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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비운의 천재 의자왕(641~660)
1. 구주백제 왜왕과 일본 서명천황 시대
2. 백제 의자왕시대
3. 의자왕시대 일본
1. 구주백제 왜왕과 일본천황시대
서기 600년 법대왕이 역시 1년만에 서거하고,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옮겨가면서,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 8살의 아배阿輩 왕자가 새로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배왕자가 뒷날 서명천황이 되고 또 의자대왕이 되었다.
백제 무대왕은 아배阿輩 왕자에게 후비로서 딸을 주었는데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 무대왕을 제명천황과 효덕천황의 부왕으로서 모정왕茅渟王으로 기록했다.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 백제 무대왕인데 서동을 마동이라고 하며, 이 마동과 모정왕의 발음이 관련된다.
8살의 아배阿輩 구주백제왕이 수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수서隋書]에서 서기 600년의 왜왕에 대하여 성은 천天(=阿每)이고, 이름 (字)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라고 했는데, 이 왜왕은 바로 서명천황舒明天皇(구주백제왕 재위600~629, 일본천황 재위629~641, 백제대왕 재위641~660) 이름이다. 서명천황의 능비는 오기나가타라시히로누카명息長帶廣額命이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오기나가息長는 시가현滋賀縣의 지명이고, 어머니 다가라왕寶王(~618)이 태어난 고향일 것이다.
[수서]의 다리시多利思는 대帶의 일본 발음이다. [고사기]에 대帶를 다라시로 읽으라고 했다. 이를 [일본서기]에 옮길 때는 족足으로 바꾸어왔다.
북고北孤는 비고比古, 즉 일자日子다. 따라서 다리시북고는 대일帶日, 또는 족일足日이다. 광액廣額의 광廣은 당시 구주백제 광국廣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액額은 우리말 발음 “아이”가 의자대왕의 호인 아히阿輩에 해당한다.
또 그의 호는 아히-계미阿輩鷄彌라고 했는데, 계미鷄彌는 우리말로 “닭미”로서 서명대왕의 호칭이었던 다무라황자田村皇子와 같은 말이다.
아히阿輩은 액額인 것이다. 액전촌額田寸은 누카다무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의 왕비도 계미鷄彌라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닭미로 읽으면 추고천황의 딸로 기록된 다미왕多米王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다메田眼로 기록했는데 똑같은 말이고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기록이 있다.
단, 추고천황이 536년생이고 다미왕이었던 다카라황녀寶皇女 즉, 황극천황皇極天皇은 594년생이므로 추고천황이 58세에 낳은 것이 되고, 추고천황의 남편인 민달천황은 585년에 죽었기 때문에 의자대왕비인 다미왕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서명천황은 이미 600년에 수나라와 교섭하여 스스로 왜왕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당시 왜왕의 후궁이 6~700명이라고 하였다. 의자대왕이 종국에 백제 사비성에서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전조가 보였다.
즉, 수나라와 교류한 600년의 왜왕은 겨우 여덟살의 구주백제 의자대왕이었다.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600년의 국서에서 하늘을 형이라 하고 태양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해뜨기 전에 정사를 보고 해가 뜨면 일을 마치고 동생(즉 태양)에게 맡긴다. ”고 하여 수나라 문제를 왜왕의 동생격인 태양에 비유하였다.
倭王以天爲兄,以日僞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
[수서]의 기록에 이때 600년에 이미 의자대왕은 구주백제에 12관제를 시행하였다. 덕德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용하여 대덕大德,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예大禮, 소예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 등으로 12관제를 만들었다.
구주백제가 백제의 관위를 버리고, 스스로 관제를 만든 것은 본토백제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그를 섬긴다고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기록했는데, 스스로 위덕대왕 이후의 적손으로서 본토백제 무대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는 그가 무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607년의 국서에서는 더욱 광오한 표현으로, 수양제를 화나게 하였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하였다.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국서에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뜨는 태양이, 지는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게다가 수나라 양제를 지는 태양으로 놀렸으니 수양제가 화를 낸 것이다.
