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투르크,터키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정복 전쟁(1)

자연정화 2013. 9. 11. 18:44

오스만의 유럽 정복 전쟁(1)_유럽의 심장을 향해!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본진을 총공격하는 헝가리군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본진을 총공격하는 헝가리군

오스만의 유럽 정복 전쟁 전쟁 개요

전쟁주체
오스만투르크 제국, 헝가리,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신성로마제국
전쟁시기
1389년-1529년
전쟁터
현재의 발칸반도, 그리스, 중부 유럽, 흑해연안
주요전투
코소보 전투(1389/1448), 바르나 전투, 베오그라드 공방전, 바스루이 전투, 타르고비스테의 야습, 모하치 전투, 빈 공방전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명분이 합쳐진 강력한 전쟁

영어에 ‘발카나이제이션(Balkaniz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인데 “여럿의 작고, 분열적이고,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국가로 나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지금의 유럽동남부를 형성하는 발칸반도에서 기원한다. 발칸반도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전쟁이 잦고 여러 세력의 교체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인 국가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나라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외부세력과의 전쟁이나 내분으로 국가가 오래가는 일이 드물었다. 1차대전 발발 직전의 동유럽, 1990년 냉전체제붕괴후의 유고슬라비아를 보면 발카나이제이션(balkanization)의 의미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전쟁이 잦았던 지역답게 이 지역에는 전쟁과 관련된 전설이 많고 이와 관련하여 전쟁영웅들도 많다. 일부 전설은 일종의 ‘민족적 상징’으로써 최근의 민족분규에 악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389년의 코소보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붕괴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 세르비아인들의 주요 모티프였으며 이 전투를 이끈 모라비아-세르비아의 군주 라자르 레발리아노비치는 세르비아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헝가리의 경우 국조(國祖)인 아르파드, 초기의 영웅인 스테판 1세와 함께 최대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로 야노스 훈야디(Janos Hunyadi)가 있다. 그는 바르나와 베오그라드 등의 전투를 승리를 이끌며 헝가리는 물론이고 중세유럽 최고의 지휘관이자 전술가로 기억된다.

 

헝가리 아래쪽의 왈라키아에도 영웅이 있다. 그는 타르고비스테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서 왈라키아를 침공하는 적을 대파하였다. 아울러 상당히 잔인하기도 하여 잡은 포로들을 수백 명씩 땅에 박힌 꼬챙이에 꿰어 죽이고 이를 재미있게 보면서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적들이 꼬챙이에 꿰인 시체들을 보고 질려서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 정식명칭은 왈라키아의 군주(voivode) 블라드 3세. 그러나 그는 드라큘라 대공(大公)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블라드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헝가리의 국경 안에서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업적은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비록 아드리안 해안의 소국이지만 알바니아에도 영웅이 있다. 본명은 ‘게오르기 카스트리오티’. 그러나 이 사람은 스칸데르베우(영어 Skanderbeg)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알바니아가 강력한 외부세력의 침공을 맞게 되자 서로 싸우던 봉건영주들을 하나의 기치아래 통합하고 그들의 땅을 외국세력으로부터 지켜낸다. 이는 알바니아 역사에서 최초로 영주들이 하나로 통합된 사례이기 때문에 알바니아에서는 스칸데르베우에 의한 통합을 1차 ‘건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세력에 점령당하였다.

 

발칸반도를 구성하는 현재의 국가들

 

 

