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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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하전여총도, 정화선단의 비밀

자연정화 2016. 3. 10. 01:06

5. 천하전여총도, 정화선단의 비밀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1.23  14:55:22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5>

 

6. 천하전여총도와 정화 선단

우리는 앞장에서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문제의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결과, 지도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실제 17~18C의 것이며, 또 세계전도로서의 지도의 중심이 바로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래는 지도상의 세계의 중심, 한반도를 재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확대해본 것이다.

 

▲ 천하전여총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 천하전여총도 아시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한반도 상上에 ‘고려高麗’란 두 문자가 뚜렷한 가운데, 지도상의 중심을 나타내는 수직선이 지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高麗’란 두 문자는 한반도의 한 가운데에 씌어져 사각형의 테두리로 둘러져 있는데, 수직선은 그것의 세로방향과 정확히 평행하여 그어져 있다. 이로서 우리는 ‘고려高麗’가 먼저 씌어지고 난 뒤에, 수직선이 그것과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여 그어졌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지도를 제작할 땐 지도에 담을 내용을 정한 후, 우선적으로 지도의 중심을 결정한다. 그 다음에 지도의 전체 내용과 지면의 크기에 따른 비율을 가늠할 것이다.

보다시피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중심은 한반도이다. 게다가 그곳이 중심임을 강조하는 수직선까지 나타나 있다. 분명 수직선은 그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1418년의 원본지도에 나타났는지, 아니면 1763년 모사 당시에 원본지도 상의 중심을 재차 강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또한 다분히 의도적이자,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을 전제로 우리는 원본지도제작자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원본지도제작자에게 있어 한반도는 그의 정신적 근원이자, 모태란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이 지도상의 ‘고려高麗’에 있다는 말이다.

천하전여총도의 원본지도인 1418년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공도貢圖’란 이름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까지의 항해결과에 대한, 보고 형식의 지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본지도제작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다 및 항해와 관련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곤 그가 어떻게 원본지도에 나타난 내용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그가 항해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성조成祖 대에 조정에 바친 지도이다. 성조의 연호인 영락永樂16년이란 지도상의 설명이 그것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 지도제작자는 당시 명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영락제 시기의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남해 대원정이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에서부터 근 30여 년에 걸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대규모 선단에 의한 7차례의 대항해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정설은 이 항해의 무대가 인도양 전역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남아시아 연안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여, 동아프리카 해역에까지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서 이 항해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는데, 그 이유의 핵심은 정화 선단의 항해 범위가 기존의 인도양 연안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각지와 남극 대륙 등에까지 이른 전지구적 차원의 항해였다는 주장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은 필자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정황․증거들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만약 사실로 입증된다면 가히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 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화 선단의 업적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페르니난도 마젤란 등의 시기보다, 단지 앞선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서양 지리상의 항해가 동양의 성과에 기인한 것이란 결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천하전여총도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이 지도가 정화 선단의 세계 항해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필자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관심은 위 지도제작자와 정화 선단의 관계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화 선단에서 어떤 존재였나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항해의 성과를 담은 지도의 작성을 맡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 글 전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앞질러 결론을 내리자면 당시 정화 선단의 항해는 비록 명 조정의 대외정책에 기이한 것이지만, 실제 그러한 항해를 가능케 한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항해의 절대적 기반은 위 지도제작자와 같이 당시까지 ‘한반도 정체성’을 지녀온 해상집단이란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의 전반에 걸쳐 그 사실의 논증은 물론이거니와, 이들 해상세력의 기원에서부터 명멸하기까지의 활동무대를, 또 이들이 서양 지리상의 항해에 미친 자취들을 하나씩 밝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사의 해부는 불가피할 것이며, 오늘날 동북공정의 역사적 연원도 접할 것이다.

