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10. 한사군과 졸본부여 bc108~bc58

자연정화 2013. 7. 31. 17:09

한사군과 졸본부여 bc108~bc58

 

 

1. 위만의 험독성과 우거의 조선성

 

46세 번한왕 기준箕準은 bc221년에 즉위하여 서우여의 번한성(금주시 대집둔, 요동군 험독성)에 있다가 그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쳐들어와서 2000리까지나 땅을 뺏기고 요동군 패수沛水의 번한성(태안현 손성자)으로 옮긴다.

 

이때 연나라의 요동군과 요서군이 설치되었고 이는 진나라에 승계되었다. 연의 요동군은 대릉하에 있었고, 요서군은 육주하 서편에 있었다. 전단군조선의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은 연나라 요서군 도하현이 된다. 연나라 요동군 위치는 위만의 수도였던 만번한에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로 통일되어 진시황의 만리장성 역사를 피해 번한으로 이주해 들어온 연燕나라, 제齊나라 사람들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에 들어와 살았다. <사기>에서는 상하장上下?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단군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과 후단군 번한수도 대집둔을 각각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그중에서 탕지산 안덕향에 연나라 유민들이 많이 살아서 뒷날 당나라 때에 연주燕州가 되었을 것으로 고려 된다. 반면에 대집둔은 제나라 사람들이 많이살았을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흥하여 요동군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다시 요동고색을 지었고, 패수로서 조선과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연나라에 속하였으나 연왕 노관이 반란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도 망명하여 천여인을 모아서 오랑캐복장을 하고 요동고색을 벗어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때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漢興,?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界,屬燕.燕王盧?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

 

한고조 유방 때에 여황후의 전횡으로 인하여 유주자사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고, 그 부하인 위만은 요동고색을 지나 패수를 건너 요동군 험독성에 도망해 들어왔다. 이 패수는 낙랑군 패수가 아니다. 이 패수는 수중현의 구하狗河, 별칭 구려하句麗河, 또는 명수明水가 된다.

 

번한왕 기준은 위만衛滿에게 상하운장을 떼어주고 한나라를 막도록 하였다. 이때 위만은 험독성에서 조선왕이라 한 것이다.

 

bc194년에 위만은 기준을 배반하고, 상하 운장의 중국인 이주민들을 이용해서 기준을 속이고 쳐들어와서 의무려산 동남쪽 태안의 번한현에서 축출하였다. 기준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 목지국 마한으로  떠났고, 대장군 탁의 무리는 번한의 오가를 이끌고 월지국 마한으로 떠났다.

 

그후 위만은 연나라 요동군이 있던 왕만구에 옮겨서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전에 연나라가 세운 요동군 위치로 고려된다. 또한 뒤에 만번한滿番汗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무제의 요동군 양평이의 무려산 동쪽에 설치되었을 때는서부도위를 두었던 무려현으로 되었다. 왕만구의 무엽산에서 무려현이 유래된 것이다. 반면에 대릉하 동쪽의 지금의 무려산은 더 큰 무려산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도1 위만의 험독성. 이는 대릉하 하구 서안과 금주시 사이에 목엽산 기슭에 있으며 요동군이었다.

 

 

이후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에게 전해졌다. 이때 위만조선은 진번(서요하 천산)과 임둔(요동반도 서안)을 이미 복속하였다고 한다.

 

 

지도2 낙랑군 조선성은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동남쪽 조양동산에 있다.

 

bc108년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우거를 치는데 수륙양군이 모두 실패하였다.그러나, 우거에게 불만을 가진 조선의 제후들이 반란하여 한나라는 쉽게 우거를 제거하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된다.

 

2. 한사군의 위치

 

bc108년 한무제의 조선정벌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이 현재 중국과 우리 역사학계의 잘못된 견해다. 그 잘못된 주장에 의하면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은 요양시에 있었고, 요동군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한나라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시다.

