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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비왕의 일본 천황 시대
사비왕(재위238~239)
238년 사비왕(202~268)이 즉위했는데 사비왕은 구수왕의 아들로서 일본에서 사마네현을 다스리다가 백제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백제에서 다시 일본에 가서 일본 제 5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이 되었다.
일본에서 이름은 미마쯔히코카에시네御眞津日子詞惠志泥命이라고 하며, 효소천황의 능은 사대주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를 모시는 하압신사下鴨神社에 붙어있다.
나라현 압도하팔중사대주명신사...사대주신의 신사는 이즈모 미호신사도 있다.
하압신사
압신의 뜻은 압록강에서 왔다는 것으로서 고대의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다.
즉 백제 사비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하여 통치를 하던 곳도 구이왕과 마찬가지로 고대 압록강인 요양시 대방성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통치하던 곳은 팔중성八重城이니 시마네현이다.
구수왕이 서거할 때에 사비왕의 나이는 32세였다. 어리지 않았다. 초고왕 계열을 대표하여 백제왕을 구이왕계로부터 다시 이어받을 만큼 실력이 있었다. 사비왕은 백제에서 최초로 연호를 세웠는데 낙초(樂初)라고 하였다. 이는 [삼국유사/남부여]의 기록이다.
또한 사비왕은 옥저고지에 사비성을 세웠다.
심양시 동쪽 끝에 무순시와 경계가 되는 사수(泗水)가 있는데 그 서남쪽으로 고려된다.
이 사비성 지역에서 바로 북쪽에는 고구려 석대자산성이 있고 동쪽에는 발해 남해부성이 되었던 무순시 고려산성이 있다. 사비성지에서 혼하 남쪽에는 상백관 고성이 있는데, 그 부근에서 동한시대 고분이 많이 발굴되었다.
백제 사비왕은 사비성에 있다가 대방성의 고이왕에게 239년에 쿠테타를 당하여 폐위되었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인 구이왕의 아들이고, 사비왕은 개루왕의 아들인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의 아들이다.
즉 초고왕계와 구이왕계의 백제 본토 권력 싸움에서 초고왕계가 밀렸다고 할 수 있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는 구수왕 대국주신大國主神과, 칸야타데히메神屋盾比賣命의 아들이며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이다.
칸야타데히메는 일본에서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백제 여인인데 칸은 카무라고도 읽으므로 역시 압록강 출신으로 볼 수 있으니 구이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사대주신事代主神이 일본에서 돌아온 구수왕을 대신하여 이즈모出雲에 살며 일본을 통치하다가 대화大和를 거쳐 백제로 돌아가서 238년(삼국유사)에 사반대왕沙伴大王이 되었다가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에게 백제를 뺏기고 다시 일본으로 왔다.
백제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대화大和 동쪽 미시마三嶋에 살던 세야타타라勢夜陀多羅比賣를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須岐比賣命(219~273)를 낳았는데, 훗날 신무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일본은 효소천황과 사대주신을 별개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효소천황의 이름은 카에-시네(詞惠志泥, 香殖稻)라고 한다. “카에”는 우리말 “껴”에 해당하는데 그의 궁성 이름은 와키가미掖上宮이고 와키掖의 동사動詞가 “끼다.(옆에)”이다. 그러면 우리식으로 “껴시네”가 되는데 사실은 “끼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켜시네”, 즉 “혀시네”가 원어原語로서, 불을 “밝히다照昭”의 우리말 고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우리말로는 “혀시네”왕이고 한자로는 조소왕照昭王이 된다.
조소왕이 한자어로 개작되어 효소왕孝昭王이 된 것이다. 그가 묻힌 곳은 “밝다산博多山”이다.따라서 그의 우리말 이름은 “밝혀시네”왕이이다.이는 신라왕 박혁거세와 비슷한데 부여어로 고려된다. 박혁거세가 부여에서 왔다는 주장이 《한단고기》에 실려있다. 부여의 영역이었던 내몽고 서요하의 천산 지역에서는 지금도 남자 무당은 박博이라고 하며, 여자무당을 이도칸伊都干이라 부르는데 굿을 하여 구사치병駒邪治病한다.
그의 백제 시호인 사비왕은 우리말 빛, 빗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새빛성에서 즉위하여 새빛왕(사비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혀시네왕이 된 것이다.
사대주신에서 대(代)를 시로로 읽는데 이는 흰색을 의미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초고왕의 증손자인 신무천황이 구수왕의 아들들을 향해 전쟁을 시작했다.
연오랑 세오녀는 일본 오사카에서 수진국(秀眞國)을 세웠다. 그러나 초고왕 스사노오의 침략으로 연오랑은 시코쿠(四國島)로 도망하고 세오녀는 포로가 되었다. 뒤에 세오녀는 초고대왕의 아들을 낳고 초고대왕의 팔중궁에서 탈출하였는데, 야마타이국을 규슈에 세웠고 히미코 여왕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천조대신 아마테라스로도 알려졌다. 초고대왕이 히미코의 왜국 왕권을 인정하여 주몽검을 내려주었다.
초고대왕과 세오녀의 증손자가 신무천황인데 초반에는 구수대왕의 아들들에게 밀려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백제 땅을 거쳐서 중국에 사자로 다녀오고 큐슈에 있던 왜여왕의 책봉을 받아왔는데 238년의 일이다.
