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한사군 설치부터 소멸까지 정리

자연정화 2013. 8. 18. 14:47

 

1. 한사군 설치기 (기원전 108년 ~ 기원전 83년)

 

 

한사군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들여다 보면 낙랑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강합니다. 낙랑군이 안정화되면 다시 동쪽으로의 확장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사군의 영역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적지 않은 땅을 확보한 것이지요.

한나라는 조선을 멸망시켰지만 확장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많은 강 때문에 현도군의 병력으로는 흩어져 지킨다는 것은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병력을 움직여 B지역 옥저를 공략했을 것입니다. B 지역이 옥저라고 설정한 근거는 후한서 동이열전 옥저전을 참고하였습니다.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이후 30년 동안 현도군의 확장 영역은 C 지역까지이며, 옥저에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규모 이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참고로 검은색 선은 현 중국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각 지역을 설정을 해 보겠습니다. (설정 메모)

- 부여 : 한사군이 설치되고 진번군과 임둔군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킨 국가는 부여로 설정하였습니다. 

- 오환 : 동호의 남쪽 부족으로 선비족이 등장할때까지 역사에 등장하고 있어 해당 지역을 오환으로 설정하였습니다.  

- 가 지역 : 패수 서쪽까지 요동군에 속하게 됩니다. 최전방 국경지역에서 안전한 후방으로 바뀌었으므로 급격한 발전이 진행됩니다. 

- 나 지역 : 패수 동쪽부터 낙랑군에 속하게 됩니다. 요동군보다는 못하지만 발전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 A 지역 : 왕래가 쉽지 않은 대습지

- B 지역 : 옥저

- C 지역 : 구려  : 후 현도군의 확장으로 E 지역으로 이동.

- D 지역 : 양맥(?)

- E 지역 : 구려     

 

2. 진번 임둔군의 소멸기 (기원전 82년~ 서기 14년)

 

 

기원전 82년에 부여의 압박으로 진번군과 임둔군이 사실상 소멸이 됩니다. 진번군은 낙랑에 예속되어 낙랑 서쪽을 방어하게 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예속됩니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이맥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임둔군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고, 현도군가 있었던 곳을 방어하면서, 현도군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번군이 낙랑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요동군도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장성 안에서 밖으로 나와 방어선이 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한사군의 핵심은 현도군입니다. 진번군과 임둔군이 소멸되었지만 요동군과 낙랑군은 완전히 안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현도군은 북쪽에 3개 현을 설치하여 고구려현을 치소로 삼아 확장을 시도합니다. 이때 가장 고민을 하게 만드는 부분은 과연 현도군이 요하를 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양이 있는 E 지역으로 가려면 도하를 해야하는데 강폭이 넓고 구려(아직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입니다)의 본진과 가까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도하를  하려면 부교나 다수의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구려 진영에서 이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대비를 할 것입니다. 이 시기의 현도군은 대릉하 이북의 핵심 전력입니다. 자칫 실수로 병력을 많이 잃게 되면 대릉하 이북 옥저 땅이 위태로워집니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을 보더라도 피해없이 요하를 넘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는 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또한 현도군이 도하를 해 선양에 자리를 잡았다면 대릉하 북쪽 옥저땅을 누가 지켰을까요? 북쪽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소멸시킨 부여가 있습니다. 만약 부여가 내려와서 옥저 땅을 차지해 버리면 현도군은 한마디로 고립무원이 되어버립니다. 요하에 막히고, 부여에 막히고...

 

현도군은 요하를 넘지 않았고, 북쪽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전한이 끝나고 왕망의 등장하기 전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 됩니다. 기원전 75년부터 서기 12년까지 한사군 주변에서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고구려가 건국하였고, 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부여가 폭설로 인하여 수많은 병사를 잃으면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3. 현도군의 후퇴기 (서기 14년 ~ 서기 314년) 

 

 

 

현도군은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으로 되어 있고 치소는 고구려현입니다. 그런데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왕이 양맥을 점령하고, 고구려현까지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서기 13년, 고구려가 부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양맥(현 신민시)까지 차지했는데 이 양맥을 넘어 현도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정확한 출처를 말씀 드리긴 힘들지만, 예전에 양맥은 강가에 부교를 설치해 놓고 사는 부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 그렇게 설정을 한 것입니다) 

 

현도군이 치소가 빼앗기면서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곳은 현 푸신시입니다. 사료를 보면 현 선양 동쪽의 푸순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푸순으로 현도군이 가면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기 때문에 푸신시로 설정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푸신시와 푸순시를 비교해보면 노천 광산도 많고 내용도 매우 비슷합니다. 

 

고구려현을  뒤로 물렸지만 현도군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합니다. 낙랑군과 여전히 연결이 되니까요. 하지만 애써 확장한 옥저 땅이 교전 지역으로 변하게 됩니다.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군사를 파병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땅을 지키는 군사이므로 남겨두고 요동 병사로 공격을 해 요하 너머로 밀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승패가 나지 않았고 요동군으로 퇴각합니다. (고구려군도 양맥쪽으로 퇴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붉은색 그림의 지역은 교전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고구려는 태조 대왕때 한사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선비족과 동맹을 맺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을 합니다. 위치상으로 볼때  고구려는 현도군을 공격하고, 선비족은 요동군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때부터 고구려의 수군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것이 서안평현입니다.

 

서안평현은 패수 서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라고 판단합니다. 지리적으로 이곳이 끊기면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이 고립되기 때문입니다. 요동군은 북쪽의 선비족과의 갈등이 있을때마다 고구려의 바다로의 공격을 받았고, 백제의 고이왕, 분서왕 기록을 보면 백제 역시 이곳을 공격한 것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대방군은 낙랑군의 서쪽 7개 현이 분리되어 만들어진 군으로 요동군을 도와 패수 지역을 방어를 목적으로 합니다.  

 

4. 한 사군의 소멸 (서기 314년) 

 

서기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장악합니다. 당시 상황을 추정하면, 모용 선비와의 동맹을 맺었고, 모용선비는 요동을 공격하고,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서안평이 점령되는 순간 한사군은 완전히 고립이 됩니다. 2년후 낙랑군의 군장 장통이 요동으로 퇴각을 하였고, 이듬해 고구려가 대방군을 점령하면서 낙랑지역은 고구려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도지역은 고구려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다가 결국 모용 선비에 투항을 합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모용 선비(전연)와 요동군을 두고 다투게 되었고, 요동군을 차지한 모용 선비에 의해 뒤로 밀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