다시 정화 선단의 항해로 돌아가 보자.
정화 선단의 항해가 최근 세계적 관심사로 부상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계기는 영국의 연구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멘지스는 2001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심포지엄과 그 이듬해 출판하여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정화 선단이 유럽에 훨씬 앞선 시기에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무려 14년이란 시간동안 세계 각지의 200여 도서관과 박물관, 또 정화 선단이 발길이 닿았을 곳곳의 현장을 탐방했다.

사실 정화 선단의 세계주항에 대한 주장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학계 일각에선 197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로, 다만 서양의 주류학계에서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멘지스의 주장이 세계적인 조명을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그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그는 비록 주류학자가 아닌 일개 연구자에 불과하지만, 어느 학자보다 설득력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즉 그는 영국 해군의 잠수함 함장 출신으로, 세계 곳곳의 바다를 직접 항해한 경험에다, 전 바다에 걸쳐서 계절에 따른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특성은 물론, 과거의 천문항법, 지도 및 해도의 제작 능력까지 지식을 겸비한 항해에 관한 가히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이다.

그런 그는 중세 유럽의 지도가 정화 선단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각 지도들을 예로 들어, 어느 계절의 어느 시간에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여 지도를 작성한 것인지, 또 당시 바다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배경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인해 그의 주장은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디스커버리’ 등의 TV 채널 등이 앞 다투어 관련 프로를 방영한데다, 할리우드에선 그의 저작물에 대한 영화제작권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필자가 볼 때 멘지스의 저작은 그 내용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서양인이 그렇듯이 동양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의 성과물은 죄다 중국의 성과로 인식하는 서양 일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지스가 정화 선단 이전의 동양 지리지식을 설명하면서 지적한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조선의 지도라는 점이다.

그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란 이름의, 1402년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회와 이무, 김사형에 의해 제작되고, 권근의 발문이 씌어진 지도인데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리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자.

 

▲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린다.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모사본 4본이 일본에 남아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엔 4본 중의 일본 교토, 류코쿠 대학 소장본의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는 당시 중국의 직방세계관이 잘 표현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킨 데에 비해, 아프리카나 유럽 등의 상대적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다. 또한 인도 반도(대륙)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가 지닌 놀라운 점은 멘지스가 주목했듯이 아프리카 대륙의 동서해안과 유럽 일대가 나타나는 지도란 점이다.

지도상의 아프리카를 보라. 비록 위경선의 비율이 어긋나지만 동서해안의 윤곽이 매우 사실적이다. 더하여 지도상엔 아프리카 지명이 35여 곳, 유럽 지명이 100여 곳이나 나타나기까지 한다. 조선 개국 10년 만에 그려진 지도에 아프리카와 유럽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라면 우리로선 당시 조선의 세계인식에 대한 놀라움이자, 중상주의를 표방했던 해양국가 고려를 인식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19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각광을 받은 지도이며, 멘지스의 저서에서 아프리카가 묘사된 세계 최초의 지도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멘지스가 말한 ‘세계 최초’는 사실이 아니다. 일전에 멘지스의 연구팀에서 필자에게 혼일강리도에 대해 문의해올 때까지도 멘지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래는 중국 명나라 초기의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1389년)이다.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위 지도는 얼른 보기엔 앞서의 혼일강리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혼일강리도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지도제작상의 기풍인 직방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상대적 크기 등 세부적으로 볼 땐 혼일강리도완 분명 다른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필자가 굳이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를 한꺼번에 소개한 이유는 이들 지도의 관계 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알리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혼일강리도에 대한 학계 대부분의 설명은 혼일강리도가 대명혼일도를 참조로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혼일강리도에 씌어진 권근의 발문과,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엔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년?)와 승려 청준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1328~1392년)를 참조하여, 조선과 일본 부분을 보강하여 작성한 것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외 어디에도 대명혼일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럼에도 대명혼일도를 참조했다고 하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두 지도의 유사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위 원나라의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으론, 조선의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마 위 원나라의 두 지도 및 대명혼일도 모두에 영향을 준 모본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혼일강리도엔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언급된 ‘만국삼라와 우리나라가 함께 그려진 화이도華夷圖’, 그리고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말 나흥유의 ‘고려와 중국이 그려진 지도’ 등에 나타난 축적된 지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 글의 다른 장에서 거듭 다루어 나가겠지만, 필자는 위 가상의 원나라 모본지도라던가, 고려의 지도들 모두가 실제 천하전여총도의 제작자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집단의 산물이란 것임을 확신한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외의 그러한 지도를 작성할 해상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위의 인도 대륙 부분이 누락된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모본지도를 가정한다면 애초에 누군가가 중국지도에다, 아프리카 부분이 따로 그려진 지도를 인도로 오인하곤 두 지도를 함께 이어 작성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장으로 천하전여총도를 주제로 한 1장이 마감된다. 다음 장엔 놀라운 우리 해양사의 자취들을 살펴보겠는데, 이 장에서 고지도 한 종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지도는 ‘천하도’란 이름의 지도인데 같은 종류의 지도가 국내외에 아마 백여 본이 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들 지도는 거의 태반이 조선의 것으로,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 대유행한 우리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우리의 지도라 할 수 있다.

