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자연정화 2017. 12. 18. 21:18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下)

 

자료출처 : 조선pub 2014. 10. 23. 이상흔 기자

 

-이제부터는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요서 지역과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은(殷)나라가 망하면서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기자는 자기 선대(先代)가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은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남성(河南省: 은허)에서 한반도의 대동강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망명객 신분에 이(異)민족이 있는 지역을 지나서 한반도로 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우리 사학계도 기자조선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요서조선(진한 시대의 요서군)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한 하북성 동부 일대 지도.

 

 

원나라 말기까지 존속한 '조선하' 명칭

 

-고조선의 중심 도시나 무대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발해만에서 동북쪽 일대가 활동 영역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송나라 때 나라에서 펴낸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인데, 여기에 바로 ‘조선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선하는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무경총요>에 등장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왜 북경 북쪽 지역에 이 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경총요>가 편찬된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씨(李氏) 조선 건국보다 348년이 앞섭니다. 따라서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성계의 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고대 조선의 주무대가 대륙 깊숙이 중원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조선하’가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잠시 정리를 해보면, 중국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활동지는 주로 섬서성(陝西省)입니다. 조선하는 고대 요서조선 수도의 서쪽에 있던 강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모든 기록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사기> 열전에 섭하(涉河)가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것이고, 위만이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겁니다. 당연히 수(隋)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이병도의 주장처럼 청천강이 아니고 조선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천강 패수설’과 ‘대동강 낙랑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무경총요>는 어떤 책입니까.

 

“이 책의 저자 증공량(曾公亮)은 북송(北宋) 왕조의 중신(重臣)입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신당서>와 <영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입니다. <무경총요>는 북송 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아 4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펴낸 역작으로 정사(正史)에 뒤지지 않는 권위 있는 사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하가 허위일 수 없고, 저들이 허위로 조작하여 조선하를 기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 조선하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제가 고증을 해보니 오늘날 북경 부근의 ‘조하’(潮河)가 바로 조선하입니다. 저의 이번 책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사고전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하가 왜 조선하인지 자세하게 고증했습니다. 최소한 원(元)나라 말년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습니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 같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소유한 나라에 불과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원 수도 근처에 조선하가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불편한 명칭이었을 겁니다.”

 

 

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최고 지리서 <산해경>, '동해 안쪽에 나라가 있으니…'

 

-혹시 노룡현 쪽이 고조선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다른 기록도 있는지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편을 보면 ‘동해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산해경광주>는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과 ‘대황경(大荒經)’을 ‘조선기’(朝鮮記)라고 했습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한 셈이 됩니다.

 

<산해경광주>는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이란 학자가 쓴 <산해경> 주석서입니다.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입니다. 서한(西漢) 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유흠(劉歆)은 <산해경>이 하(夏)나라의 우(禹)왕과 백익(伯益)의 저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근거 없는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사기>에도 <산해경>이 인용된 것을 보면 선진시대의 사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에서 사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한대(漢代) 이전 고조선의 직접 사료인 <산해경> 중 ‘해내경’과 ‘대황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해경>에 말한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가 노룡현 부근입니까.

 

“풀이할 것도 없이 글자 그대로입니다. 지금의 황해를 예전에는 ‘동해’라고 했습니다. 한족의 근거지인 섬서성을 기준으로 보면 북해(北海)는 현재의 ‘발해만’밖에 없습니다. 발해의 다른 이름이 ‘북해’입니다.

 

<해내경>은 첫줄에서 조선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북해의 모퉁이’라고 했습니다. 삐죽 튀어나온 곳을 모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북성 발해만 지역에 있는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이 바로 <산해경>이 말한 지역이 됩니다.

 

<태평환우기>에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하고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나 한나라 때는 이 지역을 ‘요서’라고 했습니다. 즉 조하의 동쪽이 요동, 조하의 서쪽이 요서로, 지금의 요동ㆍ요서하고 다른 기준입니다.

이처럼 옛날의 모든 기록이 고조선과 낙랑의 중심적 위치를 일괄적으로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맞아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이 현재의 요동이나 반도에 위치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조하(조선하)를 기준으로 요동ㆍ요서를 나눈 근거는 무엇인가요.

 

“〈산해경〉에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동ㆍ요서를 나누는 오늘날의 요수(요하)를 보세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요녕성에서 지리 구조상 강이 동남쪽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녕성의 요하는 옛날 <산해경>에서 말해온 그 요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요하로 바꾼 거죠.

 

거기에 반해 조하는 정확하게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갑니다. 기록이 정확하잖아요. 이병도 같은 분들은 요동ㆍ요서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낙랑군이 요동군 동쪽이라고 하니까 대동강 유역이라고 본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가 요서군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과도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요동군에 한나라의 군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압록강에 있다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넘어서 성을 쌓을 수 있습니까. 강단 사학은 앞뒤가 안 맞으면 무조건 오류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냥 옛 기록에 있는 그대로만 따르면 다 맞는다는 말씀이시네요.

