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12.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자연정화 2013. 7. 31. 17:12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고구려 요수가 현재의 대릉하라는 증거 6가지

 

1. 첫 번째 증거 [한서-지리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서 요동군 망평현에는 대요수가 새외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안시로 가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물길은 고작 1250리다.

望平; 大遼水 出塞外 南至 安市 入海 行 1250里

 

현재 중국의 10리는 5km지만 한나라 때는 약 3km였다. 당나라 때는 4km 정도 였고 현재 우리나라와 같다. 따라서 당시 대요수는 400km 길이다.

 

전한시대 대요수는 현도군-고구려현을 지나고 요동군-망평현, -양평현, -요대현, -안시현”을 차례로 지난다. 대요수는 말갈 서부 남산에서 나오고 [전한서]에서 물길이 1250리다. 반면에 오늘날의 대요하遼河는 물길만도 3000리 이상이니 절대로 전한시대 대요수가 아니다.

 

이는 지도9에 자세하다.

마자수압록강馬?水鴨綠江은 오늘날의 류하柳河 즉, 구려하句麗河, 거류하巨流河며 또 구하?河가 된다.

그중 염난수는 고륜기庫倫旗를 지나는 구하?河의 북쪽 가지로 고려된다.

 

낙랑군樂浪郡의 물도, 전한시대의 패수浿水는 대요하大遼河이고, 후한시대 패수는 낙도현 아래 작은 물 어니수다. 전한시대 대수帶水는 시하柴河, 열수列水는 범하汎河다.

열수列水는 분려산分黎山이라고 하던 청원현淸原縣 마리홍산摩離紅山(=莫日紅山)에서 비롯되어 북부의 진한과 남부의 마한을 나누는 경계였다.

 

살수薩水, 기수奇首는 혼하渾河로 고려된다. 그리고 태자하는 혼하渾河의 남쪽 가지였으니 고대에는 한수漢水였을 것이다. 발해 삼로군이 본계의 태자하변에 있었는데 거기에 한양현漢陽縣이 있었으니 태자하가 한때 한수漢水로 존재했었던 근거가 된다. 한편 비류수沸流水는 양식목하養息沐河, 소수小水는 부신시 세하細河다. 소수맥小水麥 구려句麗가 거기 있었다.

 

지난 몇백년 동안 대요수를 지금의 대요하로 보아온 것은 지리상으로 엄청난 비약이었다.

백랑수白浪水였던 대릉하大凌河로부터 대요하遼河 사이에 있는 양랑하楊郞河, 무량전수無梁殿水, 요양하繞陽河, 유하柳河, 양식목하養植沐河, 수수하秀水河가 모두 다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왜곡된 역사의 커다란 구멍이다. 무려 500리 사이에 아무 물도 없는 것이 된다.

[한서-지리지] 기록 체제상에서 이런 허술한 기록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근세 역사가들의 해석이잘못된것이다. 게다가 마자수압록강馬?水鴨綠江을 지금 압록강으로 보면 요동반도에 흐르는 수십개의 중간 물들이 또다시 몽땅 사라지고 만다.

 

[한서-지리지]의 왜곡된 해석은 만주지리를 한 점의 블랙홀 속으로 빠트린다.

[한서-지리지]에서 요동군 바로 앞의 요서군의 물은 48개다.

48개의 물을 모두 합치면 3000리가 넘는단다. 작은 물까지 무지무지 자세하다. 그런 요서군 물도 약간은 좀 이상하다. 그에 비하면 요동군, 현도군 기록은 그들이 요동군 물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하물며 낙랑군 물에 대한 기록에 과연 무슨 진실이 있고, 그 물 이름이 어찌 한반도까지 밀려 내려와 덮어질 수 있겠는가?

 

제 땅 요동의 물이름도 잘 모르면서 남의 땅 낙랑의 물이름을 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런데도 그들이 그때 이미 다 알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실상은 그들이 전혀 몰랐다는 것을 다음 책 [당회요]에서 증언해 주고 있다.

