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1. 추모왕 고주몽 홀본성 시대bc58~ad14

자연정화 2013. 7. 31. 05:28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1. 추모왕 고주몽 홀본성 시대bc58~ad14

 

추모왕鄒牟王 고주몽 高朱蒙은 북부여단군 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리군왕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 불리지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柳花夫人 사이에서 bc79년에 낳은 아들이라고도 한다.

 

동부여왕 해부루는 bc79년경에 옥저를 쳐서 옥저후 불리지 고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뺏아간 것이다.

불리지 고모수는 한무제의 침략으로 관직을 받아 한대산 환도성에서 불리지(弗離支), 또는 불리한지弗離汗支 라고 하였을 것이다.

 

뒷날 환도성을 불내성이라 부른 연원이 된다. 또한 한나라가 처음 세운 현도군의 위치가 낙랑군 옥저성인데 바로 이 환도산으로 고려된다.

 

 

또한 동부여왕 해부루는 bc77년 곤연鯤淵에서 제사 지내고 금와왕을 얻었다.

곤연은 천지天池의 다른 말로서 환인시대 천산이었던 사이한산에 제사지낸 것이다. 금와는 피부색이 밝고 눈이 개구리처럼 큰 서양인의 모습을 하였고, 이는 금와왕의 모후가 중앙아시아로부터 곤연鯤淵에 들어와 살던 서양 여자였다고 추정하게 한다.

 

유화부인은 부여에서 태후太后의 예로서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으므로 금와왕의 모후일 것이다.

유화부인은 본래 하백녀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하백이 서요하 서쪽 달라이 호수 부근에 있던 호족으로서, 하백이 중앙아시아에서 얻은 부인이 서양계 여인이어서 하백의 딸 유화부인도 역시 서양인 모습의 혼혈이었을 수 있으며, 키가 커서 유화부인이라고 했을 수 있다.

 

동부여에서 죽은 유화부인의 신묘가 통유현通楡縣의 전장포氈匠鋪에 있는 한묘漢墓로 추정된다. 각종 금은 장신구와 3명의 시비, 그리고 동물을 순장하였다.

유화부인은 먼저 고주몽을 낳았으니 이는 불리지의 아들이고, 다시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을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주몽도 활을  잘 쏘아서 주몽이 아니라 얼굴이 남달리 붉은 피부색이라서 주몽일 수 있다.

 

<한단고기>에서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bc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천 졸본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22살이다. 

 

bc 59년 고두막한 동명왕의 사후에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졸본부여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bc58년 고무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순시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고탑으로 졸본부여를 천도한 것이다. 고무서라는 이름 자체가 [사위 없음]이라는 뜻의 무서無壻였다. 즉 사위가 되어 단군 제위를 계승한 일이 없었다.

 

<후한서/부여전>에서 색리국에서 시비의 아들이 부여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고주몽이 금와왕의 동부여에서 도망쳐서 처음 도착한 곳이 졸본부여였다는 방증이다.  금와왕의 동부여가 색리국으로 기록된 것인데 이는 동부여의 당시 위치로서 실위 지역을 의미한다. 색리는 이두로서 우리말 쇠(鐵)를 의미하니, 즉 금왕金王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에는 이 졸본부여 기록이 없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추모왕은 오로지 비류수 홀본서성에서 왕이 되고, 홀본동강에서 승천한다. 즉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된 것은 홀본성으로 보아야 옳다.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성은 비류수에 있다.
<요사지리지>에서 고구려고국 졸본성인 압록부 신주에서 380리 서북에 비류왕고지 비류군沸流郡이 있었다. 이는 내몽고內蒙古 통료시通遼市 과얼심좌익후기현科爾沁左翼後旗縣 치소인 감기하甘旗下가 된다.  

 

그 아래에 비류수가 발원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양식목하로 고려된다. 거류하진이 있어서 예전에는 압록수와 마찬가지로 구려하라고 불렀던 것이 된다.

또한 비류수는 현도군 압록강의 동쪽이면서 환도성의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bc37년 고주몽은 비류수 홀본에서 산성을 지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bc36년 비류국 송양을 쳐서 다물도로 삼았다.

bc34년 궁성을 지었다.

bc32년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이때 궁성이 완공되고 신작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던지 뒤에 홀본성의 앞뒤로 전신추, 후신추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겨울 10월에 대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고주몽이 빼앗은 행인국은 요원시
遼源市 남부다. 석역진石驛鎭 채람산
彩嵐山에서 고구려 초기의 화려한 황금장식, 금동장식 유물이 나왔다. 요원시는 청동모와 비파형 청동검 등이 발굴되었던 곳이다.

