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4)숙신,훈,돌궐

훈족이야기 1. 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자연정화 2013. 8. 18. 11:51

 

출처 : 조선일보 [JR의 유목민 이야기] 한수선

 

훈족이야기

서기 370년 바람과 같이 유럽 다뉴강(현 헝가리) 초원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배경은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확하게 어느 민족이며 아시아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 지역에서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 훈족에 대한 연구는 유럽인들이 300 여 년 전 시작해 훈족이 흉노라는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유럽에 진출한 훈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 기록 중에서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쭉 찢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 한 작달막한 사람들로 로마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던 이들은 분명 아리안족인 백인과는 거리가 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살던 몽골계 유목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던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 갔다. 이들과 끝임 없는 전쟁을 치루며 조공으로 국력을 잃은 서로마는 끝내 침입해온 게르만족에게 힘없이 멸망했다.

로마의 어린이도 훈족이 온다면 울음을 그치게 할 정도로 전쟁터에 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잔인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들이 유럽으로 출발한 근원지를 추적한 다큐가 독일과 미국에서 두 편 제작되었다.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 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없어져 다큐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기억에 남은 그들은 중국과 미국의 역사학자들이었다.

두 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 고증으로 훈족의 출발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증을 해가면서 밝힌 반면,1997년 방영된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첫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가 한반도에서 만주 벌판으로 뻗어 올라가며 훈족의 출발지를 한반도 본토로 기정사실화 하면서 훈족은 한반도 깊숙한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TV 화면을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 후 나는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시간까지 책과 인터넷에서 훈족의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였다.

신라와 한반도에 정착한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정보 보다는 이들에 대한 폭넓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지 않고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역사자료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이주한 흉노의 발자취를 그들이 남긴 유물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 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 개 꿰매어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 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씌워 컵으로 사용했다. 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 인들이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쳐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 있고, 그 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던 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Partatua)앗씨리아 공주와 결혼으로 앗씨리아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 쫓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 인종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 되였다는 사실과 헤르도토스 남긴 스키타이인의언어 기록 중 'pata" 죽이다, '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

말과 스키타이인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들은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은 최초의 인류라는 기록을 남겼으며(유럽인의 시각), 이들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민족으로 추정되며, 말등에 안장 없이 천을 깔고 달리는 말위에서 등자도 없이 몸의 중심을 잡으며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 부터였다. 6세기 이전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민족과 전쟁을 한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분수 있는 장면이다. 한창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기를 가끔씩 훔쳐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 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들이 남부 소련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활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 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 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를 맞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후퇴를 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래나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그렇지만, 대왕이 우리와 진정 한판의 전투를 즉시 하고 싶으시다면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한번 건드려 보십시오, 그때 대왕은 우리가 싸울지, 싸우지 않을지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 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 일이 있은 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해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 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브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 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

 

(사진 융성기의 스키타이 영역, 노란색)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 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책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 전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