608년 수양제는 배청裴?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수나라 사자 배청은 백제를 거쳐서 죽도竹島(=진도珍島),남망라국南望羅國(=남해도南海島), 쓰시마都斯麻國(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支國)를 지나 큐슈 북부의 축자竹斯國에 상륙하였다. 그 동쪽에 중국인들이 사는 진왕국(秦王國)이 있었으니, 침류대왕 때부터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큐슈 동해안)에 달하니, 왜왕倭王이 소덕(小德)이라는 벼슬을 가진 아배이(阿輩台)를 마중시켰다. 이는 의자대왕과 같은 아배(阿輩)를 사용하니 왕자였을 것이다.
이 큐슈 동해안에서 수나라 사자 배청은 왜왕을 만나고 돌아갔다.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에는 수나라 사자가 가지 않은 것이다.
600년 기록의 왜국 수도는 야먀퇴(邪靡堆), 야마대(耶馬臺)였다. 지금의 오오이타현(大分縣) 나가쯔(中津市) 야마쿠니가와(山國川)로 보아서 나가쯔시(中津市)가 당시 의자대왕의 구주백제 수도 위치이다.
한편 600년에 의자대왕의 태자로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가 기록되었다. 리利가 이름이고, 가미다(=神田)-불리(佛)는 다리시-북고와 같은 경칭일 것이다. 가미다神田는 큐슈九州 교토군京都郡 가미다정神田町의 지명이다.
이곳 주변에 전방후원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서 의자대왕의 동생으로 중진왕(中津王)과 다량왕(多良王)이 있다. 중진왕中津王은 구주백제의 중진시中津市를 다스리고, 다량왕多良王은 큐슈 다라국多羅國, 구마모토熊本城를 통치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쿄토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 축자(筑紫)=(후쿠오카福岡市)와 지마군島郡(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來目皇子)는 이듬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옛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또다시 승리하여 당마황자의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603년 초에 헌법 17조가 일본에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으로서, 일본 천황의 보좌역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나이어린 조카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마굿간(廐戶)을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국서를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국서를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는 큐슈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일본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준동할 것을 염려했는지,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조정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위덕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서명천황 의자왕은 구주백제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을 통하여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天智天皇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天武天皇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서명천황이 죽을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큐슈의 구주백제에서 대화조정으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이후 구주백제왕은 의자왕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제명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제명천황의 아들인 부여풍장은 대화조정으로 들어가고 중대형황자가 남아서 동궁이라고 하였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隆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조정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큐슈(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큐슈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였을 것이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오사카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의자대왕은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본토백제로 향했다.
이때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세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구주백제, 일본을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이다.
삼단의 방형제단은 백제와 구주백제, 그리고 대화조정을 상징하는 것일까?
2.백제 의자왕시대
[삼국사기]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의자왕은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재위 33년(632)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2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왕은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서 사형할 죄死罪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미후성은 충청북도 청주의 미호천변으로 고려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이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서울王都에 전달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3년(643)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화친(和親)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당항성은 안산으로 고려된다. 장항구(獐項口) 성이라고도 했었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 왕 덕만(德曼)선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4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은 사농승(司農承)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니 왕은 표를 받들어 사례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5년(645) 여름 5월에 왕은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김유신전]에는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고 하였다. 이는 고령군의 가혜아성, 성산군 등으로 고려된다.
7년(647) 겨울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무산성(茂山城)은 전라북도 무주군이다. 감물성은 김천시(金川市)로 고려된다. 동잠성은 영동군(永同郡)으로 고려된다.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요거성은 경기도 파주 거유령으로 고려하여 현재 파주 성산 부근으로 고려된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자, 은상은 이롭지 못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에 우뢰가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한탄강 지역의 전투다.
11년(651)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여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12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3년(653)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15년(655) 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여름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佛宇을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북악 오함사는 황해도 토산군(옛 오사함달)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을 7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마천성은 지리산 동북쪽에 있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신라기]에는 1월에 신라 북쪽의 33성을 탈취하였으므로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기벌포는 소부리주에 있고 이는 충청남도 금강 하구로 고려된다. 당시에는 백강이라고 하였다.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죽었다.
19년(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왕의 서자 41명은 많은 것이다. 문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구주백제왕 시절에도 시녀가 6~700명이었다. 그러니 41명의 서자가 일본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국 규슈와 일본에서 들어온 의자왕의 서자들이 왜국 출신으로서 백제 땅에서 인화를 이루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멸망의 원인은 신라군의 죽음을 무릅쓴 단결과 백제의 상하부조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에는 태자 효(孝)가 있었고 뒤에 태자가 된 융(隆)이 있었다. 이들은 의자왕의 백제 왕후가 낳았을 것이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의 두 성을 쳤다.
