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한사군은 허구다 / 동화 속의 한사군

자연정화 2017. 12. 23. 01:33

한사군은 허구다 / 동화 속의 한사군

(국회청문회에서 임승국님의 논지)

 

☞ 이 글을 올린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머리말

지금도 첨예한 대립 각을 세우며 또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한사군]의 [존재유무]와 [위치비정]이 왜 중요한 관건인가를 말씀드리기 위한 서두(序頭)입니다.

바로 이 쟁점들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외세지배론]의 핵심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사편수>를 빌미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는 일제의 내부원칙인 중추원 령에 근거한 총독부 지침에서,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적이 없고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왜 그렇게 한사군의 반도 비정과 한사군의 존재고착에 매달리는 이유가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충실히 따라가며 완성된 [조선역사]는 위의 요건을 금과옥조로 삼았고, 또 단군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룡)같은 이를 전면에 중추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해졌다.

아울러 조선사 편수의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 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 삼국, 통일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1차 위원회 때는 신라통일 이전, 신라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던

미묘한 흐름이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

조선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론의 근거 부각,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다.” 라는 결론의 유도 등이다.

위와 같은 일제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이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일례로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라고 손을 들어줌으로서 그 망령의 해독을 아직까지 끼치고 있다는 슬픈 현실 때문이다.

 

 

국회청문회에서 임승국님의 논지 (1)

 

□ 한사군 - 제발 동화 좀 쓰지 마라!

제가 맡은 분야는 바로 아까 <김원룡> 선생께서도 "터치"하신 [한사군] 문제와 삼국강역 문제인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많이 말씀드리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백제 강역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한사군 문제를 저는 세 가지 각도에서 분석합니다.

 

첫째는 사료적인 측면에서

두번째는 상황적이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세번째는 아까 말씀하신 고고학적 측면에서 인데

여기에 하나의 분야를 더 보탠다면 지리적인 측면입니다.

 

1. 중국 한 왕조가 300년을 존속한 적이 없는데 한사군이 421년이나 존속했다고 합니다.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크게 나누어 서너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는데 먼저 [상식적 상황적 측면]에서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과서는 <한사군>을 설치한 연대를 BC 108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또 지나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누구나 붙잡고 <한사군이 언제 멸망했느냐?> 하고 물어보면(제 딸한테 물어봐도) 그동안 문교부가 어떻게 국사교육을 철저하게 잘 시켰는지 "낙랑군이 제일 오래 존속하다가 AD 313년에 멸망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기원 313년에다가 기원전 108년을 합치면 총계가 [421년]이나 되는데, 한사군이 421년이나 존속했다는 게 정말 말이 됩니까? 동양사의 ABC만 아는 사람도 이 421년 이라고 하는 숫자를 결코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

중국의 [25사]라고 하면 25왕조의 역사를 적은 책인데 즉 한 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2000년 동안에 중국에서 망하고 흥한 왕조의 숫자가 모두 25개 왕조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25개의 역대왕조의 연대가 300년을 "오버"하는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네들 말대로 외국에 있는 식민지가 421년이나 존속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중국왕조 가운데 200년을 지속했던 왕조라면 고작 <4개> 뿐이예요. 바로 후한(後漢), 당(唐)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입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경우 사실은 혈족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 계통입니다마는 하여튼 전부 합쳐 네 개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300년 넘은 왕조는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해외에 나가있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식민지가 400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2. 제발 좀 동화 쓰지 마라! - [한사군]이 무슨 중국 5개 왕조의 전리품인가?

다시 말해 그와 같은 <421년> 동안에 중국 측에서 일어서고 몰락한 왕조를 보면

- 한 무제의 전한(前漢)이 망하고

-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나타나고

- 그 다음에는 후한(後漢)이 일어서고

- 뒤를 이어 삼국지에서 말하는 조조의 위(魏)나라가 있었으며

- 그리고 서진(西晉)입니다.

