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21. 무왕(600~641)
무왕(武王)은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3년(602) 가을 8월에 왕은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아막성(阿莫城)<다른 이름으로는 모산성(母山城)이라고도 하였다.>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 진평(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막성은 남원시 운봉면이다.
신라가 소타성(小陀城), 외석성(畏石城), 천산성(泉山城), 옹잠성(甕岑城)의 네 성을 쌓고 우리 강토를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讐)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네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과 무은(武殷)이 무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다.
해수는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대택(大澤) 가운데로 퇴각하여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서 갑옷 입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큰 대택에 이르자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히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귀산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項)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며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더욱 분발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신라 진평왕기]에는 이 기록이 없다. 따라서 553년 소타, 외석, 천산, 옹잠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소타는 경기도 소래산으로 고려된다. 즉 경기도 안산의 당항진 진출이 되는 것이다.
교하현을 천정구현(泉井口)이라고 했었으므로 천산으로 고려되고 그 서쪽인 개풍군에서 백제의 매복전이 있어났던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신라는 다시 물러나 임진강 남쪽만을 지켰다.
그 결과로서 백제는 예성강 동편에 각산성을 쌓는다.
6년(605) 봄 2월에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신라가 동쪽 변경을 쳤다.
예성강 하구인 황해도 백천군 각산진으로 고려한다. 각산성은 경상남도 사천에도 있고 황해도 백천군에도 있다.
7년(606) 봄 3월에 서울王都에 흙이 비처럼 내려雨土 낮인데도 어두웠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어 기근이 들었다.
8년(607) 봄 3월에 한솔(~率) 연문진(燕文進)을 수(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고, 또 좌평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양제(煬帝)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도록 하였다.
여름 5월에 고구려가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하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석두성은 황해도 토산군 토산읍으로 고려된다. 석두사가 있었다. 당나라와 신라전에서도 석두성이 나온다.
송산성은 개성일 것이다. 예성강 하구에서 건너와서 북행한 것이다.
따라서 602년 전투 이후로도 백제와 신라는 계속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9년(608) 봄 3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문림랑(文林郞) 배청(裵淸)이 왜국으로 사신이 되는 갔는데奉使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12년(611) 봄 2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므로 왕은 국지모(國智牟)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가 행군 기일軍期을 요청하였다. 양제는 기뻐서 상을 후히 더하여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보내 와서 왕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적암성(赤巖城)을 쌓았다.
겨울 10월에 신라의 가잠성(~岑城)을 포위하여 성주(城主) 찬덕(讚德)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하였다.
가잠성은 북한산주에 가까운 곳이다. 강원도 철원군 관인면의 가산산성으로 고려된다.
13년(612) 수나라의 6군(軍)이 요하(遼河)를 건넜다. 왕은 국경에 군비를 엄히 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썼다. 여름 4월에 궁궐 남문에 벼락이 쳤다. 5월에 홍수가 나서 인가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기었다.
17년(616) 겨울 10월에 달솔(達率) 백기(~奇)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강화도 길상면의 대모성산으로 고려된다.
19년(618)에 신라 장군 변품(邊品; 북한산주 군주) 등이 가잠성(~岑城)을 공격해 와서 이를 회복하였는데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22년(621) 겨울 10월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24년(623) 가을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勒弩縣)을 쳤다.
장항구진이라고 하던 경기도 안산으로 고려된다.
25년(624) 봄 정월에 대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高祖)는 그 성의를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여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岐岑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懸城), 혈책성(穴柵城) 등 여섯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속함성은 지리산 동쪽 함양(咸陽)이다. 함양 일대 6개 성이 백제에게 속한 것이다.
26년(625) 겨울 11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7년(626)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고, 인하여 고구려가 길을 막고 당나라上國에 조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와서 조서를 내려 우리와 고구려가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王在城)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東所)를 붙잡아 죽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강원도 평강에 왕재산이 있다. 따라서 강원도 평강성으로 고려한다.
