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초원의 제국
-中國과 對立하는 遊牧帝國
起. 序論
수천년에 이르는 중국사를 접하면서 중국의 역사는 나름대로 한족의 역사, 제도의 역사, 유학의 역사, 상업의 역사라고 규정지어 보았다. 물론 21세기를 위한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중국은 뿌리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으며 모든 요소를 대표하고 또한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周族에 의해 형성된 慕華思想은 많은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되어 1911년의 辛亥革命의 정신적 의지가 되었다. 秦代에 형성되고 漢代에 이르러 완성된 다양한 제도는 조금씩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폐지되거나 신설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2000년을 이어왔다. 春秋時代의 諸子百家중 孔孟에 의해 주도된 儒學은 秦代의 焚書坑儒를 통해 더욱 더 확고부동한 중국의 중심사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말직에 해당되지만 중국상인의 상술은 西域과의 무역, 洋人과의 무역에서 언제나 우위에 서게 되어 중국으로의 金유입을 가져와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은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史記' 대표되는 역사학의 발달은 상당한 위치에 있었으며, 세계 4대 발명품 중 종이, 화약, 나침반등 세 개는 중국에서 발명되어진 것이며 때로는 강호의 시대로 표현되어 다양한 문학작품의 주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운데 '中'자를 써서 中國이 되는 이 나라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모든 문화적 요소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의 뒤안길에는 중원을 수시로 약탈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복하기도 하는 이민족에 있다. 이들은 넓은 초원을 중심으로 몽고, 중앙아시아에 그들의 터전을 잡고 중국과 지속적인 밀고 당기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古代에는 이족의 끊임없는 국경의 침범과 약탈로 얼룩졌고 西晋말기에는 중국본토로 직접 들어와 16국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漢族과 胡族의 연합적인 체제속에서 隋와 唐이 건국되어졌다. 그러다 宋代에 잠시 漢族의 왕조가 성립되는 듯 하더니 '靖康의 變'을 통해 宋은 여진족이 세운 金에 의해 멸망하고 강남으로 내려간 시대를 南宋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칭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족은 元을 세워 100여년간 차별적인 정책으로 우수민족인 漢族을 지배하였다. 元의 세력약화를 틈타서 朱元璋이 明을 세웠고 곧이어 滿洲族은 마지막 왕조 淸을 건국하게 된다. 굳이 변방의 침입이나 화친등이 아니더라도 왕조의 변천만 보더라도 중국은 이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많은 이민족들이 한족과 동화되면서 중국내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영토적인 면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지금의 중국이 있게한 것은 漢族뿐만 아니라 漢族의 땅에서 소멸되어간 수많은 이민족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멀리 초원으로 시야를 넓혔더니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섰던 민족들이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돌궐이요, 위구르였다.
본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秦·漢시대에 중국과의 전투에서 우위에 섰던 민족이 바로 匈奴이다. 그들은 韓民族의 경우와 같이 일정한 영토 내에서 중국과 별개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않고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수백년에 걸쳐 중국을 침입하였다. 그렇다고 중원의 드넓은 땅에 눈독을 들인다던가 중국의 문명을 받아들인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秦始皇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전국시대에 건축된 수많은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완성하였고 漢高祖는 흉노와의 패배로 인한 공포로 말은 화친이지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며 황실공주를 흉노선우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漢族이 이민족에게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사실 무제이후에도 흉노는 중국을 압도했다고 여긴다. 武帝는 그의 치세동안 匈奴를 완전정복하고 싶어하였으나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흉노는 당근과 채찍의 수법으로 수십여년간 중국을 유린하였고 무제이후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급속도로 붕괴되어 결국은 중국의 세력권에 밀리는 미약한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後漢말기에 중국은 혼란에 휩싸이는데 그 혼란의 끝은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이민족 왕조의 성립이다. 匈奴, 鮮卑, ?, 厘, 羌族으로 손가락 꼽히는 5胡는 수백년에 걸쳐 화북이북에 수많은 왕국을 세웠고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16國이라 한다. 그리고 5胡로 인한 화북의 분열은 鮮卑族인 北魏에 의해 통일되고 이제 초원의 권력은 흉노에서 선비로 그 세력이 넘어가게 되었다. 여러갈래의 선비중에서 평성에 도읍한 탁발선비는 초원을 지배하다가 북위가 건국되고 나서 太武帝에 의하여 화북은 통일하게 되고 이제 강남까지 정벌하면 되었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특성, 강할 때는 엄청 강하나 한 번 내분에 휩싸이면 쉽게 무너지는 게 그들의 특성인 것이다. 胡漢體制의 완성을 가져오긴 했지만 결국 그 胡漢體制로 인한 변방의 탁발선비의 소외감으로 결국 北魏는 중국통일의 과업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東·西魏로 분열된다. 그러나 탁발선비는 남으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북으로는 강한 유목민족인 柔然을 견제하여 결국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柔然을 쇠퇴하게끔 만들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突厥이다.
隋·唐시대의 새로운 유목 민족인 突厥은 민족은 참으로 낯익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渤海가 唐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突厥과 외교관계를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突厥과 위구르는 蒙古사막을 중심으로 하여 왕국을 성립시켰다. 너무도 강하고 자체적인 문자도 만들었지만 돌궐은 결국 東·西突厥로 분열된 후, 그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대립하다가 중국의 교묘한 정책으로 인하여 붕괴되었다. 그러나 다시 돌궐의 부활이라는 기치를 걸고 새로이 일어서는데 그때를 第2突厥帝國이라고 한다. 돌궐은 다시금 번영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그 역시 유목민족의 특성, 분열로 인하여 그 뒤를 위구르가 잇게 된다. 위구르는 唐이 安史의 난으로 인한 혼란기 때 唐을 도왔으나 결국 중국과의 관계는 동반자에서 침략자로 바뀌게 된다. 낙양을 약탈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곤 하였으나 唐은 방관하고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채 100년도 지키지 못한 채 위구르는 쇠퇴하고 그 뒤에 이렇다할 유목민족은 나타나지 않는다. 수백년이 지난 후,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의 위엄을 동서양에 떨칠 때서야 다시 유목민족의 강성이 나타나는 듯 하였으나 몽골제국은 중국내부에 침투하여 중국의 왕조를 계승한다. 유목민족의 제국은 위구르가 마지막이 된 것이다.
세계를 재패한 몽골은 그 기반이 완성된 초원에서 일어설 수가 있었다. 굳이 흉노와 선비는 중국으로의 진출을 노렸기 때문에 제외하더라도 분열만 아니라면 몽골 못지 않게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돌궐이나 위구르의 탄탄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돌궐문자는 초원에 있어서의 새로운 문명을 탄생하게 하였고 현재 몽골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마도 과거 돌궐이후 초원의 말이며 이 말을 러시아 알파벳에 이용하여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承. 本論
I. 遊牧帝國의 特徵
1) 古代遊牧國家의 性格
초원의 제국 건설의 전통은 기원전 2세기 중에 수립되기 시작하여 기원 후 7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완성되었다. 이 기간 중에 수개의 제국과 무수한 왕국들이 초원에서 등장하였다가 소멸하였다. 흉노에서 위구르에 이르는 천여년의 초원의 역사는 사실상 등한시되어 왔고 현재 중국의 영토에 속해 있어도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주변 민족으로, 그리고 한족을 괴롭히는 나쁜 오랑캐로 묘사되어 오곤 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는데도 그러한 특성은 무시된 되어 온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초원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 초원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국가 형성기의 역사는 오직 인접하였던 정착 국가들의 사료를 조심스럽게 분석·연구함으로써만 습득할 수 있었다. 6세기의 돌궐에 와서야 문자가 발명되어지면서 그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것들조차 방대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제한적이다. 흉노에서 탁발선비로, 선비와 유연, 그리고 유연에서 돌궐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계승되어지는 중앙아시아 초원의 지배자는 은근히 정복하고 정복되어 가는 과정에 나름대로 역사를 계승한다. 이것이 유목민족의 특성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몽골제국은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흉노족의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목민족史 전통의 결정체이다. 기나긴 초원의 역사에서 몽골은 완성체로서 성립된 것이다.
유목국가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의 유목적인 생활이다. 정착 민족인 한족의 눈으로 볼 때 유목의 생활은 상당히 신기할 수밖에 없다. 일찍부터 중국의 사가들은 기마 유목민에 대해 경이의 눈으로 관찰해 왔다. 사마천은 흉노인을 두고 "수초를 따라 옮겨 다니고 성곽과 항상 머무는 곳이 없었으며,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현대적인 고도적인 기술로서야 도시를 세울 수 있는 척박한 땅과 도저히 농사를 경작할 수 없는 기후와 바람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자연 조건이 유목제국의 특징 아닌 특징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유목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은 '부족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부족연합체적 유목국가는 개념적으로 유목경제를 영위하는 부족들의 연합을 바탕으로 구성된 하나의 통일적인 정치적 조직을 의미한다. 사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부족적인 연맹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것이 점차 정착화되면서 정착민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유목국가의 부족연합체 구조의 특징은 집단의 형성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핵심적인 지배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제국의 건설을 주도했고 또한 군주를 독점적으로 배출하는 군주씨족, 그리고 이들과 외혼적 결합을 이루면서 군주의 배우자를 배출하는 인척씨족이 바로 핵심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둘째, 연맹집단은 제국건설 초기에 지배집단과 연합하여 문화적·혈연적으로 그들과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셋째, 종속집단은 핵심집단과 연맹집단에 의한 정복전쟁의 결과 강제적으로 복속하게 되어 부족적 일체감을 느끼지는 못하면서도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넷째는 부용집단이란 정주지역에 대한 약탈전쟁으로 강제사민된 농경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이루고 있는 집단이다. 핵심집단과 연맹집단, 종속집단, 부용집단은 피라미드식 구조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흉노의 경우, 핵심집단은 선우를 배출하는 虛攣씨와 연지를 배출하는 呼衍·蘭·須卜·丘林씨등이 형성하였고, 연맹집단은 '흉노'라 칭하던 유목민들이 형성하였고, 종속집단은 月氏·東胡·丁靈·白洋·樓煩등이 형성하였다. 그러나 부용집단은 사실상 정확한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추측에 따를 뿐이다. 이러한 부족연합적 구조를 갖는 유목국가에서 정치권력은 부족단위로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따라서 지배체제 역시 그같은 현실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유목국가의 특징인 수장의 권위는 유사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 또 흉노를 들 수 있다. 흉노의 정치조직은 선우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고 있다. 선우는 군장으로 국내의 전부족을 통치하고 부족의 단합을 꾀하기 위한 국가의 제사를 주재한다. 이를 통하여 선우는 절대권을 행사한다. 선우는 부족장과 귀족의 협의에 의해 선출도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세습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절대 권력은 다른 유목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고 정복왕조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유목민족의 마지막 특징으로는 그들의 멸망은 외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대립속에서 지속적인 중국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더욱 굳건하고 더욱 결속을 다졌으나 중국과의 대립이 한동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면 유목국가들은 핵심집단에서 동서로 분열되던가 아니면 내부의 종속집단에 의해 멸망하게 된 것이다. 중국을 유린하였던 흉노와 탁발선비는 오히려 지도층의 분열로 인하여 결국 한족의 세력권안에 속하던가 아니면 저 멀리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유연과 위구르는 종속집단인 돌궐과 키르키즈에 의해 멸망하고 그 역사가 단절되게 된다. 돌궐의 경우는 이러한 두가지 경우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제1제국은 동서로의 분열, 그리고 제2제국은 카간의 암살로 인하여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 결국은 초원의 지배는 결코 중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멸망에 따라 다른 유목국가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2) 遊牧社會의 發展有形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언제나 어느 특정한 일개 부족 내에서만 발생되었다. 그 일개 부족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맹과 정복과 정복 위협 등의 수단으로 국가를 확장하여 나갔다. 유목국가를 성립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한 요소는 바로 통치자의 카리스마적인 인격과 탁월한 군사적인 기술이다. 만약 군주의 역할이 소멸되면 기존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 서로 분열되던가 아니면 이틈을 타고 공격하는 중국의 먹이가 되었다. 유목민족은 비록 인구는 적었으나 중국의 막북세력으로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뛰어난 기마술과 전쟁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들이 무진장 활용한 말은 가장 큰 기동성의 이점이었고 생활에서 나타나는 수렵기술에 근거를 두고 뛰어난 전쟁전술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초원의 정치적인 영향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유목민의 군사훈련은 수렵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항상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을 때에만 전투에 임하였고 우수한 기동성과 게릴라식 전법 때문에 중국의 여러 국가들은 초원의 내부지역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착국가의 군대는 기습작전을 감행할 수 있을 때에만 간간히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유목국가가 무력에 의하여 붕괴된 경우는 오직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종속민족이 침략하였을 때뿐이다.
