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패수(浿水) 위치 놓고 격론
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의 영토 찾기 토론회 개최
자료출처 : 조선pub 2016. 06. 23. 이상흔 기자
6월 21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고조선과 한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상고사 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공석구 한밭대 교수(사회자),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 이후석 박사(숭실대).
고대 고조선(古朝鮮)과 한(漢)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패수(浿水)’가 어디인지를 고증하는 역사학계의 토론회가 열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6월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소위 강단사학과 재야사학계의 대표 주자들을 불러 ‘고조선과 한(漢)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한나라가 요동의 옛 국경 요새를 수복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소속시켰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패수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만큼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다.
강단사학이 패수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이병도의 청천강 패수설’과 ‘노태돈의 압록강 패수설’, 그리고 ‘혼하(渾河) 패수설’로 정리될 수 있다. 이 가운데 혼하 패수설은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강단사학의 이론으로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요수(遼水: 요하)의 동쪽에 흐르는 혼하를 패수로 보는 시각이다. 결국 요수(요하)를 기준으로 그 동쪽(요동)과 한반도를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혼하 패수설은 강단사학계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을 가장 서쪽으로 요동까지 넓게 확대해서 보는 시각으로, 기존의 한반도 패수설에 비교하면 한결 진일보한 시각이다. 하지만 민족사학계에서는 혼하 패수설도 결국 강단사학 이론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논리가 한사군 한반도설과 대동강 낙랑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재야사학 혹은 민족사학계는 패수의 위치를 오늘날 요수 서쪽의 대릉하(大凌河)나, 북경 동쪽에 있는 난하(灤河)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민족사학자 가운데 대릉하나 난하 보다 더 아래쪽(서남쪽) 지역을 패수로 보는 이도 있다(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동북아역사재단 토론회에서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이후석 박사(숭실대),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가 토론자로 나섰다.
결론부터 요약하면 김종서 박사는 패수의 위치를 난하로 지목했고, 박준형 박사는 혼하 패수설을 주장했다. 이후석 박사는 고고학적 증거를 근거로 패수가 오늘날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비정했다. 심백강 박사는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수성진) 일대가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패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산해경》에 기록된 조선의 위치. 《산해경》 ‘해내경’에는 ‘동해 안쪽의(東海之內) 북해(발해) 모퉁이에(北海之隅) 이름을 조선이라고 일컫는 국가가 있다(有國名曰朝鮮)’라는 기록이 있다. / 김종서 박사
"한사군의 위치 고증으로 볼 때 패수는 북경 부근의 난하"
김종서 박사, 한국과 세계의 역사교육을 바로 잡는 사람들의 모임
이병도는 ‘중국의 가장 오랜 지리서 산해경’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산해경》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서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를 비롯한 ‘고조선·한사군 재(在) 한반도설’ 논자들은 정작 고조선이 발해의 북쪽, 영정하(永定河) 유역으로부터 요하(遼河) 서안(西岸)까지 사이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산해경》의 여러 기록을 철저히 배척하거나 그 내용을 왜곡하여 왔다.
《산해경》에 고조선의 영역이 요하의 동쪽에 한정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자신들의 학설에 반하는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해경》 ‘해내경’에는 ‘동해 안쪽의(東海之內) 북해(발해) 모퉁이에(北海之隅) 이름을 조선이라고 일컫는 국가가 있다(有國名曰朝鮮)’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동쪽 바다(발해·황해·동중국해)’ 중에서도 ‘북쪽 바다(발해)’의 모퉁이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이 기록을 현재의 지명으로 옮기면 ‘중국의 동쪽 바다 중에서도 북쪽 바다인 발해(북해)의 모퉁이 지역 중에서도 영정하의 동쪽으로부터 요동반도의 서부 지역에 이르는 지역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로 풀이된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서기 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1년간 벌어진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었고, 한나라 태사(사관)들의 우두머리인 태사령으로서 한나라와 조선과의 전쟁의 발발, 전쟁의 진행, 전쟁처리 등을 모두 지켜보고 ‘조선열전(朝鮮列傳)’을 통해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패수는 한나라 육군과 조선의 수비군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 강이다. 때문에 사마천이 패수에 대하여 남긴 기록은 아주 정확할 것이다.