이런 5개 왕조를 거치면서 [한사군]이 무슨 전리품이었던가요? 다시 말해 <이건 내가 가졌던 거니까 네가 물려받아라!>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는 얘기라고 정말 보시는 겁니까? 까놓고 말해봅시다. 그 잘난 누가 <한사군은 중국의 5대 왕조를 거쳐 가면서 역대 왕조에 주구장창 식민지 노릇을 했다. 바로 이것이 한사군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때부터 이는 그가 잘난 강아지처럼 떠들어대는 [역사학]이 아니요. 그렇다고 재미난 [동화의 소재]도 안 되는 웃음거리입니다.

 

게다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이젠 신물이 넘어오는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는 이 식민지의 종주국이 어떤 나라냐 하면 전한(前漢)입니다. 헌데 이놈의 <전한>은 AD 8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주국도 망하고 없는 식민지가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 식민지는 개념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에는(제가 여러분한테 나누어드린 자료를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정확히 국사교과서에서는 <한나라의 식민지인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설치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식민지]라는 정치술어 조차 아니 그런 정치개념 조차 없을 때예요.

그런데 겁도 없이 "한나라의 식민지인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설치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넌센스"예요

그래서 저는 이쯤에서 [전략적 상황적 측면]에서 본 견지에서도 종주국이 멸망하고 나서 300여 년 동안 존속되었을 뿐 아니라 망해버린 종주국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이러한 식민지가 존속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또 한편으로 400여 년 동안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도 다 끊어져버리고 없는 [한사군]이 과연 존속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낙랑군]이라고 하는 <평양>의 북쪽에는 당시 동양최대의 강국인 <고구려>가 기세를 뻗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漢)나라 사신이 고구려한테 “내 식민지인 낙랑으로 갈 테니까 길 좀 비켜 달라”고 했다면 그들이 좋게 비켜 주었을까요? 교통수단이 없으면 통신수단도 없는 것입니다. 나라도 없고 아무 소통할 수단도 없는 이러한 식민지는 만에 하나라도 있었다고 해보았자 그건 이미 식민지가 아닙니다.

이상은 [상황적인 혹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 [한사군 부재론]입니다.

 

 

 

국회청문회에서 임승국님의 논지 (2)

 

□ 국회청문회에서 임승국 : 한 무제는 기자조선에 패하였다

다음은 [사료적 측면]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제가 국회 국사청문회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조작이니, 잘 모르는 비전공자들의 믿을 수 없는 설이니 하는 나사 빠진 이들의 "논란의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함입니다.

이 자료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증언하여 국회가 보관하고 있는 속기록 자료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한번 보시고 제발 조작 운운하는 스스로 머리가 빈 걸 드러내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없기를 바랄뿐입니다.

속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국회 문공위에서 증언한 목소리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회는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한 사연을 담은 속기록 내용이라는 걸 거듭 말씀드립니다.

 

1. 사마천의 <사기>는 [한사군]에 대한 "1차 사료"이다.

잘 아시다시피 [한사군]의 설치는 BC 108년이고 그 당시 漢나라 임금은 <한 무제>입니다.

중국의 [25사]라고 하는 책은 바로 이 한 무제 때 쓰여 지기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바로 무제의 신하요 사관인 <사마천>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신하가 130권의 [사기]를 적었는데 <115권>이 이른바 우리가 지금부터 문제 삼고자하는 [한사군]의 기록을 적은 "조선열전"입니다. 따라서 이 "조선열전"의 기록은 [한사군]에 관한 한 우리사학계에서 얘기하는 "제1차 사료"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원전>이라는 뜻입니다.

 

2. 1차 사료인 사마천의 사기 원전에는 [한사군]의 기록이 없다.

이 원전 속에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훑어보아도 오늘날 우리 중 고등학생들이나 여기에 앉아계시는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또 달달 외우고 있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사군(四郡)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그럼 지금 교과서에서 그렇게 떠들고 있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기록은 도대체 어디서 누가 창작해 냈단 말입니까?