초원에서 흥망한 북방국가를 유형별로 구분하면 遊牧國家와 潛入國家, 그리고 征服國家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유목국가는 고대로부터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가 세운 국가이고 잠입국가는 5호16국 시대의 다양한 왕조들이다. 그리고 정복왕조는 遼·金·元·淸 등을 말한다. 그 중에서 유목국가의 기원을 살펴보면, 초원에서 고립된 유목사회가 그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부족으로 발전하고 다시 부족들이 연합된 부족연합체를 형성하면서 유목국가로 발전하는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유목민이 부족적 단결을 이루어 유목부족을 탄생하게 만든 요인은 내부적 분쟁의 조정과 외부세계에 대한 대응이었고, 이를 위해 단결된 유목국가의 출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재해에 의해 안그래도 빈곤한 식량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농경지역으로 식량약탈에 나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족적 단결과 타부족으로부터 그들 자신이 약탈을 당하는 경우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공동방어의 필요에서 단결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씨족을 중심으로 시작된 단결은 유목사회의 內外적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유목민의 단결력도 강화되고 이어 부족사회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사·정치적 능력이 있는 부족장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게 되고 유목국가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할 제국을 건설하고 중국을 유린하곤 하였다.
잠입왕조의 경우는 유목왕조의 기간을 거쳐 어느정도 세력을 확장한 후에 기원전의 흉노와 달리 중국으로의 영토확장이나 세력 진출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후한이 멸망하면서 분열된 중국의 상태는 유목민족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고 어리석은 서진의 왕자들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목민족을 끌여들였다. 그래서 세워진 국가가 흉노의 유연이 세운 漢이다. 흔히 침투왕조라고도 하는데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주한 것이 특징이다. 이주형태도 중국 농경지에 강제로 이주한 경우와 부분적인 침략자가 정착한 경우로 구분되며 반평화적으로 침투하여 정권을 획득한 왕조이다. 이후 150여년에 걸쳐 16국이 넘는 국가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한족의 땅을 지배하기는 하였지만 문화적으로 한족을 지배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배당했기 때문에 역사는 그들을 잠입왕조라 칭한다.
정복왕조는 갑자기 출현하여 중국을 지배한 왕조라는 뜻으로 정복왕조란 용어는 독일의 역사학자 빗트포겔에 의해 사용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위구르가 멸망하면서 916년에 요가 건국되는 10세기초부터 정복왕조가 초원의 역사무대에 등장하였다. 특히 10세기 중기의 宋의 文治主義는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 북방민족이 군사력을 확충함으로써 정복왕조의 건국을 가능하게 하였다. 정복왕조로 칭해지는 遼·金·元은 宋을 상대로 정복활동을 펼쳤던 왕조이다. 게다가 그들은 유목국가와 다른 특징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정복왕조가 발흥했던 지역은 한반도나 중국본토와 가까운 요하나 만주, 몽골지역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거 유목국가는 초원을 중심으로 중국과는 괴리되는 지역을 통치하였고 부분적으로 중국과 대립하였으나 정복왕조는 그들의 터전은 중국과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수시로 약탈과 침략을 자행하였다는 것이다. 정복왕조는 반복되는 약탈행위를 통하여 유목사회를 農牧的 二重社會로 전환시키면서 유목적 부족체제를 해체하고 정복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갔다. 정복왕조의 카간은 중국적 전제군주의 성격을 띠면서 그의 권력을 강화하였고, 부족장과의 관계도 중국적 君臣관계로 변화시켜 나갔다.
3)南北對立體制의 展開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그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자연환경에 따라 역사의 전개도 달리하고 있었다. 남방에는 농경 정착민족인 한족이 세운 왕조가 일찍부터 발전하여 왔고, 북방에는 유목민족에 의한 유목국가가 성립되어 남북으로 대립하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사실 고대의 초원의 역사에 대해서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기록이 파악할 수 있으리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흉노의 역사는 같은 시대의 서쪽 초원을 지배한 스키타이보 다는 잘 기록되어 있다. 흉노를 중심으로 한 고대 유목국가는 장성을 중심으로 그 이남에 건립된 중원왕조와도 매우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초원의 수장은 중국과의 관계에 유목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요한 기능이란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여 유목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분배해 주는 일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중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실제로 그러한 시도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자의 확보였고, 이를 위해서는 물자공급을 보장해 주는 협정을 중국과 맺으면 소기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이었다. 중국에 대한 영토적 지배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면서 군사적 압력을 통해 자신의 요구에 굴복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그 결과 장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는 중원왕조가 그리고 북쪽에는 유목제국이 서로 병존·대립하는 체제, 즉 남북대립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단순한 남쪽나라이고 약탈하기 좋은 나라, 아니면 그들의 무력을 시험하기 좋은 나라였을 것이다.
고대의 남북대립체제는 흉노와 秦·漢으로 끊임없이 대립을 하였고 무제이후 흉노의 내분으로 인하여 남북대립체제는 漢의 한판승으로 일단락되었으며 이후 흉노를 계승한 최초의 나라는 탁발 선비로 5세기에 건설되었다. 탁발선비의 시기는 남북대립체제가 아니라 한족과 유목민의 호한체제가 이루어져 있었던 때이다. 탁발선비는 유목민의 특성을 벗어나 중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였다. 탁발선비의 北魏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제국을 건설하려고 기도하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를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유목민의 특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특성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중국사회에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고 무너지게 된 것이다. 北魏의 혼란을 틈타 초원은 다시 유목의 지배가 되었다. 그것은 같은 투르크 계통인 돌궐이 초원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였다가 곧 이어 그들도 유목민의 또 하나의 특성인 분열로 인하여 멸망하고 초원은 마지막 유목왕조인 위구르의 지배하에 통일되었다. 위구르와 당의 관계는 남북대립체제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점차로 위구르가 우위에 서는 관계로 발전하였고 당은 위구르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위구르의 쇠망으로 인한 초원에서의 역사는 끊어지고 소수 부족들에 의해 계승되어지다가 드디어 중국과의 대립체제·호한체제를 깨고 드디어 중국을 정복하였다.
II. 匈奴 (秦·漢)
1) 匈奴의 成立
1.匈奴의 기원
匈奴는 史記에 따르면 그 시조가 夏后氏의 후예로서 그 이름을 淳維라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빙성이 별로 없고 단지 고대의 전설에 따르는 것뿐이다. 흉노라는 이름이 ?淺이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9세기나 8세기경에 중국에서 처음 불린 것이라 한다. 그 이전에는 보다 막연하게 단순히 胡라고 불린 것 같다. 春秋시대의 秦과 趙가 당시의 전투 방식인 무거운 전차에서 기동성 있는 기병으로 바꾸어 기동력을 발휘하고자 한 것은 기마 민족인 유목민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흉노와 인접한 나라들은 흉노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쪽 국경에 초보적인 요새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후에 秦始皇이 이를 토대로 연결시켜 축조한 것이 萬里長城이다. 당시의 사서인 司馬遷의 史記를 보면 흉노가 통합되어 강력한 국가체제를 이룬 것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라고 나온다. 흉노에는 왕이란 의미를 지닌 單于가 있었는데 선우의 완전한 칭호는 한자으로 '砲梨孤塗單于'라 전사되며 이는 '하늘의 당당한 아들'이라 한다고 한다. 투르크-몽골어의 어근에 따르면 탱리는 텡그리tengri로 하늘의 전사에 해당된다. 漢族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흉노의 정치등급은 모두 24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우 밑에는 左右屠耆王(左右賢王)이 있었다. 한자로 음사된 屠耆는 '올바른 충실한' 등의 의미를 갖는 투르크어 'doghri'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左賢王은 선우의 차기 계승자로 동부에 거주하였으며 아마도 그곳은 케룰렌 강 상류로 추측된다.
흉노의 직급에 따르면 左右屠耆王 다음은 左右谷?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이외에도 千長, 百長, 十長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수천, 수만 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흉노는 左를 숭상하여 左賢王은 항상 선우의 태자가 임명되었다. 흉노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冒頓은 영토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中部는 대략 중국의 大郡과 雲中에 접하여 있어 선우가 직접 다스렸으며 수위정도 이 지역 안에 두었다. 東部는 상속군과 그 이동의 변방군을 접경으로 하고 또한 朝鮮과 서로 접하여 左賢王과 屬官이 이를 통치하였다. 西部는 上郡 및 그 서쪽의 변방군과 접하여 있었고 또 저강지구와 서로 접하여 '右賢王'과 屬官이 통치하였다. 이 밖에도 다른 명칭의 여러 王이 있는데 이들은 아마도 무특 이후에 비로소 생긴 것으로 대부분 흉노가 정복한 夷族地區를 통치하고 있었다.
흉노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유목적이다. 그들은 양이나 말, 소, 낙타 등에 주식을 의존하였으며 물을 찾아 이동 생활을 하였다. 선우는 가을이 되면 부족민을 불러모아 호구와 가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사가들은 흉노에 대하여 상습적인 약탈자로 묘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흉노가 농경지역에 가끔씩 예고 없이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漢의 반격을 받기 전에 약탈물을 가지고 재빠르게 퇴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2.匈奴의 발전
기원전 3세기말에 중국의 북방에서 흉노는 장성이북의 유목민을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흉노는 그 이전의 분산적인 유목부족의 상태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여 선우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면서 정치적 통일체를 조직하고 기원 전 3세기말, 頭曼선우시대에 흉노는 甘肅 서부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月氏를 공격하면서번창하기 시작하였다. 흉노는 두만의 아들이며 실질적으로 흉노를 건설한 冒頓선우때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近人의 고증에 의하면 묵특은 始의 뜻으로 무특은 始皇帝의 뜻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명칭은 始皇帝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무특은 궁사 30여만 명을 거느리고 주변의 이민족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다. 무특은 기원전 177-176년경에 서부 甘肅지역의 월지에 대해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月氏를 완전 정복했다고 여긴 무특은 월지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그 왕의 두 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무특의 계승자인 老相선우는 월지를 甘肅에서 쫓아내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였고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에서 기원한 민족이동이다. 월지라는 이름은 별다른 내용없이 단지 중국어 전사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또한 秦의 붕괴와 漢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내전으로 중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기원전 201년에 山西 지역을 공격하고 중심지인 太原을 포위하였다. 노상은 계속 남침하여 秦代에 상실하였던 河北지역을 전부 회복하고 또 중국 河北의 일부 요새를 탈취하였다. 따라서 중원을 새롭게 통일한 漢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漢에서 강력한 대응을 추구하였으나 흉노에 의해 궁지에 몰려 죽을뻔 했던 漢高祖는 흉노와 화친을 통해 달래가며 60여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흉노는 漢에게 물자공급을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약탈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어느 학자의 견해에 의하며- 침입의 원인과 목적은 대체로 유목지의 수복과 획득, 농경물자 및 인간의 약탈, 漢의 흉노공격과 술책에 대한 보복조치, 漢의 성의부족에 대한 보복 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라 흉노는 보다 나은 조건의 화친을 체결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춰로, 또는 단순히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의 습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그들은 정착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漢과의 화친으로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았을지라도 부족민의 약탈욕구의 충족시키기 위해 가끔씩 변방을 약탈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漢은 만만한 존재였으리라. 흉노의 위대한 선우인 무특은 군사적인 우위를 믿고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무특 이전의 흉노에 대하여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그런 주변민족이던 흉노가 무특때에 이르러서 흉노는 중국에 공포를 주는 대상으로 비로소 잘 알려지게 된 것이다.
2) 秦始皇의 萬里長城과 漢高祖의 和親政策
1. 始皇帝의 萬里長城
흉노의 강성을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흉노는 기원전 3세기말부터 중국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강력한 세력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때는 바로 秦이 春秋戰國을 마감하고 여섯나라를 흡수하여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이다. 戰國시대부터 흉노는 서북지방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있던 東胡나 서쪽으로 있던 월지와 대립하면서 자주 중국의 북변을 침입하였다. 따라서 흉노와 인접하고 있던 秦·趙·燕 등의 나라에서는 장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장성이란 말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史記의 <田敬仲完世家>의 齊의 威王 9년(기원전 370)이다. "趙나라 사람이 나에게 장성을 돌려 주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왕이 齊의 실지를 회복하였다는 말을 의미하며 되찾았다는 말은 아마도 꽤 오래전부터 장성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 蒙恬列傳에 의하면 始皇帝가 기원전 221년에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天下를 통일 한 후, 흉노의 위험을 예상하고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萬里長城을 완성하게 했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오랑캐를 쫓게 하여, 河南을 다스리게 하였다. 장성을 축조하고 지형에 따라 天險을 이용하여 변방을 제압했다. 기원전 214년경 몽염은 황하의 만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흉노를 몰아냈다. 사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로서는 오히려 장성은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때는 흉노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아무리 시황제라도 흉노를 막기 위해 북방에 있는 장성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보강한 것이었다. 물론 몽염은 그다지 전쟁을 벌이지 않은 듯 하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미루어 추측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30만대군과 만리장성이라는 것만으로도 몽염은 흉노에 위압을 줄 수가 있었다. 만리장성은 기원적 215년 이후 흉노로부터 중국 영토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시황제가 장성의 평안을 더욱 고려한 것은 盧生의 예언서에 서 秦은 胡에 의해 망하리라는 귀절이 있는데 시황제는 당시 득세하고 있던 흉노를 胡로 여기고 견제하는데 주력하였다. 물론 엉뚱하게도 秦은 시황제의 아들 胡亥에 의한 실정으로 멸망하고 만다.-그러나 시황제 사후 호해의 제위찬탈이 이루어지면서 장남이며 후계자인 扶蘇가 자살하고 몽염이 투옥된 후 자살하고나서 30만대군이 남쪽으로 떠난후에 변방은 흉노의 차지가 되었고 흉노에는 英傑의 지도자 무특선우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흉노는 시황제 사후 중국의 어지러움을 틈타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2. 漢高祖의 和親政策
흉노는 중국이 漢·楚戰으로 혼란하자 이 틈을 이용하여 남하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高祖는 흉노에 대응하고자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01년에 흉노가 韓王 信을 馬邑에서 포위하자, 信은 馬邑을 갖고 흉노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고조가 스스로 장군이 되어 이를 공격하자 信은 흉노로 도망가게 되었다. 무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하해서 晋陽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듬해 고조는 30여 만 명으로 흉노를 격파하려다가 平城부근에 있는 白登山에서 포위되어 흉노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선우의 처인 연지를 이용하여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흉노에 대하여 다시는 무력으로 해결하려하지 못하였다. 기원전 198년에 그는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 흉노와 화친하고 황실여자를 무특에게 출가시키고 매년 흉노에게 일정한 양의 솜과 명주 및 곡식을 보내주었다. 이후 무특의 침입은 적어졌으나 이러한 화친은 漢에게 있어서 상당히 굴욕적인 것이었다.