동잠성은 영동(永同)으로 고려된다.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比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신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신라에는 공주나 기군이 없다. 이는 백제의 공주 기군을 의미하는데 바로 현재의 공주다.
또한 현재의 공주가 당시 백제 웅진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670년에 서북에서 옮겨온 웅진이 현재 공주에 들어간 것이다.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생초진은 경상북도 산청군이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20년(660) 봄 2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泗比河)의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여름 4월에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의 저자 사람들市人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났는데 마치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여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5월에 바람과 비가 갑자기 불어 닥쳤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6월에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野鹿과 같은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서울王都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고 하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세 자尺 가량의 깊이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新月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國家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까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백제를 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隅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덕물도(德物島)는 덕적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적도가 아니라 개성시 동남쪽 덕물산(德物山)이다.
[신당서/백제기]와 [신당서/소정방전]에는 웅진강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는 또 당시 의자왕 도읍을 진도성(眞都城)이라고 하였다.
自城山濟海.百濟守熊津口,定方縱擊,虜大敗,王師乘潮帆以進,趨 "真都城" 一舍止.虜悉拒,復破之,斬首萬餘級,拔其城.義慈挾太子隆走北鄙,定方圍之.
웅진강 입구에서 소정방이 크게 이기고 물을 따라 올라가서 진도성(眞都城)의 30리 앞에서 멈추었다. 다시 만여명을 죽이고 성을 함락했다. 의자욍과 태자가 나라의 북쪽 경계로 도주했는데 소정방이 포위했다.
[책부원귀]에는 역시 웅진강구이고 역시 진도(眞都)라고 하였다. 백제대장 녜식(~植)이 의자왕을 이끌고 항복했다고 추가했다.
[삼국사기] 원문에도 진도성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진도성이 속해있다.
근자에 자치통감을 이용하여 진도성을 기도성(其都城)이라고 고쳐적기도 한다.
그러나 문장을 똑바로 보자. 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북으로 도주하였다. 사비성은 의자왕이 도주한 후에 항복하는 것이며 또한 항복하는 것을 발기성(拔其城)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의자왕이 싸우다가 도주한 진도성은 소정방에게 함락되었고 부여성은 미처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후에 항복하였다.
여기서 백제 수도는 하나가 아니라 동서양성이었다는 기록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 其王所居有東西兩城
[신당서] 王居東西二城
즉 임진강의 진도성이 왕이 거하는 두 성의 하나였다고 고려되는 것이다.
웅진부의 웅진성은 훨씬 북쪽에 있어서 북방성이다.
고마성, 혹은 거발성인 안협군과 진도성 사이에 위치한 삭녕군 앞을 흐르는 임진강이 옛 지도에는 ‘금강(錦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삭녕군에는 승령산성이 있고 대사리가 있는데 의자왕이 일본에 백제대사를 지은 것처럼 승령산에도 백제대사를 지었을 수 있다.
661년 7월에 다시 임진강으로 들어온 유인궤는 웅진의 지라성을 함락하고 진현성을 다시 함락하였다.
[신당서] 二年七月,仁願等破之熊津,拔支羅城,夜薄眞峴,比明入之,斬首八百級,新羅餉道乃開。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신라기]나 [신당서]는 진도성(眞都城)의 이름을 진현성(眞峴城)으로 바꾸어 적었다.
이 무렵 당나라 군사는 개성 남쪽에 상륙하여서 웅진강에 겨우 다시 들어오기는 했으나 장단군 임강현이나 임진현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라성과 진도성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파주군은 액봉현이라고도 했는데 "액"은 의자왕의 일본 이름이다. 구주백제왕 때부터 아해(阿輩)라고도 했다. 이는 [수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이면서 일본 서명천황의 능묘 비문에 적힌 이름이다.
파주군이 백제의 아해봉현이었던 것이다.
김포군 통진의 애기봉은 통일신라 때 동자성이었는데 역시 의자왕의 이름 아해봉과 관련된 것이다.
마전천현(麻田淺縣)이 바로 의자왕의 웅진부 부도인 진도(眞都)이다.
다른 말로 니사파홀(泥沙波忽)이고 신라는 임단현(臨湍縣)이라고 했는데 임당현(臨唐縣)이 변한 말이다.