역사라는 것은 창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울러 역사적 사실에는 "플러스 알파"도 안 되고 "마이너스 알파"도 안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것이 본래 어찌 있었는가? 그런 역사적 사실이 원래 어찌 있었는가?>를 연구하는 자세가 <실증사학>의 태도입니다.

이 말은 독일의 실증사학자 <랑케>가 얘기했지요.

그래서 저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은 본래 있는 그대로 적어야 하지요. 수치스러우면 수치스러운 대로 영광스러우면 영광스러운 대로 결코 가감이나 첨삭하지 않고 그대로 적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을 그들과 다른 주장을 펴는 우리들을 가리켜 "한국사의 영광이나 긍지만을 조작하고 창조해내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다면 이야말로 턱없는 중상이요 모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야 말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자는 것이 그 주장이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들이 언제나 입에 꼬리처럼 달고 매도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학설에다가는 그런 실증주의적 태도를 왜곡하여 적용하는 것보다 백배 나은 정말 훌륭한 [실증적사학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 근거가 되어야 할 가장 원초적 자료이며 제 1차 사료라 말할 수 있는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저도 안타깝지만 식민사학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을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기록이 1차 사료인 "사기 조선열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즉,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郡) -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사군이 되었다>라는 기록 다음에 글의 순서로 봐서 "낙랑, 현도, 진번, 임둔 야(也)"라 하는 기록이 있어 주어야겠는데 그게 없습니다. 요즘 정신없이 이것저것 가져다 붙여대기 좋아하는 식민사학가들이 "어이쿠! 그래도 있어 주었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 쉴 텐데 그것이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더욱 이상하게도 그 대신에 이 "사군(四郡)"이라고 하는 말 바로 다음에는 글자하나 빼놓지 않고 바로 계속되는 다음 글이 뭐냐 하면 엉뚱하게도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아닌 "평주, 날양, 추저, 홰청"이라고 하는 조선사람 네 사람이 다스리는 네 개의 지명이 버젓이 나온다는 게 저들로 보아서는 기가 막히겠지요.

 

문법적으로 보아도 이는 동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조국 - 한반도"라 하면 "나의 조국"과 "한반도"는 동격어입니다. 또한 "고대사학자"인 "나 임승국"하면 "고대사학자"와 "나"는 동격어라는 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사군(四郡)"인 "평주, 날양, 추저, 홰청"이라고 읽을 수 있으므로 이 "四郡"과 계속되는 네 개의 지명을 저는 동격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릅뜬 눈이 뒤집혀질 차례인 뜻 하군요.

 

3. 이젠 [한 四郡]이 아니라 [조선 四郡]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인정하면서 기자조선은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이 四郡이 한 나라 측 통치자가 아니라 전부 조선 사람이 통치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선 대전제로 이 사군의 이름을 저는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 사군]이라고 일단 가정을 해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 무렵에 벌어진 전쟁내용을 훑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전쟁의 상대자는 보통 "적군과 아군"이며 "피, 아"라는 쌍방인데 [한사군 전쟁]이라고 하는 전역(戰役)에는 "피, 아"말고도 "어너더 케이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뭐냐 하면 <고조선족의 세력>입니다. 저는 [위만 정권]과 그 피치자(被治者)인 고조선족의 세력을 분리해서 보는 입장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아시겠지마는 <위만>이라고 하는 자는 기자조선을 뒤엎고 들어선 정권입니다.

 

"위만이 우리 한국 쪽이다. <기자>의 성씨는 한(韓)이다"해서 [한씨조선]으로 말하는 <이병도> 박사의 말씀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국적문제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무튼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며 고조선에 망명해 사기를 쳤어요. <사기>의 내용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한(漢)나라의 병사가 여덟 길로 쳐들어오니까 내가 왕성에 들어가서 성을 지키겠소이다."라고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에게 말했습니다.