라자르 레발리아노비치, 야노스 훈야디, 블라드 체페슈, 그리고 스칸데르베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오스만투르크가 유럽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발칸지역의 전설들과 영웅담은 상당수가 오스만투르크의 유럽침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의 ‘유럽’이라 불리는 지역을 침공한 세력은 많지만 단순한 침공차원을 넘어 ‘정복’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많지 않다. 서로마제국 말기의 훈족, 10-11세기의 마쟈르족의 공격은 대규모 침공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정복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훈족과 마쟈르의 목적은 유럽을 ‘약탈’하여 부를 축적하려는 것이었지, 이를 정복하고 다스리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경우는 정치적인 목적에다 전 유럽을 이슬람화하려고 하는 종교적인 목적이 결합되어 매우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로마’의 수도로서 천 년을 지속한 콘스탄티노플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함락된 후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로 포함되었고 이후에도 투르크의 발칸반도 침공과 유럽정벌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발칸반도는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진 후 기독교와 이슬람간 전쟁의 최전방이 되었으며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하였고 11-12세기에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중동에 쳐들어갔던 유럽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오스만투르크가 이끄는 이슬람세력의 침공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오스만의 유럽진격

오스만과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영토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정중앙이 되는 위치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같은 대도시가 유지되려면 그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인 네트워크와 교통/교역망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자면 대도시의 존재는 해당 지역에 경제적인 네트워크와 교통망이 형성이 되어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콘스탄티노플은 크림반도에서 시작하여 보스포루스-에게해-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상교역망의 중심임과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아나톨리아-트라키아-도나우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육상교통망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미 600년대에 인구 60만을 넘어섰고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노플과 주변지역의 인구가 소위 ‘라틴제국’사건으로 인하여 급감하기 전까지는 1백만을 유지하였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주변지역이 피폐하여 지기는 하였지만 콘스탄티노플의 교통망과 경제네트워크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단순히 동방기독교의 중심을 무너뜨렸다는 상징성 외에도 제국(帝國)의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는 광역네트워크를 지닌 도시를 손에 거머쥔 것이다. 건국 초기의 오스만투르크의 수도는 브루사, 발칸반도에 진출한 이후에는 아드리아노플이었지만 이는 모두 임시 수도에 지나지 않았다.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제국의 수도로써 필요한 인프라와 광역네트워크가 없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함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던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바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메메트 2세가 점령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군사원정에 있어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고 향후 모든 주요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이 기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투르크는 매우 빠른 팽창을 하였다. 1459년에는 세르비아, 1463년에는 보스니아, 1464년에는 펠로포네수스 반도, 1468년에는 알바니아, 그리고 1468년 아나톨리아 남부의 카라마니아를 모두 점령하였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원래는 동방정교의 교회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후 모스크가 되었다.

 

 

이 당시 유럽대륙은 두 개의 ‘방벽’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서남방에서 이슬람의 팽창을 막고 있던 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동로마는 멸망하고 유럽의 최전방은 사라졌다. 두 번째 방벽은 호전적인 유목민 마쟈르의 후예로 중부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던 헝가리 왕국이었다. 동로마를 무너뜨린 메흐메트 2세의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헝가리가 되었다. 유럽을 정복하고 유럽까지 이슬람을 전파하려면 반드시 헝가리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목표는 헝가리 왕국이 현재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당시에는 헝가리 영토였고 이름은 난도펠헬바르)를 중심으로 구축한 방어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트 2세는 이미 1300년대 말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유럽정벌을 계속해나갔지만 발칸반도에서 그가 맞닥뜨린 적들은 녹녹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투르크의 난적(難敵), 야노스 훈야디

1396년에 니코폴리스에서 유럽동맹군(십자군)이 바야제트 1세의 투르크군에 참패하고, 1398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거의 전멸하고(사실 이 싸움에서 투르크군도 세르비아군에 못지않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군을 이끌던 술탄 무라드 1세도 세르비아 암살자의 칼에 쓰러졌다.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투르크는 아나톨리아쪽에서 추가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싸울 수 있는 병사가 없어 결국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등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의 전사들을 자처하는 투르크 군의 공격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오스만투르크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이가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자 대영주인 야노스 훈야디였다. 비록 선조(先祖)는 왈라키아(루마니아)에서 왔지만 그는 스스로를 헝가리인으로 여겼고 헝가리를 위하여 싸웠다. 훈야디는 헝가리 왕이자 후일 신성로마황제가 된 시기스문트를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알베르트와 라디슬라프 등을 충실하게 섬겼고 헝가리의 군대를 이끌며 무라드 2세와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투르크군을 여러차례 격파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오스만투르크군은 헝가리군을 포함한 기독교군대에 상당한 고전을 하였고 훈야디의 아들이자 후일 헝가리의 왕이 된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도 로마 이후 유럽 최초의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흑군(또는 검은 군단, Black Army of Hungary)을 이끌며 헝가리를 투르크로부터 지켜냈다.