진도의 진(眞)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마"가 되고 우리말로 진이 니(泥)가 된다.
진도성 서쪽에는 사미천이 흐르고 남쪽에는 임진강, 동쪽에는 임진강이 흐른다.
그 서남쪽에는 소정방 이래로 당나라 웅진도독부가 있었는데 지금 미산면이다.
연천군 왕징면의 무등리, 내동리 등이 궁터일 것이다.
징파천(澄波川)이 있는데 진파천(眞波川)으로 고려된다.
고왕산이 있는데 동명왕사를 세웠을 곳이다. 즉 의자왕의 2경 중의 하나다.
진도성의 서쪽인 장단군 안에 옛 현이 많다. 임강현(사야홀, 장항현), 임진현(오아홀), 송림현(약지두치현) 등이다.
진도성은 현재의 왕징면이다. 왕징면의 어원은 고왕산과 징파리이다.
왕징면 북쪽의 강서리 군영장거리(軍營場巨里)는 백제 군영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또한 왕징면 진도성의 임진강 건너편인 군남면 진상리에는 당묘(唐墓)가 있다. 웅진도독 왕문탁의 묘일 수도 있다.
군남면 왕림리는 웅진도독부를 구하기 위해 신라 문무왕이 왔던 웅현성으로 고려된다. 즉 백제 웅현이다.
웅현은 연천군의 옛이름인 웅섬산현을 고려하면 연천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곡리 부근으로 고려된다.
왕징면 무등리 북쪽에는 고성산(高城山)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동쪽에는 미산면 우정리(牛井里) 산성이 있다. 우정리에 산성이 있고 옹현(甕峴)이라는 곳이 있다. 이는 문무왕이 깨트린 옹산성에 해당한다.
왕징면 무등리 창골(倉谷)은 삼국 영토분쟁의 각축장이었을 때 이 골짜기 안에 무기를 보관하던 병기창이 있던 곳이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도 창고가 있던 곳에는 와편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진도성의 병기 창고인 것이다.
무등리 서쪽에 성안동[城內洞]이 있다. 무등리산성의 서쪽,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도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토기, 와편, 석재들이 지표에서 많이 수습되는 곳이다.
이제까지 백제성의 성제로 보면 우등리에 평지 토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동리 원수골은 예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곳으로 피난했다고 하는데 백제 의직 같은 장수가 있었을 것이다.
노동리 태봉(胎峰)은 백제 왕자의 태를 묻었을 것이다.
동중리에는 신성(新城)골이 있다.
동중리에 당현(唐峴)이 있었다. 당나라군이 점령했던 곳이 된다.
북삼리에는 둔밭, 둔전현(屯田峴)이 있는데 군대의 둔전(屯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능곡(陵谷)은 가마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능이 있었다 한다.
시내기자리 아래에 있는 깊은 못인 용못은 왕의 어원이었을 것이다.
강서리에는 고능동(古陵洞)이 있고 큰 고분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강서리에 오방터와 영전리가 있었다. 오방터(五方垈)는 백제 북방 웅진을 의미하는 곳으로 보인다. 영전리(營殿里)는 궁전이 있었을 수 있다.
왕징면 남쪽인 미산면(역시 마전천현이었다.) 백석리에 도독골(都督谷)이 있다.
이는 당나라 웅진도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산면의 유촌리는 유인궤의 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독정동도 있는데 이는 웅진도독부 위치로 고려된다.
북쪽에 중군고개(中軍峴)가 있었다. 당나라 중군이 진주한 곳이다.
치라재와 하오리가 있다. 치라재는 두리산의 길이다.
따라서 665년 신라 문무왕이 부여융과 당나라 도독과 맹세한 취리산이 바로 현재의 두리산이 된다.
옛 지리지에는 ‘분석산(分石山, 盆石山)'으로도 기재되어 있다.
하오고개(和友峴)라는 이름도 있는데 취리산의 맹세로 붙여진 마을 이름일 수도 있다.
이 미산면 두리산 치라재가 웅진부의 지라성이다.
661년 7월에 다시 임진강으로 들어온 유인궤는 웅진의 지라성을 함락하였다.
[신당서] 二年七月,仁願等破之熊津,拔支羅城,夜薄眞峴,比明入之,斬首八百級,新羅餉道乃開。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신라기]나 [신당서]는 진도성(眞都城)의 이름을 진현성(眞峴城)으로 바꾸어 적었다.