 

2. 두 번째 증거 [당회요]

 

한나라 때는 지금의 대요하遼河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642년 안시성 패전뒤 2년만에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644년 영주도營州道(=조양시朝陽市)를 지나서 고구려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을 침범했는데,

 

[당회요唐會要]에 의하면 이세적李世勣이 파리성頗利城을 지나, 백랑白浪과 황암黃巖 두 물을 건너고서 대요하가 발원하는 요원遼源 소재를 물었다. 그러자 지금 건너온 백랑, 황암 두 물이 더 가다가 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요수遼水가 된다고 대답했고 그 발원인 요원遼源은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세적 군대는 백랑수의 최남단인 고릉하枯凌河와 합치는 요수遼水를 건넌 것이고, 황암수는 고릉하와 합치기 전의 요수 이름이 된다. 북녕시北寧市 서남쪽 70리에 황암사黃岩寺가 있었다.

 

이 두 물, 백랑수白浪水와 대요수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만나 안시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수경水經]에 기록되어 있다.

 

신성, 남소성은 백랑수, 즉 대릉하 북쪽에 있었다.

중국은 고구려 신성新城이 무순撫順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남소南蘇는 혼하渾河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 남소 모두 조양시朝陽市 동북의 내몽고 지방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에 있었다.
파리성頗利城은 “발”성의 차자인데 발한성이 있던적봉시팔리한진(전한시대 우북평군 치소)로고려된다.

 

3. 세 번째 증거 [문관사림]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을 시작한 통정진通定鎭은 어디인가?

[문관사림文館詞林]에서 수나라 군역軍役 기간의 차등 순서가 전방까지의 거리별로 단계적 차등을 두고 있는데

-탁군?郡 2년

-임유관臨楡關 3년

-유성군柳城郡 4년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5년

-통정진通定鎭 7년

-도요서진渡遼西鎭 10년 이런 순서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노하, 회원 통정진 등은 모두 요서진遼西鎭 보다 서쪽이다.

도요서진渡遼西鎭은 마땅히 대릉하 지역이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탁군 2년 - 임유관 3년 - 유성 5년- 통정진 7년- 도요진渡遼鎭 10년 이다.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이 따로 없다. 이는 노하, 회원진이 유성과 가깝다는 반증이다.

 

 

수나라때 수양제와 백만병사가 요동성까지 진군한 행로를 표시하면 위와 같다. 윗 그림에서 파란색은 중국의 주장이며 틀린 것이다. 붉은색이제대로된것이다.수나라 유성군은 푸른색의 유성(당나라 영주 유성현)이 아니라 붉은색의 유성(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 평로성)이 맞다.

 

노하瀘河는 금주시錦州市 소릉하小凌河다. 지금의 소릉하를 노하로 보는 것은 중국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중국은 노하현을 오늘날의 금주錦州로 보는데 그보다 훨씬 상류, 즉 서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때에 노하현瀘河縣, 노하진瀘河鎭도 있었다.

 

회원진懷遠鎭은 금주 서북 50리의 당왕채산唐王寨山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양제가 살수대첩 후에 다시 또 쳐들어왔다가

양현감의 반란으로 군대를 되돌린 곳이라서 회원回遠진이고

당왕채산이 수왕채산隋王寨山의 와전訛傳이라면 당왕채가 곧 회원진이 된다.

그 남쪽 고당산??山은 당태종이 군량을 비축한 고량산庫粱山이 된다.

 

중국학자들은 항상 갑자기 비약하는데 문제가 있다. 노하, 회원진에서 노하는 소릉하라고, 하면서 회원진을 갑자기 물 건너 산 넘어 또 물 건너 심양시 요중현遼中縣이라고 주장한다.

 

대릉하大凌河 건너 의무려산醫巫閭山 넘어 요하遼河 건너...큰 두 물과 큰 산을 갑자기 넘는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서 금주 서쪽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에서부터 다음 통정진으로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탑遼濱塔으로 주장한다. 요나라 요주遼州의 요빈현遼濱縣이 있던 곳인데 그곳이 요수遼水를 건너는 곳이니 통정진은 응당 거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요빈탑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은 당시 대요수가 아니라 압록강이다.