28년(627) 가을 7월에 왕은 장군 사걸(沙乞)에게 명령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회복하려고 크게 군대를 일으켜 웅진(熊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웅진은 사비성 시대 북방을 말하며, 본래 문주왕의 고마성이었고 강원도 안협군이다. 백제는 임진강 하구를 확보하여 신라의 당나라 교류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신라 왕 진평(眞平)이 이를 듣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위급함을 고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김포반도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가을 8월에 왕의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은 백제가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서로 빈번히 침략·토벌한다라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왕이 대대로 군장(君長)이 되어 동쪽 번병東蕃을 위무하고 있다. 바다 귀퉁이海隅가 멀고멀며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지만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서로 잇따르고, 더욱이 경의 아름다운 꾀를 생각하니 심히 기쁘고 위로가 되도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寵命을 받들어 강토에 군림하고 정도(正道)를 넓히려고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천성과 천명性命을 이루어 모두로 하여금 또한 평안하게 하고 있다.
신라 왕 김진평(金眞平)은 짐의 번국의 신하요 왕의 이웃 나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를 믿고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은 바라는 바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신라의 사신에 대해 함께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하여 모두 화목하겠끔 하였다. 왕은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이웃 나라와의 정을 함께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그치라.』
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실제로 서로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29년(628) 봄 2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가봉성(柯峯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가봉성은 가잠성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30년(629)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1년(630) 봄 2월에 사비(泗比)의 궁궐을 수리하여 고치고 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거둥하였다.
경기도 연천군 옥산리에 모정산茅亭山이 있다. 모정이 백제 무왕의 다른 이름이므로 백제 무왕이 다녀간 것이 된다.
여름에 가물어 사비의 공사를 그만두었다.
가을 7월에 웅진으로부터 돌아왔다.
32년(631)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3년(632) 봄 정월에 맏아들 의자(義慈)를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2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쳐 쌓았다.
함양군에 마천면이 있다.
가을 7월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왕은 생초(生草)의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함양군 동쪽 산청군에 생초면이 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4년(633)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西谷城)을 공격하여 13일만에 함락하였다.
35년(634) 봄 2월에 왕흥사(王興寺)가 낙성되었다.
익산 미륵사로 고려된다.
그 절은 강가에 위치하였고,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하였다. 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는 섬을 축조하여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기었다.
37년(636) 봄 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比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奇巖怪石이 들쭉날쭉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琴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 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여름 5월에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사졸들을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군사를 거느리고 엄습해 와서 이를 쳐서 무찔렀다. 우소는 큰 돌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다. 6월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38년(637) 봄 2월에 서울王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3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철제 갑옷과 조각한 도끼彫斧를 바쳤다.
태종이 후히 위로하고 비단 도포錦袍와 채색비단 3천 단(段)을 하사하였다.
39년(638) 봄 3월에 왕은 빈(嬪)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40년(639) 겨울 10월에 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금제 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41년(640) 봄 정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월에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요청하였다.
42년(641)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夫餘璋)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먼 나라를 위무하는 도는 총애하여 내리는 칙명寵命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사람의 최후를 장식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도 막힘이 없는 것이다.
고인이 된故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 부여장(夫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멀리서 정삭(正朔)을 받고, 보배를 바치고 글월을 올려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는데 문득 죽으니 깊이 슬퍼하고 추도한다. 마땅히 일상의 예에 더하여 애도의 영예를 표하노라.』 태종이 왕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렸다.
639년에 무대왕이 익산益山 미륵사지로 천도를 시도하였다.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로 천도하여 새로 사찰을 지었다. 그러나, 639년 겨울 11월에 크게 번개치면서 비가 왔는데, 제석정사帝釋精舍, 법당法堂, 부도浮圖들이 다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하였다,
지모밀지(地慕蜜地)는 금마저(金馬渚) 지반현(支半縣=당나라 도독부시대때 금마의 칭호)의 다른 표기니 익산(益山)이다. 무대왕의 능이 제석사 터에 있는 쌍릉이다. 모밀지(慕蜜地)에서 [일본서기]의 모정왕(茅渟王)이 유래한다. 무광왕(武廣王), 무강왕(武康王)과 같고, 시호는 무대왕(武大王)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모정왕도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무대왕이 법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에서 민달천황의 아들들이라고 기록되었던 많은 형제들이 사실은 위덕대왕과 법대왕의 아들들로 마구 섞여 있다. 민달천황도 흠명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실제는 그 형인 성명대왕의 아들이었다. 확실하게 법대왕의 아들로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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