 

보충하면 <후한서군국지>에서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우북평은 낙양에서 2300리다. 후한의 우북평은 난하의 노룡군이었다. 그러니까 난하에서 양평은 1300리가 된다, 낙랑은 낙양에서 5000리였으므로 양평에서 1400리이다. 한편,<무릉서>에서 임둔은 장안에서 6130리였는데 이는 낙랑으로 부터로 고치면 대략 230리가 된다. 진번은 장안 7640리...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당나라 때 평주가 후한의 우북평이므로 평주로부터 장안까지가 2650리. 낙양까지가 1900리를 참조하여서 750리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낙양 평주 거리 2300리다. 후한시대 2300리가 당나라 때 1900리로 줄어들면서 당나라 때 장안-낙양 차이 750리는 한나라 때 907리가 된다. 이는 당나라 때 십리가 4km이고 후한시대 십리가 3km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시대를 기준으로 교정하면임둔은 낙양에서 5230리, 낙랑에서 230리가 되고 진번은 낙양에서 6740리...대략 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먼저 잘못된 중국 주장을 현재 지도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3

 

즉 한반도 전체가 한사군이었다는 주장이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현재 우리 국사의 토대이다. 여기에는 낙랑군 수성현에서 시작된 중국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현재 중국 역사책에서는 한강까지 중국 땅이라고 그려놓고 대동강에 낙랑군을 그리고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그려놓았다.

 


지도4

 

중국은 많이 양보해서 경상도의 진번군을 지웠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압록강 이남에는 중국식 고성터가일체 없다.

대동강의 낙랑고성은 원형으로서 중국의 네모반듯한 평지성이 아니다. 즉 한사군은 압록강 이남에 없었다.

실제로 진번군은 고래로 서유하 북쪽 천산에 있었다.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라 저 북쪽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일어났는가? 이는 대동강의 고구려 평양이 낙랑군이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수도였다는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한다.

 

대동강은 고구려가 망국한 도성이지만 고구려 당시 평양이 아니라 한성이었다. 고구려의 삼경인 국내성, 평양성, 한성 중의 한성이었다.


이는 당나라에 항복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산의 낙양성 묘지에 나오는 글이고,또한 대동강 평양성벽 각서에 고구려인이 기록한 한성이라는 기록을 무시한 것이다. 대동강 평양은 700년대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었던 고구려 왕손 고덕무가 독립하여 세운 후고구려(ad700-820)의 새수도로서 평양이었다.

 

이미 앞에서 기자조선의 출발지는 대동강에서 천리밖인 대릉하 상류인 것을 기자의 유물로서 밝혔다.

대신에 대동강 평양에 대하여는 <원사지리지>에 그 올바른 설명이 있다.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잘못된 압록강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아주 상세하게 밝히고, 여기서는 한사군의 위치만 바로잡는다.

 

우선 낙양에서 2300리 우북평은 <후한서>에서 당시 토은현土垠縣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당산시唐山市 북쪽 풍윤豊潤 위치다. 산융족의 무종국은 남수藍水변인데 이는 옥전玉田 위치다. 후단군시대 남국의 위치다.

 

한편 3600리 요동군 치소인 양평성은 연나라 요동성(위만의 험독성), 본래의 요동군 무려현으로 고려되고,
3300리 요서군 치소 양락성 위치는 흥성시興成市로 고려 된다. 흥성시 북쪽 흥성하 발원처에 양가장자楊家庄子가 있고 흥성하 하류 서쪽에 양안성羊安城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양안성이 양락성의 후신일 것이다.

 

이때 3260리 거리의 요동속국 위치는 당시 천료天遼 또는 창료昌遼라고도 했는데 본래 요서군 부려현夫黎縣이었다. 요서군 부려현, 뒤에 요동속국도위는 흥성시 서북쪽의 포도구葡萄溝로 고려된다. 이 요동속국에는 요동군의 험독현(대집둔), 방현, 무려현,그리고 요서군에 속했던 부려현, 빈도현, 도하현 등이 속했다.

 

후한시대 거리가 밝혀진 요동군과 요서군의 중요한 현의 위치는 대략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5

 

지도5에서 요동군 무려가 연나라, 진나라, 후한시대 요동군이고 한무제의 요동군만 전한 양평이며, 공손탁의 요동국 양평은 별도다.


<후한서>에서 요동군과 현도는 400리인데, 요동국과 현도는 200리 였다.

양평은 무려 다섯군데를 옮겨다녔는데 이는 따로 다룬다.


요서군 유성은 두 곳인데, 하나는 산해관 동북으로서 전한시대 요서군 유성이고 삼류수가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수나라 유성군이 되었고 당나라 영주를 두었다가 평로군을 두었으며 평로성이 있었다. 요동 신성에서 거란군에게 망한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당나라 중기에 다시 세운 곳이다.

 

또 하나의 유성은 공손탁이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유성인데 모용황이 전연국 수도를 세웠고 평주平州 황룡성이라고 하였었다. 북연의 수도였고 북위군에게 함락당했으며 평주 대신 영주營州를 두고 평주는 난하의 노룡현으로 옮겨졌다. 그후 조양시는 영주 유성현이라고 계속 불렀다. 그러나 수나라 건국 무렵에 북제 영주자사 고보녕이 점령하였고, 수나라가 설치한 요서군은 전한시대 유성현 위치였다.