 

“<사고전서>에 기록된 대로 요하를 조하로 보고, 노룡현 지역을 ‘요서고조선’의 평양으로 보면 고대사 전체가 다 맞아 들어갑니다. 그동안 사료가 없다 보니까 우리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더듬이 길 찾듯이 고대사를 다루었는데 이제 사료를 통해 다 밝혀졌으니까 더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강단 사학은 새로운 사료가 나와도 자기들 통설하고 안 맞으면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척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전서>에서 밝혀진 사료는 강단 사학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든탑을 허무는 것이 너무 아까우니까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또 보려고 해도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이 안되다 보니까 그동안 이런 내용이 보이지가 않았던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최근 펴낸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심 원장은 계속해서 <사고전서>의 삼국시대 관련 사료를 펴낼 계획이다.

 

"북한이 만든 시조 단군릉은 가짜"

 

-바로 그 강단 사학의 뿌리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우려된다는 말씀이시죠.

 

“일본 사람들이 단군조선은 ‘신화(神話)’라고 해서 부정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거리가 멀어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습니다.

이런 논리로 단군조선 1000년, 기자조선 1000년을 잘라내고, 위만(衛滿)조선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를 2300년으로 만들었는데, 일본의 2500년보다 역사가 짧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의 길이를 단절시켰고, 역사의 무대를 축소해 놓았습니다.”

 

-재야사학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사료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먼저 알아야할 것은 <환단고기> 등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주로 ‘재야사학자’라하고, 신채호, 정인보 선생처럼 정사(正史) 사료를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들은 ‘민족사학자’로 구분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고전서>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료는 연대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는데, 이런 원자료를 부정한다면 역사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말씀대로 중국 중원(中原)에서 활동하던 우리 민족은 어떤 계기로 한반도 쪽으로 영역을 계속해서 축소해 왔는지요.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興亡) 했습니다. 돌궐, 흉노, 말갈, 여진…. 그 모든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지만, 오직 우리만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토, 언어, 전통, 민족, 역사를 모두 유지하면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로마가 아무리 강성한들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단군이 세운 그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 민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세계사에서 이처럼 생명력이 긴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천년의 역사적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환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옛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처음 주 무대가 노룡현 일대라면,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제가 다음번에 <사고전서>의 자료를 모아서 책으로 펴낼 부분이 바로 삼국의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주 무대가 동북을 포함하는 역사였습니다. 반도(半島) 쪽으로 완전히 축소된 것은 고려 이후 조선조에 넘어오면서입니다.

 

고구려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노룡현 지방이고, 현재의 평양 천도는 그 한참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의 수도가 바로 노룡 지방입니다. 이때 당(唐)나라에 요서평양(노룡 지역)을 내주고,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번 책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북한은 “평양에서 단군의 시신이 발겼되었다”며 단군릉을 조성했습니다.

 

“고조선이 워낙 오래 존속되었기에 훗날 단군의 후손이나 왕족의 일부가 평양에 건너와 거주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그 무덤이 시조(始祖) 단군일 수는 없습니다. 단군에게 제사를 철저하게 지냈던 조선 시대에도 평양 일대 민간에서 단군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묘를 시조 단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삼원 구조의 원형제단(좌)과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대규모 적석총 유적. / 이미지 출처: 우실하 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 쏟아지는 유물ㆍ유적 증거

 

-기록과 함께 유물ㆍ유적 같은 고고학적 증거가 받쳐 주어야 더욱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민족이 원래 중원의 주인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발굴되면서 입증되었습니다. 기록뿐 아니라 유물과 유적까지 뒷받침하는 것이죠.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던 요서군 지역입니다.

 

홍산문화의 3대 특징은 여신을 모신 사당과 원형제단,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섬서성처럼 중국 한족 문화가 융성한 지역(황화문명권)에서는 이런 특징을 가진 유적이 발굴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우리 동이족 매장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 황제는 무덤 조성 시 평지에 흙을 끌어모아 토갱(土坑)을 만들었습니다. 능(陵)과 태묘(太廟), 제단(祭壇) 등은 부락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인데, 대규모 제단이 황화문명에 앞선 홍산문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국가의 전야(前夜) 단계라고 합니다. 황화문명이 아직 국가 단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때 벌써 국가의 전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거주하는 곳에서 먼저 문명이 시작되어 황화문명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홍산문화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신상. 오른쪽은 두상이고, 왼쪽은 복원한 반가부좌상이다.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라는 것이죠.

 

“그것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올 수는 없잖아요. 이러한 문화의 전야(前夜) 위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면 무슨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가지고 고대국가의 건국을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중원 대륙의 우리 민족이 살던 곳 요서지역에서 국가의 건국을 상징하는 유물이 최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중국 문명의 서광(曙光)이 홍산문화에서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명의 시작이 황화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족의 무대는 섬서성이고, 동쪽은 동이족, 그 가운데 우리 ‘박달민족(배달민족)’의 주무대였습니다. 박달민족 국가를 한자로 쓰면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 되는 데, 현재 이 지역에 ‘아사달’이나 ‘박달’과 연관된 무수한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은 홍산문화도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동북공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홍산문화를 발굴해놓고 보니까 기존 중화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건국도 홍산문화에서 먼저 이루어졌고요.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용(龍)이 황화문명에서 발굴된 용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봉황(鳳凰)도 최초로 이쪽에서 나왔고요.