이 무렵 당나라 군사는 개성 남쪽에 상륙하여서 웅진강에 겨우 다시 들어오기는 했으나 장단군 임강현이나 임진현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라성과 진도성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미산면 우정리에 대성동(大城洞)과 소성곡(小城谷)이 있고 옹현이 있는데 바로 옹산성이 있었고 부흥군이 점령하여서 웅진도독부를 고립시킨 곳이 된다.
서쪽 임강현(사야홀) 북쪽에 석각상이 있다. 북한에서 최근에 발견하고서 임꺽정 석각조상이라고 발표한 것인데 의자왕의 석각조상으로 보인다. 관모를 쓰고 부처의 후광을 표시한 도적은 없을 것이다. 이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진도성에 새겨진 의자왕의 조상으로 고려된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탄현은 대전 동쪽 보은군의 탄현이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步騎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眞都城)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삼국사기 원본]에도 역시 진도성(眞都城)이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때 진도성이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와 가까운 아신왕성, 옛 고마성까지 도망한 것이다.
소정방이 진도성을 접수하였다. 이때 경기도 적성과 양주가 래소군(來蘇郡)이 된 것이다. 래소군은 소정방이 왔다는 뜻이다.
소정방의 부대는 웅진성을 포위하였다.
한편, [신라기]에 의하면 6월 18일에 신라왕은 남천정이라고 하던 이천에 도달했다.
6월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이는 경기도 이천에서 한강 하류를 타고 병선 100척을 내려보내서 웅진강의 소정방과 합류하게 한 것이다.
이 때는 소정방이 웅진강구에서 이미 전투를 치르고 백제 제2 수도인 진도성을 함락한 후로 고려된다.
소정방은 태자 법민과 7월 10일에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신라 육군을 만나기로 하였다. 20일 뒤에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한것이다.
소정방은 7월 12일에 부여의 소부리주 벌판에서 소부리성을 포위하고 싸웠고 다음날 7월 13일에 사비성이 항복하였다.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충청남도의 부여 사비성이 포위 중에 항복한 것이다. 사비성의 항복은 부여융에 의해 주도 되었고, 부여융은 뒤에 당나라 웅진주도독이 되었다.
부여성이 느닷없이 항복하니, 북쪽에서 농성중이던 의자왕도 웅진에서 항복한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9월 3일에 소정방이 백제왕을 당나라로 압송하여 보냈다.
[신라기]에 의하면 7월 18일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그후 8월 2일에 소정방과 김춘추가 부여의 사비성에서 만났다.
당나라 고종황제는 8월 21일 庚辰에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알았다.
그리고 9월 3일에 소정방은 유인원을 남겨 부여성을 지키게 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왕문탁을 보내어 웅진도독으로 삼아 지키게 하였다.
9월 28일에 왕문탁은 당나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삼년산성에 이르러 당황제의 조서를 신라왕에게 전달하다가 죽었다.
이때 당나라 소정방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된다.
나라는 본래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서울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탁(王文度)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부여 사비성에 유인원과 군사 1만을 두고 고구려 공격을 위해 철수한 것이다.
당황제는 임진강 파주에 웅진도독으로 왕문탁을 새로 보냈다가 병으로 죽자 유인궤를 대신하게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고종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상례(喪禮)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왕문탁(王文度)이 바다를 건너와서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대신하게 하였다.
3. 의자왕 시대 일본
한편 의자왕 시대에 일본에서도 많은 변혁이 있었다.
일본의 황극천황皇極天皇(594~661, 68세)과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3, 63세)은 [일본서기]에서 동일인으로 조작되었지만, 죽은 날도 다르고 고분도 각각이다.
현재 일본에는 두 개의 황극천황릉이 있는데 하나는 나라현 다카시(奈良県高市郡高取町)에 있는데 월지강상릉越智崗上陵이라 여기에서 제명천황과 함께 묻힌 간인황녀의 비문이 나왔다. 따라서 제명천황릉은 월지강상릉이다.
또 하나는 나라현 가시하라시橿原市에 있는 고타니고분(小谷古墳)인데, 에도시대까지 황극천황릉이라고 전해왔으며 높이 8m, 직경 30m의 봉분을 가진 석실고분이다. 이것이 황극천황릉이 된다.
