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9. 부여시대 구물 장당경문화 bc425~bc238

자연정화 2013. 7. 31. 17:08

부여시대

구물 장당경문화 bc425~bc238
44세 구물,45세 여루, 46세보을,47세고열가단군

 

 

 

 

bc426년 43세 단군 물리勿理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낙랑樂浪 도성을 포위하니 겨울에 단군 물리는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여 죽었다.

 

bc425년 백민성의 욕살 상장 구물이 장당경에서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압록 18성의 원조로서 새 단군에 즉위하고 대부여를 세웠다.

 

백민성은 창도현昌圖縣 북쪽 팔면성八面城이다. 요나라 때 3차 한주韓州를 두었는데, 금나라 사람 왕적은 여기에 가서 단금상檀金像에 향을 올렸다. 단군 구물의 사달이 있었던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藏-唐)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따라서 눌현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다.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있었다. 뒤에 발해 서경압록부가 있었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이다.

 

구물丘勿 단군은 해성에 이궁離宮을 지어 역시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는 3세 단군가륵이 세웠던 평양과 가까운 곳으로서 단목국 수도가 있던 법고시에 세원진 평양으로 고려 된다.

46세 단군 보을은 장당경 도성에 불이 나서 해성의 이궁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단군왕검 고조선문화 참조)

 

사면성 서쪽 보력진寶力鎭 장발향長發鄕에서 청동기시대, 전국시대 고묘 등의 유적지가 발굴된다.

장발향에서 나온 3자루의 청동검은 여러 형식이다. 하나는 비파형 청동검에서 보는 “T”자형 청동손잡이를 달았지만 검날이 비파형이 아닌 북방식 세형동검이다. 이는 중군, 즉 서요하西遼河 상류 식이다. 또 하나는 공병식 청동검으로서 가운데에 나무 자루를 박아 넣는 원형 구멍이 있다. 이것도 중군 형식으로서 긴 창이 된다. 또하나는 검날이 육릉형이며 타격석을 끼우는 것이었다.

 

 

청동화살도 삼릉식다. 삼릉식 청동화살은 임호林胡의 근거였던 내몽고 양성현凉城縣, 포두시包頭市 등에서도 나왔다. 그외 철제 기구가 많이 발굴된다.

 

이 장발향 청동검과 비교되는 것이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鄭家窪子의 세 곳에서 발굴된 청동검인데, 청동제 가중기는 비슷하나 거기서는 세 자루의 검날이 모두 비파형이다.

 

팔면성의 어원은 그곳 성터에서 글을 판독할 수 없는 팔면능형八面稜形의 갈석碣石(=石經幢이라고도 한다)의 발굴에 의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 동천왕 양위교서 갈석, 중천왕 즉위교서 갈석 등과 같은 팔면능형 갈석은 중요한 고대 유물로 추정된다.

 

팔면성은 3차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3차 한주가 이수현으로 옮겨간 뒤에는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과 유하현柳河縣의 기물器物이 팔면성에서 발굴되었었다.

단,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遼河 서쪽 창무시彰武市 1차 한주에서부터 옮겨온 것이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서 1190년에 이 팔면성에 단금상檀金像이 있어서 제사(妙香供?檀金像)를 드렸다.

단금상은 단검상檀檢像의 기록으로 고려된다. 팔면성 아래 구가둔丘家屯을 보면 단군 구물丘勿이 본래 백민성 출신이라서 장당경에 도읍하고서 백민성 아래에 묻힌 것으로 고려된다.

 

대창홀아하大創忽兒河와 소창홀아하小創忽兒河가 발원하는 사평시四平市 동쪽 탑자산塔子山(=400m)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구월산 장당경탑이 여기도 있었는지 알 수 없다.

 

45세 단군 여루 때인 bc365년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쳐들어 왔고 운장에서 막았다. 이때 번조산, 막조선, 진眞조선이 합세하여 막는데 진조선은 낙랑이다. 46세 단군초에 번조선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죽고 기후국의 기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bc304년 장당경이 불타니 해성의 평양으로 도성을 옮겼다. 해성은 단군 물리가 와서 죽은 곳이다.

bc296년 한개韓介가 객좌에 있던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해성 평양을 침범하여 단군이 되려하니 해성에 있던 단군물리의 현손이 고열가가 일어나 물리치고 47세 단군이 되었다.

 

bc 239년 북부여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키더니 수유의 군대와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진한 소밀랑 대전자 문화 참조)을 차지하였다.

 

고열가 단군이 스스로 물러나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후에 영품리왕이라고도 하였으니 영고탑 영주로 피신한 것으로 고려 된다.

 

고열가도 낮춘 이름 고리의 추장(고리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후손이 장당경에 다시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다.


북부여 웅심산문화 bc239~bc108

 

해모수解慕漱는 2333년 47세 단군 역사 시대를 종식시켰다.

 

bc239년, 해모수는 본래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서 군대를 일으켜서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하고,

웅심산熊心山 난빈蘭濱에 궁실을 지어 북부여라 하였다.

 

백악산 아사달은 여러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신시 백악산 아사달이다.