그러다 보니 ‘황화문명에서 문명이 시작되어 오랑캐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기존의 이론이 뒤집어 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달라지다 보니까 아예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를 이쪽 지방으로 갖다놓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우리 강단 사학 이론"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족 입장에서 동북지방은 동쪽과 북쪽 사이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입니다. 즉 동쪽과 북쪽 사이를 일컫는 말인데 그동안 이 지역의 역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은 해왔지만, 명백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입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람뿐 아니라 우리 강단 사학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이 이룬 많은 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학회도 만들고, 정부의 움직임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겠다고 출범한 연구재단도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면 기존의 일제나 이병도의 반도사관 학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보낸 자료가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자료에 불과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일일이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요서고조선’ ‘요서낙랑’ ‘요서고구려’(여기서 말하는 요서는 오늘날의 요서 지역이 아니라 진한시대의 요서군 지역임)만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모든 사료는 중국의 조상이 만든 중국 측 자료이고, 그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우리가 합리적이고 치열하게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반박하면 중국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군요.

 

“당연합니다. 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예컨대 선비족(鮮卑族)은 고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세워진 선비족의 ‘두로공신도비문’이 지금 전해집니다. 어떤 이의 비문을 쓸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조상(뿌리)부터 이야기하는데, 그 첫마디가 바로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건국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선비 모용부(慕容部)가 나라를 세우고 활동한 지역이 요서와 요동 지구,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곳은 기자조선이 건국하고, 고죽국이 통치하고, 이후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사군을 설치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는데, 제가 사료분석을 하니 고죽국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분명합니다. 고죽국은 백이ㆍ숙제의 고사로 유명합니다. 이 고죽국이 바로 요서에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고죽국’까지 나오니까 좀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주시죠.

 

“그러니까 발해만에서 가까운 노룡 지역에 조선성이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 ‘고죽성’, ‘요서성’으로 불렸습니다. 요서성은 진시황이 이쪽 지역을 요서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있었으니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고, 고조선 때는 조선이 있어서 ‘조선성’이란 이름이 있었던 겁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중국 동북지방 전체가 우리 역사이고, 우리 조상의 무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교과서 개정으로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갑골문자(좌)와 이보다 앞서는 골각문자(우)

 

-동북아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은나라도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다면 은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로 봐도 됩니까.

 

“갑골문자는 한자(漢字)가 아니라 ‘은나라의 문자’ 즉 은문자(殷文字)입니다. 갑골문자에서 4000천자(字)가량이 해독되었는데, 미해독 문자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의 문자가 통용될 정도라면 이미 이에 앞서 갑골문을 탄생시킨 문자 체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문자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습니다(수년 전 산동성 창려현 지방에서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 앞선 골각문자가 발견됨=편집자주).

 

한자(漢字)는 갑골문자를 한족이 더욱 발전시킨 문자입니다. 정리하면 한자는 당연히 갑골문을 토대로 한족이 발전시킨 글자이지만, 이 문자를 발생시키고 문명 자체를 연 서광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문명의 뿌리이자, 시초를 열어준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서 중국의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현재 우리 역사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반도사관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신화이고, 기자는 허구이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민족은 타율적이며,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관을 아직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꾸려면 교과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료를 정리해 놓아야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작업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가르칩니다. 로마나 한(漢) 왕조보다도 훨씬 위대했던 고조선만 바로 서면 동서화합,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사업은 범국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사학계의 주류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학회나 재단이 만들어진들 연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일연 스님이 고조선에 대해 단 몇줄의 기사를 남김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살려내는 공헌을 했습니다. 만약 일연 스님이 그 기록조차 안 남겼다면 후대에 누가 고조선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제가 하는 이 일도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조선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사료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 사료를 찾아내서 세상에 내놓고 있는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이라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심 원장은 "고죽국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한다"

 

-우리 사학계에 하실 말씀은.

 

“국사 학자라면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능력보다 한문 원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교수로 임명해야 합니다. 사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대사학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놓은 ‘요서낙랑’ ‘요서고조선’ 자료를 가지고도 박사학위 논문이 수십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북경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라는 것을 밝히는데 3개의 자료를 인용했지만, 후학들이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고전서>는 동양 삼국이 공히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고전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바로 세우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여러 난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를 통해 한국사의 근간을 바로잡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며, 한중(韓中)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는 여러 문제에 대해 상호 우의(友誼)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심백강 박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광복 이후 모든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정권도 여(與)에서 야(野)로, 야에서 여로 여러 차례 교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 가까운 세월을 조금도 변화없이 식민사학을 계승한 이병도 학파가 줄기차게 주도하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입니다.

 

이제 늦었지만, 역사학계도 하루빨리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야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인문학의 핵심은 역사입니다. ‘역사광복’을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