황극천황은 641년에 일본 천황이 되었으나 친자식이 없었으므로, 즉위 때에는 의자왕과 소아씨 법제랑원法提郞媛사이에서 낳은 고인대형古人大兄(~645)을 태자로 세웠다. 거기다가 큐슈의 제명천황에게서 데려온 부여풍장(622~686)을 어려서부터 길러서 친해졌다.
그런데 641년 큐슈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백제 무대왕의 아들인 경황자輕皇子가 변란을 일으켜서 구주백제왕이 되고 제명천황과 중대형황자가 함께 대화로 쫓겨났다.
이때 백제의 대좌평 지적智積과 제왕자弟王子(=의자대왕)의 아들 교기翹岐 왕자 등 40인이 큐슈에서 쫓겨났다고 하였는데, 교기翹岐가 천지천황의 이름이고 그의 모후인 구주백제왕 제명천황과 여동생 간인황녀가 다 쫓겨났던 것이다.
이때 또 백제국주百濟國主(=구주백제왕九州百濟王)의 모후가 서거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경황자와 제명천황의 모후로서 길비희吉備姬였다.
의자대왕의 모후인 누대공주糠代姬는 618년에 이미 죽었고, 구주백제왕인 제명천황은 663년에 서거했으므로, 기록대로 641년에 서거한 백제국주의 모후는 오로지 백제 무대왕의 부인이다. 그래서 그 아들인 경황자가 변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 [일본서기]가 말하는 백제국주가 된 것이 확인된다.
새로 구주백제왕이 된 경황자(596~654)는 제명천황(601~661)의 오빠로서 무대왕의 아들이었다.
643년 9월에 무대왕의 모후인 길비희吉備姬 오오타마왕大俣王(562~643)이 죽었는데, 당시 천황이 극진히 간호했다고 한다. 이는 친딸인 제명천황이 그랬다는 것이며 당시 천황인 황극천황과는 아무 상관없다.
한편 대화조정의 고인대형古人大兄의 외숙부인 소아대신하이蘇我大臣蝦夷는 일본의 최고 권세가였고 백성들이나 왕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의 아들 소아신입록蘇我臣入鹿은 자기들 부자의 쌍묘雙墓를 미리 생전에 크게 만들었다. 이때 성덕태자의 묘소지기를 빼앗아서 성덕태자 부인의 원성을 받았다. 그러자 1년 후 소아신입록은 성덕태자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 일가를 몰살시킨다.
이때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조용히 삼륜산에서 벌을 키우고 있었다. 부여풍장은 때를 기다리며 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기황자翹岐皇子(=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천지천황)는 칼을 빼어들었다.
교기황자는 그를 큐슈에서 쫓아낸 구주백제왕(백제 무왕 아들 효덕천황)과 손을 잡아서 큐슈의 장수를 빌렸다.
그리고 큐슈의 사신이 황극천황에게 표를 올리는 날에 소아신입록을 나오도록 하여 대전에서 황극천황이 보는 앞에서 소아신입록을 살해하였다.
이때 고인대형태자도 목격하고 나와서 한인韓人들이 소아신입록을 죽였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가라인韓人, 즉 큐슈인九州人이 살해했다고 발설한 것이다.
소아신입록의 아비인 소아신하이도 운이 다한 것을 알고 집에 불을 질러 스스로 죽었다. 이때 일본의 중요한 역사책들이 불타버렸다.
645년 6월, 교기황자翹岐皇子(=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는 소아씨를 제거한 뒤에 직접 황제 즉위를 하지않고 실권만 잡았다.
외삼촌인 구주백제왕 효덕천황이 큐슈로부터 들어와서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효덕천황은 구주백제를 백제에서 떼어내어 일본에 붙이고 천황이 된 것이다. 무령천황이래 백제 땅이던 큐슈가 일본 땅이 된 것이다.
그것이 교기황자의 제안이었으니, 효덕천황은 통일 일본의 천황이 되는 것을 꿈꾸고 대화로 온 것이다.
대신에, 효덕천황은 다음 천황이 되는 황태자에 중대형황자를 세워주는 것까지 서로 결맹한 조건이었다.
중대형황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그 자신이 의자대왕의 적자가 아니고 제명천황이 백제에서 시집오기 전에 낳아서 데려온 아들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천황으로 즉위하는데 심한 저항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황극천황이 양위해 줄 가능성이 무대왕의 아들인 효덕천황에 비해서 훨씬 적었던 것이다. 교기翹岐라는 그의 이름에서 제명천황의 꼬리에 묻어온 아들이라는 뜻이 숨어있는 것이다.