 

헌데 야릇한 것이 우리 국사에서는 <기자조선은 부인한다.>고 하면서 이상하게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기준의 잣대를 금방 바꾸어 <기준>의 이름까지 밝혔어요. 즉, 국사교과서를 보면 <기준을 내어 쫓고.......>라고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마지막 왕 <기준>은 인정하면서 <기자조선>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중적 태도는 분명히 또 하나의 "넌센스"입니다. <숭늉을 마시면서 휘파람을 분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모순일 뿐 아니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들어선 <위만정권>이 다스리는 백성들은 전부 다 고조선 사람들이었다는 걸 잊으시면 앞으로 전혀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기자조선>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손자인 <우거>때에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났는데 고조선 사람들이 주동이 돼서 정권을 뒤엎습니다.

바로 이웃집에서 전쟁이 터지고 혁명이 나니까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슬쩍 보냈습니다. 마치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바구니 들고 도둑질이라도 해볼까 하고 뛰어드는 격이에요.

그는 수륙양군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패전만 하고 돌아왔다 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사군의 진상]으로 가는 중요한 <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한 무제가 보낸 수륙양군은 조선 사군(四郡)에 참패하였다.

여기에서 한마디를 먼저 던져 놓고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읽고도 한 무제가 전쟁에 이겨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은 정말 아직도 입만 나불거리면서 <원문을 전혀 안 본 무지의 소치거나> 아니면 그걸 읽고도 은연중에 무시하거나 은근슬쩍 뭉개어 지금까지 추종해오던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얼빠진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무제의 수륙양군이 결국 <조선사군>과의 전쟁에서 "전멸"을 당했는데 어찌 한사군을 설치 할 수 있었겠는가? 아울러 그 "조선사군"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닌 "발해만" 다시 말해 <하북성> 유역이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제발 그놈의 알량한 소설 좀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수륙양군 가운데 <누선장군>이라는 사람입니다. 다락 루(褸)에 배 선(船)자니까 아마도 다락같이 큰 배를 타고 출전한 해군제독이겠지요. 이 사람이 누선(주1)장군 양복(楊僕)인데 오늘날의 해병대사령관쯤 되겠지요. 왜냐 하면 큰 배를 타고 나갔는데 부하들을 전부 물귀신 만드는 것도 모자라 배는 파선되는 바람에 "둔산중십여일(遁山中拾餘日) - 산 속에 10여 일 동안 혼자 몸을 피해 도망 다녔다"라는 기록이 <조선열전>에 보이니까 말입니다. 배를 타고 나간 사람이 "둔산중십여일(遁山中拾餘日)"했으니까 이야말로 해병대사령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튼 이 기록은 수군에 관한 얘기입니다마는 육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다 죽었습니다]

 

1. 한 무제의 군사가 "참패"하여 돌아왔는데 무슨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소설을 쓰는가?

<좌장군>은 육군사령관인데 부하인 졸정 다(卒正 多)라고 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전선에 나가서 패해 가지고 돌아오니까 "너 왜 후퇴했느냐"해서 사형에 처했다는 말이지요. 이밖에도 한나라 측에서 <사기 조선열전> 상에 등장되는 인물이 모두 여섯 사람입니다.

물론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제가 한번 언급해 보겠습니다.

섭하(涉何)는 천자(天子)의 사신(使臣)입니다.

또 지금 말씀드린 졸정 다(卒正 多)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공손수(公孫遂)이며 그 다음에 위산(衛山)인데

이 네 사람(섭하, 졸정 다, 공손수, 위산)은 전부 천자(天子)의 사신(使臣)입니다.

여기에 육군사령관이 순체(荀체)요

해군사령관이 양복(楊僕)입니다.

헌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 여섯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누가 있느냐?

하나도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조리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섭하(涉何)"는 전쟁초기에 전사하였고

"졸정 다(卒正 多)"역시 법에 의해서 참수(斬首)되고

천자의 사신 두 사람과 육군사령관, 공군사령관이 논공행상을 받기 위해 한무제 앞에 섰는데 이들에게 무엇이 내려진 줄 아십니까? 높은 상이나 높은 벼슬이요?