 

훈야디의 헝가리군과 오스만투르크군 간의 전투는 대부분 오스만투르크에게 일부 복속된 세르비아와 왈라키아에서 벌어졌다. 훈야디는 1441년에 라디슬라프의 명에 의하여 트란실바니아의 군주(voivode)가 된 이자크-베이가 이끄는 투르크군을 세멘드리아(현재 세르비아 스메데레보)에서 대파하였다. 1442년에는 민병(民兵)들을 포함한 1만 5천의 군으로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려 나온 8만의 투르크 대군을 무찔렀다 한다. 비록 전승담(戰勝談)의 특성상 공적이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로서 투르크의 왈라키아 침공은 잠시나마 완전히 좌절되었다. 훈야디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투에서 보병, 기병과 함께 1400년대 초기 보헤미아의 종교전쟁(Hussite Wars) 당시 보헤미아군이 쓴 마차요새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언제나 수적인 열세에 처했으면서도 투르크군을 연파할 수 있었다. 1443-4년에 헝가리의 새로운 왕인 라디슬라프와 함께 남정(南征)을 감행한 훈야디는 트라야누스의 관문을 넘어 니스(Nis)를 탈환하고 3명의 투르크 영주(Bey)들이 이끌고 있던 부대들을 연파하였다. 그러나 훈야디의 군은 오스만 영역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마침 카라마니아에서 싸우고 있던 무라드가 카라마니아 군주들과 휴전을 하고 원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입하였다. 훈야디의 헝가리군은 바르나에서 무라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맞아 그 양익(兩翼)을 격파하며 선전하였으나 훈야디에게 전권을 주었던 라디슬라프가 갑자기 자신도 전공을 세우고자 훈야디가 구축한 수레요새를 뛰쳐나와 오스만군 중앙에 있던 예니체리 부대를 공격하다가 패하고 그 머리는 잘려 창 끝에 꿰어졌다. 이로 인하여 헝가리군의 사기가 갑자기 떨어졌고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헝가리군은 대패한다.


갑옷입은 야노스 훈야디의 판화초상

 

설상가상으로 헝가리가 오스만군과의 전쟁을 이유로 왈라키아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던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가 야노스 훈야디를 잡아가두고 여러 가지 요구를 한다. 헝가리 왕가의 개입으로 겨우 풀려난 야노스는 이후 블라드 2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왈라키아 귀족(보야르)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1447년에 블라드 2세와 그의 맏아들인 미르챠를 죽인다. 그의 둘째 아들인 블라드는 투르크의 수도인 아드리아노플로 도망하였으나 후일 왈라키아로 돌아와 군주가 되었다.

 