또, 혹시 백제에서 군대를 파병하여 구주백제를 수복하기 위해 대화조정을 치고 들어오면, 그 책임을 효덕천황에게 씌우고 자신은 살아남으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효덕천황이 645년에 즉위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통해서 구주백제를 일본 조정에서 관할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본이 큐슈를 포함하여 만국萬國을 다스린다고 선포하였고, 처음으로 연호를 세워 대화大化라고 하였다. 일본이 대국화大國化가 되었다고 연호를 대화大化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 대화개신의 개혁정치는 중대형황자가 이루어나갔다.
중대형황자는 천황에게 할 말이 있으면, 꼭 사람을 보내서 효덕천황에게 말했으니 혹시라도 마음 변한 효덕천황에게 암살당할 우려를 없앴다.
중대형황자는 효덕천황에게 여동생인 간인황녀間人皇女를 시집보냈는데, 그녀는 오래도록 중대형황자와 밀통하였다. 이는 효덕천황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공작이었다.
이때 의자대왕의 아들이자 황극천황의 태자였던 고인대형태자는 머리를 깍고, 중이 되기로 약속하여 살해 위기를 잠시 모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석달 후에 살해되었다.
효덕천황이 말하기를 백제, 임나, 일본은 세 가닥의 동아줄과 같다고 하였다. 백제는 본토백제, 임나는 구주백제를 의미하는데 구주백제가 사라지고 일본의 임나로 환원된 것이다.
이후로 구주백제에는 구주백제왕이 없어지고 대신에 축자대재수筑紫大宰帥와 여러 국사國司를 두어서 다스렸다.
즉 백제에서 임명하던 구주백제왕이 일본이 임명하는 축자대재수로 바뀐 것이다.
효덕천황은 오사카 해안인 난파難波로 도읍을 옮겼다. 궁성 이름은 나니와나가지노도요사키궁難波長柄豊碕宮이라고 한다.
이때, 의자대왕은 백제본토에서 왕자 효孝를 태자로 세우고, 신라 김유신의 침략으로 7성을 빼앗겼다.
645년 다시 백제가 신라 성 7개를 빼앗았다. 그러면서 구주백제를 되찾을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효덕천황은 계속해서 개혁정치와 공포정치를 하였다. 또한 사치와 낭비를 줄여서 장묘제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였다.
관위제도도 개정하여 19계의 관위를 만들었다.
중대형황자는 자신에게 위험이 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장인까지 희생하는 피바람을 또 일으켰으니 그 딸이 스스로 굶어죽었다.
의자왕의 친아들인 천무천황의 능비에는 대해인천황大海人天皇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누나카하라오키노마히도"天渟中原瀛眞人天皇라고 하였다. 아메天는 성이고 이름은 무武다. 대해인大海人은 존경해서 높인 말이다.
누나카하라渟中原는 모정왕茅渟王이라고 했던 무대왕이 도성으로 삼으려던 익산益山 지방의 옛이름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와 관련되는데, 백제가 망한 뒤에 그는 백제 부흥을 위하여 김제金堤의 벽성避城(=碧城)에 잠시 도읍했다가 다시 주류성으로 옮겼던 적이 있다. 그의 모후가 무왕의 딸인 제명천황이기도 하다.
오키노마히도瀛眞人는 영瀛이 대해를 의미하고 특히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동영東瀛을 의미한다. 마히도眞人는 마히도間人 황녀처럼 어릴 때 왕자로서 붙인 이름이 된다.
소아대신을 죽이고 황극천황을 폐위시키며 효덕천황을 세우고 스스로 황태자가 된 중대형황자는 자신의 모후였던 제명천황을 받들어 일본 천황으로 모시고, 이전의 황극천황은 시코쿠四國島 고지시高知市로 유배하였다.
시코쿠 고지시高知市의 조창신사朝倉神社에 황극천황이 지금도 모셔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의자대왕의 적자인 부여풍장도 함께 보내버렸다.