 

석역진의 주요 유적지인 彩嵐山은 행인산의 행荇이 채菜로 변한 것이다. 행채荇菜가 흔한 말이다. 이 채람산 북쪽에 북행산北杏山이 있는데 그곳에는 성인둔城仁屯에 성인둔 고성이 남아있다.

따라서 채람산이 본래 남행산南杏山, 또는 남행인산南荇人山이었을 것이다.

행인국이 대백산 동남쪽이라 하였으므로 대백산은 지금의 오룡산(烏龍山, 620m)이 된다. 


bc28년 겨울 11월에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북옥저는 동천왕 때에 길림성 매하구시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고주몽이 밀어낸 본래 북옥저 위치는 무순시 청원현으로 고려된다. 청원현 안에 남산성이 있는데 이는 송화강 수계다. 청원현은 마리홍산에서 혼하도 발원한다. 마리홍산의 마리는 고주몽의 신하 이름에도 있다.

 

bc19년 여름 4월에 유리왕(類利)이 부여로부터 쳐들어와서 고주몽은 홀본성을 빼앗기고 동쪽 졸본성으로 후퇴하여 이후로 황룡국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리왕은 고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영고탑으로 옮겨간 졸본부여왕인 고모수로 비롯되는 구려계 후손으로 고려된다.

 

한편 홀본성에서 상장군 연타발延佗潑의 딸 소서노와 고주몽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얻었다. 

bc30년경에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요녕성 해성시로 옮겨가서 어하라국을 세웠다. 이후 온조가 다시 분가하여 bc18년 온조가 대동강에 옮겨가서 백제를 건국하였다.

 

비류의 후손은 광무제의 침입으로 파저강의 환인현으로 옮겨갔고 다시 고구려 태조대왕의 정벌로 대동강으로 북쪽 미추홀로 옮겨갔다.

졸본성에 옮겨온 고주몽의 도읍은 후에 그의 아들 대무신왕이 이어받았다.

졸본성 시대의 고구려 유물은 서풍현西豊縣 낙선향樂善鄕 서분구西岔溝에서 발굴된 철검 70여개의 고분군이며 대부분 고구려 초기 고분이다.

 

처음 낙선향 서분구 고분군이 발견되었을 때 중국학계는 흉노 고분이라고 발표했다. 흉노의 자랑인 금속예술 스키타이 청동 장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신라까지도 스키타이 문화가 전해지는 중간 지점 고구려 수도였다. 스키타이 양식 문화는 그리스가 아니라 내몽고 서요하西遼河 상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묘제는 토갱수혈묘였다.

 

                                     

철령시 서풍현 낙선향의 고구려 초기 고분에서 나오는 70개의 철검 일부


고구려 초기 스키타이 양식 동패식

 

<참고>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 눌현訥見은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전해왔다. [대변경大邊經]에서 대부여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京을 지금의 개원開原이라고 하며 “평양”이라고도 부른다고도 하였다. [번한세가 하]에서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를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에 나타난 고주몽기는 아래와 같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부여왕 해부루는 동염왕 고두막한을 피하여 북방을 유목하다가 금와와 아란불을 만나 흡수당하고 금와의 세력이 동진한 것이다. 태백산은 흥안령산맥 환인산 천지다. 부여왕 해부루를 이은 금와왕이나 아란불은 쇠의 색인 검은 피부를 가진 서남아시아 계 (스키타이족 유형) 민족일 것이다. 

주몽은 붉은 피부를 가진 북방족이다. 박혁거세도 부여계인데 눈강으로부터 동해로 피하여 신라에 이른 것이다. 곤연은 환인의 천지일 것이니 흥안령 산맥에 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금와왕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새로운 정복족 백인에 가까운 피부의 금와족은 금와족의 후손으로 왕을 이을 것인데 부여족의 후손인 붉은 피부의 고주몽이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족의 후손인 고주몽은 부여족의 도움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백이 별주부와 같은 관직을 가졌을 수 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비류수 홀승골 성이 광개토왕 비문의 비류곡 홀본서성이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말갈의 본토가 지금의 요하 서쪽 유하 柳河변인 것이다.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몽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왕은 그 말을 [듣고]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비류수 다물도는 통료시 과이심좌익후기 치소인 감기하다.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졸본부로 진입하여 졸본성을 세운 것이다.

 

6년(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행인국은 요원시 남부 석역진 채람산이다.

 

10년(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북옥저는 무순시撫順市 청원현淸原縣으로 고려된다.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유화부인의 신묘가 통유현通楡縣의 전장포氈匠鋪에 있는 한묘漢墓로 추정된다.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유리왕의 침입으로 홀본성을 빼앗기고, 고주몽은 동쪽으로 물러나 졸본성만 가지게 되었는데 황룡국이라고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