고조가 죽은 후 무특은 漢을 더욱 경시하며 呂后에게 글을 보내 구혼까지 하여 呂后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文帝때에도 漢은 계속하여 흉노에 대하여 和親政策을 취하였다. 기원전 174년에 무특이 죽자 아들이 계위하여 老上선우가 되었는데 漢은 다시 황실여자를 보내 그의 처로 삼게 했다. 그러나 흉노는 약속을 엄격하게 지키는 관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수시로 침입하여 어떨 때는 흉노의 기병이 長安 부근에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흉노에 대하여 文·景帝때에 일부 신하들은 굴욕적인 화친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고, 특히 賈誼는 그의 <治安策>가운데 흉노에 대하여 강경하게 대처하도록 주장하였다. 조정의 분위기가 이러는 와중에 漢은 기원전 152년에 다시 황실여자를 흉노의 軍臣선우에게 출가시키고 이들과 서로 교역하였다. 그러나 흉노는 여전히 소규모의 침입을 계속하여 왔고 기원전 133년, 武帝때 와서야 흉노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수십년간에 걸친 어려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조에 의해 흉노에 대하여 취해진 화친정책은 고조에서부터 무제초기에 이르기까지 60여년을 유지하여 왔다.
3) 武帝의 北伐
1. 武帝 초기의 정벌
사실상 중국 변경은 무제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 거의 전지역이 위협받고 있었다. 무제는 흉노를 그들의 근거지로부터 일소할 계획을 세웠다. 무제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민족들과 연합하여 이중 삼중으로 흉노를 압박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고 그중에서도 특히 흉노와 적대관계에 있으며 흉노에 의해 甘肅에서 밀려나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에 자리잡은 월지와 동맹을 맺어 그 배후를 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월지에 張騫을 사절로 파견했다. 그러나 기원전 138년에 출발한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군신에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거의 10여년간 억류되다가 마침내 탈출하여 페르가나의 왕을 방문한 뒤 다시 소그디아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새로운 영역에 적응하여 만족하고 있던 월지는 더 이상 초원의 문제에 흥미가 없었다. 월지에게 기대되었던 견제작전의 제안이 거부되자 무제는 흉노를 단독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33년에 주전파인 王恢가 흉노정별의 계획을 올리자 주화파인 韓安國의 반대가 격렬하였다. 그러나 무제가 왕회를 지지하면서 주전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무제 초기에는 유인책을 써서 흉노를 섬멸시키려 하였으나 흉노가 유인되는 순간 마지막에 漢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물러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이때부터 흉노는 漢과 국교를 단절하고 때때로 침입하였으나 關市의 교역은 여전히 유지하여 갔다.
무제는 흉노를 유인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29년에 무제는 衛靑등 네명의 장군에게 각각 기병 1만 명씩을 주어 흉노를 따로따로 사방에서 공격하게 하였으나 위청만이 승리하고 나머지는 흉노에 패하였다. 이후 漢軍은 전술이 변화되어 출정할 때마다 규모가 더욱 큰 하나나 두개의 병단을 보내어 사막 깊숙이 들어가 흉노의 주력을 섬멸도록 하였다. 漢은 외척인 衛靑과 藿去病의 지휘하에 여러차례 흉노에 대하여 대규모로 공격하였다.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1만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전에 月氏와 烏孫이 차지했던 甘肅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냈다.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흉노의 소규모 집단이 선우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漢에 투항하여 남산 북부 지역의 변방에 자리잡았다. 위청은 산서북부지역에서 출발하여 고비를 횡단, 옹긴 강가에 있는 농성까지 진출하면서 그들을 격파했다. 이렇게 일단 흉노를 몽골고원에 서 몰아낸 무제는 그들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기원전 127년부터 111년 사이에 감숙 지역에 屯田과 郡縣을 설치했다. 그러나 漢은 외척인 위청과 곽거병의 불필요한 낭비로 인한 손실과 동시에 외척과 關西군인의 심각한 파벌 싸움으로 다시는 그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당시 흉노를 정벌한 군의 장령은 대부분 관서사람들로 이들중에 李廣이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무제와 위청은 이광에 대하여 모두 질투하였으며 이광은 흉노정벌에서 위청의 배척을 당하자 자결하고 말았다.
기원전 119년에 끝까지 무제의 신임을 받은 위청·곽거병이 마지막 출정을 한 후 20년동안 漢과 흉노는 다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제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기간동안에 무제는 朝鮮을 침략하고 서쪽으로는 다시 장건을 파견하여 西域과 교통하여 비단길을 열었으며, 남쪽으로는 東?·兩越과 西南夷를 평정하여 판도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흉노에게 전쟁 못지 않은 위협을 주었다. 漢은 기원전 108년에 朝鮮을 멸망시킨 후 遼東塞外의 烏桓을 끌어들여 그들에게 동북 지구에 살게 하고 흉노를 감시케 하였으며 흉노는 漢의 서역교통에 대하여 서쪽에 대한 근심을 느끼게 되었다. 점차로 흉노는 전쟁을 재개할 기미를 보였고 무제 말기에 두번째 漢과 흉노의 격돌이 일게 되었다.
2.武帝 말기의 정벌
무제 제위말기에 북방의 흉노는 여전히 무장한 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漢이 동서로 확장하고 있는 동안 흉노의 정치 중심은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또한 장기간의 휴양으로 국력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고, 다시 침입을 개시하여 또 다시 漢과 서역패권을 둘러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무제도 새로이 서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다시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무제는 여전히 전처럼 외척을 군사 최고지휘자로 하고자 하였으나 위청·곽거병은 이미 세상을 떠나 무제 이부인의 오빠인 李廣利에게 그 임무가 돌아갔다. 이광리의 능력은 위청·곽거병보다도 훨씬 떨어져 대관을 정벌할 때 군기가 해이되어 누차 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이렇게 문제점이 많았음에도 불국하고 여전히 그를 신임하여 기원전 99년에는 그에게 3만기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광의 손자인 李陵에게는 그를 위하여 보급품의 수송을 맡도록 하였다. 이릉이 이를 거절하자 무제는 결국 이릉에게 5천명을 이끌고 이광리와 따로 출격하게 하였다. 이때 이릉은 북부 몽골에 대한 원정을 계획하고 10만명의 흉노군과 싸워 겨우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군의 지원이 없어 결국은 국경으로부터 백여리 떨어진 곳에서 그는 기마궁사로 구성된 8만 명의 흉노 군대에 겹겹이 포위되어 유린당하였다. 그는 중국 국경쪽으로 후퇴했지만 여전히 흉노기병의 추격을 피할 수가 없었고 이광리로부터 원군이 끝까지 오지 않아 결국 단지 400명의 병사만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이릉을 포함한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외척 군인과 관서군인간의 암투의 모순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릉의 투항소식은 무제를 격노하게 했고 사마천은 이릉의 명예를 지켜주려다가 宮形을 당하였다. 기원전 90년에 무제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흉노북벌을 꾀하였으나 이광리는 흉노에 전멸당하자 투항하고 나머지는 전과없이 돌아와 이후 무제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흉노에 대하여 능동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4) 匈奴의 分列
1.東·西匈奴의 분열
무제의 흉노북벌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긴 하였으나 흉노의 손실 또한 상당히 컸다. 첫째는 전쟁 중에 漢은 병력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았으나 흉노는 반대였다. 漢이 동서를 확장하는 소등기간 동안 흉노는 비록 휴식의 기회를 얻었으나 무특이후의 전성시대 국력만큼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무제 말년에 흉노가 비록 여러차례 漢軍을 물리치긴 하였지만 흉노 또한 漢에 대하여 다시는 대규모의 침입을 하지 못하였다. 둘째는 가축의 손실이다. 흉노는 목축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가축은 그들의 재산이었다. 또한 화친의 결렬로 인하여 漢으로부터 들어오던 물자공급도 중단되었던 것이다. 전시에 흉노의 가축이 漢에 의하여 획득된 것이 대략 수천만에 이르렀고 이것은 바로 흉노의 쇠퇴를 의미한다. 셋째는 흉노의 영토손실이었다. 흉노는 對漢전쟁에서 먼저 河南과 河西 두 곳의 큰 목장을 잃게 되었다. 그 후 전쟁으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물러나 동북 각지는 흉노의 세력 범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漢의 국력도 비록 장기적인 전쟁 때문에 많은 것을 소모하였으나 漢은 회복할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흉노의 곤란은 더욱 심하였다. 결국 흉노는 무제가 죽은 후에 화친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昭帝때에 이르러 흉노는 漢과 화친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침입을 적당히 하였다.
宣帝시대 타림분지에 대한 중국의 진출은 괄목할 만했다. 기원전71년 장군 常惠는 일리 계곡에 있는 오손의 도움을 받아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로부터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이렇게 쉽게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원전 60년이래 흉노가 선우位의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흉노의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내분은 기원전 48년에도 다시 일어나서 흉노의 분열과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분열되어 과정을 살펴보면, 呼韓邪와 ?支가 서로 선우를 칭하였다.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지고 東匈奴 부중이 장성 연변으로 남하함으로써 漢과 흉노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준비하게 되었다. 동흉노는 호한나의 지도하에 漢과 긴밀한 교섭을 유지하였다. 기원전 31년 호한나는 長安의 조정에 신하의 예를 취하고 직접 朝貢하여 선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흉노의 호한나가 漢에 대한 入朝稱臣함으로써 종래의 화친관계에서 '朝貢關係'로 전환하였고, 다시 기원후 1세기 중반 흉노 일부가 남하한 경우에는 後漢의 영역 안에 거주하면서 조정에서 파견된 使匈奴中郞將이라는 관리의 감호를 받는 '屬國關係'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유목민의 계속적인 유입과 漢의 약체화, 그리고 선우권위의 실추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조금씩 바뀌어 갔다. 호한나는 중국의 지원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경쟁자를 누르고 기원전 43년 오르콘 강의 영지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한편 호한나에게 쫓겨난 질지는 일리지역에서 오손을 격파하고 이밀 강 지역의 呼揭와 아랄 초원의 堅昆을 복속시킨 뒤 그들을 동맹자로 삼으며 세력을 다졌다. 그러나 漢은 질지가 입지를 공고히 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질지에 이끌린 서흉노는 서방의 이리지방으로 이동한 후 다시 중앙아시아의 탈라스지역으로 갔으나 漢의 서역도독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다. 기원전 36년 장군 陳湯은 아주 대담하게 추강 지역까지 습격해 들어가 서흉노가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질지를 잡아 목을 베었다. 이렇게 질지가 죽은 후에 질지를 따라서 아랄 지역까지 들어온 서흉노의 자취는 사라져버렸고, 더 이상 서흉노에 대한 기록은 없다.
2. 南·北匈奴의 분열
宣帝 때에 동흉노가 漢에 稱臣하여 북쪽 변방은 다시 60여년동안은 조용하였다. 서흉노의 이주와 소멸, 그리고 타림분지에 대한 동흉노의 간섭배제는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前漢의 붕괴로 인한 중국의 혼란으로 인하여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 王莽이 新을 건국한 지 2년채인 10년에 新이 흉노선우의 印信을 고치자 이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 변방이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흉노는 장기간의 보양으로 실력이 크게 증가하여 왕망이 비록 여러차례 토벌군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과 물류가 많던 북쪽 변방이 황폐하게 되었다. 25년에 後漢이 건국되어 다시 중국이 안정되었을 때 後漢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동흉노가 다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30년 光武帝때 흉노의 呼都而尸道若革是 선우는 그들의 세력을 동남쪽으로 넓히면서 45년까지 침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선우가 죽은 후 두 아들이 차례로 계위하여 선우가 되었는데 계속적인 재난과 오환의 공격으로 국세가 쇠약해졌다. 그리고 呼都而尸道若革是 선우의 형의 아들인 比는 자신의 부친이 선우가 되지 못하였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8년의 추장인 비는 선우인 蒲奴(呼都而尸道若革是 선우의 아들)에게 반기를 들고 남쪽의 8개 흉노집단을 가지고 중국에 투항했다. 그리고 비는 자립하여 동흉노의 선조인 호한나의 명칭을 따 호한나선우라 하고 북방의 포노선우와 공방전을 벌였고 마침내 흉노는 동서에 이어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광무제는 호한나선우를 지원하여 내몽골 즉, 고비의 남쪽 국경과 산서의 甘肅의 국경에서 번병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남흉노가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후한의 유일한 적은 외몽골 오르콘에서 과거 흉노 제국의 맥을 잇고 있던 북흉노였다. 明帝때에 북흉노가 자주 변방을 침입하므로 후한은 궁여지책으로 북흉노와 화친을 맺게 되었다. 그러자 남흉노는 이에 원한을 품어 북흉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後漢은 五原에 度遼營을 설치하고 남·북흉노를 격리시켰다. 章帝때에는 북흉노에 내란이 일어나 북흉노가 혼란스러워 部衆가운데 後漢에 항복한 자가 20만이 넘었고 88년에 和帝가 즉위하자 남흉노는 기회를 틈타서 북흉노를 병합하고자 하였다. 이에 後漢은 남흉노를 견제하여 군사를 일으켜 북흉노를 정벌하였는데 이때 북흉노는 붕괴되어 북선우는 도망가고 부하 수천을 사로잡아와 북흉노는 붕괴되게 되었다. 결국 이후 남흉노는 漢에 대하여 더욱 견제하며 조심스러워졌다.
