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5)동호,선비,거란

모용선비 연나라와 고구려

자연정화 2013. 8. 18. 15:57

 

모용선비 연나라와 고구려

 

흉노(匈奴)족과 선비(鮮卑)족들은 유목민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 북방의 유목민 국가들은 흥기할 때는 굉장히 크게 흥기했다가 퇴조할 때는 굉장히 극단적으로 퇴조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편견을 제거하고 살펴보면 흉노는 기원전 210년부터 기원후 155년 정도 가지 그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350년이 넘은 역사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살펴보면 중국의 중원의 여러 나라들 중에 이정도 되는 역사를 이어간 통일국가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아주 쉽게 애기해서 흉노는 현재의 중국 북쪽에 있는 만리장성중에서 섬서성과 감숙성, 영하회족자치구 정도에 성벽이 남아있는 부분의 언저리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서쪽으로 이주를 하면서 유목국가들을 세웠고 이후에 정착하였다고 보면 된다. 수당시대에는 이 흉노족의 일파에서 흥기한 돌궐(突厥)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한자어로 돌궐로 쓰는 것의 음가가 투르크인 것이다. 이후에 이 흉노족, 돌궐족의 일파는 지속적으로 서진하고 정착하여 이슬람화되는 역사를 가진다. 셀주크 투르크로 다시 흥기하여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과 가까운 아랄해 부근에서부터 이란과 터어키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 셀주크 투르크가 몽골의 지배를 마친 후에 오스만 투르크가 되고 현재의 터어키가 되는 것이다.

 

 선비족의 역사는 이 보다는 더욱 복잡하고 현재의 몽골지역과 북만주 그리고 몽골의 역사처럼 현재의 중국의 북방지역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흥안령 서쪽편에서 음산산맥을 경계로 남진하여 중원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쫒겨나서 몽골의 바이칼호까지 혹은 그 서편의 알타이산맥지역까지 몰려가기도 하였다.

 

 또한 선비족은 그들의 유전자를 현재의 북중국인들에게 남기고 있다. 진시황의 통일과 한나라의 성립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원의 북부로 이주, 정착하는 역사를 가지고 중원의 화하족과 섞이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인 집단 섞임의 사례는 선비족의 일파 탁발 선비가 세운 북위(北魏)일 것이다. 족장의 성씨가 탁발(拓拔)이었기 때문에 탁발 선비라고 한다. 한나라가 망하고 유비, 손권, 조조가 세운 삼국지의 시대의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아니라 그 이후에 생긴 선비족의 나라이다.

 

탁발 선비의 원천지는 대흥안령 산록의 울선동 동굴이라서 북위가 안정된 시대에 그들의 선조묘를 찾는 프로젝트를 한 적도 있다. 수도는 평성(平城)인데 현재의 산서성 대동(大同)시이다. 뻬이징과 위도는 같으면서 뻬이징이 있는 화북성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산서성으로 이동하면 거기에도 만리장성의 일부가 있는 데 그 바로 이남에 대동시가 있다. 평성에 북위 정권이 선 것은 398년이다.

 

493년에 천도를 감행하여 수직으로 남하하면 나오는 현재의 섬서성의 낙양에서 둥지를 틀기도 했다. 북위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를 위진 남북조시대라고 한다. 북위의 6대 효문제의 왕후가 고구려계 귀족의 여자 문성왕후이다. 7대 선무제의 아버지는 선비족, 어머니는 고구려족인 것이다.

 

그리고 북위는 516국의 시대의 5호를 통합한 국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5호가 흉노, 선비, , , 강이라 화하족이 아닌 북쪽 및 서쪽의 유목민 계열이라는 는 점은 분명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 , 강족의 언어의 계열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리고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 이전중원의 북쪽과 서쪽에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4-5세기 서쪽에 북위가 있었다면 그 동쪽편 현재의 뻬이징 북쪽 연산의 주변에는 전국시대(기원전 711-480)의 연()과 이름이 같은 선비족의 나라가 있었다. (), (), 북연(北燕)으로 부르는데, 산동성에 같은 성씨의 왕을 가진 남연도 있었다. 이 선비족의 일파는 모용(慕容) 선비다. 이들의 수도도 현재의 뻬이징과 난하 주변의 도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요서방향으로 확장을 하기 시작하는 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337년에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는데, 이전에 선비 대선우를 자칭한 그의 아버지 모용외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유주(幽州)자사 관구검의 246년 고구려 침공에 참전했었다(동천왕 20). 이 모용선비의 연나라가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12(342)에 고구려의 환도성을 유린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도 그려진 것처럼 연왕 모용황은 고구려침공이전에 용성(龍成)으로 도읍을 옮기고 전쟁준비를 철저히 한 이후에 침공해서 고구려의 사직이 풍전등화에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가지고 갔고, 고국원왕의 어머니 태후를 인질로 잡아갔으며 환도성을 헐어버렸다. 외교적 방법으로 미천왕의 시신은 돌려받았지만 태후는 지속적으로 연의 도성인 용성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고구려의 이후의 대응은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이 좀더 고차원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진 불교를 받아들이고율령도 반포하였으며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은 다시 연나라를 치기도 하고 공격을 받기도 한다.

