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의 진실
서론
지금의 기성세대들이라면 대부분 한사군(漢四郡)을 기억할 것이다. 학창시절에 국사교과서에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이 한사군이었을테니 말이다.
한사군이란 기원전 109-108년에 중국 한나라 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 고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곳에 식민지인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조선열전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정조선 위사군(遂定朝鮮 爲四郡)’. 뜻을 풀이하면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최초 기록은 이게 전부다.
그런데 우리는 국사시간에 한사군은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라고 열심히 외워야 했고, 그 위치도 한반도 북부, 즉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라고 배웠다.
수십 년 전에 배운 내용이지만 아직도 머릿속에는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한나라와 고조선(사실은 위만조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현장에서 직접 보았던 사마천이 쓴 역사책에는 사군을 두었다는 내용만 있지 사군의 이름과 위치는 어디에도 없음에도 우리가 그처럼 구체적인 내용의 한사군을 배우게 된 것 말이다.
위만조선
사실 한사군의 진실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나라의 상고역사는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한사군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된 위만조선을 알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기원전 195년에 죽자 그 부인인 여태후가 왕권강화 차원에서 유씨계 종친들과 개국공신들을 대거 숙청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공신 중에 노관이란 자가 있었다. 노관은 유방과는 동향인데다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난 죽마지우의 관계로서 일찍이 연나라 왕에 봉해진 인물이다.
노관은 화를 피하고자 한나라를 내내 괴롭혔던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로 도망을 갔고, 이때 노관의 부하로서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웃나라였던 조선으로 도망을 온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위만(衛滿)이었다.
당시 조선왕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배운 바 있는 기준(箕準) 즉, 준왕이다. 위만의 망명을 받아준 준왕은 위만을 서쪽변방의 국경수비를 임무로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자기를 받아준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1년 뒤 기원전 194년에 왕검성을 기습하여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삼한관경제-삼한으로 이루어진 고조선
위만이 망명하였던 조선은 정확히 말하면 번조선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흔히 고조선은 하나의 나라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나라였다. 셋이란 진한, 번한, 마한이고 이것을 합해서 하나로 조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가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삼신의 신교문화를 바탕으로 나라를 경영한 고조선은 신정국가였다. 단군은 국가 최고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천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었다. 우주를 통치하는 삼신의 존재원리는 한마디로 삼신일체(三神一體)이다. 우주의 절대자는 한 분의 신 즉, 일신이지만 이 일신이 현상세계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는 셋이기 때문에 일신을 삼신으로 인식하였다. 다시말하면 一神卽三神이다.
삼신은 각기 다른 세 분의 신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보면 한 분의 신이지만 작용면에서 셋으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삼신일체라고 한다. 삼신일체의 원리를 국가경영의 기본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의 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을 삼한관경이라고 한다.
삼한은 중심국가인 辰韓(나중에 진조선으로 바뀜), 진한의 제후국으로서 요동과 요서지방에 위치한 番韓(나중에 번조선으로 바뀜), 한반도에 있던 馬韓(나중에 막조선으로 바뀜)이 삼한관경을 이루면서 2,096년이라는 엄청난 세월 동안 존속하였다. 고조선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삼한관경은 조선을 진한, 번한, 마한이라는 셋으로 나누어서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였고, 번한과 마한은 중앙에서 임명한 부단군이 통치하는 국가형태였는데 이는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제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의 원뿌리가 바로 삼한관경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무진년에 단군왕검이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으로 개국한 이래 마지막 47대 고열가(古列加) 단군에서 문을 닫을 때까지 2,096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니까 2,333년에서 2,096년을 제하면 고조선이 망한 시기는 기원전 238년이 된다.
이것은 삼한 중에서 단군이 직접 통치하던 중앙정부인 辰韓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망국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면 2,096년의 정확히 절반이 지난 시점인 기원전 1,285년에는 진한을 진조선으로, 번한을 번조선으로, 마한을 막조선으로 나라이름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진한을 계승한 진조선은 860년을 내려오다가 망하기 188년 전인 기원전 425년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었다. 대부여가 완전히 망한 시점은 기원전 238년인데 이 보다 1년 전인 기원전 239년에 웅심산에서 건국한 북부여가 대부여를 계승하였으며 시조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바 있는 해모수이다.