아닙니다. "사형"이 내려졌습니다.

漢나라의 형법에는 사형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이 기시(棄市)라고 하는 것입니다. 폐기한다는 기(棄)에 저자 시(市)자입니다.

즉 시장에 내다버린다는 말이니 글자도 좀 기분이 나쁩니다. 사람을 죽여 사지를 찢어서 장안(長安)의 사대문에다 걸어 놓은 극형이에요. 이들은 극악스런 정말 국사범이 아닌 다음에야 처형할 수 없는 이런 형을 다 받았어요. 전원 사형이었군요.

장수(將帥)나 천자(天子)의 사신할 것 없이 전원 처형이라고 하는 이런 승리도 있습니까?

"관계자 전원처벌 전원처형"이라고 하는 이런 승리도 있습니까?

나는 이제까지 이런 승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평주·날양·추저·홰청"이란 사군(四郡)의 책임자가 된 조선 사람(최, 참, 음, 협)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물론 <사기>는 군(郡)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후(四候)"라고 했어요.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2. 조선이 승리한 즉 <조선 四郡의 승전기록>이다.

<위만>의 조선이 무너지면서 [사군四郡]의 통치자로 등장한 고조선족 네 사람이 소속된 고조선 세력이 승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만조선>이라는 통치기구가 무너지고 그것이 네 개로 갈라지고 통치 주체가 "기자조선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지만 어저께 <김철준> 박사께서는 "사기연표"를 들면서 이렇게 설치된 조선 사람의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고 10년에서 20년 뒤에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통치기간이 길고 짧은 것이 문제되는 게 아니에요. 이 전쟁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바로 조선세력인 네 사람에게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딴 사람은 다 사형됐는데 이 사람들만이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는데 생생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은 그 옛날 기자조선의 땅이고 또 무너진 위만조선의 강역이기 때문입니다.

 

3. 조선 사군의 땅은 발해만 연안, 기자조선 유물도 나와

그런데 이 땅의 위치를 어디라고 <사기연표>는 밝혔는지 아십니까?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부 <발해연안 즉 「뽀하이」만 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치는 곳에 四郡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만주대륙도 아니고 한반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착안하셔야 합니다. <이형구>교수가 79년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지금 이형구 교수는 대만에 가 계신 줄로 압니다만) <기자의 유물들이 중국의 객좌현(喀左縣)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객좌현>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朝鮮人 四郡이 설치된 바로 그 지역이며 옛날에는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 출토물들을 연구하여 석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한반도 이남의 유물로 고조선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누가보아도 어리석은 짓이지요.

기자조선이 있던 곳에서 기자의 유물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인 휴전선 이남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가지고 고조선 역사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판단입니다.

이야말로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어떤 부류의 고고학이 안고 있는 학문적 한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역사적 해석의 확장을 위해서도 남북통일은 빨리 되어야 되겠어요. 그래서 중국 땅에 자유롭게 들어가서 새롭게 발굴되는 유물상을 바탕으로 한 고고학과 한국고대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해야겠습니다.

 

4. <사마천>은 스스로 조선에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을 다 적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태사공 왈"이라는 대목을 적었습니다. 이게 무슨 기록이냐? 하면 한마디로 자기가 적은 역사기록에 대한 "서평"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태사공 왈>에서

“순체쟁로(荀체爭勞) - 순체가 공로를 다투다가”

"여수개주(與遂皆誅) - 공손수(천자의 사신)와 함께 죽임을 당하고"

"양군구욕(兩軍俱辱) -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욕을 당했다"는 말이 전선사령관이 전선에 나가서 뭐 적장에게 뺨이라도 맞았다는 말 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군사술어]인데 "졌다"는 뜻입니다. 자기 측의 기록을 <패敗>라고 적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욕"이라는 말은 <졌다>는 뜻입니다.

"졌다"는 말을 한문(漢文)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패(敗)"나 "항(降)"이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지요.