그 서쪽에 천왕, 천산이라는 지명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달란화(達蘭花)라는 곳이 있다.

달란화는 대란하大蘭河와 같은 발음이다. 즉 난빈蘭濱의 웅심산아사달은 이곳이다.

 

고대 조천지朝天池가 있던 하늘산(=사이한산)에서 내려오는 두 물 중에서 서쪽 물이 색불루 단군의 녹산 아사달을 지나는 자칸무렌강, 즉 흑수이고 동쪽으로 내려오는 물이 요나라 상경을 지나는 대란하였던 것이다. 그 대란하 하류에 신시 백악산 아사달이 있었고, 또 웅심산천안궁도 있어서 동서로 마주본다. 아사달과 천안궁 북쪽에는 목엽산 천산진이 있어 요나라 황제가 신단수를 세워놓고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요나라 황제는 물론 사이한산 아래서도 제사를 올려서 그 터가 남아 있다.

 

아사달과 천안궁 사이로 흐르는 물은 달라이하達拉爾河와 합쳐지며 해하이하海哈爾河라고 하는데 각각 달물과 해물이었을 것이다. 웅심산이라고 했지만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활”의 의 태어 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즉 활활 타오르는 의미다. 또한 홀승홀이나 홀한강처럼 크다는 의미가 있다. 대웅이 곧 한웅桓熊인 것이다. 천안궁 남쪽 지명은 바라치루도巴拉奇如德이니 대웅도(大熊都)라는 뜻이 된다. 즉 웅심산수도다.

 

부여족은 계속 수도에 난하(蘭河)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부루의 동부여가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옮겨간 곳에도 나린하와 난릉이 있다.

 



천산진 남쪽 천산구진과 천왕 이라는 곳에 있던 북부여 웅심산 천안궁, 건너편은 환웅의 백악산 아사달이다.

 

이때 단군 고열가가 단군에서 물러나 해성 이궁 평양으로부터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고열가는 다시 아사달로 옮겼다. 이후에 영품리왕이라고도 하였다. 일부 기록에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 동명왕이 고열가의 후손, 또는 영품리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열가는 장당경으로부터 길림시 아사달로 옮겨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길림시에 아시하달이라는 송화강변의 절벽 지명이 남아있다.

 

해모수 말기인 bc201년에 동호東胡가 흉노왕 묵돌가한에게 멸망하였다.

 

34세 오루문 단군 이후 중국과의 교류는 37세 마물 단군 때 주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은 일이 있다. bc635년경의 일이다. 당시 <사기> 기록에는 적족翟族의 장수가 딸을 주나라 양왕의 비로 주었고 양왕은 적족의 힘으로 영토를 지켰다. 그러나 주양왕은 적비를 몰아내려 하였고 결과는 적족의 장수가 궁내로 들어와 주양왕을 축출하고 적비의 아들을 주나라 천자로 세웠다. 그러나 4년후 다시 주양왕이 돌아오고 적족은 물러났다. 이후 진晉의 문공文公이 백적과 적적을 낙양의 북쪽에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진晉의 북쪽에는 임호와 서융인 누번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한편 이후로 산서성의 북쪽인 양성에 임호林胡가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이 bc305년경에 하북성에 있던 중산국과 임호, 누번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와서 동호를 물리쳤다. 이는 적봉시 남쪽 영성현의 낙랑홀이 함락당한 것이다. bc221년이다.

 

bc220년에 해모수는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지내고 천안궁을 지었다.

 

한편 bc201년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는 어디인가? 동호가 멸망후에 오환과 선비가 되는데 당시 오환산이 지금의 서한산, 즉 천산인 것이니 그 서쪽이 동호의 위치다.

 

<규원사화>에서 40세 단군 달음 기록에 당시 알유(오르도스)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부여인을 맥인貊人이라고 했다. 즉 호맥은 부여인이다. 이를 예인 들과 합쳐서 예맥이라고도 한 것이다.

 

동호는 선비와 오환으로 갈라졌는데 흥안령 산맥의 서북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때 선비는 흑룡강성 눈강의 실위 지역까지 쫓겨 올라가고, 오환은 오환산에 있었는데 색불루가 있던 녹산 아사달이었다.


실위로 도망간 선비족이 바로 중산국을 만들었던 백적족白翟族으로 고려된다. 실위는 시로위로 읽으면 일본말로 백색인데 후에 탁발선비라고도 하였다. 반면에 오환이 임호라고도 하던 적적족赤翟族이다. 따라서 동호의 망국 위치는 달라이 호수 변이 된다.

bc195년에는 적봉시 영성현 노로아호하 상류에 있던 낙랑이 배를 타고 개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로서 북부여의 서부는 매우 취약해진다.

 

북부여 시기 유물은 파림좌기巴林左旗 북쪽 30km 지점인 남양가영자南楊家營子 유지가 있다. 그 북쪽에는 세석기시대 부하문화富河文化가 있었다. 파림좌기는 거란국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거란족 선조와 차이가 크다. 거란은 보통 시체를 숲에 두었다가 3년 뒤에 뼈를 수습하여 화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1차장이고 화장한 흔적이 전혀 없다. 또한 부장품은 동물을 희생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순장殉葬하기도 했는데 순장은 부여의 풍속이었다. 남양가영자 유지에서는 20개의 묘기가 있고, 주로 철기와 동기 제품, 그리고 옥석장식은 다량으로 나오는데 시기는 육가자 유적지와 같고 다만 구리만 있고 금은金銀 제품이 전혀 없으니 왕릉급이 아닌 것이다.