 

당나라 영주도 수나라 유성군, 즉 전한시대 유성현에 두었다. 이 당나라 영주에서 도하의 연군성을 지나 대릉하(당시 대요수)를 건너서 당나라 안동도호부 양평이 있던 적도 있는데, 이는 요동신성이며 공손탁의 요동국성 양평과 같다.

 

전한시대 유성현과 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는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6

 

수나라 유성군은 대루(大柳)에 전한 유성현은 삼산三山 남쪽 삼류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상류구(上柳溝)에 있었고 당나라 영주이자 안록산의 평로군절도사 치소인 평로성은 로두구(瀘豆溝=盧州城) 평천영(平川營)에 있었던 것이다. 로두구와 평천영은 평로성의 성북과 성남이다.

 

당나라 영주와 요수(현재 대릉하), 그리고 요동 신성 안동도호부의 새로운 비정은 압록강(현재 대요하)에  있던 발해서경 압록부(졸본성)과 고구려 수도(환도성, 구평양성 등)을 올바로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제까지는 공손탁의 요동국이 요동군을 갈라만든 요서군 유성, 즉 조양시를 기준점으로 하여서 많은 착오가 있었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대동강에 있었다는 거짓역사를 만들어냈다.

 

이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한사군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7

 

낙랑군은 본래 개원시(開原市)였다고 <원사/지리지>함평로咸平路에서 밝히고 있다.

<후한서>에서 요동군으로부터의 낙랑군까지의 거리가 1400리인 점을 고려하면 전한시대 낙랑군 위치인 개원보다 먼 곳이다.

 

후한시대는 <삼국사기/고구려기> 기록에 광무제의 살수(심양시 渾河) 이남 침략이 있었다.

<후한서>에만 등장하는 낙랑군 낙도현 樂都縣을 이때 혼하 아래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고, 이 낙도현까지 거리가 1400리로 추정된다.

 

명나라 때 금주시에서 북진시까지가 180리였고 북진시에서 요양시까지 360리였다. 합하면 540리가 된다.  명나라와 한나라 때의 10리는 3 :5이므로 한나라 때의 금주-요양은 900리 거리다.

 

그러나 여기에 고대 해안선의 변수가 있다. 청나라 때도 대개 심양 동남이나 서북에서대요하를 건넜는데 이 대요하가 한나라시대는 강이 아니고 바다의 열구였을 것으로 고려되므로, 한나라 시대는 요동군에서 낙랑군 조선현을 돌아서 심양 서북에서 강을 건너 요양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계산하면 금주시에서 북진까지 180리, 북진에서 양식목하 건너 거류하진까지 220리였다. 거류하진에서 조선성까지는 34km로서 70리에 해당하고 여기서 심양까지는 55km, 즉 110리에 해당한다. 심양서 요양까지는 120리다. 도합 700리다. 이는 한나라시대의 1170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230리를 더가면 요즘 거리로는 140리이므로 해성시에 이른다. 해성시에는 패수 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낙하(樂河)에서 유래된 말일 수가 있다. 낙을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고 어를 역시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면 같아 진다. 따라서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오늘날의 해성시로 추정된다.

 

동시에 위나라 명제가 237년에 공손탁의 요동군 몰래 바다를 건너 낙랑군과 대방군을 밀파하여 세웠는데, 그 낙랑군이 해성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대방군은 그 서남쪽 대석교시 부근이었을 것이다.

즉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요동군에서 1400리로서 해성시에 해당한다.

 

임둔군은 해성시로부터 230여리 즉 70km 남쪽 해안으로 잡으면 개주시 부근으로 고려 된다.

진번군은 낙랑군 조선현으로부터 고려해야 하는데 요동군이던 금주시에서 470리 정도다. 한나라식으로 780리다. 진번군은 요동군에서 3140리 내외이므로 조선현으로부터 정가방에서부터 2360리를 더 가야하는데 동북 방향으로 약 700km다.

 

이는 흑룡강성 하얼빈을 넘어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낙랑군과 진번군이 이웃하였을 것이므로 당시 1000리인 300km이상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위치에서 북부여 수도인 천산진까지가 약 300k다. 또한 천산진은 단군 시대 진번군이었다.

여기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해부루에 이르러 동부여로 이주한 것이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한사군의 점거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사군과 동이 제민족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