그러니까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는 기원전 195년 무렵은 진한의 땅에는 해모수의 북부여가 국통을 이어받아서 이미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새로운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북부여의 서쪽에는 번조선이 아직 그대로 존속한 채로 준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위만이 찬탈한 조선은 진한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가 아니라 그 제후국이라고 볼 수 있는 번조선이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이은 나라가 절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조선이 삼한관경 제도로 운영이 되어온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위만조선, 기자조선, 한사군과 같은 왜곡된 역사의 실상을 알 길이 없다. 참고로 고조선(진한)이 망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 역사에 등장할 때까지 북부여를 중심으로 동부여, 옥저, 동예 등 여러 나라가 이끌어온 약 200년의 시기를 역사에서는 열국시대(列國時代)라고 한다.
위만조선의 멸망
이때 (기원전 194년) 나라(번조선)를 찬탈한 도적에 불과한 위만은 나라이름을 그대로 조선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번조선의 위만정권이라고 해야 한다. 위만정권은 86년을 내려오다가 손자인 우거에 이르러 기원전 109년에 멸망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나라 무제의 침공 때문이었다.
한무제는 좌장군 순체, 우선장군 양복을 내세워서 수륙양군 57,000의 대군을 이끌고 위만조선으로 쳐들어 왔고, 1년간 항전하던 우거는 내부의 반란으로 죽고 위만조선은 붕괴하게 된다. 이때의 일을 사마천은 史記에서 遂定朝鮮爲四郡이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동명왕 고두막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서 사군을 설치하고자 북부여 땅으로 진격해 들어왔는데 이때 구국의 영웅이 등장하여 의병으로써 한무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고두막한이었다.
고두막한은 나라를 지킨 공으로 백성들의 인망을 얻어서 졸본땅에 졸본부여 또는 동방의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명(東明)이라고 하는 나라를 열었다. 말하자면 북부여 안에 졸본부여 혹은 동명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명왕은 고주몽이 아니라 바로 이 고두막한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로 왔다고 하였으나, 이는 동부여를 탈출하여 북부여로 온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만약 졸본부여로 왔다고 하더라도 주몽이 졸본부여를 세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졸본부여의 다른 이름인 동명국을 세운 동명성왕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두막한은 22년간 졸본부여의 동명왕으로 있다가 북부여의 해부루 단군을 다른 곳으로 쫒아내고 스스로 북부여의 단군이 되었다. 해부루 단군은 가섭원땅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나라를 다시 열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동부여이며, 그 왕통은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게 된다.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서 동부여에서 성장을 한 후 북부여로 온 것이다. 그가 북부여로 왔을 때 북부여의 단군은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 단군이었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잘못된 기록으로 인하여 동명성왕이 고두막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한무제의 침입과 그것을 물리친 북부여의 역사도 함께 사라지고 엉뚱한 한사군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한사군의 진실
한편, 한무제는 번조선을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중국사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때의 전쟁은 한무제의 패배였다.
왜냐하면 전투마다 참패하였기 때문에 전쟁에 출전한 장수들을 모두 참하고, 오히려 우거를 죽이는데 공헌한 번조선의 신하들을 한나라의 제후로 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장을 직접 본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서 그 이상을 기록할 수 없었다. 환단고기에서는 한사군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 재위 13년 계유년(기원전 108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漢劉徹(한유철)이 寇平那(구평나)하야 滅右渠(멸우거)러니 仍欲易置四郡(잉욕역치사군)하야 盛移兵(성이병)으로 四侵(사침)이라.’ 즉, ‘한나라 유철이 평나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조선 땅에 4군을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고두막한의 강력한 저항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천은 사군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였고, 위치는 더욱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사군은 한무제의 마음속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죽은 지 백 년도 더 지나서 나온 반고의 漢書나 地理志, 五行志 등의 여러 사서에 한사군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서에서는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이라 하고 있고, 지리지에는 낙랑, 현도 2군으로, 오행지에는 3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배구전에 이르기를 (중략) 한나라가 이를 나누어 3군을 설치하여 현도, 낙랑, 대방이라 불렀다. 통전에서 이르는 바도 역시 이와 같다.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네 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군으로 되어 있다 하였고 그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라고 하여 중국기록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한사군을 믿지 못하겠다고 써놓고 있는 것이다. 한사군에 얽힌 대략의 사정이 이와 같지만 우리는 한사군이 실재했으며, 그 이름은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며 그 위치는 한반도 북부라고 철썩같이 배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낙랑군의 실체