[한서漢書]에 기록된 당시의 대요수는 길이가 고작 1250리, 즉 300km 남짓한 짧은 물이었고,

현재의 요하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서漢書의 마자수압록강은 2100리라고 했는데 지금 요하의 일부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시 요수가 대릉하였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유성에서 노하, 회원진이 150리 정도 되지만, 금주에서 요빈탑은 500리가 된다. 중국의 주장은 그 500리 중간에 도대체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왜곡된 역사의 전형적인 구멍이다. 역사의 블랙홀인데 역사 왜곡을 위해 생략한 거대 공간이었다.

통정진보다 동쪽의 도요서진渡遼西鎭, 혹은 도요진渡遼鎭이 최고 관건이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동쪽의 요서주遼西州 위치가 대릉하 지역이다.

 

4. 네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에서 금주시는 한나라 요동군遼東郡 무려현無慮縣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후한後漢 시대 무려현이다. 수나라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를 빼앗아 만든 요동군은 금주시錦州市였으니, 통정진通定鎭은 의현義縣 서남쪽 45리에 비정된다.

 

수양제는 10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에 쳐들어왔는데, 요동성에 진을 치고서, 그중 30만 대군이 압록강 넘어 평양성까지 갔다가 평양성밖 30리에서 회군하여서 을지문덕장군에세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당하는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2700명이라고 했다.

 

이후 수양제는 철군하면서 고구려 요동성은 그냥 두고, 요수 건너 편의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서 수나라의 요동군隋-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다. 수나라 요동군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였으니, 금주시錦州市 대무보大茂堡 위치고, 통정진은 의현義縣 서남 40리 대정보大定堡로 고려되는 것이다.

통정진은 그 이름부터가 당시 안정현安定縣이었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通-安定)이라 통정通定진이다.

 

그런데 요나라 때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은 의현義縣 동쪽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이었던 것이 [양원부인장씨묘비梁援夫人張氏墓碑]로 증명되었다. 이는 고구려 요동성 편에 자세하다.

 

5. 다섯 번째 증거 [책부원구冊府元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당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백랑수白浪水( = 대릉하大凌河) 남쪽을 따라서 고구려 현도의 성에 갈 것이다.”朕 然後 徑塗 白浪之右 親巡 玄?之城

 

고구려 현도, 신성 등은 요수 건너에 있었는데, 당태종의 말처럼 백랑수를 건너가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즉 백랑수가 당시의 요수遼水다.

[수경水經]에 의하면 본래 백랑수와 대요수는 지금의 고릉하枯凌河를 통해서 방현房縣에서 만나 안시를 통해 바다로 나갔다. 大遼水注, 大遼水 自遼隊來 東南過 房縣西 又會白浪水 下入安市

 

역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안시성 전투를 한참 치르던 중에 당태종의 신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친히 요대에 오셨는데 今 陛下 親臨 遼隊...”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을 위해 주둔한 곳은, 전한前漢시대 요동군 양평襄平의 남쪽으로서 전한시대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이었다.

 

[수경水經]에서 대요수大遼水는 전한시대 망평望平에서 내려와 양평현襄平縣,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방현房縣의 동남쪽에서 백랑수와 합쳐지고 안시현安市縣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망평현望平縣은 요나라 때 산동현山東縣이라고 했는데 북녕시北寧市 동쪽 150리였다.

 

지금의 유하柳河가 동남으로 향해 흘러내려오다가 서남으로 틀어지는 곳이라 무량전진無梁殿鎭 부근이다.

전한시대 양평현襄平縣은 그 서남이며 대요수와 소요수가 합쳐지는 곳의 동쪽이다.

즉 요양하繞陽河와 가 합쳐지는 곳인데,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야만 하지만 물길이 2000년이 지나서 현재는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는데 흑산현黑山縣 대호산大虎山 부근이다.