1448년에 헝가리군과 오스만군은 이전 1398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코소보에서 격돌하였다. 이전에 1444년 제게드의 조약으로 인하여 세르비아 왕가가 다시 세워졌으나 세르비아 왕가가 이전에 협력의 대가로 헝가리에게 넘겨 주었던 헝가리내의 세르비아 영지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두 나라간의 사이는 틀어졌다. 이때 세르비아의 군주였던 브란코비치는 이에 앙심을 품고 훈야디에게 협력을 하기를 거부하였고 격노한 훈야디는 투르크와의 싸움이 끝나면 브란코비치를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투르크와 싸우러 나섰다. 브란코비치는 직접적으로 헝가리군과 싸우지는 않고 그들을 통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몰래 헝가리군의 이동경로와 함께 전장(戰場)근처의 지형에 대한 정보를 오스만군에게 제공하였다. 이도 모자라 헝가리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계책까지 알려주었다. 심지어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바우가 보낸 원군을 중간에서 막고 그 진군을 지연시켰다. 결국 알바니아의 원군은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할 수 없었고 24000의 헝가리군은 6만의 오스만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투르크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후방에서 위협할 수 있었던 헝가리는 더 이상 동로마-오스만 전쟁에 개입할 수 없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함락된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메흐메트는 헝가리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하였다. 이미 세르비아는 다시 오스만투르크의 후국(侯國)이 되기로 하였으니 세르비아의 영역을 통과하여 헝가리의 최전방이었던 베오그라드(당시의 지명은 난도르페헬바르)를 포위하였다. 헝가리는 카톨릭 국가로써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인 죠반니 카피스트라노가 헝가리 지역으로 파견되어 원정에 참여할 병사들을 모았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인 헝가리 농민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고 비록 평소에 쓰던 농기구들을 들고 몰려왔기는 하지만 이에 힘입어 훈야디는 약 3만정도의 병력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아울러 마침 왈라키아에서 발생한 정변(政變)도 헝가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훈야디가 왈라키아 귀족들을 조종하여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를 죽여버렸을 때 왈라키아의 정치적 상황은 헝가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정리되었을 때는 친 오스만 성향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왈라키아의 군주가 되었던 것이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의 국경지역을 자주 약탈하고 그 변경도시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등 헝가리를 괴롭혔다. 훈야디는 왈라키아 내의 도시들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방식으로 맞섰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왈라키아 방면에 주둔시킨 정예군을 끌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훈야디는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함을 알고 자신이 죽여버린 블라드 2세의 아들인 블라드 체페슈에게 접근하여 병력과 자원지원을 약속하였다. 블라드 3세는 왈라키아의 귀족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훈야디에 대한 원한을 뒤로 하고 그의 지원을 받아들여 귀족들을 모두 숙청하고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가 된다. 이로서 훈야디는 베오그라드 방어전을 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6세기 베오그라드의 묘사도

이탈리아 화가 벨리니가 그린 1480년의 메흐메트 2세 초상화

 

 

훈야디가 베오그라드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오스만 술탄인 메흐메트 2세가 7만의 대군으로 베오그라드를 에워싸고 있었고 베오그라드는 투르크군의 공성포에 의하여 쉴새 없이 포격을 받고 있었다. 그 북서쪽에는 오스만 수군이 널리 형성된 늪지대를 순찰하면서 보급을 막았다. 베오그라드는 큰 고지를 둘러싼 도시가 있고 그 위에 요새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요새의 뒷쪽은 강이었고 주변이 모두 보이는 높은 고지 위에 위치하고 있어 보병에 의한 공략은 어려웠기에 일단 오스만군은 포격으로 성벽을 부수기로 한 것이다. 요새의 지휘관인 미하일 실라기는 성민(城民)과 병사들을 합하여 약 28000명으로 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일단 베오그라드 요새에서 승리하려면 보급을 방해하고 있는 오스만 수군을 격파하고 식량과 무기의 원활한 보급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베오그라드로 가기 전 함대를 끌어 모은 훈야디는 크고 튼튼한 배를 하나 골라서 기함으로 삼은 다음 성주인 실라기와 연락하여 헝가리 함대와 오스만 수군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요새에서 동시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훈야디가 모은 함대는 무려 200여척에 달하였고 1456년 7월 14일에 베오그라드 요새 밑의 도나우강 물위에서 벌어진 대규모 수전은 5시간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요새 측의 함대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전세가 뒤집혀 오스만 수군은 함대의 3분의 2를 잃고 사실상 궤멸되었으며 이어 육군만 남게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포격을 계속하였고 베오그라드의 성벽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이에 메흐메트는 보병에 의한 공격을 명하였고 오스만군, 특히 예니체리들은 베오그라드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때 훈야디는 요새의 수비병들에게 통나무에 타르(tar)를 묻혀 아래로 던질 것을 명하였고 불타는 통나무가 도시로 떨어지면서 화재를 일으키고 먼저 내성(內城)으로 진입한 예니체리들은 아직 외성에 있는 일반보병들과 분리가 되었다.