 

부여의 제천행사가 영고迎鼓였고, 도성은 영고탑寧古塔이라는 말을 이미 썼는데, 영고탑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육가자六家子이다.

 

흥안력興安嶺 산맥 동남쪽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유적지가 북부여 시대 주요 왕족릉으로 고려된다.

 

육가자에는 약 30개의 묘좌가 있는데 야수문野獸文의 금속 부장품이 많이 나왔다. 머리는 서북을 향하였다. 육가자의 묘제는 부여식으로서 유곽무관有槨無棺이다. 부여는 옥관을 빌려서 운구하더라도 옥관은 묻지 않았다.

 

부장품을 보면 금은 세공이 발달하여 금마식패金馬飾牌, 쌍금마식패, 그외 수형금패獸形金牌가 2건이고, 금팔찌 7건, 금비녀 2건, 금반지 3건, 금정침 1건, 기타 금장식 13건에 은비녀 16건, 기타 은장식 7건, 동경 3건, 구리 허리띠 장식 1건, 도금한 구리허리띠 1건 도은한 구리허리띠 1건, 기타 여러건의 구리 장식과 도금한 철제 장식이 23건이다.

 

그뿐아니라 옥玉과 유리琉璃로 된 장식도 30점이 나왔다. 호박琥珀, 마노瑪瑙, 녹옥석綠玉石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하한下限이 동한 시대며 대략 bc2세기까지로 본다.

금은은 부여, 고구려의 장식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흉노도 유명하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 육가자의 북부여 금은 유물(혹은 갈사국 유물)

 

이 흉노와 부여, 고구려의 금은 장식은 소위 스키타이, 야수문 양식으로 같다. 단 그리스의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서요하西遼河에서 시작되어 오르도스 고원에서 부여족에 의해 꽃을 피우고 그리스 스키타이까지 전해진 것이다.

 

거란족은 동호의 후예로서, 흉노에 망하여서 선비산에 살다가 적봉으로 내려왔으나 위나라 조조에게 망하고 다시 요택에 살았다. 요택은 시라무렌강 상류의 부여성이다.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 때에 적봉시의 송막松漠에 내려와 살다가, 수나라에 이르러 8부족 형성 초기에 거란족 시조인 대하씨大賀氏가 일어나 부여夫餘, 실위室位를 합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至唐 大賀氏蠶食扶余, 室韋, 奚, 靺鞨之區,地方二千餘里。<요사 상경도>

 

실위는 당시에 하이라얼海拉爾, 눈강嫩江 부근이었을 것으로 고려되고, 부여는 옹고트 송막으로부터 하이라얼 실위로 이르는 도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부여 영역은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서요하西遼河)가 될 것이다.

 

거란족은 선비 땅에서 일어났으나

 

북부여 2세 모수리는 위만조선에 대비하여 bc193년 상장 연타발延?勃을 시켜 평양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 평양은 환도성이 있던 법고시 한대산이다. 이듬해 해성을 평양도사平壤道史에 속하게 하고, 해모수의 차자 고진高辰으로 지키게 하였다. 도사道史, 순사巡使, 욕살褥薩 등은 관직 이름이다.

 

그후 4세 단군 고우루 단군 때에 다시 고진을 발탁하여 bc120년에 고구려후高句麗侯, 또는 고리군왕藁離郡王으로 삼았는데, 이 고리군 위치는 서압록하(지금의 柳河)로서 창무시였다.

 

그러나 모수리 단군 때에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에게 해성 이북 50리까지 침략을 당하여, 다시 고우루 단군이 해성에서 우거군을 격파하고 살수까지 추격하여서 구려하 동쪽을 수복하였다. 구려하는 역시 마자수압록강이었던 유하柳河다.

 

<참고>

진나라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호맥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여와 예맥이다. 부여를 예라고도 할 수 있으니 부여를 hui로 예를 역시 hui로 발음한다.


즉 조선말로는 "예"가 부여말로는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즉 호맥과 예맥은 같은 말이다.


先秦時期北方民族。貊字古多作「?」。往往與「胡」連稱「胡貊」,泛指貊和北方民族。《山海經》有貊國,近燕。《周禮》有「九?」。可見其族類之多。西周時,貊?北國之一,周宣王命韓侯?方伯以柔撫之。《詩經?大雅?韓奕》言:「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詠其事。此所謂「追」,學者們以??「濊」(或作穢、?),與貊同類,因有濊貊之稱。戰國時期,?人猶有留居趙北者。史載:趙襄子「逾句注而破?代以臨胡?」,趙武靈王西北有林胡地至休?之?,甚至秦國之北也還有「胡?」。漢代的夫餘、沃沮等族,當時人仍以?人稱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