흉노의 남북분열은 이후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흉노와 북흉노는 유라시아 판도를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는 4세기초 後漢으로부터 劉氏姓을 하사 받은 남흉노의 영가의 난을 시작으로 하여 5胡의 남하가 일어나 중원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한는 5胡 16國의 분열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 세계는 전해지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북흉노는 공포의 훈Hun으로 불리면서 서쪽으로 이동을 계속하여 흑해나 카스피해연안 진출하였으며 결국 4세기 후기부터 시작된 게르만의 이동을 가져왔고 따라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의 멸망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의견은 충분한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단지 학설에 머무르며 학자간의 대립의 주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III. 拓跋鮮卑·柔然 (南北朝)
1) 鮮卑의 進出과 拓跋鮮卑의 成立
1. 鮮碑의 진출
鮮碑는 東胡족의 한갈래로 선비산과 북방 嫩江Nonni에서 활동하였는데 前漢시대에는 별다른 교통이 없었다. 後漢 光武 초년에 흉노가 재전성기를 맞게 되자 선비·오환을 이끌고 자주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마침 선비와 흉노가 요동을 침입하다가 요동태수에게 패하고 많은 피해를 입어 선비는 漢에 대하여 마침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49년에 後漢은 흉노에 대한 측면공격을 감행하였고 남흉노가 後漢에 항복하고 북선우가 고립되자 선비는 後漢에 사절을 파견하여 後漢에 귀속될 것을 요구하며 광무제에게 말과 돈피로 만든 좋은 옷을 보내며 자신들의 성의을 표시하였다. 물론 광무제도 비단이나 구리거울 등 진귀한 물품을 답례로 주었다. 後漢은 선비에게 북흉노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54년에 선비대인들이 그 부하들을 이끌고 內朝하자 後漢은 王과 侯에 봉하였다. 그후 明·章帝 2대에 거쳐 선비는 큰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나 和帝 초년에 북흉노를 격파되고 선비가 그 지역을 차지한 이후부터 선비는 점점 강성하여 後漢의 변방 방어에 큰 화가 되었다.
선비는 흉노의 쇠망 후 흉노를 대신하여 초원의 아들이 되었다. 2세기 중엽에 이르러 선비의 한 부족장인 檀石槐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왕위세습제를 실시하여 노예제국가를 건립하였다. 단석괴가 선비를 통일하였을 때 동쪽에는 부여와 예맥이 위치하였는데 이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때로는 예맥과 연합하여 後漢을 침입하곤 하였다. 단석괴는 북흉노를 정복하고, 오손이 존재하는 서부 몽골리아의 일리까지 진출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156년 북아시아의 세력을 얻은 단석괴는 後漢에 대한 오만함을 가지고 요동 지역을 공격했지만 이내 물러났다. 그는 그때 後漢에게 종속되어가고 있던 내몽골의 남흉노를 공격한 뒤, 그들을 서로 포섭하여 陝西와 甘肅의 중국 변경을 공격하였지만 연합한 부족들은 後漢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요서에 대한 선비의 새로운 공격 역시 177년 趙苞가 격퇴하였으며 207년에 趙操는 흥안령 남부의 달라이노르Dalai Nor와 시라무렌Sira Müren 에 있었던 오환을 격파하였다. 220년에 後漢이 멸망하고 삼국으로 나뉘는 등 상당히 혼란기가 도래되어 호기회로 이용될수 있었으나 북방의 유목집단들은 後漢에게 계속 패하고 견제당하여 약화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상황을 이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정도 세력을 확대한 선비는 기회를 노려 甘肅의 국경을 대답하게 공격했으나 279년에 晋의 장군 馬隆에게 격퇴되었다. 漢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거대한 흉노 제국이 붕괴되고 그를 대체한 선비는 아직 중국을 누룰만한 세력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魏·吳·蜀의 삼국이 魏와 晋에 걸쳐 통일되고 점차 중국은 태평의 사치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상황과 꾸준히 세력을 길러온 중국의 이민족들은 중원으로 진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304년에 山西의 太原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劉淵이라는 漢姓을 갖고 있는 흉노선우가 晋에 의해 五部선우로 책봉되었다. 308년에 그는 5만명의 흉노군대를 이끌고 漢의 후예-漢의 성이 劉씨였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내세워 太原에서 칭제하였는데, 이 나라가 바로 北漢 또는 前趙라고 알려진 5胡 16國의 시작을 여는 나라였다. 유연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劉聰은 311년 洛陽을 점령해 황궁을 불태우고 황제인 懷帝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는 長安으로 쇄도해 가 그곳에서 인구의 절반이나 학살하였다. 흉노가 떠난 이후 晋의 새로운 황제인 愍帝는 장안에 거처를 정하였지만, 316년 흉노가 다시 돌아와 성을 봉쇄하고 심약한 황제에게 항복을 강요하여 결국 晋은 멸망하게 되었다. 晋의 종묘는 8왕의 난을 피해 建業으로 피신한 晋의 종친인 司馬睿에 의해 건국된 東晋으로 이어졌다. 이때 선비는 後漢말기의 난세와 五胡 침입기를 이용하여 모용선비에 의한 燕과 탁발선비에 의한 代로 건국되어지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代는 魏로 국호를 변경한 후 화북의 십육국을 통일하며 北魏로 발전하였다.
2. 5胡 16國의 鮮卑國
永嘉의 난 이후 匈奴, 鮮碑, ?, 厘, 羌族등 북방민족이 장성이남으로 내려와 그들의 나라를 건국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慕容鮮碑가 세운나라는 前燕, 後燕, 南燕등이 있고 이외에 乞伏國仁이 세운 西秦, 禿髮烏孤가 세운 南凉등 다섯 개의 나라이다. 선비족의 한 갈래인 모용선비는 선비산에서 남하하여 시라무렌 유역에 와서 정착하였다. 魏나라 초기에 막호발이 여러 부의 주민을 거느리고 동남 방향으로 이동하여 요서지방에 들어가 대극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후 막호발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 섭귀 때에 이르러 창려, 요서 등 두 곳을 치다가 대 참패를 당하고 멀리 요동의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284년에 섭귀가 죽고 아들 외가 즉위하였다. 모용외는 285년에 동쪽으로 부여를 진공하여 부여의 수도에 박근하여 부여사람 수만을 붙잡아 돌아왔다. 그후 그는 청산과 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국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이로써 모용선비는 대대적으로 발전하였다. 모용외 이후부터 봉건사회로 이행하여 慕容簿은 337년에 燕王을 칭하며 龍成을 수도로 정하였다. 이 나라가 前燕이다. 燕王 모용준의 동생 모용각이 後趙를 찬탈한 염민의 위를 토벌하고 ?을 수도로 하여 천도하였다. 모용준은 황제로 즉위하여 洛陽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의 아들 모용위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수가 사이가 나빠져 모용수는 前秦의 符堅에게로 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부견은 이를 기회로 洛陽을 점령하고 ?을 함락시킨 후 모용위를 잡고 前燕을 멸망시켰다. 부견은 전연뿐만 아니라 代나 기타 소국등을 병합하여 화북의 통일을 가져왔다.
부견에 의해 燕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기회를 노려 燕의 부흥을 꾀했는데 羌族인 姚?과 더불어 부견을 꾀어 東晋과 전쟁을 벌이게 하여 ?水戰에서 부견이 패하자 모용수는 하남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燕王이라 하였다. 과거 前燕을 따르던 선비족이 집결해 큰 세력이 되자 西燕의 모용명을 죽이고 모용선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모용수는 탁발선비의 나라인 代와의 전쟁에서 병사하고 後燕은 魏로 국명을 바꾼 代에 의하여 가운데가 분단되자 북변의 3주를 지배하는 소국이 되었다가 결국 魏에 의해 흡수되었다.
西秦은 甘肅에서 乞伏國仁이 세운 나라이다. 작은 소국으로 36년간이나 유지되었으나 흉노족인 혁련정이 魏의 태무제를 피해 도주해와 西秦을 멸하였다. 南凉은 前秦의 부견 사후 화북이 분열되자 禿髮烏孤가 甘肅에서 세운 나라이나 西秦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南燕은 魏에 의해 後燕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모용수의 동생 慕容德이 자립하여 後燕의 남부를 지배하였다. 모용덕 사후 모용초때 東晋의 劉裕가 북벌을 단행하자 식량부족과 동진군의 공격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모용초는 建康으로 송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2) 北魏의 北朝時代
1. 北魏의 성립
선비의 한 갈래인 鮮卑系 拓跋部는 2세기 후반경에 흥안령 동북부 울선동과 훌룬호수에서 음산산맥 부근으로 남천하였다. 탁발부는 이동목축생활을 영위하던 부족들의 연맹체였는데, 중국과도 비교적 근접하고 농경도 부분적으로 가능했던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경제생활에도 변화가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後漢代에 남하하여 옛 흉노가 살던 곳으로 들어와 유목생활을 하였다. 3세기 전반 力微때부터는 약탈을 통해 가축과 인민을 빼앗아 오는 한편, 성을 쌓아 定居하기도 하고 농경도 실시하였다. 탁발부는 역미에서 什翼?에 이르는 150년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부족 지배층내의 권력구조에 차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나중에 세습화된 代人이라고 하는 맹주를 중심으로 결속을 굳혀 성락에 동브을 구출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진은 이 새로운 세력을 회유하고 이용하고자 代人인 拓跋?盧를 代王에 임명함으로써 산서성 북부부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동진의 시대가 되자 탁발부는 자동적으로 晋과의 臣從관계에서 이탈하여 代王 십익건은 선비의 다른부족, 흉노의 여러부족, 또 남아 있던 한족을 모아 자립을 꾀해 338년에 晋을 모방하여 백관을 정비하여 代國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代는 십익건사후 前秦의 부견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후 前秦이 붕괴되자 386년에 拓跋珪는 代를 부흥하여 代王이라 칭하다가 다시 398년에 국호를 魏로 바꾸고 平城에 도읍하여 道武帝가 되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영웅적인 왕으로서 화북을 통일해 나갔으며 중원지역 통치를 위해 유목사회의 부족체제에서 과감히 탈피하였고 漢族 士大夫와 귀족의 자제를 등용하여 국가체제를 중국식 율령체제로 정비하였다. 점차 北魏는 북방의 유목사회에서 남방의 농경체제로 전환되어 갔다. 道武帝는 처음 後燕의 모용선비로부터 진양을 빼앗고 다시 보정의 남쪽에 있는 중산을, 마지막으로 업과 창덕을 정복함으로써 탁발선비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고 체제를 정비한 탁발의 魏는 멀리 황하에 이르기까지 산서와 하북을 영유하였다. 도무제의 호한융합체제는 선비족의 반발이 있었지만 北魏정권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군주권의 강화를 위하여 제위의 장자계승제도도 확립되게 되었다.