 

고국양왕은 종묘도 수리하고 사직도 세운다. 고대 사회에서 종묘와 사직을 바로세우는 것은 새로운 정벌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무제가 흉노, 조선, 남월을 정벌하기 전에 태산에서 하늘과 땅을 향하여 봉선의식을 하였던 것에 비견된다. 태자 담덕은 이러한 모든 국내외 정세를 자라면서 배운 것이었다. 광개토태왕의 사적은 그의 아들 장수태왕이 호태왕비문에다 새겨 넣었다. 장수왕대에 모용 선비의 연나라는 멸망한다.

 

    모용선비의 연나라와 고구려는 왜 이렇게 굉장히 원한에 서린 공격과 보복의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유골을 들고 갈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아마 311년 미천왕 12년에 장수를 보내어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는 것을 필두로, 315년 한나라, 조조의 위나라 및 서진을 지나오면서도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 현토군의 현도성을 쳐부수었고, 319년 모용외를 죽일려 했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서진(西晉) 위촉오 삼국 다음의 중원 국가- 의 유주자사 최비(崔毖)의 사건도 있었고, 이후로 미천왕대에 연나라쪽으로 굉장히 많이 진격해 들어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용선비의 연나라는 고구려와의 요서-요동경쟁에서 굉장히 많은 국력을 소비했다. 나중에 장수태왕대에 선비족 연나라는 고구려와 탁발선비의 국가인 북위의 협공에 멸망한다. 도성이 유린된 정도로 국가위기를 겪은 이후에 고구려의 반격은 치밀했고, 장기적이었으며, 대담하기도 했으며, 군사와 외교를 모두 동원한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새겨진 영락 5(392) 비려 정벌 기사는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만들어 진 것이다비려는 선비족에서 연원하였지만 정착화 과정을 거친 연나라나 북위와는 조금 달리 유목민 문화를 가진 족속인 후대 거란족의 선조족속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광개토경호태왕이 3부락, 6-7백영()과 함께 우마(牛馬)군양(群羊)을 수도없이 많이 노획하였다는 기사가 비문에 남겨진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잡혀갔던 남녀를 데리고 왔다는 삼국사기 영락 1년 기사도 연나라에 잡혀 갔던 것과 거란에게 잡혀간 것이 겹치는 대목이기도 하다.

 

광개토경호태왕 비문의 양평(襄平)이라는 지명은 서진(西晉) 평주(平州)의 호동이교위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광개토대왕은 북연의 왕으로 오른 고구려계 고운(高雲)에게 동족의 예를 보낸다. 이후에 고화가 밀려나고 풍홍이 북연의 왕이 되었는데, 장수태왕이 북위와 짜고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게 만든 다음, 처음에는 평곽(平郭)이라는 곳에 있게 하다가 북풍(北豊)에 유치한다(북사 93권 북연풍씨; 삼국사기 장수왕 26[438]). 그런데 이 북풍이라는 지명도 광개토경호태왕비문에 비려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쳐서 온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천왕대에 공격을 개시한 서안평이 정말 지도에도 빨간색으로 명기된 신의주의 반대편 현재의 압록강 건너의 단동이었을까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모용선비의 연나라와 일진일퇴의 전쟁을 벌이게 된 연유도 연나라가 점유한 것으로 보이는 현도군과 그 서쪽 지방에 대한 미천왕의 공격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아주 작은 소국 고구려가 현도군을 점차적으로 몰아내는 첫 시발점으로 미천왕이 젊은 시절 어려울 때에 압록강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소금장수를 했다고 이후에 공격한 서안평이 즉위이전의 행각을 반영하는 것인 양 그려내고 있는 것은 좀 그렇다.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한 것으로 이야기 되는 예맥족과 퉁그스족은 선비족들 보다는 오히려 더욱 동쪽으로 치우쳐져 분포한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요하의 동쪽 지역과 한반도에서 유목-정착 복합문화를 이루어 온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정착민 문화가 더욱 강한 것은 사실인데, 유목적인 요소 혹은 숲에서의 사냥을 강조하는 엽호(獵戶) 문화[hunter-guard culture]가 상존했던 것도 사실이다. 1세기-3세기 동이를 묘사하는 중국측의 사서들도 동이(東夷)는 정착민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선비족이나 흉노족과는 또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사회의 문화적 스펙트럼으로 보아서 농경민의 전형은 중원과 남중국의 장강 이하의 족속들에서 찾는 다면 유목민의 정형은 흉노족과 선비족에서 찾을 수 있고, 한국 학자들이 예맥한으로 자주 이야기 하는 한국인과 만주인, 심지어 일본인의 공통조상의 대부분은 유목-정착의 복합적 문화를 일구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대에 와서 농경전통이 강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