 무고한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은 알지 못하십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12월에 왕은 수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어 모든 정사政事에 싫증이 났다. 하늘의 운수는 너의 몸에 있다. 더욱이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軍事를 총괄하여 사직을 오래 보존한 공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맡기는 이유는 사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니, 너는 왕위에 올라 영원히 신의를 얻어 경사를 누려라.”

그리고 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태조대왕이 졸본성을 버리고 피난하였다가 이때서야 수성왕에게 국새를 넘기고 은거하였다고 고려된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김부식은 중국 기록과 고구려 기록이 다른 것을 무조건 <후한서>가 틀린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부에 구려국이 따로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후한서><위지동이전>에 이어서 <북사>에서도 태조대왕이 죽으니 아들 백고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위지동이전>처럼 수성이 빠져 있다.

<북사>...號曰高句麗,因以高為氏.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王,即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子如栗立.[四]如栗死,子莫來立,乃并夫餘...至殤、安之間,莫來裔孫,數寇遼東...宮死,子伯固立, 伯固死,子伊夷摸立.伊夷摸自伯固時,已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降胡亦叛.伊夷摸更作新國.伊夷摸死,子位宮立.始位宮曾祖宮,生而目開能視,國人惡之.及長凶虐,國以殘破.位宮玄孫 乙弗利頻寇遼東...

수성왕이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통감>에 나오는데 그 시기가 121년이고, 백고가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데 146년 이전이다. 모두 구려왕이 된 것이다. 대신에 고구려왕은 각각 태조대왕과 수성왕이었다.
146년에 태조대왕이 고구려왕에서 쫓겨나고, 수성왕이 동쪽 고구려왕이 되었으며, 동시에 신대왕 백고가 구려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