아까 [삼전도]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인조대왕께서 청 태종한테 곤두칠배하면서 항서(降書)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사서(史書)에서는 이를 뭐라고 적었냐 하면 "성하지맹(城下之盟)"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 아래에 내려가서 맹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맹서했다"는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슨 조약체결이라도 했다는 말 인줄 아십니까? 아니에요. "항복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漢文의 「뉘앙스」입니다. "맹서 한다"는 "맹盟"자나 "강화 한다"는 "화和"자는 모두 항복을 뜻합니다.

[중략]

어쨌든 "맹(盟)"이나 "화(和)"라고 하는 말은 모두 "항복(降伏)" 했다는 말이며 "양군이 구욕(俱辱)"이라 한 이 말도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는 뜻인데 이는 "수륙양군이 모두 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문(漢文)의 "뉘앙스"를 잘 아셔야 합니다.

 

또 "태사공"은 말하기를 "장졸문막후의(將졸問莫侯矣)"라 했습니다. 여기서 "졸"자는 "졸(卒)"로 읽습니다. 즉 "장교나 졸병이나 간에 아무도 후(侯)가 된 자 없다" 따라서 "상 받은 자가 없다"는 얘기예요. <상>은 무슨 <상>입니까? <후>는 또 무슨 <후> 입니까? 모두 사형 당했는데!

그러므로 <사마천>은 스스로 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국회청문회에서 임승국님의 논지 (3)

 

1. 1차 사료인 사마천의 사기 원전에는 [한사군]의 기록이 없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4군이 없습니다. 사학에서는 이런 자료를 1차사료라고 합니다. 1차사료인 목격담 속에 낙랑현도진번임둔이 없는데, 우리는 뭐가 아쉬워서 자꾸 그 이름들을 외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기 다음에 쓰여진 중국정사가 한서(漢書)입니다. 한서는 서기 80년 경에 쓰여졌는데, 한사군 사건으로부터 말하면 200년이 채 안되는 180년 이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그런데 한서는 사기의 조선열전을 복사기로 복사를 해 놓은듯 똑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기 조선열전의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群)'이라는 기록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반고)이 8글자를 가필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서에서부터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8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남대문을 구경한 사람이 서울얘기를 하는 것과 남대문 구경도 못한 사람이 서울 얘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사군 전쟁이 일어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반고(班固)가 적은 한서(漢書)가 정확하겠어요, 아니면 한사군 전쟁이 났을 때 한무제의 신하였던 약관 27세의 사마천이 적은 기록이 정확하겠습니까? 게다가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한사군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기록이 나옵니다.

 

한국사람의 마음 속에는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의례히 진다'라는 패배의식이 한국사관에 의해 알게모르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와서 배운 역사라는 것이 전부 싸움에서 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무제의 육해양군(兩軍)과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으니까, 보나마나 또 졌겠지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에 진 결과로 이긴 자가 설치한 것이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저 김철준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열전(朝鮮列傳) : 사기(史記)

사기(史記)라는 사서는 한무제(漢武帝)의 신하였던 사마천이 쓴 목격기이다.

사기가 완성된 때가 서기전 100년이다. 사마천의 그 때 나이 27살이었다.

약관의 27세 때 한사군 전쟁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 조선열전(朝鮮列傳)이다.

 

한서(漢書) : 중국 정사

한서는 서기 80년 경에 쓰여졌는데, 한사군 사건으로부터 말하면 200년이 채 안 되는 180년 이후에 쓰여진 기록이다. 그런데 한서(漢書)는 史記인 조선열전(朝鮮列傳)을 복사기로 복사를 해 놓은 듯 똑같이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漢四郡에 대한 기록 부문만 다음과 같이 8글자를 가필했다.

 

▶ 조선열전(朝鮮列傳) 과 한서(漢書)의 차이점

漢四郡에 대한 기록

조선열전(朝鮮列傳)

(BC 100년)

'수정조선위사군‘

(遂定朝鮮爲四群)

한서(漢書)

(AD 80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

(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