北魏는 明元帝와 太武帝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계속하였다. 특히 태무제는 화북 변경을 자주 침략하던 초원의 유목부족인 柔然을 물리쳐 변방을 안정시킨 후 서쪽으로 나아가 西秦, 夏, 北燕, 北凉 등을 차례로 병합하여 부견에 이어 439년에 화북 재통일을 이루었다. 태무제의 치정으로 인한 정치적 안정을 배경으로 孝文帝는 과감하게 한화정책을 수행하여 洛陽천도와 姓族詳定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평성에 있는 아직 유목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탁발부족민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것은 결국 숙번화된 洛陽의 탁발부족민과 아직도 생번인 평성의 탁발부족, 조정과 군벌과의 마찰등 하부사회의 여러 집단간의 이질성과 상하계층간의 모순을 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北魏가 기반을 두고 있던 탁발부족민들의 반발을 야기하여 北魏를 내부로부터 허물어뜨리는 힘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5호 16국과 北魏시대는 漢과 匈奴라는 두 제국을 기축으로 유지되던 남북대립체제가 붕괴되면서 초원세계와 농경세계의 접속지대에 호한적인 요소를 동시에 내포하는 정권들의 시대였다. 상당수의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포기하고 정주화하며 중국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적지 않은 중국인들 역시 유목사회에서나 통용되던 형태와 이념에 익숙해져 갔지만 '호한체제'는 여전히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를 철저히 융합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장성 이북에 突厥이라는 완전한 유목국가가 성립되고 그리고 장성 이남에는 隋·唐이라는 호한융합적인 중원왕조가 성립됨으로써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남북대립체제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러나 약 3세기간에 걸친 두 세계의 이질적인 성향의 접촉은 이후에 들어선 隋와 唐의 체제에 대해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2. 北魏의 쇠퇴
北魏는 장성 밖의 세력들과 대비하려고 6鎭을 세웠다. 하지만 洛陽천도가 이루어지고 효문제의 적극적인 한화정책으로 인하여 한화된 선비와 북방의 선비는 심각한 갈등이 생겨 525년에 孝明帝때에는 6鎭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효명제는 6鎭의 반란이 일어나자 선비의 일족인 爾朱氏인 爾朱榮의 힘을 빌어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효명제는 어머니 胡太后와의 갈등속에 독살당하고 幼帝가 옹립되었으나 결국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고 호태후는 살해되었다. 세력을 잡은 이주영은 효문제의 조카를 맞이하여 孝莊帝를 세웠으나 효장제는 이주영과 마찰속에 폐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주영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이주영의 아들인 爾朱兆는 효장제를 살해하고 節閔帝를 옹립하였다. 그러자 이주영휘하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때를 노리고 있던 高歡이 이주씨토벌을 선언한 후 ?을 탈환하고 洛陽에 진입하여 절민제를 폐위하고 효문제의 손자인 孝武帝를 세웠다. 효무제는 제위에 오른 후에 고환을 몰아내고자 武川鎭 출신인 宇文泰를 포섭하고 그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고환은 효무제를 대신하여 효문제의 증손을 내세워 孝靜帝로 삼았고 우문태는 효무제와의 대립속에 효무제를 독살한 후 그의 사촌형을 문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北魏는 고환과 효정제의 東魏와 우문태와 文帝의 西魏로 분열되었다.
3. 화북의 분열과 隋의 통일
東魏의 고환사후 高澄은 세력을 점차 더욱 확대하여 효정제를 핍박하며 황위를 찬탈하려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동생인 高洋은 효정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齊를 세우고 文宣帝라 하였다. 문선제는 초기에는 명군이었으나 점차 난폭해져 선비족을 멸시하며 일족을 죽이기 일쑤였고 문선제가 죽은 후 高演은 幼帝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하여 孝昭帝가 되었다. 그는 현명하였으나 일찍 죽어 어리석은 武成帝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무성제 또한 北周를 격파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여러 대신과 명장 斛律光 등을 죽여 황실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점차 北周보다 정치·군사·경제적인 면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北齊는 정치적인 중심지인 수도를 ?에 두고 군사상의 중심지는 晋陽에 두었다. 이것은 정치와 군사가 양분되는 것을 가져왔고 선비족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西魏또한 우문태가 죽자 宇文覺은 공제를 폐하고 국호를 周라 한 후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가 武帝이다. 무제즉위 이후 北周는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여 군사나 경제적인 면에서 北齊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무제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안정과 군사력 강화, 그리고 경제적 발전에 주력하였다. 서위 때 우문태에 의해 실시된 부병제와 중농정책, 유학을 존중하는 태도는 무제에까지 계승·발전하여 결국 꾸준히 발전하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557년에 北齊를 정복하고 화북지방을 다시 통일하였다. 北周의 중심지인 장안은 고대로부터 정치·군사상의 요충지였지만 後漢이 낙양에 도읍한 후 문명의 중심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히려 선비족은 한화되지 않고 아직 유목적인 건전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北周의 사정도 무제가 죽은 후부터는 달라지게 되었다. 무제가 죽고 宣帝이후의 황제는 모두 무능하여 국정이 문란해져 민심은 외척인 楊堅으로 옮겨갔다. 그는 외손주인 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니 이로써 隋가 건국하게 되었다. 隋의 양씨는 그 근원이 北周와 같은 무천진 출신으로 그의 선양형식을 빌린 왕위 찬탈은 커다란 동요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北周왕가의 부흥운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문씨 일족을 찾아내어 모조리 다 죽여버렸다. 당시에는 같은 무천진 출신으로 우문씨와 조금이나마 인척관계에 있는 장군들이 많아는데 그 또한 北周의 외척이면서 무천진 군벌 출신의 장군 등을 필요 이상으로 살육하여 결과적으로 군사의 정점인 무천진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점점 고립되게 되었다. 문제는 이미 그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九品官人法을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선발 방법으로 과거를 실시하였으며 南朝의 陳의 국세가 기울었음을 틈타 陳을 멸망시켰다. 581년은 220년 後漢이 멸망하고 삼국이 건국되면서 전국으로 분열되어 300여년간 남북으로 나뉜 중국이 隋에 의해 통일되는 순간이었고 隋는 秦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왕조가 되었다.
3) 柔然 帝國
1.柔然의 起源
흉노와 선비가 중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아직 주인이 없던 초원에서는 5세기초부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 부족이 柔然이다. 대부분의 유목국가가 그렇듯이 유연의 근원과 그들이 사용한 언어, 다른 민족 및 언어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유연이 건설하였던 제국의 판도는 대체로 동으로는 고구려의 국경이 맞닿은 요하에서, 서쪽으로는 이르티쉬 강 상류와 카라샤르 부근까지의 漠北전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중심지는 오르콘강과 셀렝가강 유역으로부터, 천산산맥 북쪽기슭까지, 그리고 오르도스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후세에 기록된 계보에 의하면 유연은 몽골족으로 흉노의 일파이며, 유연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때는 3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유연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北魏와의 군사적 충돌 사실에 국한되어 있다. 유연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 기록하는 것은 北魏 도무제때다. 402년경에 유연의 수장중의 하나인 社崙Shinlun이 카라샤르지역에서 철을 제조한다고 하는 소규모 유목국가인 高車를 토벌하여 복속시키면서 제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또 北魏와 충돌하게 되었다. 유연의 지배자는 과거 투르크적인 흉노의 선우라는 칭호를 대신하여 몽골어로 汗Qan또는 可汗Qaghan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유연의 汗位는 건국자의 부족에 의해 세습되었다. 유연은 제사를 국가의 중대행사로 받들고 매년 정기적으로 거행하였으며, 이때 부족민을 모아 정치, 군사적 국가대사를 협의하였다. 특히 유연의 군사제도는 百人을 1幢으로 편성하여 幢에는 幢師를 두고 10幢으로 구성된 千人을 1軍으로 편성하고 軍에는 將을 두었다. 이와 같은 십진법적 군사편제는 이후의 돌궐·위구르·몽골제국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2. 柔然과 北魏와의 관계
초기의 유연은 미약한 소수 세력에 불과하였으나 이미 4세기 말이 되면 北魏의 공세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막북의 일대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에 北魏는 유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경지대에 장성을 축조하는 등 피동적인 방어를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노력이 효과적이지 못한 것을 인식하면서 유연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고 유연 각 씨족간의 분열을 획책하는 등 보다 능동적인 방어형태를 취하였다. 도무제는 402년에 고차를 정벌하고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사륜을 물리치는 성공적인 원정을 하였다. 명원제는 423년에 북방에서 유연이 만리장성으로 접근하는 경계를 계속적으로 방어하였다.
태무제때에 이르러 北魏의 유연에 대한 대처는 능동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425년에 기병을 이끌고 남에서 북으로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유연에 대한 습격을 수행하였다. 화북이 통일되고 北魏의 정치적인 안정이 이루어지자 태무제는 고비에 있었던 유연에 대해 대정벌을 위하여 4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 대대적인 원정을 지휘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살육했다. 결국 429년 여름에 유연은 치명적으로 패퇴하였다. 소규모의 보급부대를 거느린 輕騎부대가 고비사막을 건너 유연의 카간인 大檀Tat'an을 습격하여 대단을 북쪽으로 도망가게 하였다. 北魏는 유연을 고립시키고자 초원에 거주하는 민족 중에서 유연과 전쟁을 수행할 동맹을 구했다. 그리하여 유연의 동쪽과 서쪽 경계밖에 존재하던 烏孫이나 高車등과 같은 유목민족의 소왕국들과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삼면에서 고립된 상태에서도 柔然의 침입행위는 감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438년과 443년 2차에 걸쳐 수행된 北魏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445년 北魏는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고 있었던 선선을 보복 공격하였고, 448년 北魏의 장군인 萬度歸는 카라샤르지역의 고차로 하여금 北魏에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태무제는 세 번째 원정을 위해 449년 柔然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태무제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대 중국문명을 훌륭하게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개성을 갖고 있었으며 화북을 통일시키는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용맹을 갖추었다. 이런 태무제가 직접 유연을 공격한 것이다.
수십년 동안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北魏는 대체로 공격하는 쪽이었고 유연은 방어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태무제 사후 北魏의 유연에 대한 정벌이 조금 주춤하는 듯 하였으나 새로 즉위한 문성제가 다시 유연에 대한 무력정벌을 준비하였다. 문성제의 유연 공격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완전히 소탕 정복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北魏도 470년에 있었던 마지막 정벌을 끝으로 당분간 국내의 치정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이후 수년간 유연의 동쪽 경계지역에는 비교적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와 반대로 서쪽지역은 유연이 카라샤르의 고차에 대한 지배권을 재획득하려 함으로써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6세기초에는 유연은 서쪽을 완전히 제압하고 동쪽의 北魏 공격을 기도하였다. 물론 北魏의 진공이 유연에게 심각한 문제로 제기하였으나, 유목제국의 군사적인 기반은 완전히 분쇄할 수는 없었다.
北魏의 북방정책은 한이 흉노에 취한 북방정책과는 몇가지 구별된다. 첫째 황제의 빈번한 막북친정이다.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 한 무제와 스스로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막북으로 나선 태무제와의 차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성품이 아니라 농경적 군주와 유목적 군주라는 근본 배경이 달랐다. 둘째 北魏의 유연원정이 대부분 겨울에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겨울은 목초가 부족하기 때문에 유연은 동영지에 머무렀고 따라서 기동성이 현저하게 저하되는 계절이었다. 다시 설명하면 적의 공격에 가장 노출이 심한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몽골고원의 다른 유목민들처럼 유연 역시 겨울에는 비교적 온난한 남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北魏의 공격권내에 들어온 셈이었다. 때문에 유연을 급습하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에 輜重이 달린 대규모 정규군이 아니라 기동력이 뛰어난 輕騎를 이용하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사실을 北魏의 황제들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매년 봄이 되면 어마어마한 대군으로 막북으로 갔던 漢무제의 원정과는 그 내용도 결과도 모두 판이할 수밖에 없다.
3. 柔然의 분열과 멸망
유연은 주로 단결된 군사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도우룬Toulun의 재위기간부터 이러한 사정은 변화되어 유연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외부적인 요인은 우선 고차가 독립을 다시 쟁취하는 때부터 분명해지면서 결국 반세기 후에 초원의 신세력 돌궐족에게 유연제국은 멸망하는 것으로 그 절정에 달하며 끝났다. 유연제국 내부적인 분열은 도우룬과 그의 숙부 나가이Nagai간에 군사적인 경쟁심이 발전하면서 대두되었다. 492년에 도우룬이 급서하자 나가이는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나가이의 재위기간은 10년이었는데 나가이 사후 14년 동안 유연의 카간은 수시로 바뀌었다. 阿那壞가 계승한 520년의 유연제국 내부에는 심각한 긴장상태가 폭발하였다. 유연은 동부의 카간인 아나궤와 그의 숙부이며 서부의 통치자인 婆羅門사이의 충돌로 인하여 520년 내전이 벌어져 크게 약화되었다. 北魏는 즉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연의 집권층을 영구히 분열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아나궤는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 위하여 막강한 北魏의 조력이 필요하였다. 北魏의 협조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아나궤는 자신이 직접 낙양을 방문하여 北魏 천자에게 직접 항복하였다. 北魏의 바라문에 대한 아나궤의 카간계승권을 인정하라는 평화적인 설득이 실패하자 전면적인 무력공격이 감행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시 수년 후 北魏는 바라문의 근거지를 습격, 바라문을 생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하였다. 바라문의 사후 수년간 北魏와 유연은 형식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돌궐은 본거지가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유연에 복속되었던 부족이었으며 주로 철물업에 종사하였다. 6세기초부터 고차는 유연에서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부민은 고차의 독립계획을 아나궤에게 알려주고 유연의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아나궤는 이를 거절하였다. 부민은 서위와 연합하였고 552년 초에 부민의 반군과 아나궤의 진압군은 황이황 북쪽에서 대접전을 하였는데 부민의 승리였다. 유연의 실질적인 멸망이었다. 아나궤는 자살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유연제국 내부분열이 표면화되었다. 유연족의 일부는 아나궤의 아들 안로전Anlochen을 따라서 西魏에 항복하였고 다른 일부는 도우룬의 후손하나를 중심으로 유연제국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연 내부에 심각한 분열은 계속되어졌고 내부 분열로 야기되는 난관은 서쪽의 돌궐과 동쪽의 거란의 연이은 공격으로 더욱 가중되었다. 555년과 556년에 돌궐은 유연을 치명적으로 패퇴시키고 초원에 제국을 건설하였다.