 

요대는 고구려 안시성 부근이 되고, 그래서 당태종이 요동군 요대遼隊에 왔었다는 것이 되고, 요동군 안시현은 본래 대릉하大凌河, 즉 고릉하古凌河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므로 구방자진溝幇子鎭에 있던 방현房縣보다 남쪽이 된다.

 

지금의 대요하 건너 해성시海城市 앞에 요대사遼隊寺라는 절이 있다. 이는 요나라가 한인漢人과 발해인渤海人이 반란하지 않도록 발해인은 서쪽으로, 한인은 동쪽으로 옮겨서 섞어놓은 다음에 생긴 것이다. 본래 요대현은 태안台安의 서북이다. 왜냐하면 태안에 건안성建安城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건안을 지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동에 많은 당태종 전설이 있지만 거의 가짜로 고려된다. 당태종은 지금의 요하를 건너보지 못했다. 만주에서 북으로는 심양 북쪽 철령시 당왕채 전설에도 당태종이 왔다고 하였고, 남으로는 단동시 봉성에도 당태종이 왔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다 사실이 아니다.

대개 이세적이나 안동도호부 도독 설인귀薛仁貴의 흔적이 와전된 것이다.

 

6. 여섯 번째 증거 [금주부지], [요동지]

 

[금주부지錦州府志]와 [광녕현지廣寧縣志]에서 본래 한나라 요서군치소遼西郡治所로서 요나라 요서진遼西鎭이 되었다고 비정된 곳은 의주義州 서西 40리다. 이는 의주 서남 40리에 위치한 대정보大定堡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한시대 공손탁의 요동국에서 본래 전한시대 요동군을 다시 나누어서 만든 요서군치소 요서진으로 고려되며 기왕의 전한시대 요서군은 아니다.

 

한편 [요동지], [전요지]에서는 요서진이 의주 동東 40리라고 [금주부지]와 동서를 반대로 말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릉하 동쪽 왕민둔王民屯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요나라가 설치한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 위치다.

 

요서주는 본래 한-요서군지漢?西郡地로서 요나라 장녕궁과 현주에 속했다.
遼西州,阜城軍,中,刺史, 本漢遼西郡地,世宗置州,

이 요서주는 본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위치다. 고구려 요동성이던 첫 번째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이 폐지되어, 신민시 북쪽 두 번째 요주遼州 요빈현遼濱縣으로 옮겨간 뒤에, 바로 그 첫 번째 요주 자리 아래에 생겨난 것이 요나라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인 것이다.

 

한편 유성군柳城郡-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 통정진通定鎭 - 도요서진渡遼西鎭 순서로 보아서 도요서진의 위치는 금주시 동쪽 대릉하성大凌河城으로 고려된다. 지금 금현錦縣 위치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곳은 요돈遼頓이라 했다.

현재 대릉하성大凌河城의 설치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수나라 도요진渡遼鎭이고, 당태종의 요돈遼頓이었다.

 

의주義州(현재 의현義縣) 서쪽 40리거나 의주 동쪽 40리거나, 요서진遼西鎭은 대릉하大凌河에 있었다.

그런데 대릉하 요서진보다 훨씬 후방 내지인 통정진만이 느닷없이, 500리 바깥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현遼濱縣이 될 수 없다.

회원진도 산넘어 물건너 요중현遼中縣까지 가지 말고 유성 부근의 노하瀘河. 현재 소릉하小凌河 주변에 바로 있어야만 한다. 그게 사실史實이다.

 

5. 졸본부여 bc108~bc

 

졸본부여卒本夫餘는 한사군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고두막한高豆莫汗 동명왕東明王이 세웠다. 요동군 서안평까지 수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낙랑군을 모두 수복한 것이다. 그래서 설치 20여년만인 한나라 소제 때, bc82년에는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하였고 중국의 낙랑군은 의무려산 서쪽으로 내려갔다.


고두막한은 bc238년에 해모수에게 단군조선을 빼앗겼던 고열가의 후손 영품리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졸본성은 고주몽의 2번째 도읍 눌현성訥見城, 즉 황성黃城이었고, 고국천왕의 고국이었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었고,발해 서경압록부신주성이었는데심양審陽 북쪽 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이다.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 골령의 황룡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이다.