사기색은의 하본기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수성현(遂城縣)이 있는데 이곳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다’라고 나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마천은 4군의 이름을 이야기한 적이 없고, 후대의 사서에서 낙랑군이 등장하는데, 그런 까닭에 낙랑군은 바로 한사군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대표적인 지명이다. 한사군이 있었다고 가정을 하고 낙랑군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본다면 바로 위에 언급한 사기색은의 기록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낙랑군에는 수성현이 있어야 하고, 갈석산이 있어야 한다. 수성현은 수나라 때 역사를 기록한 隨書라는 책에서 창려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나온다. 바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이 그곳이다. 그곳에 갈석산이 지금도 있고,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이라는 표시가 있는 산해관도 있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는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이곳은 번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이 있던 곳과 매우 가깝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지금의 하북성 주변 요서지역에 번조선이 있었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며, 한무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고두막한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낙랑군은 원래 그곳에 있던 하나의 지명이었으나 후세의 사가들이 조작하여 한사군의 하나로 지어낸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거꾸로 지금의 하북성까지 모두 우리의 고대강역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사군 재한반도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은 중국사서에는 없는 내용이고 일본제국주의 역사학자 쓰다소우키치가 주장한 것을 그의 제자이자 우리나라 식민사학계의 태두인 두계 이병도가 ‘낙랑군고’라고 하는 논문에서 다시 인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정설로 굳어져 내려온 계기였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만행 때문에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시간에 한사군은 낙랑, 현도, 임둔, 진번하면서 그처럼 정력을 들여서 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가 이처럼 명확한 근거를 갖고 있음에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자기네들에게 불리한 기록은 일체 인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낙랑군고’에서 뭐라고 했는가? “낙랑군 수성현(遂城縣),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의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수(遂)자의 글자가 같다고 수성현이 황해도의 수안이라고 하는 이병도의 주장은 사실 ‘비정하고 싶다’라고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본인도 그러한 주장이 막연한 추측임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학계는 학문연구의 제1의 수단으로 실증사학을 표방하고 있다. 실증사학이란 실제적인 증거가 있어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재야사학계를 공격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어온 말이다. 실제로 뚜렷한 증거를 바탕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니 매우 그럴듯하고 일리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막연한 주장을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이 과연 실증사학인지 되묻고 싶다.
그의 주장이 이처럼 터무니 없건만 그의 그 한마디는 한국사학계의 바이블과 같은 것이라서 제자 중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수성현에는 분명히 갈석산이 있어야 하는데 수안에 어디 그런 산이 있는가? 그는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수안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그게 갈석산이라고 주장한다.
무슨 근거로? 갈석산은 갈석산이고 요동산은 요동산일 뿐이다. 갈석산은 중국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설악산, 지리산과 같이 유명한 산이다. 중국에서 만든 동북공정 지도에 보면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로 끌어들였다. 왜냐? 이처럼 낙락군이 황해도에 있다고 하는 자기네들로서도 차마 주장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것을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에 쉽게 편승한 것이다.
속으로 우리학계를 얼마나 비웃고 있겠는가? 그런데 그 지도에는 갈석산이 중국땅에 그대로 있다. 산을 옮겨올 수는 없으니까 이것만은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북공정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만들어준 것이나 진배가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잘못된 기록
그럼 이병도는 왜 낙랑군이 황해도 수안이라고 하였을까? 한민족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에 고정시키고자 하는 쓰다소우키치를 비롯한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에 세뇌된 탓이 크다.
삼국유사에도 고조선은 수도가 아사달로 나오는데 원래의 아사달은 송화강이 흐르는 하얼빈이건만 일연스님은 아사달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은 탓에 강단사학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주변에서 한사군을 찾고자 한 것이다.
평양은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로서 평양이라는 말이 지금의 평양으로 굳어진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삼국유사와 아사달, 평양의 문제는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겠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낙랑국은 평양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낙랑군과 낙랑국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강단사학자들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최숭이 평양근처에 세운 낙랑국은 그의 손자인 최리에 와서 고구려 대무신열제에 의하여 멸망한 실존 국가이다.