IV. 突厥·위구르(隋·唐)
1) 第1突厥帝國
1.突厥의 起源
突厥의 기원은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민족의 기원과 같이 신비와 전설로 싸여 있다. 돌궐의 전설은 중국의 사료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돌궐의 선조는 투르크계의 일족으로 匈奴의 북방에 나라를 이루고 살았는데 어느 날 열살 된 한 소년만 발이 잘린 채 살아남고 모두 살륙되었다. 소년은 암이리에 의해 양육되었고 암이리는 소년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러나 다시 소년을 잡으로 오는 적들을 피해 암이리는 투르판Turfan의 어느 동굴로 도망가 열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소년들은 인간의 여자와 결혼하여 흩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阿史那Ashihan라는 성을 가지고 가계를 세웠는데 몇 세대 이후 돌궐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타이山을 지배하였고 그들 조상의 발생지인 동굴을 순례하였다고 기록되어진다. 돌궐의 근원에 관한 사실적인 역사를 밝혀 줄 만한 기록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돌궐이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언급된 시기는 3세기 중이었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돌궐은 柔然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6세기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기부터 돌궐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돌궐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북몽골에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돌궐의 출현은 동아시아 세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6세기 중기에 돌궐의 군주 일릭카간과 그 아들 무칸카간은 2대에 걸쳐 북아시아 세계를 제패하던 柔然을 멸하고 고대 흉노에 비할 정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남북조시대의 말기로 北周와 北齊는 유연의 붕괴에서 돌궐의 진출로 이어지는 초원의 역사에 위협을 느꼈고 隋煬帝의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 돌궐의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행동으 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돌궐제국은 건국 30년만에 동서로 분열되었고 7세기 중기 이후 隋양제·唐태종의 적극적인 침략으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돌궐이 문명을 이루었다고 하는 증거로 북아시아 유목민족 가운데는 처음으로 돌궐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당나라 현종때 만든 돌궐비문이 오르콘강가에서 발견되었다. 돌궐문자는 서아시아의 소그드문자를 변형한 것으로 한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표음문자이다. 이는 중국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돌궐이 문화적으로 서아시아 문화가 훌륭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돌궐이 군사적으로 세력이 약한 중국문화를 배격한 것은 북방민족의 강한 민족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돌궐의 국가조직은 건국초부터 동·서돌궐로 나누어 카간과 야구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동돌궐이 宗家的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돌궐 카간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카간의 칭호를 주었다. 카간의 세습은 先카간의 유언과 부족장들의 찬성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돌궐의 汗位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카간의 아래에는 7대관과 다시 그 밑에 28등관이 직할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관직은 세습되었다. 그리고 서돌궐의 야구브은 수도를 天山山中에 두고 야구브 아래 다시 소카간을 두어 10부를 통치하게 하였다. 카간位에 대한 계승은 결국 서돌궐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돌궐은 강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란으로 인한 세력 약화로 그 꽃을 크게 피우지 못했다.
2. 돌궐의 전성기
돌궐 제국의 성립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높았던 일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52년 돌궐을 건국하여 Ilig Qaghan伊利可汗을 칭한 것은 阿史那氏의 土門Bumin이었다. 돌궐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부민의 업적 때문이었다. 유연은 카간인 阿那壞와 그의 숙부인 바라문사이의 충돌로 인해 502년 내전이 벌어져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연은 북위의 원조를 받은 아나궤의 승리로 돌아가고 투르크계 부족들의 반항을 평정하는 일은 칸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아나궤의 몫이었다. 508년에 그런 부족의 하나였던 高車가 유연을 격파했으나 유연은 516년경에 고차의 왕을 죽이고 복속시켰다. 고차는 끊임없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21년 고차는 유연의 내분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46년 직전 그들은 또다른 독립을 계획할 때 돌궐의 방해를 받았다. 돌궐은 고차와 같은 종족이었지만 유연의 카간 아나궤에게 그 계획을 알렸다. 대가로 돌궐의 지도자였던 부민은 유연의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했지만 아나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부민은 같은 투르크계로 장안을 수도로 하고 있었던 서위와 연합하였다. 그들은 몽골계이며 숙적인 유연에게 보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맹을 반가워하였고 서위는 그 대가로 551년에 부민에게 공주를 주었다. 서위와 돌궐은 유연을 포위하고 난 이후 부민은 그들을 완전히 격파하고 아나궤를 자살하게 하였다. 이때 유연의 잔여세력은 중국의 변경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동위를 계승한 北齊가 그들을 변경의 수비병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부민은 초원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초원의 영토는 유연으로부터 돌궐로 넘어가고 부민은 카간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다. 부민은 승리 직후 사망하였고 그가 죽자 그가 건설한 제국은 나뉘어 그의 자식과 동생에게 분할하였다. 그의 아들인 무칸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카간의 칭호를 물려받았고 이로써 동돌궐 칸국이 성립되었다. 동돌궐은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범위는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투르판분지의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하였다.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은 2인자란 뜻을 지닌 '야브구yabghu'라는 칭호를 갖고 서쪽 지방을 물려받아 서돌궐 칸국을 세웠다.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다.
돌궐의 국가 토대가 확립된 것은 Muqan Qaghan木汗可汗이었다. 572년까지 계속된 무칸의 집권시기에 돌궐제국은 동쪽과 서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무칸은 그의 제국을 중국의 접경까지 확대시켰고,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거란이었다. 동돌궐이 560년에 거란을 격파하여 복속시켰다는 사실은 돌궐제국의 판도가 이제 거의 요동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북주도 돌궐의 세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무한의 딸에게 청혼했다. 돌궐은 北齊를 공격하여 진양을 완전히 약탈하였다. 무한이 572년에 사망하고 他鉢Tsapar가 제위에 올랐을 때 서돌궐의 이스테미는 원로정치인으로 카간의 칭호를 스스로 획득할 수 있었겠지만 타파르의 등극을 승인하였다. 타파르의 재위기간동안 돌궐의 압력은 중국 북방변경지역에 계속되었고 돌궐의 번영은 영원하는 듯 보였다.
3. 돌궐의 분열
동돌궐의 발전
돌궐은 제국을 세운 지 2대만에 동서로 갈라져 발전하면서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서돌궐은 이리하 지방에서 천산남로와 파미르서쪽을 점령하고, 동돌궐은 몽골지방을 차지하여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돌궐의 제국들은 전성기를 오래 구가하지 못하였다. 호쇼차이담 비문에서 찬양되었던 위대한 카간의 권위는 이후 위대한 능력이 결여된 후손들에 의해 계승하였다. 사실 돌궐의 최대의 적은 다른 돌궐이었다. 실제 돌궐의 힘을 파괴한 것은 오르콘 강가에 있는 동돌궐과 탈라스 강과 이식쿨에 있는 서돌궐사이의 경쟁이었다. 만주로부터 아랄해까 지를 절반씩 나누어 지배한 두 돌궐제국이 만약 이스테미가 인정하였듯이 동돌궐이 우위를 보장하여 카간이라는 최고 군주의 칭호를 갖고 서돌궐은 이인자의 뜻을 지닌 야브구라는 칭호에 만족하면서 통일을 유지했다면 그들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의 동생이자 계승자인 돌궐의 카간 타파르는 서돌궐의 충성을 받았던 동돌궐의 마지막 존재였다. 타파르의 全제위기간 동안 돌궐은 남쪽에 위치한 중국의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타파르가 사망한 581년은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된 해이다. 카간位를 두고 타파르의 아들인 안로Anlo와 조카 다로빈Talopin이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로는 즉위 즉시 다로빈의 아우 이스파라Ishpara에게 양위하고 안로는 제2카간이라는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고 새 카간인 이스파라는 다로빈에게도 아파카간Apa Qaghan이라는 칭호를 주어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300여년만에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는 이제 시선을 북으로 돌려 돌궐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583년에 수는 이스파라의 돌궐군을 물리쳤다. 이스파라는 전쟁 도중 아파카간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그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아파카간은 도주하여 서돌궐의 야구브인 타르두에 게 갔다. 동·서돌궐의 관계는 그로부터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스파라가 아파카간을 공격했던 것을 계기로 동돌궐제국 시대의 전성기는 종료하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동서간의 초기 전쟁에서 동돌궐은 패하여 수에 도피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는 돌궐의 내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수는 동돌궐에 원조를 하여 돌궐의 전체 세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중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정하였다. 수의 목표는 양쪽 돌궐을 존속시키되, 동돌궐을 수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로 유지시켜 수와 강력한 서돌궐 사이의 완충적인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파라 사후, 동돌궐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되어 동돌궐의 존속은 수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夷利制夷 방법이 성공함에 따라 수는 종종 돌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돌궐의 불만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카간 沙鉢略때는 서부의 타르두와 동부 지역의 거란으로부터 협공을 당하였다. 수는 타두르와의 연맹을 유보하고 오히려 타르두에 대항하는 동돌궐을 지원하였다. 내분에 휩싸인 동부는 더 이상 위협스런 존재가 아니었고 타르두에게 유리하게 돌궐이 통합하게 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동돌궐의 카간 都藍은 중국의 지원을 받던 또 다른 정적 突利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도람은 599년에 돌리를 몰아내었지만 수는 오히려 돌리를 환대하고 그들은 오르도스 지역의 변병으로 삼았다. 후에 당은 돌리를 이용하여 동돌궐을 견제하였다.
수양제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의 동돌궐의 지배자는 시비Shih-pi였다. 시비는 고구려 침략의 실패로 중국내부에 일어난 혼란을 틈타서 동돌궐은 과거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행동을 취해 동돌궐의 찬란했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재획득하기 위한 계획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으로 돌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고 시비의 공격은 어느정도 성공하였으나 615년의 공격은 이세민에 의해 격퇴되었다. 수·당 교체 이후에는 당의 중국에 대한 全지배권을 확대시키는 동안 동돌궐은 침체된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계속하였으나 갑자기 시비가 사망하고 당의 적절한 외교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동돌궐의 붕괴
당태종은 처음에 당의 건국을 도와준 돌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초원 유목민들은 산서의 심장부로 쇄도해 들어왔고, 624년 태종이 즉위하던 해에 동돌궐의 새로운 카간 힐리Hsiehli는 중국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부대를 이끌고 長安을 위협했다. 태종은 소수의 군사로 대담하게 행동하여 결국 힐리는 전통적인 희생양식을 치르고 화의를 체결하였다. 당은 돌궐의 무례한 자세와 당을 함부로 여겨 침략해 온 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우호관계를 접고 적극적인 공세로 동돌궐을 격퇴시켜 그 지배하에 있던 서북지방의 유목민을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태종은 서북방의 유목민으로부터 天可汗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태종은 힐리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힐리에게 반란을 일으킨 두 투르크 부족-철륵과 薛延陀-을 지원하였다. 전자는 타르바가타이 지역에 있었고, 후자는 홉도 근처에 있었다. 627년에는 동부 몽골리아 본토에서 태종은 카간의 정적인 돌리를 돕자 그가 힐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당은 이를 방관하면서 은근히 반군을 원조하였는데 이렇게 힐리를 둘러싼 포위망을 구축한후 630년 李靖과 李世勣의 지휘하에 중국군대를 출정시켰다. 당군은 초원으로 침입하여 힐리와 충돌하여 그의 부족민은 궤산시켰고 이른 봄에는 힐리를 생포하였고 반군을 카간의 位에 앉혔다. 이 이후로 동돌궐의 세력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제 서돌궐이 중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동돌궐은 50년 가까이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태종의 승리이후 돌궐은 암흑시대가 되었다. 근반세기 동안 돌궐은 당에 의한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고 돌궐은 마지막 힘을 모아 679년에 阿史德Ashihte家의 영도하에 당을 침입하였다. 이 침략은 시기상조였고 충분히 준비되지 못하여 실패하였지만 돌궐재건의 자극을 주었다.
서돌궐의 발전
이스테미의 아들인 타르두Tardu가 즉위함으로써 서돌궐의 야브구가 되었다. 타르두는 야심있는 인물로써 돌궐제국의 2인적인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서부의 경제권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582년과 584년 사이에 타르두는 동돌궐의 카간과 결별하고 스스로 카간을 칭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한의 위업을 회복하고자 했던 강력한 隋는 타르두의 반란에서 타르두를 지원했고 돌궐제국 둘로 분열되었다. 그후 수년간 동서의 두 돌궐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양측은 각각 隋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隋문제는 어느 쪽도 후원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정세를 이용하여 오히려 돌궐 내분을 더욱 조장하였다. 동·서돌궐은 결코 다시 통합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서로가 최고의 적이었다. 도람이 죽자 타르두는 동부의 혼란을 다시 한 번 이용하여 그들을 복속시키고 몽골리아와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여 돌궐족의 재통합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중국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는 위협수단을 구사했다. 601년에는 隋의 수도인 長安을 위협했고, 602년에는 중국의 보호를 받으며 오르도스에 둔영을 치고 있던 돌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603년 중국의 간교로 인하여 서부부족의 하나인 쩉뢰스Tölös족이 갑자기 타르두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타르두도 자신의 영역안에서 세력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타르두 사후 서돌궐은 바로 분할되었다. 타르두의 손자인 Shekuie射?는 서쪽의 타쉬켄트를 포함하는 지역을 확보했고 處羅라는 이름의 반란 수령은 일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610년대 초에 동서돌궐의 형세는 호전되는 듯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북방민족의 중원침입 이후 한민족은 북방민족에 대해 수세적 저자세로 일관하여 왔다. 이러한 對북방관계는 양제에 의하여 적극적 공세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양제가 제위에 올라 일련의 대침략 전쟁을 고구려에 대하여 감행하였으나 무참히 실패하였고 이 원정의 실패와 또 양제 자신의 무절제한 지출로 隋의 기둥은 무너지게 되었다. 서돌궐은 중국의 내분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기도하였다.
