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빼앗긴 땅은 번조선의 변방이다.

자연정화 2018. 6. 21. 13:44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빼앗긴 땅은 번조선의 변방이다.

 

秦开是中國戰國時代燕国將領,早年在东胡做人质,很受東胡的信任,通曉民情風俗。燕昭王即位後,秦開逃歸燕國。后于前300年大破东胡,迫使東胡北退千余里,又曾渡過遼水進攻箕子朝鮮,直達滿番汗(今朝鲜清川江)為界[1],據有遼寧全境。并开辟辽东,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築燕長城。《史記·匈奴傳》有其事蹟。秦舞阳是秦開之孙。

 

진개에 대한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설명 : 진개가 고조선(동호라 표현)의 땅을 빼앗은 것이 한반도 청천강(한반도 북부)까지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또한 강단사학은 한반도 內라고 주장한다.

 

魏略과 史記 匈奴傳 문구를 대비하면, 魏略은 秦開가 朝鮮의 西方 2천리를 빼앗았고, 滿番汗으로 燕나라와 朝鮮의 경계를 삼았다고 적혀 있는데 반하여 史記 匈奴傳에는 燕나라가 東胡의 땅을 1천여리를 빼앗고, 造陽에서 襄平까지 燕長城을 쌓았다고 적혀 있다. 秦開가 빼앗은 지역이 史記 匈奴傳에 적혀 있는 문구보다 魏略에 적혀 있는 문구가 2배 가까이 더 많은 것으로 적혀 있다. 小數民族 정책에 歷史를 이용하는 중국의 사학자들은 秦開가 東胡(朝鮮)를 침략하여 遼河를 지나 開原을 지나 遼東半島를 지나 鴨綠江을 지나 平安北道 博川江 방면까지 빼앗고 그곳까지 燕長城을 쌓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대부분 이 설에 찬동하고 있다.

 

▶만번한의 위치

만번한 [사기 흉노열전]에서 연나라 때 진개가 동호를 습격하여 깨트리고 조양에서 동쪽으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라고 하였다. 양평에 대해서 [후한서 원소류표열전]의 주석에서는 ‘양평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해있었다. 그 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라고 하였다. 노룡현의 위치는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경내로 연나라가 한반도 북부까지 점령했다는 기존설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연나라의 진개가 점령한 만번한의 위치는 하북성 장가구시(A)와 북경시, 당산시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봐야 한다. 이유립은 만을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으로, 번을 반현이 있던 하북성 회래현으로 비정하였다.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潘汗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연의 침입과 만번한

BCE 300년경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입해와 만번한을 새로운 국경으로 정하였습니다. 사기 위략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의 중국사서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가들은 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리를 빼았았다는 구절을 더하였습니다.

 

만번한은 만현과 번한현을 합친 말로 만현은 지금의 요령성 개주시, 번한현은 그 인근의 해성시입니다. 연나라에게 2천리를 빼앗겨 줄어든 강역의 새 국경이 요동반도 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원 국경은 어디였을까요? 고조선의 위치를 처음 언급한 <산해경>과 <사기>, <전국책>, <설원>, <수경주>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난하가 고조선의 국경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호 1천리 조선 2천리?

진개가 공격한 곳이 각각 동호와 조선, 두 나라가 아니라 조선을 달리 부른 이름에 불과하다 는 사실은 진개의 공격으로 연(燕)나라가 획득한 강역이 같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기』 「흉노열전」은 진개(秦開)가 동호를 1천리 내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해 호(胡)를 막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열전」 한(韓)조의 『위략』은 “연나라가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은 드디어 약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한서(漢書)』 「지리지」‘요동군’조에는 문·번한(文番汗)현이 나오는데, 번한(番汗)은 한자 표기까지 같다는 점에서 이것이 『삼국지』 ‘위략’의 번한현임은 분명합니다. 문(文)현은 만(滿)현의 음을 가지고 표기한 것일 것입니다. 진개 가 동호를 1천리 쫓아냈다는 『사기』 「흉노열전」과 진개가 조선을 2천리 쫓아냈다는『삼국지』 ‘위략’은 같은 사건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동호는 조선입니다. 만약 진개가 북쪽으로 동호를 천 리, 그리고 또 동쪽으로 조선을 2천리 쫓아냈다면 그 두 끝 지점이 같은 요동일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로 활용하는 연나라 진개장군의 진격 .. 그러나

 

지금 학계는 진개의 공격으로 인한 고조선의 영역 후퇴를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진개의 공격으로 평양까지 밀렸단 얘기인데 위와 같이 이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때 2천리(혹은 1천리)를 밀렸으나 곧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이후에 위만이 번조선 마지막 왕 준왕에게 망명을 오게 되는데 그때 연과 고조선의 경계지역의 공터를 할당해서 주게 되는데 그게 상하장이라는 곳이고 난하에 있습니다. 이는 다시 고조선이 영역을 회복했음을 말합니다.

 

 

복기대 논문, "기원전 7~4세기 요서지역의 정치적 변화에 관하여- 진개 동정을 중심으로 -"

 

연나라 진개의 침략 이후의 고조선, 연나라 국경은 한반도 북부 청천강이 아니고 연나라 세력은 요서까지만 들어왔지 지금의 요하 동쪽인 소위 요동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고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로서 밝히고 있다.

 

즉, 복기대 박사는 진개 침략 이전에는 고조선과 연나라가 난하를 경계로 서로 국경을 이루다가 진개 침략 이후에는 난하와 요하 사이의 요서 지역을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뺏기고 대략 요하를 중심으로 새롭게 국경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윤내현 교수께서는 합리적인 사료적 고찰로 연나라 진개에게 영토를 뺐겼지만 고조선이 곧 반격하여 영토를 되찾고 오히려 연나라 영토를 더 빼앗았음을 밝히고 있다.

 

진개 침략 이후 연나라의 상황을 봐도 제나라 격파 및 소위 동호, 고조선 침략을 하는 등 연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소왕이 죽고 난 후 뒤를 이은 혜왕의 연이은 실정으로 연나라는 곧 제나라의 반격을 받아서 대패하는 등 연나라의 짧은 전성기는 급격히 막을 내렸고 이후 연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여 비록 진나라의 통일 직전까지 나라는 유지하였으나 멸망 직전까지 수세적인 위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연나라가 거의 자신들의 기존 영토와 맞먹은 넓이의 거대한 영토를 줄곧 요서 지역에서 유지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즉, 연나라는 진개의 기습 침략으로 빼앗은 고조선의 요서 지역의 영토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조선에 빼앗겼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연이 비록 동호와 조선을 공격하고 그 자리에 오군을 설치하였다고는 하지만 토착민들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원태자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연양식의 질그릇과 토착문화의 질그릇이 공존하는 것을 볼 때 토착문화와 연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요서 지역에는 토착인들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연의 문화가 많이 있는 것은 연이 해당 지역을 점령, 지배해서가 아니라 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온 연을 비롯한 소위 중원 지역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바로 이 지역에 집단적으로 둥지를 틀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비단 이 시기 뿐만 아니라 혼란한 중원 지역을 탈출한 피난민들을 우리 측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착시킨 예들은 사료상으로도 쉽게 확인되고 있다.

그러니 이 시기에도 이런 피난민들을 받아들여서 정착시키는 것이 고조선의 기본 정책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난하를 경계로 이루어진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소위 진개의 기습 침략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변화는 있었지만 다시 곧 예전 상태로 돌아가 여전히 난하를 경계로 계속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