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5. 구이왕 대방 시대
구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었다.
234년 구수대왕의 사후에 만주 부여성에 있던 백제 구이대왕仇台大王이 만주 요양시遼陽市 태자하太子河 대방성帶方城에 진출하여서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구이왕은 요동반도 복주의 부여성 출신이라서 부여씨라 하였고 이는 그 아들 고이왕과 비류왕과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으로 이어진다.
[삼국유사 / 남부여]에서 고이대왕의 즉위년을 기왕에 알려진 234년이 아니라 낙초樂初 2년 기미년 239년이라 하였으므로, 구수왕의 아들인 사반대왕의 즉위년을 238년으로 보아야 하고, 구수대왕(재위 214~234) 서거 뒤에 234년에서 238년까지 다스린 백제대왕이 비게 되므로 그 자리가 구이대왕 위치가 된다.
백제가 남긴 백제대왕의 대위는 [신찬성씨록]으로 보면 도모왕인 소서노를 1세로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문주왕을 도모왕 24세손, 혜왕을 도모왕 30세손이라고 했다.
出自百濟國都慕王24世孫汶淵王也....出自百濟國都慕王30世孫惠王也
따라서 삼국유사의 대위와 비교하여 2대의 차이가 있는데 시조로서 도모왕을 추가하면 그외로 1분의 백제왕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편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6대 구수왕은 10세손이라고 했는데 대위수가 4대나 차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貴首王也 고대에 칠七과 십十을 구별하기 어렵게 썼으므로 이를 7세손이라고 교정해서 보면 그의 앞에 도모왕 소서노 한 분만 있다.
따라서 구수왕 뒤에 사라진 백제왕 한 분이 있는데 바로 8대왕인 구이왕이다.
만주 대방 고지의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후비로 들였고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서隋書]와 [북사北史]의 <백제전>에서 동명의 후예에 구이가 있어 대방고지에 백제를 세우고 공손탁의 딸을 처로 삼고 동이강국이 되었으며 처음에 백가였으므로 백제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 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한편 170년에 등장한 공손탁이 190년에 요동국을 건설하고 고구려 영토를 침탈하였다.
요동국을 치기 위해서 위나라는 진제가 된 사마선을 보내어 238년에 멸망시켰다.
이때 삼국지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공손강이 건설한 낙랑, 대방은 의무려산 동남쪽이며 지금의 요하 서쪽이다. 왜국의 신무천황이 왜여왕 히미코의 사자로 즉위전에 중국에 들어왔는데 바로 이 대방을 통해서 들어왔고 238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237년 위나라 명제는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몰래 바다건너 보내서 대방군과 낙랑군을 만들었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들이 중국관직과 관복을 받았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自服印綬衣?千有餘人.
요동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위나라 명제는 바다 건너로 한예 땅에 유흔과 선우사를 파견하여 허위로 대방군과 낙랑군을 세웠고 한예를 선무하였는데 바로 백제를 선무한 것이다. 당시에 요동국과 한예백제(복주의 부여백제)의 연결을 끊어놓고 고구려 군대까지 동원하여 위나라는 238년 요동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246년에는 고구려를 쳐서 동천왕을 패퇴시켰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할하였으므로 한국의 진한 8국을 잘라 낙랑에 속하게 하여 다스리려 하였다.
한국 신지가 격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쳤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구이왕 시대 238년에야 위나락 요동국을 멸망시켰으므로, 237년 요동반도에 들어온 대방군의 기리영은 요동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온 소규모 병력이며 고작 외교대표부 수준이었고 군사력이 아니라 뇌물로서 한예와 구이왕을 선무하였던 것이다.
구이왕은 위영지령고분이라고 부르는 요양시의 벽화 고분에서 위영지령(魏令支令)이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공손탁이 준 작호라면 위나라가 앞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영지령은 위나라가 대방태수를 통해 구이왕에게 책봉해 준 것이 되며, 영지성은 하북성 난하 동쪽인데, 당시 공손탁의 영역으로서 백제왕에게 뺏아 가지라는 의미가 있다.
구이왕 벽화고분은 데 황해도의 안악3호분과 벽화 모습이 거의 같고 다만 행렬도의 규모가 안악3호분보다 조금 작다. 특징적으로 제2부인인 공손씨 벽화가 남아 있는데, 바로 공손탁의 딸을 부인으로 받은 구이왕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구이왕묘가 있는 곳은 지금 요양시 북쪽 교외인데 이 곳에서 166m의 고대 포석대로(鋪石大路)가 발굴되었다. 이는 호사스러웠던 산성인 것이다.
이 산성은 태자하가 감싸고 또 호성하를 파서 보호했는데 "머리빗"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비사성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산성의 서쪽과 동쪽에 호성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자보다는 규모가 커서 호성하(護城河)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산성 동쪽에는 초사하(肖夾河)라는 지명이 보인다. 산성을 남쪽에서 방어하는 호성하의 시작에서 끝부분까지 직선거리, 즉 성의 장축이 4000m이다. 남북거리는 1500m이다.
산성 남쪽에는 평양 안학궁과 비슷한 평지 토성이 있는데 북변의 길이가 1120m이고 남북으로는 450m이다. 안학궁은 600m x 600m다.
이 성의 이름은 바로 대방백제 구이성(仇爾城)으로 보이는데, 구이성과 발음이 비슷한 고려성으로 요양시 고적지에 그 이름이 전해 내려왔고 지금은 상왕가(上王家)라는 곳이다.
구이왕성은 근초고왕이 세운 평양 안학궁과 비교된다. 안학궁은 600m x 600m의 정방형이다.
안학궁의 성벽은 약 10m가 넘는 토축성벽이다. 특히 남쪽 성벽은 15m가까이 된다.
요양시 구이왕성의 남쪽 토축성벽도 10m가 넘는다. 구이왕성의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심양의 봉천성 성벽도 문화혁명 때 없애버린 기록이 있다.
동남각 성벽이 특이하다. 성문앞에 특별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군사시설이거나 상인들의 시장일 것이다.
안학궁의 북쪽 성벽은 잘 남아있는데 구이왕성은 겨우 그 흔적만 보이고 확실치 않다. 성벽은 판축법으로 쌓으므로 조사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237년 한예를 대표하여 백제 부여왕 구이왕이 요양시에서 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위나라는 공손탁이 평주목사를 자칭하면서, 위나라의 작호를 요청했을 때에 목사나 자사나 태수보다 아래인 고작 영령향후를 주었다. 공손탁이 기분 나쁘다고 그 책명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현령급인 위-영지령을 받은 백제 구이왕이 당시로서 책명을 약하게 받은 것이 아니다. 근초고왕은 진나라로부터 낙랑태수 백제왕을 책명받았다.
238년 구이왕이 죽었다. 구이왕은 개루왕(재위128~166)의 아들이라 했으니, 설령 유복자라고 해도 238년이면 이미 72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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