서돌궐의 붕괴
서돌궐은 사궤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고 있었다. 알타이의 설연타를 복종시킨 이후 테케스 강과 율두스 상류에 거처를 두고 있었던 사궤는 알타이로부터 카스피해와 힌쿠시에 이르는 지역을 611년부터 618년까지 지배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야구브인 統葉護는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이미 동북쪽에 있던 철륵을 정복한 그는 서남쪽의 재배권을 재확인하고 부분적으로 타림분지에 대한 패권도 장악하였다.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여행 도중인 630년 초 토크막Tokmak에서 통엽호를 만났을 때 그의 세력은 최고 정점에 있었다. 당시 동돌궐을 격파하기 위해서 온힘을 쏟고 있던 태종은 통엽호를 동맹자로 대우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통엽호는 토크막에 있는 아정에서 중국의 구법승을 환대하였다. 현장이 방문한 지 몇 달 뒤 이 강력한 서돌궐 제국은 붕괴되었다. 630년에 돌궐의 부족중의 하나인 카르룩Qarluqs에 의하여 통엽호는 피살되었고 태종은 이를 이용하여 서돌궐의 정치적인 세력을 제거하여 漢代의 속지였던 투르환지역을 점령하였다.
서돌궐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그 이름은 중국어 전사로만 남아 있는데, 이식쿨호의 서부와 서남부에 있는 弩失畢과 그 호수의 동북부에 있었던 尉陸이다. 갈라진 민족이 언제나 그렇듯 이 두집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싸움으로 서로를 약화시켰다. 카간 돌육-나라이름과 같음-은 이 두집단을 통합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651년에는 중국의 둔전이 설치되어 있던 하미지역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장군 郭孝恪이 古城과 우룸치 사이에 있는 보그도 울라Bogdo Ula근처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더구나 태종이 돌육에 대항하여 노실필 유목민들을 지원하자 進退維谷에 빠진 돌육은 박트리아로 도망가 그곳에서 사라졌다. 唐고종은 서부에 있는 돌궐에 노력을 집중했다. 돌육의 카간 賀魯는 잠시였지만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서부의 汗國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중국의 정책에 잘 따르던 婆閏을 카간으로 하면서 항가이 산맥의 주변에서 유목하던 위구르계 투르크인들과 연합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657년에 唐의 蘇定方은 서북으로 출정하여 하로를 이식쿨호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격파하였고 타쉬켄트로 도망갔지만 타쉬켄트인들은 하로를 잡아 唐으로 보냈다. 이로써 서돌궐도 중국의 지배권에 속하게 되었다.
2) 第2突厥帝國(682-743)
1. 엘테리쉬 카간Elterish Qaghan
고종의 치세 후반기에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티베트인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 게다가 태종에 의해서 멸망된 동돌궐이 쿠틀룩 엘테리쉬Qutlug Elterish의 지휘하에 부흥한 것이다. 동돌궐은 항가이산맥지역과 오르콘 상류의 전통적인 핵심지역에서 재건되었다. 683년에 쿠틀룩은 토뉴쿡Tonyuquq의 협조를 받아 제국 부흥에 따른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탁월한 정치가였던 토뉴쿡은 한때 산서성 북부근처에 있는 雲州에 변경지역에서 唐의 행정관리직을 세습했던 가문 출신으로 태종이래 멸망된 많은 돌궐의 지배층처럼 토뉴쿡도 중국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쿠틀룩이 투르크의 독립을 이룩했을 때 톤유쿡은 그와 합류하여 최고의 참모가 되었다. 682년이후 쿠틀룩과 토뉴쿡은 唐의 서북변지방을 해마다 약탈하였으나 685년에는 唐軍에게 패하여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4년동안 전쟁을 감행한 끝에 돌궐은 唐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쿠틀룩의 침략은 돌궐제국 재건의 서막을 연결하게 되었다. 위대한 쿠틀룩 엘테리쉬는 호쇼 차이담 비문에서 엘테리쉬카간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재건된 돌궐제국을 흔히 제2돌궐제국시대라고 부른다. 엘테리쉬와 토뉴쿡이 승리를 획득한 후에도 초원의 분위기는 약 2세기전 최초의 카간 부민이 당면했던 것들보다 어려웠다. 그때는 초원을 제패한 세력은 오직 돌궐족이었고 반발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엘테리쉬는 돌궐을 계속 지배하려는 唐과 대적해야 했고, 쩉뢰스Tölös, 투르가쉬Turgash등과 같은 돌궐부족연맹들과도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91년 엘테리쉬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건된 돌궐제국은 동부초원지대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2. 카파간 카간 Qapaghan Qaghan(691-716)
唐은 고종의 죽음으로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후는 산서와 하북의 변경지역을 거의 매년 약탈하는 쿠틀룩의 동돌궐에 대하여 성공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무후는 투르크족의 하나인 투르가쉬를 지원하여 그를 측면에서 공격하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투르가쉬의 수장인 烏質勒은 엘테리쉬에게 패하여 그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테리쉬는 691년에 사망하였는데 쿠틀룩 엘테리쉬의 아우이며 계승자이었던 默?에 의해 돌궐제국은 더욱 번성하였다.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로서 오르콘 비문들에서 카파간카간Qapaghan Qaghan으로 불린 인물이다. 711년경에 카파간은 서돌궐로 하여금 자신을 카간으로 승인하게 하는 돌궐제국의 가장 중요한 소득을 성취하였다. 그는 측천무후를 상대로 唐을 수호하는 척 하면서 唐의 영역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694년에 그는 영하 근처의 靈州를 약탈하였고 698년에는 북경 서쪽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唐과 일시적인 연맹을 결성해 요서와 열하에 있는 몽골계 유목민인 거란을 쳤다. 李수장은 카파간의 동맹자가 되었는데 얼마 후 그가 죽자 거란인들은 李의 아들을 몰아내고 돌궐과의 동맹을 깼다. 카파간은 추방당한 그 사람을 다시 앉히기 위하여 唐과 연합하여 唐의 비단, 쌀, 무기 등의 원조하에 거란은 붕괴시켰다. 무후는 카파간이 자신을 영속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믿었으나 카파간은 영주에 대한 약탈을 재개하였다. 약탈이 있을 때마다 카파간은 수많은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갖고 몽골리아로 돌아왔다. 게다가 카파간은 동쪽으로는 케룰렌 상류의 바이르쿠Bayirqu사람들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인들을 격파하였다.
카파간은 699년에 서쪽으로 일시적이나마 서돌궐의 두 집단인 돌육과 노실필을 복속시켜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었고 550년의 돌궐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 투르가쉬의 수장인 오질륵의 아들인 沙葛은 저항을 시도하여 카파간에 대항하여 서돌궐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패하여 카파간에게 살해됨으로써 711년에 카파간은 돌궐족의 유일한 카간이 되었다. 카파간의 영광도 잠시, 카파간은 늙어갔고 돌궐족은 그의 잔인함과 독재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군소부족의 수령들이 당에 충성을 바쳤고 케룰렌 상류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결국 그들을 격파하고 귀환 도중 죽었다.
3. 퀼 테긴Kül-tegin과 벨게 카간Bilge Qaghan(716-734)
그러나 카파간이 갑작스럽게 죽고난 후, 카파칸의 죽음은 돌궐족 내부의 심각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생전시의 카파간을 적대시하던 내부 세력들이 많았으니 카간位의 계승권을 두고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그 위기는 엘테리쉬의 아들인 퀼테긴Kül-tegin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었다. 카파간의 조카인 퀼테긴은 정변을 일으켜 카파칸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가족과 참모들도 죽였다. 오직 형의 장인이며 부왕때의 현명한 참모였던 70세의 원로정치인 토뉴쿡만이 살아남았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퀼테긴은 제위에 오르지 않고, 그의 형인 默棘連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시켰다. 그는 현명한 제왕이라 불리는 빌게 카간Bilge Qaghan으로 716년부터 734년까지 초원을 통치했다. 한편 카파간의 죽음과 퀼테긴의 정변을 틈타 유목민들이 돌궐제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퀼테긴과 빌게는 질서를 회복하고 그들을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이런 끊임없는 전투속에서 동돌궐은 서돌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퀼테긴과 빌게의 집정 아래에서 돌궐제국 전역은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강화·구축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돌궐비문에 나타나 있다. 더욱 빌게 카간의 계획중에는 유목민족인 돌궐족의 정착화를 증가시키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축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빌게는 唐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토뉴쿡은 현종의 시대에 열리던 절대전성기의 唐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고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토뉴쿡의 조언으로 빌게카간은 중국과 평화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현종이 거절하고 거란과 연합하여 돌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토뉴쿡의 예상대로 거란과 중국이 공격 시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결국은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카간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과 그의 對중국정책에 대한 반대로 최후의 정치적 위기가 왔다. 731년에 퀼테긴이 사망하고 수년 후에 빌게는 그의 신하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빌게의 죽음은 돌궐제국의 실질적인 종말이었다. 빌게의 오르콘 비문과 돌궐문자가 입증하는 그들의 문화, 그리고 비교적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던 빌게 덕택으로 734년 빌게가 신하에게 독살 당했을 때 동돌궐은 위대한 문명의 본류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으나 결국 카간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분란과 붕괴가 초래되었다.
4. 돌궐의 멸망
빌게 카간이 사망하자마자 형식적으로 지속되어온 돌궐족의 통합양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빌게의 뒤를 이어 두 카간의 즉위하였으나 별로 중요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첫 번 카간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고 뒤를 이어 동생 텡리카간Tengri Qaghan이 幼兒로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텡리의 모친이 섭정을 하게 되니 다수의 돌궐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텡리는 그의 관리였던 동부의 샤드Shad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돌궐의 全영토는 각종 부족들을 지배하려는 세력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샤드는 이후 오즈미쉬 카간Ozmish Qaghan이라는 이름으로 카간임을 자청하였다. 오즈미쉬는 바로 세부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동돌궐의 남은 카간 씨족들은 743년에 당으로 피난하였다. 이제 초원의 제국을 누가 차지하느냐만이 문제였다. 이 분쟁의 최후 승리자는 위구르Uighur족이었다. 위구르가 카를룩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였고 위구르의 칸은 오르콘 상류에 있는 제국의 근거지에서 쿠틀룩 빌게Qutlugh Bilge라는 호칭으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등극은 당시에는 강력한 당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당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지배영역은 바이칼 호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즉위한 다음 해 죽었으나 그의 제국은 100여년간 그대로 존속하였다.