이전에 히미코코여왕은 초고대왕과 자신의 아들 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가 일본의 대화大和를 통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첫째 신녀의 아들 아메노호히天菩比神를 야마대국의 사자로서 백제 본토의 구수대왕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복형인 구수대왕으로부터 영지를 받고 이즈모出雲에 정착하였다.히미코여왕은 그후 다시 아메쓰쿠니다마天津國玉命(122~178)의 아들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구수대왕에게 보냈는데, 역시 구수대왕의 사위가 되어서 돌아와 큐슈에 영토를 받았다. 히미코여왕은 다시 세번째로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160~210년)을 아메노토리후메天鳥船命(149~206)와 함께 파견하였다. 이 다케미카즈끼는 206년경에, 오사카에 있던 4살박이 사대주신事代主神(202~268)을 겁주어서 힘으로 밀어냈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그보다는 백제 본토에서 사대주신 사비왕을 본토로 불러들이고 의덕천황에게 대화 통치를 맡겼던 것이 된다.
신무천황이 중국에 왜여왕의 사자로 다녀온 238년에, 신무천황은 대화大和의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초고대왕의 아들인 대년신의 아들로서 쿠니타마신大國御魂神이자 안녕천황安寧天皇이다.)와 전쟁을 벌이는데, 신무천황과 함께 대화大和 정벌에 나선 이트세五?命(184~238)가 전사한다.
결국 신무천황이 244년에 대화大和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와 싸워서 에시키를 전사시키고 승리한다.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의 아들로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友命이다.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으로 기록되었다.
이 대화 정벌 전쟁에서 244년에 마침내 승리하니, 안녕천황安寧天皇,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이 항복하였고, 그 후예는 물부련物部連이 되었다. 같은 초고대왕의 후손으로서 구수대왕계를 배반하고 협력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 신무천황은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의 딸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황후로 취한다.
그러나 244년 이때까지도 대외적인 왜여왕은 큐슈에 있던 히미코였고, 실제 통치는 증손자인 칠뜨기 신무천황이 오사카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후 247년에 히미코가 죽으니, 신무천황이 왜왕으로 즉위하면서 히미코의 능을 거대하게 꾸미고, 무려 백명의 노비를 순장하였다.
《위지왜인전》 卑彌呼以死 大作塚 逕百餘步 徇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247년 히미코 여왕 사후의 혼란은 《위지왜인전》에 간략히 기록되어있다. 다시 남왕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다시 서로 죽였다.
신무천황은 257년에 죽었는데 247년 즉위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반란으로 큐슈로 후퇴하였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때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 안녕천황, 효소천황(사반왕), 효안천황(사반왕 아들)이 모두 지방왕으로 존속한 것이고 왜여왕 일여는 겨우 257년에 13세로 즉위하였으니 10년간 극심하게 혼란했던 것이다.
다시 여왕을 세우니 비미호의 일가인 일여로서 13세에 왕이 되었고 나라가 평온해졌다.
[위지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王,國中遂定
일본사서에서 제 2세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은 이스케요리의 아들이다. 누나가와미神沼河耳命라는 이름은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이름으로 보아서 그는 대화大和로부터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로 257년에 쫓겨가서 죽은 것이 된다.
신무천황이 257년에 죽었고, 257년에 일여가 즉위했으므로 수정천황이 독자로 즉위할 수가 없다. 한 지방왕이 되어 할거한 것으로 고려된다.
제 3세 천황으로 기록된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은 시키즈히코타마데미師木津日子玉手見命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초고대왕의 손자이며 270년에 죽었다. 244년 신무천황에게 신무천황에게 항복한 니기하야히邇藝速日命를 안녕천황으로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니기하야히는 현재 天照國照彦天火明櫛甕玉饒速日尊으로서 여러 신사에서 모셔진다. 안녕천황의 치소治所였던 카타시호片監의 우키아나궁浮穴宮은 신무천황이 도읍한 가다이片居로서, 신무천황이 이 가다이를 이와레伊波禮라고 고쳤다.
제 4세 천황으로 기록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友命은 구수대왕의 아들이며 244년 전사하였다.
제 5세 천황으로 기록된 것이 효소천황, 즉 사비왕이다.
제 6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안천황(222~298)은 사비왕의 아들이며 일여가 죽은 후에 일본을 다스렸고 대물주신이라고도 하였다.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도니 효원천황(228~273)도 사비왕의 아들이며 그의 딸이 왜여왕 일여로서 제 9세천황 개화천황이기도 하다.
제 8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은 선비족에게 밀려나 일본에 왔던 부여왕 의려依慮이다.
제 9세 천황으로 기록된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 와카야토네코히코오호히히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 천황은 256년 신무천황이 죽은 뒤에, 13살에 왜여왕으로 즉위한 일여다. 사비왕의 손녀이면서 히미코의 종녀宗女라고 하였는데, 가야국 거등왕의 공주인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의 딸이다. 히미코 여왕, 즉 세오녀가 신라 땅인 포항에서 건너갔지만 본래 출신은 가야였던 것이다. [위지왜인전] 卑彌呼宗女 壹與
효소천황 사대주신은 나라를 양보한 전설이 있는데 이후 일본에서 한가로이 지낸 것으로 고려된다.
사대주신 사반왕 말년의 여유로운 모습
사반왕의 일본 후손은 효원천황, 효안천황 이외에 씨족으로 대춘일조신, 길전련, 소야조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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