이것은 신화도 아닐뿐더러 낙랑군과는 하등 상관도 없다. 번조선에서 대부호였던 최숭이 재물과 사람을 데리고 대동강 근처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가 낙랑국이다. 낙랑국은 최숭이 원래 살던 곳에 있던 낙랑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낙랑산의 위치가 바로 낙랑군이 있던 하북성 창려현 근처이다. 그러니 낙랑군은 낙랑산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지만 그 위치는 절대 평안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
일제식민사학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평안도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단군고’라는 논문으로 교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서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변조하여 우리나라 상고역사를 거세한 장본인이자 식민사학 제1의 원흉이다.
석유환국이 석유환인으로 바뀌면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에서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로 뜻이 전혀 다르게 된다. 즉, 환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실존역사가 사라지고 환인이라고 하는 신화의 인물의 역사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글자하나 조작하여 우리나라 상고역사를 모두 날려버린 희대의 대 사기꾼이 바로 이마니시다. 점제현 신사비는 낙랑군의 속현인 점제현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을 위해 산신제를 지낸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인데 이것을 평안도 용강군에서 발견하였으니 낙랑군은 평안도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방이 탁트인 평야지대에 2천년 동안 아무도 못 본 것을 이마니시가 단번에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점제현 신사비는 이마니시가 조작한 거짓으로 밝혀졌다. 자기가 만들어서 몰래 갖다 묻어 놓고 처음 발견하였다고 사기극을 벌인 것인데 이것을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계에서는 그대로 진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눈만 뜨면 실증사학을 떠드는 강단사학자들의 가면 속에 감추어진 가장 비실증적이고 추한 모습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안도로 갖다 놓고 보니 현도, 임둔, 진번도 근처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함경도, 평안도북부에 아무렇게나 추정하고 그린 지도가 바로 아래의 지도이다.
이같은 엉터리 지도를 그려놓고 교과서에 실으면 진실로 둔갑하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학문권력이다. 민주사회에서 정치권력은 국민투표로 바꿀 수 있다지만 학문권력은 그럴 수가 없다. 스승에서 제자로 대를 이어가면서 공고하게 굳어진 공생관계는 누구도 깨뜨리지 못한다. 대통령도 못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결론
이처럼 한사군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웬만큼 관심을 가지고 정력을 쏟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사군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만리장성 동북방에는 고조선이라고 하는 거대한 나라가 2096년 동안 존재하였음에도 지금의 국사교과서는 기원전 2333년 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고 실제 내용은 전혀 없는 유령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에 의하여 위만이 세운 고조선이 멸망하였다고 하고 있다. 진조선의 서쪽 날개인 번조선의 멸망의 역사를 고조선의 멸망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것은 삼한관경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조선상고사에서 삼한관경을 말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을 뿐더러 전혀 연구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게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다. ‘위만조선도 식민지 역사요, 한사군도 식민지 역사니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것이다’라는 것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한국, 중국, 일본 사학계는 각기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사군의 재한반도설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의 상고역사 거세를 통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처럼 터무니없는 한사군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식민사학자들의 제자였던 이병도와 신석호 등이 해방 후 주류사학계를 장악하였고, 그 2세대, 3세대 학자들이 계속 대를 이어 그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지껄이고 있다. 조금만 세심하게 따져보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건만 학문권력을 이용하여 무턱대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사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지금도 자기네들의 주장과 어긋나는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면 심사과정에서 모조리 탈락한다고 한다.
고조선의 참 역사를 다룬 글들은 우리나라 역사관련 학술지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직폭력배만도 못한 이들의 행태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도저히 학자의 그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동북아 3국이 모두 이처럼 똑같은 소리로 떠들고 있으니 서양의 선진국 학생들이 배우는 세계사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지도가 마치 진실인양 교육되고 있다.
위 그림은 글렌코 힐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책에 있는 중국 한나라의 지도를 표시한 것으로서 만리장성이 한반도 내로 들어와 있고 한강 이북은 한나라의 영토라고 표시되어 있다. 바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지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시작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고, 문자, 언어, 문화 등 모든 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고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동포 2세, 3세 들이 지금도 전부 그렇게 배우고 있다.
그들이 조국의 역사를 얼마나 부끄러워하겠는가? 오늘날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이런 역사의식으로 바라본다면 한류(韓流)도 한류(韓流)가 아니라 한류(漢流)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북한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한다면 북한 땅을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할 명분도 별로 없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사군 문제만 바로잡아도 세계사 책이 다시 씌어지게 될 것이다.
한사군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상고사 왜곡의 핵심의 한 부분인 것이다.
<충북대 안병우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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