3) 위구르의 오르콘帝國
1. 위구르의 성립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위구르족은 匈奴족의 먼 후예이고 직접적인 조상은 쩉뢰스 부족연맹인 구성철륵부 가운데 回骨部에 속하던 일개 부족이었다. 쩉뢰스 부족연맹이 7세기 초에 와해됨으로써 위구르는 셀렝강가 상류지역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629년은 위구르족의 조공사신이 내조한 사실을 최초로 기록된 해이다. 위구르는 당시 제1돌궐제국시기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열을 조심스럽게 이용하며 641년경에는 이미 동부초원지대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파간카간이 활동하던 8세기초에는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위구르는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에 발생한 돌궐의 멸망적 조짐이 뚜렷한 혼란기에 위구르를 중심으로 베스밀Besmil과 카를룩Qarlug 두 돌궐부족이 연맹을 결성하여 돌궐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할 수 있었다. 돌궐의 멸망과 당의 내분을 틈타 위구르는 정식으로 744년에 나라를 세웠다. 돌궐에서 위구르로의 패권이동은 사실상 초원에 그다지 커다란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초원의 패자가 단지 유연에서 돌궐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바뀐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위구르의 수장이며 위구르제국의 건설자는 骨力表羅K'olipeilo이었으며 그의 위호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Qutluq Bilge Kül Qaghan으로 744년부터 747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건설한 위구르 제국은 흔히 오르콘 제국이라 불려지며, 위구르족이 세운 수개의 국가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중 몇몇은 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오르콘 제국은 840년에 키르기즈Qirghiz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1세기를 동부 및 중남부 초원을 지배하였다. 위구르는 늘 중국의 위험한 이웃으로 여겨졌던 돌궐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 그 뒤에는 유용한 동맹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때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唐의 귀중한 보호자였다. 위구르가 초원을 지배하던 때는 위구르를 능가할 부족이 없었다. 게다가 唐에서는 과거 태종이나 고종 등과 같이 정복에 사활을 거는 황제도 없고 錦上添花격으로 安史의 난이 일어나 唐은 위구르에 대처할 만할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위구르의 군사적 원조를 바랬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때 군대를 파견하여 唐왕조를 도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후 그 세력을 중국으로 확대하였다. 위구르의 카간은 안사의 난을 진압해주는 댓가로 황실 공주를 얻게 되었다. 광할한 초원에서 도착한 위구르 군대는 그곳에서 唐軍과 연합하여 洛陽을 반란군으로부터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唐숙종은 위구르의 카간에게 감사의 표시로 칭호를 잔뜩 주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매년 2만 단의 비단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후 위구르는 唐에 경제적 도움을 요구하고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나갔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唐의 내전은 가라앉지 않았고 다른 반란세력이 또다시 唐을 위협하였다. 登里牟羽라고 알려진 새로운 위구르 카간은 반란군의 사신에 의해 처음에는 반란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궁지에 빠진 唐의 어려움을 이용하려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도중에 기민한 唐의 사신이 모우카간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그는 唐과의 동맹으로 선회하였고 762년에 위구르는 황제를 위해서 반란군으로부터 洛陽을 수복해 주었다. 그러나 위구르는 원조의 대가로 長安과 洛陽 두 도시를 완전히 약탈하였고 그 곳에 위구르인을 거주시킬 것을 唐에 강요하였다. 당시 唐의 조정은 위구르의 약탈을 무력으로 방지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고 위구르의 거주 문제는 모우카간에게 다량의 선물을 증여한 후 회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쇠망의 길을 걷고 있던 唐은 계속 위구르의 군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는 중국 내에서는 唐을 원조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중국의 관할 아래 있던 오아시스國의 독립운동에도 응원하기도 하였다. 모우카간은 763년이 되어서야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2. 위구르의 발전
위구르는 그 이전의 유목국가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위구르의 수도는 당시 오르두 발릭Ordu Balig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현재의 카라발가순Qara-Balghasun이 있었으며 그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정착사회의 특징들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카라발가순은 오르콘 상류로 과거 흉노의 선우와 돌궐의 카간들의 거처가 있었고, 후일 칭기스칸 일족의 카라코룸이 생기게 된 곳 근처였다. 위구르는 수도와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무역로의 요지에 도성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유목도시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도시 문화는 농경민족과 농경민의 기술자 집단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만든 취락의 발전형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목민족의 사회구조가 그들의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며, 결국 위구르를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정복왕조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위구르는 도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중국인, 소그드Sogdian人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중국과 서아시아 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특히 모우카간의 재위기간에 최극성에 달하였다. 그는 중국의 宰相, 平章事, 尙書, 刺史 등의 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군신의 차별을 엄격히 하여 국가체제를 점차로 중국풍의 군주독재적인 관료체제로 전환하였다. 당시 위구르의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위구르는 중국과 독특한 관계를 가져 중국의 對중앙아시아 민족교섭史에서 달리 유레가 없는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관계는 위구르가 당과의 교역이 절대로 필요했고, 또 당의 군사력이 미약하였던 이유로 더욱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구르는 상업활동에 뛰어나 동서 교통로를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위구르와 소그드는 교역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때문에 쉽사리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최소한 4세기부터 소그드는 漢代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을 통한 중계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소그드인들은 장안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여러 중요도시에서 도매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위그르는 소그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상당한 영향을 입었다.
위구르는 문화적으로 초원 역사상 처음으로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이 아닌 마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위구르인들이 소그드인들의 중계로 이란의 죵교 마니교를 받아들였던 사실이다. 이 종교로 개종한 것은 모우카간이 唐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난 후에 옛 수도 洛陽에 머무르고 있던 762-763년간에 일어났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의 정신적인 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우카간은 마니교 선교사들과 접촉을 하게 되어 그의 제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고 마니교로 개종하게 된 것이다. 마니교는 위구르의 국교가 되었고 모우카간은 마니교의 승려와 소그드인, 그리고 중국인을 그들의 정치 문화의 고문으로 받아들였다.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인 慕寐가 마니교의 제사장으로 위구르의 영토 안에 주재하게 되었다. 카간의 보호를 받는 마니교 사제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 唐의 기록도 "위구르는 항상 마니교도와 나라일을 상의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도로 조직된 종교를 신봉하게 됨으로써 위구르민족의 정착화는 가속화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위구르 인구는 선대의 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인들은 유목민족으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9세기에는 룬문자Runic script와 같은 불편한 돌궐문자를 대신하여 소그드문자를 변용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위구르는 페르시아에서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 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 위구르는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위구르제국내에서 발전된 문화와 생활양식은 초원에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3. 위구르의 쇠퇴
위구르는 모우카간이외에 더이상 위대한 카간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점은 돌궐과 대비되는 것인데 모우카간시대에 위구르는 가장 전성기가 되었고 모우카간 사망후 그들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위구르는 모우카간의 사망과 더불어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르콘제국의 정치적인 혼란의 첫 번째 위기는 모우카간의 사촌이며 재상이었던 바가 타르칸Bagha Tarqan이 모우를 암살하고 스스로 카간位에 등극함으로써 발생하였다. 바가 타르칸은 780년에 唐으로부터 정식적인 승인을 얻었다. 오르콘 제국의 혼란은 외부적인 이유들로 더욱 악화되었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신지인 외튀켄지방을 버리고 투르환Turfan지방의 정착민족들로 둘러싸인 지역의 도시로 이주하여 정주하면서 그지역에 다른 부족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유목민족의 정주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위구르의 군사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위구르의 군력 준비의 쇠퇴를 가져 온 또 다른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안사의 난 이후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唐의 군사력이 허약하였던 것이다. 832년의 오르콘제국 내부의 혼란한 정세는 초원에 할거하며 약탈행위로써 富를 축적하는 전통적인 유목민 습성을 버리지 않은 다른 부족들이 침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840년이 되어서는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어 초원의 제일인자 오르콘제국은 여전히 유목적이고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있었던 예니세이 강상류에 살던 키르기즈人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키르기즈는 돌궐민족의 일종으로 그 이전 역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은 바로 위구르에 의하여 외튀켄지방에 정착이 허용된 부족이었다. 그러나 키르기즈는 위구르 멸망에 성공하긴 했지만 위구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강력한 부족연맹이나 제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키르키즈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구르를 약탈한 후 카라발가순의 주변의 오르콘 강 상류에 있던 위구르를 대체하기 위해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위구르에 의해 정주화가 이루어진 초원을 다시 유목과 야만으로 되돌려 놓았다. 키르기즈는 920년까지 그 지방의 지배자로 남아 있다가 몽골계 거란에게 패하여 다시 북쪽의 예니세이 초원으로 밀려나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계속하였다. 키르기즈의 위구르 멸망의 주된 역사적 의의는 초원을 위구르인들의 영향 즉, 정착민족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초원은 징기스칸이 나타나 몽골제국을 세우는 12세기 중엽까지 또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다른 위구르족은 초원의 제국을 상실하고 타림북부의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했다. 오르콘 제국은 여러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룩과 대치하게 되었고, 몇몇은 중국으로 도피하여 甘肅지방의 최서부지역에 정착하였다. 그중에서 사릭 위구르Sarigh Uighur는 서부 甘肅에 860년경에 정착해 1028년 탕구트에게 정복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10세기에 돈황에서 불교를 신봉하며 번영을 누렸던 위구르는 재빨리 마니교를 포기하고 그 지역의 불교로 개종하였다. 위구르는 알타이와 오르콘의 지역의 투르크-몽골계의 국가에게 '문명의 고사'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12세기의 나이만과 13세기의 칭기스칸의 국가에게 위구르는 書記와 관직과 문자를 제공하였다. 9세기 중기에 이르러 위구르가 멸망한 후 북아시아세계에는 유목국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위구르제국이 초원의 마지막 유목제국이었던 것이다.
轉. 結論
홀연히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의 제국을 무너뜨린 뒤 갑자기 북방으로 돌아간 스키타이(B.C 6-3C), 게르만족을 밀어내면서 로마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훈족(4C), 멀리 북방 바이칼호 근처에서 일어나 한세기도 지나기 전에 베이징과 바그다드, 키예프를 함락시켜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13-14C)…. 말을 타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한 시대를 호령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 기마민족들. 그러나 17세기 몽골 멸망을 끝으로 역사의 기억 뒤편으로 밀려났던 비운의 민족들, 흑룡강을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이들, 이렇게 초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책을 읽고서이다. 고시베리아족과 스키타이, 서융, 적적, 흑수말갈, 동이, 예맥, 숙신, 읍루, 에벤키, 오로촌, 흑룡강, 바크하룬, 요하, 케룰런, 아무르, 실카, 하라무렌 등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고전적인 냄새가 나는 민족과 지명들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이미 한자식 음역으로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더 생소한 이런 단어가 하나하나 더욱 새로웠다. 그래서 짧은 지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구체적 사실인지 구명하고 싶어서 논문의 주제로 이 범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고전미가 없어진 南宋이후의 유목민들, 아니 정복왕조라 해야 더욱 어울릴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의 국가에는 눈길이 덜 가게 되었다.
초원의 역사를 쓰면서 참으로 글의 중립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어느 나라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침략이 정복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정복이 침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면 그것은 정복으로 표현하였고 반대로 백제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 침략 행위라 표현하였다. 그것은 김부식이 慶州 金씨로서 비록 신라는 멸망하였으나 신라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는 중립성을 잃은 사가로서 그릇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이 현재에 와서 삼국사기가 비판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 여러 유목국가들이 초원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였지만 몽고 이전에는 유라시아대륙의 유목지역과 정착지역을 모두 동시에 지배할 수 있었던 국가는 없었다. 이러한 과업은 몽고의 부족연맹에게 주어졌었으니 몽고인은 칭기스칸의 영도하에 서로는 러시아의 평야지대로부터 동으로는 중국의 해안까지 북으로는 북극에 접하는 시베리아의 끝으로부터 남으로는 태양이 작열하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비교적 장기간 유지 될 수 있었던 제국을 건설하였었다. 유목민족의 제국, 특히 몽고제국은 마치 우연히 건설된 혹은 신의 저주에 의하여 창조된 국가처럼 빈번히 언급되고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몽고제국의 기원은 저멀리 1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뿌리가 바로 흉노이고 과정이 돌궐과 위구르이고 전신이 거란의 遼와 여진의 金인 것이다. 논문의 범위를 유목국가로 한정해서 잡으면서 상당히 고민이 되었다. 유목국가를 잡기에 탁발선비는 초원의 아들로 어울리지만 그이후의 북위는 오히려 잠입왕조나 정복왕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와 중국과의 관계가 남북대립체제였다면 북위 또한 南朝의 宋·齊·梁·陳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유목국가의 범주에 넣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기나긴 초원을 여행한 끝을 내야겠다. 처음 욕심으로는 우리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던가 아니면 우리민족의 기원을 중국사와 연결하여 그들 눈에 비친 한민족의 역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학계에 발표된 자료가 빈약하고 스스로 규명하기에는 역량이 너무 미약하여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서쪽으로 더 넓혔더니 그 동안 교과서에서 빠져있던 유목국가들이 있었다. 이제 막연했던 그 부분을 채워 넣었으니 사가로써 한 발을 내?은 느낌이다. 논문을 완성해 나가면서 결코 동아시아에는 중국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흉노, 탁발, 돌궐, 위구르등이 중국을 유린하고 중국의 문물을 천하게 여기며 오히려 서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흡수하였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단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중국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중국사를 대하면서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다.
結. 參考文獻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Rene Grousset 1999 사계절
『유목민족제국사』 Luc Kwanten 1984 民音社
『중국의 역사3』 陳舜臣 1995 한길사
『동양사개론』 申採湜 1996 三英社
『중국통사·上』 傳樂成 1981 宇鍾社
『중국중세사』 宮崎市定 1996 新書院
「고대유목국가의 構适」 金浩東 1989 講座中國史2
*** 年表 ***
B.C. 221 秦始皇의 천하통일
206 漢건국(劉邦)
198 漢·匈奴 화친(60년간)
174 무특死·노상階位
129 漢·匈奴 1차 대립(~119)
108 朝鮮멸망
99 漢·匈奴 2차 대립(~90)
60 東·西 匈奴 분열
31 東匈奴의 稱臣(호한야선우)
A.D. 8 新건국(王莽)
25 後漢건국(유수)
48 南·北 匈奴 분열
88 北匈奴 붕괴
220 後漢 멸망
308 永嘉의 난(흉노선우 유연의 稱帝)
316 西晉 멸망
317 東晋 건국(史馬睿)
338 代 건국
370 代 멸망
398 魏 건국(拓跋珪)
402 柔然의 고차토벌(제국으로 발전)
都武帝의 柔然 정벌
425 太武帝의 柔然 정벌(~470)
439 北魏의 화북통일
502 柔然 내란
534 東·西魏 분열
550 北齊 건국(高洋)
557 北周 건국(宇文覺)
552 突厥건국(Bumin)
555 突厥의 柔然멸망
東·西 突厥분열
557 北周의 화북통일
581 隋 건국(楊堅)
隋文帝의 천하통일
618 唐 건국(李淵)
630 唐의 東突厥지배(~679)
657 唐의 西突厥지배(~665)
682 엘테리쉬카간 시대(~691)
691 카파간카간 시대(~716)
699 突厥의 대제국 완성(西突厥 복속)
711 카파간 突厥 유일한 카간이 됨
716 빌게카간 시대(~734)
743 突厥 멸망
744 위구르 건국(쿠틀룩 빌게 퀼 카간)
755 安史의 난
780 위구르 분열
840 위구르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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