황극천황이 중대형황자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부여풍장을 살리기 위해서 데려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황극천황과 부여풍장, 그의 부인 누카다히메額田姬가 어느새 시코쿠에서 큐슈九州로 탈출하였다. 이때 누카다히메額田姬는 흥겨워서 노래하였으니 [만엽집萬葉集]에 시코쿠의 북쪽 항구 숙전포熟田浦에서 큐슈로 희망차게 떠나는 노래가 남아 있다.
황극천황은 큐슈의 축자筑紫에 옮겨가서 구주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부여풍장을 태자로 세웠다.
황극천황은 활발하게 외교를 하였고, 의자대왕의 백제는 잃었던 구주백제 대신에 새로운 구주국과 다시 우호적이 되어서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 구마모토熊本市의 아나국사血戶國司가 하얀 꿩白雉을 잡아받치니, 황극천황은 상서로운 조짐이라 하여 650년에 연호를 세워서 백치白雉로 개원하였다. 큐슈를 일본과 백제로부터 독립국으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나라 이름은, 큐슈의 아스쿠라군朝倉郡이나 시코쿠의 아스쿠라신사 등으로 유추하건데 아스카라朝韓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주 왜국이다.
650년, 황극천황은 새 나라의 신년하례를 미경궁味經宮에서 하였는데, 황극천황의 도읍인 후쿠오카福岡縣의 축자태재부筑慈太宰府의 궁이었다. 2100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2700개의 등을 밝혔다. 당시 고승인 민법사旻法師는 후쿠오카의 아담향阿曇鄕 아담사阿曇寺에서 설법하였다.
후쿠오카 축자태재부筑紫太宰府 위치에 관세음사觀世音寺를 지었고, 백제는 개국 선물로서 금동불상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부여풍장을 따라서 아우인 새성塞城, 충승忠勝 등이 오사카로부터 따라왔었고 큐슈의 황극천황은 이들을 환영했다.
이때에 오사카 대화조정에서는 지금 신라를 치자고 의논하였으니, 사실은 새나라 구주국을 치자는 논의였다.
[일본서기]에서 효덕천황의 백치白雉 원년은 황극천황이 큐슈에서 다시 등극한 백치 원년을 왜곡해서 기록한 것이다. 효덕천황이 두 번 개원한 것이 아니라 큐슈의 황극천황이 구주국을 만들어서 새로 개원한 것이다.
중대형황자는 큐슈라는 큰 배경을 잃어버린 효덕천황을 구박하고서, 효덕천황의 황후이자 자신의 정부인 여동생 간인황녀와 제명천황, 그리고 모든 신료들을 데리고 나라현으로 옮겨갔다. 혼자 남은 효덕천황은 쓸쓸히 죽었다. 효덕천황 고분은 왕능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능이다.
중대형황자는 아직도 천황이 되기에는 출신이 미약했으므로, 모후인 제명천황을 대화의 새로운 천황으로 새로 세우고 계속 황태자를 하였다.
백치 5년인 654년에 태국인(승려?)들이 큐슈에 왔는데, [제명천황기]에는 3년에 온다.
또 [제명천황기] 7년에 이세왕伊勢王이 죽는데[천지천황기] 7년에 똑같은 기사가 있다.
즉 [제명천황기]와 [천지천황기]의 중복을 의미한다. 실제는 새로운 구주왜국의 [황극천황기]와 대화의
[제명천황기]가 뒤죽박죽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는 구주백제와 구주국의 기록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고대사에서 백제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이었다.
제명천황 원년 655년에 공중空中에 용龍을 탄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공중은 본래 가라伽羅, 韓를 말하고, 이는 당시 큐슈九州를 의미하는 것이니, 부여풍장이 큐슈에서 등극하여 아스카라朝韓國, 즉 구주국의 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황극천황과 부여풍장은 큐슈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황극천황이 즉위하였지만, 655년에 부여풍장이 양위받아 구주왜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제명천황은 오사카 대화조정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 다무봉多武峰 위에 관궁觀宮, 혹은 천궁天宮을 세웠는데 부왕인 백제 무대왕武大王을 기린 것으로 고려된다.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나라현 수마사須磨寺의 오륜탑五輪塔도 무대왕을 축원하는 것이었다.
제명천황 4년에 중대형황자는 애인이자 여동생인 간인황녀의 아들을 모반죄로 몰아 죽여버린다. 간인황녀의 애통함이 시가로 [만엽집]에 남아있다. 중대형황자는 간인황녀가 죽었을 때는 승려를 330명이나 만들어 출가시켰을 정도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협은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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