그 사마천이 “한나라가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옛 요새와 바로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가 패수(浿水)를 건넜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요새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압록강이나 청천강 하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는 강이다. 따라서 압록강이나 청천강은 패수가 될 수 없다. 또 《수경》에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패수가 기록된 《설문해자》 《수경》 《한서》의 기록은 청천강(혹은 압록강)이 패수라고 주장해온 ‘고조선·한사군 재 한반도설’ 논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청천강이나 압록강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고, 동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패수였고, 조선과 경계를 마주한 한나라의 군은 요동군이었다. 모든 기록과 지리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고증해본 결과 당시의 기록을 충족시키는 패수는 난하나 난하 서쪽의 강이다.
기원전 3~2세기 무렵의 고조선 중심지와 서쪽 경계 변화도. 박준형 박사는 연의 공격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역에서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패수의 위치도 이동하고 한자 표기도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박준형 박사
"패수는 소요수로 불린 혼하(渾河)가 틀임없어"
박준형 박사,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패수의 위치와 관련해서 청천강설, 압록강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등 이미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기》 ‘조선열전’,《한서》 ‘지리지’, 《위략》,《수경주》등 관련 사료에 보이는 패수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철론(鹽鐵論)》 ‘주진편(誅秦篇)’에는 “진(秦)이 이미 천하통일한 후에 동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진이 패수(沛水)를 건너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는 점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진고공지상하장(秦故空地上下鄣)에 머물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대에 패수(浿水) 이동지역이 진의 요동군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이것은 진의 공격 이전에 이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진한교체기 영토를 확장한 흉노가 동쪽으로 예맥·고조선과 접하게 되었다(東接穢貊朝鮮)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조선은 한과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패수를 중심으로 그 서쪽에는 한과 북쪽에는 흉노와 접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한은 패수를 경계로 위로는 흉노를, 동쪽으로는 고조선·예맥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사기》‘조선열전’에서는 멀고 지키지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조선에게 연의 동쪽 땅을 빼앗긴 것을 한의 입장에서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패수 이동지역인 진의 옛 공지(空地)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패수 혼하설(渾河說)에 주목한다. 이 설은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견해로 기존의 연구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전한기(前漢紀)》의 패수 관련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한기는 후한 헌제가 한서의 문장이 번잡하고 읽기가 난해하다하여 198년 기전체의 한서를 1/4분량의 편년체인 전(前) 한기(漢紀)로 편찬케 한 것이다.
이 전한기 효무황제기에 고조선과 한의 경계를 시사하는 요수(遼水)가 언급되어 있다. 전한기 에서는 “요수(遼水)를 새(塞)로 삼았다”고 했다. 요수에 대해서 《수경주》에는 대요수(大遼水)와 소요수(小遼水)가 있는데 기록을 토대로 보면 대요수는 오늘날 요하(遼河)이며 소요수는 혼하(渾河)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는 “패수(沛水)는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패수(沛水)는 오늘날 요하(대요수)가 아닌 혼하(소요수)의 흐름과 일치한다. 따라서 전한기의 요수는 오늘날 혼하임을 알 수 있다.
심백강 원장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주 활동지인 고대의 요서지역(고조선과 낙랑군의 중심무대). 고조선의 영토는 수성진의 갈석산(백석산과 낭아산) 일대까지 이어진다. 심 원장은 패수도 당연히 서쪽 경계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백강 박사
요녕성의 혼하가 고조선의 패수가 될 수 없는 7가지 이유
심백강 박사, 민족문화연구원
1) 고대의 요수는 현재의 요하와는 다른 강이다.