 

 

졸본성은 주몽왕과 신대왕,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묻혔다. 고국원왕 때는 황성(黃城)이라고 했는데 고주몽 때에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黃)의 우리말에서 황성과 누루성이 비롯된다.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다.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天府)라고 불렀다.

 

 

천부(天府)가 신주(神州)를 거쳐 천두진(泉頭鎭)이 되었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서 고려고국(高麗故國)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綠州), [신당서(新唐書)]에서 신주(神州)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이다.

그런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遼河)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서경성은 석성으로서 폭이 무려 20리(8km)였던 대성인데, 요나라 때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어서, 그 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금나라 때 [요동행부지]를 남긴 금나라 문사였던 왕적(王寂)이 심양시 북쪽 현재 개원시에 설치되었던 함평부에 가서, 하루는 부근에 굉장히 큰 성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니 입구 마을 사람이 고구려 폐성이라는 했는데 직접 보니 성중에 함원전(含元殿)이 있고, (성을 세운 주몽이) 만세지계(萬世之計)을 세웠다가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강토를 도둑질 당하여 국파천년한(國破千年恨)을 왕적이 느낀 곳이었다.

금나라 왕적이 보았던 발해 신주, 고구려 천부였던 졸본성은 대체 개원시 어디에 있는가? 위성 사진으로 탐색한 결과 개원시 북쪽 창도현 천두진(泉頭鎭) 동쪽 소가둔(邵家屯)의 굉대한 성터였다.

 

 

 


 

 

 

 

 

지도상의 천두는 고구려 천부나 발해 신주가 변한 말이다. “주”-“두”의 발음은 구개음화 이전인 고대에 혼용되었다.

 

황정자黃頂子는 황성자(黃城子)의 변음이고, 소가둔(邵家屯)은 [수서]에서 소열제(昭列帝)라고 불렀던 고국원왕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가남구(巢家南溝)도 역시 고국원왕 이름인 쇠(釗)의 남쪽성이란 뜻이다. 또한 초가구는 소수림왕이 세운 초문사(肖門寺)에서 비롯된다.

 

신주의 위치는 고구려, 발해의 압록강이었던 요하(遼河) 하구로부터 물길로 830리라고 [신당서]에 기록되었는데 천두진이 그 위치로서 대략 맞다.

 

일반 지도 상에는 천두진 동쪽에 소가둔이 표시되어있고, 그 남쪽에 황정자(黃頂子), 소가남구(巢家南溝)가 표현되어 있고, 그 남쪽에 초가구(肖家溝) 유원지가 있다.

이를 위성으로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고구려 졸본부 황성터가 보인다.

 

이중에서 묘구가 동명왕 고두막한의 성이고 고두막한의 고분이 있을 곳이고, 황성이 고주몽의 성, 소가남구가 고국원왕의 동황성으로 고려된다. 두 성은 합쳐서 폭이 대략 8km다. 성둘레는 20km이상이다.

 

고주몽이 죽어, 용산에 묻혔는데, 그 동명묘가 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산 이름은 황룡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주몽의 장지인 용산인 것이다.

 

황성 동남쪽에는 유리왕이 골천에 세웠던 이궁인 위원보산성이 있다. 골천은 지금의 구하(寇河)다.

동명왕묘 남쪽의 류가구는 금나라 문사 왕적이 신도비를 보러 놀러갔던 당나라 장수 류인공 7세손의 집이다. 그 바로 곁에 동명왕묘가 있었건만, 당시 왕적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고구려 역사 유적이 요나라 이후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졸본부여는 고두막한이세우고 bc59년에 서거했으며 그후태자인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한다.

bc58년 고무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순시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고무서가 영고탑으로 천도한 것이다. 이후 영고탑도 부여라고 하는데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출신지로 고려된다.

훗날 태조대왕의 중국 침략을 방해하였던 부여는 이 영고탑 부여로 고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