 

성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아직 성벽 위에 남아있던 수비병들은 예니체리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성밖에서 다가오던 투르크 일반보병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이로서 예니체리들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성 안에서 모두 죽었다. 성 안에서의 전투는 끝났으나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날 카피스트라노와 훈야디가 모았던 농민병들이 먼저 오스만군 진영에 다가가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단의 오스만 스파히 기병이 소규모 공격인줄 알고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반격하였으나 갑자기 헝가리군의 총공격이 이어지면서 스파히 기병들이 패하였고 헝가리군의 공격은 오스만군 본진까지 이어졌다. 사실 농민병들이 공격하자 각개격파를 우려한 훈야디와 카피스트라노가 본군을 움직여 농민병들의 공격에 합세한 것이었다. 메흐메트의 근위대 5천이 본진을 회복하려고 반격하였으나 계속하여 밀려드는 헝가리군의 기세는 밀물과 같았고 오스만군은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분노한 술탄이 친히 전투에 나서 헝가리 기사 한 명을 죽이기는 하였지만 눈 먼 화살에 맞고 정신을 잃었고 오스만군은 황급히 콘스탄티노플로 후퇴하였다.

 

훈야디와 헝가리군의 대승이었으나 포위가 풀린 후 헝가리군 진영에 역질(疫疾)이 돌았고 훈야디도 감염되어 8월 11일에 죽고 만다. 어찌되었건 오스만군으로써는 뼈아픈 패배였고 유럽중부 방면으로 진출이 일시 좌절되었다. 훈야디가 사망한 후 헝가리의 의회는 훈야디의 아들인 마티아스를 왕으로 선출하였고 마티아스는 이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알려지게 된다. 베오그라드의 성주인 실라기는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와 손을 잡고 현재의 불가리아 지역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다가 사로잡혀 몸이 두 동강으로 잘리는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오스만투르크와 드라큘라

블라드 3세가 본디오 빌라도로 묘사된 1463년의 성화(聖畵). 기독교 세계의 블라드 3세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메흐메트 2세가 베오그라드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난 후에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오스만투르크의 궁정에 인질로 있다고 풀려난 왈라키아의 왕자 블라드가 왈라키아로 돌아간 후 헝가리와 협약을 맺은 것이다. 사실 이 과정에서 블라드는 투르크에 협조적이었던 블라디슬라프 2세를 죽이고 병력을 모아 그의 땅에서 투르크군을 몰아냈다. 메흐메트는 블라드 3세로 즉위한 블라드에게 사신을 보내어 후국(侯國)으로서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블라드 3세는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죽여버렸다. 일설에는 사절들이 그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터번을 쓴 체로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였다고 하고 다른 설에 의하면 꼬챙이에 꿰어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블라드 3세가 더 이상 투르크의 후신(候臣)이 되기를 거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블라드 3세는 새로이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한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와 손을 잡고 투르크로부터 왈라키아를 지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메흐메트는 이전에 점령한 니코폴리스의 총독인 함자-파샤에게 군을 주어 왈라키아군을 무찌르고 블라드 3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지형에 익숙한 왈라키아인들이 왈라키아땅에 들어온 함자-파샤의 기병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고 함자-파샤를 비롯한 포로들은 모조리 꼬챙이에 희생이 되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1462년에 도나우강을 건너 인근의 투르크 부락과 도시들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이에 노한 메흐메트는 1462년에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일으켜 왈라키아를 속된 말로 “깔아뭉개고자” 하였고 투르크의 대군에 맞설 병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블라드 3세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소규모 부대를 이용한 게릴라식 습격으로 맞섰다. 그러다가 1462년 6월 17일에 야영을 하고 있는 투르크군에 대한 대규모 야습을 감행하였다. 비록 블라드는 메흐메트 2세를 죽이는데는 실패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무려 1만 5천에 이르는 투르크군이 죽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세계사]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