요수라는 명칭은 《산해경》에 최초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요수는 위고 동쪽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된다.” 하지만 현재 요녕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서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주입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요수의 흐르는 방향을 통해서 본다면 고대의 요수는 오늘날의 요하와는 전혀 다른 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혼하의 발원지 백두산맥 서쪽이 한나라의 북방 변경이 될 수 없다.
혼하의 발원지는 요녕성 무순시 청원현 곤마령(滚馬嶺)이다. 즉 백두산의 지맥인 곤마령 서쪽에서 혼하가 발원한다. 《수경주》에 소요수를 설명하면서 “물이 북쪽 변방 밖에서 발원한다(水出北塞外)”라고 말했는데 오늘날의 백두산이 과연 한나라 당시의 북쪽 변방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한나라의 북새 즉 북방 변경은 산서성과 하북성, 그 북쪽 내몽고 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북쪽 변방 밖에서 발원한다”는 소요수를 오늘의 백두산 지맥인 곤마령 서쪽에서 발원한 혼하로, 그리고 그것을 다시 패수로 간주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3) 패수는 북방에서 발원한 강이고 혼하는 동북방에 위치한 강이다.
상흠의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수경》에 말한 패수는 물의 흐르는 방향으로 볼 때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산해경》의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라는 요수와 동일한 강임을 알 수 있다.
4) 고조선의 중심지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고조선은 평양, 아사달, 장당경 등의 도읍지가 있었는데 이 중에 2000년 동안 고조선 왕조의 중심지가 된 곳은 아사달이었다. 고조선 왕조의 중심지였던 아사달은 현재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로 이곳이 바로 고조선 시대의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아사달은 ‘아침의 땅’이라는 우리말이고 조양에서 朝는 아침, 陽은 양달을 뜻하는 한자로서 우리말을 한자를 빌어 뜻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조양시는 지리적으로 내몽고 적봉시의 홍산, 건평, 능원 등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영토범위를 추정하는데 있어 결정적 증거가 되는 유물인데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요서지역, 특히 조양시를 중심으로 한 일대이기 때문이다.
5) 연, 진, 한의 동쪽 경계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고조선 왕국의 강역을 살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연나라의 동쪽 위치이다. 《사기》 ‘소진열전’에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라고말했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면 고조선의 위치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강단사학은 그동안 압록강 서쪽이 모두 연나라 땅이고 그 동쪽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이 있었던 것으로 잘 못 이해해 왔다. 그러나 소진의 말에 따르면 연나라는 하북성 서남쪽에 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동남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연, 진, 한 대를 거치면서 줄곧 하북성 동남쪽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 후퇴한 사실이 없다. 그렇다면 동북 길림성 백두산맥에서 발원한 혼하가 고조선의 서쪽 경계의 패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6) 한의 요동군으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진시황 시대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5군을 설치했다. 주목할 것은 그동안 강단사학이 주장해 왔던 것과 달리 한나라 때 설치한 동북방 5군의 군현이 모두 현재의 하북성 북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이 모두 하북성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서쪽,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요동군만 홀로 수 천리를 뚝 떨어져 외로운 섬처럼 압록강 주변에 위치하고, 그 요동군 동쪽 대동강유역에 다시 고조선이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7) 낙랑군 수성현으로 본 패수는 혼하가 될 수 없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여기가 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所起)”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말한 낙랑군 수성현으로서 충족시켜야 할 세 가지 조건, 즉 수성현, 갈석산, 장성의 기점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곳은 현재의 하북성 남쪽 수성진이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먼저 고증된 후에 패수를 찾는 것이 순서다.
그렇게 볼 때 패수는 당연히 수성진이 있는 하북성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요녕성의 요하 동쪽에 위치한 혼하가 고조선의 패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춘추전국시대에서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한족 정권의 동북방 국경은 오늘의 하북성 동남쪽을 넘지 못했다. 이때의 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하북성에 있던 요수이고, 이때의 요서, 요동은 현재 요하의 동서쪽이 아니라, 하북성에 있던 요수의 동쪽과 서쪽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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