 

▲ 천하도1. [자료사진 - 서현우]

 

▲ 천하도2.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중심에 놓인 가운데 그 외곽을 하나로 이어진 대륙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의 세계관이 반영된 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선 지도에 나타난 외곽의 대륙을 상상의 산물로 보아왔지만, 최근 서양 일각에선 동양이 일찍이 태평양이나 대서양 너머의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종류의 천하도 하나가 2005년 5월 챨로테 리즈(Charlotte H. Ree's, 女)란 이름의 미국인에 의해 미국의회도서관에 소개되어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연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중세 동양이 서양에 앞서 세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말이다.

리즈가 소개한 지도는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의 아버지 헨던 해리스(Hendon M. Harris) 박사가 1972년 서울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현 우리나라의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도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지도에서 보듯이 우리의 조상들이 일찍부터 아프리카 대륙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고, 또 어떤 근거로 대양 너머의 대륙을 가정하여 지도상에 그려놓았는가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알아보고, 앞장에서 살핀 위작론자인 와데 박사의 15C 동양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드러내어 보자.

천하전여총도에 대해선, 2006년 3월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 공개 이후, 일각에서 1418년의 원본지도의 존재여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논쟁은 가라앉은 상태이다.

그리고 와데가 말한, 원본지도의 제작 당시에 중국의 어떤 지도에서도 지구가 구형이란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며, 구형을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는 지적에 대해 당시 조선의 관점에서 논박해 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엔, 오늘날 세계에서 당대 최고수준의 수학자이자, 이론천문학자로 평가받는 이순지가 당시 도성인 한양의 위도를 ‘북위 38도 강强’이라고 세종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강强은 거의 근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서울의 위도가 북위 37.34도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관측 및 계산능력의 한계로 인해 현재의 계산 값과 오차를 보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가 남긴 저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의 분석을 통해 그 차이가 결코 오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칠정산내편은 천구를 365.25도로 나눠 방위를 365.25도, 1도를 100분율로 정한데 비해, 아라비아 과학을 흡수한 칠정산외편은 오늘날과 같이 천구를 360도로 나눠 방위를 360도, 1도를 60분율로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서울의 위도 값인 37.34도를 365.25도에 적용하여 얻은 계산 값은 37.91이 된다. 바로 이순지가 말한 38도 강强에 이르는 것이다.

또 그는 천구의 주기를 오늘날의 그것에 소수점 이하 6째 자리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계산 값을 남기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과학수준은 서양에 비해 백여 년 이상이나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그런 지도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의 동양과학을 평가절하 할 순 없는 것이다.

필자는 천하전여총도야말로 그에 대한 지도학 상上의 증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