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진한 번한 마한 조선)의 종족구성
고조선(古朝鮮)의 종족구성 - 번조선(番朝鮮)의 실체
▶ 고조선은 연맹국가로서 세 개의 조선, 즉 진한조선(眞韓朝鮮), 번한조선(番韓朝鮮), 마한조선(馬韓朝鮮) 등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삼조선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번조선(番朝鮮)인데 요서지역에 위치하여 북방세력과 중원세력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문화의 점이지대로서의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이 중국역사에서 말하는 바로 그 '조선(朝鮮)'이다.
중국역사서에서 맥족(貊族)보다도 역사에 먼저 등장한 ‘발조선(發朝鮮)’에 대해 살펴보자.
역사상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중국동북지역에 있었던 세력은 '숙신(肅愼)'이다. '숙신'을 종족명칭으로 여긴다면 '숙신'과 연결되는 '조선'도 종족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숙신'을 마치 종족명칭으로 여긴 것은 중국측일 뿐 사실 종족명칭이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이 만주지역에 위치한 연맹체 명칭이듯이 '숙신'도 고대의 특정지역을 대표하는 지역명칭이거나 특정세력을 가리키는 일종의 국가명칭이었을 것이다.
'肅愼', '息愼', '稷愼', '朝鮮' 은 알타이어의 한자화된 동일명칭이란 것이 밝혀졌는데, 시기적으로 표현이 조금씩 변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숙신'에 대한 전거는 『좌전(左傳)』에서부터 비롯되어 현재 송화강유역과 그 이남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대표적인 세력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숙신(肅愼)의 호시, 석노, 강궁 등이 소개되고 있는데, 숙신에 대한 중국고대 역사서의 기록은 조선이 등장함으로써 중국북방에서 더 변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숙신은 조선이라는 명칭이 사라진 이후에도 사실 끈질기게 역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처음에 숙신이 종족명에서 출발하여 조선이라는 일종의 국가명칭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숙신은 한대(漢代)에 들어와 읍루(邑婁)라 칭하였으며,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읍루조(邑婁條)를 근거로 하여 송화강유역과 백두산사이의 분포지에서 흑룡강하류 및 연해주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숙신이 퉁구스족이라고 인식하는데 따른 결론인데, 대표적인 이가 권태원(權兌遠)으로서 왕종한(王鐘翰)의 말을 인용하여 “숙신은 이미 중국의 설화시대인 설화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때부터 중원지역과 관계가 있었고 그 분포권역이 백두산이북, 송눈평원(송화강과 눈강일대의 대평원), 흑룡강하류를 포함한 넓은 지역에 미치고 있었으며, 읍루는 숙신으로부터 래원(來源)하고 초보적 농경생활과 여경(黎耕:소가 끄는 쟁기에 의한 농사법)과 돼지(猪)등 가축을 사양(飼養)하였다”고 하였으며 시대에 따른 이동과정과 종족내의 변화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분명한 것은 숙신이 적어도 기원전 2천년대 중국의 전설적 인물 순(舜)의 시기부터 부여(夫餘)가 성립되기전 기원전 3세기경까지 송화강유역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朝鮮)에 관해서는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위만(衛滿)이 조선을 강탈하는 시대인 B.C.4-3세기때의 한(漢)과의 관계기록으로서 그 이전시기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런데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에 ‘北山戎發息愼’이라는 기록과 『관자(管子)』「규도편(揆度篇)」에 ‘發朝鮮之文皮’라는 기록이 보인다.
오제시대는 전설상의 시대로서 하(夏)나라의 바로 이전시기인데, 이때 북쪽에 ‘山戎’과 ‘發息愼’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발(發)’과 ‘식신(息愼)’을 따로 지칭하는 것으로 대부분 이해하고 있으나, ‘發息愼’, ‘發朝鮮’에서 보여주듯이 연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發’이 혼자 떨어져 사용한 예가 다른 어느 역사서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뒤에 ‘朝鮮’이 뒤따르고 있어 연칭의 사용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朝鮮’은 별도로 호칭되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이는 ‘發朝鮮’이 조선의 일부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기』「오제본기」의 ‘發肅愼’과 『관자』의 ‘發朝鮮’은 분명 개별적 호칭이 아닌 연결된 호칭이다. 여기서 ‘發’과 북방족의 하나인‘毫’를 같은 종족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毫’는 발음이 ‘호’지만 한자식으로는 ‘박’자와 발음이 같다. ‘毫’는 독립명칭이지만 ‘發’은 항상 접두어로 연칭사용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밝’에 대한 한자음으로 ‘白, 百’이후 ‘貊’으로 변한 과정을 앞에서 보았다.
즉 ‘貊’이 등장하는 것과 달리 ‘毫’가 별도로 나오고 있음을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갑골문에서 ‘毫’자는 ‘高’로 반혈거를 뜻하는 상형문자이다. 이것이 후에 ‘高’로 정착되고 『삼국지(三國志)』『위략(魏略)』에서 전하는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관련된 ‘색리국(索離國)’,‘고리국(藁離國)’으로 연결된다. ‘毫’자는 상형문자로 표기된 알타이어계통의 ‘밝’자인데, 단순히 음차만 빌린 ‘發’자와는 그 기원이 다르다. ‘毫’는 원래 낙(手+各)의 혈거지역 중에서 높은 건축물이 있는 지방을 뜻하므로 중심지역을 의미한다. ‘毫’에는 ‘北毫’, ‘殷毫’등 여러 곳이 있다. 이는 ‘毫’이 중심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북방알타이어계에서 일반화된 보통명사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毫’은 ‘博’과도 같고 ‘番’,‘蕃’과도 연결되어 진다.
‘發’은 『관자』「경중편(輕重篇)」에 환공이 서이(西夷)가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자 관자가 ‘發朝鮮’에 대해서는 文皮 즉 표범(豹) 가죽을 비싼 값에 사주어 교역을 통해 래조(來朝)하게 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하고 있다. 표범(豹)은 중국동북지역 삼림지대에 서식하는 동물로서 자연환경을 고려해 보면 삼림지대는 요동지역과 대흥안령산맥 동북지방, 요서남부지방 일대에서 서식하고 있는 셈이다. 아뭏든 ‘發朝鮮’이 연칭되는 현상은 후에 ‘진번조선(眞番朝鮮)’이 등장하면서 문헌에서 사라진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는 현토군에 대한 응소의 주(註)에서 “眞番故朝鮮胡國”이라 하였는데 ‘眞番’이 연칭되고 있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는 요동군(遼東郡)에 있는 번한현(番汗縣)에 대해 ‘汗音寒’이라 하였는데, ‘汗’은 ‘韓’과 같은 알타이어계의 군장을 뜻하는 호칭으로서 『삼국지』이후의 ‘三韓’인 ‘眞韓’, ‘馬韓’, ‘弁韓’도 같은 예이다.
‘요동(遼東)’이란 말에 대해서도, ‘遼河의 동쪽’이란 개념은 ‘遼水’라는 강이름이 생기고 난 이후이고 그 이전에는 ‘멀 遼’자의 개념으로 먼 동쪽 변경이라는 뜻의 ‘遼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요수라는 강의 이름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중원의 동북쪽 변경지방을 의미하는 극동(極東)의 의미로 ‘요동(遼東)’이란 지명이 먼저 생겼다는 것인데, 요서군이 설치되면서 요동군이 요하의 동쪽지역이란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요동(遼東)이 발해북안지대를 가리키고 예전에는 요수(遼水)가 난하((水+欒)河))를 지칭한다는 설을 따르면 번한현(番汗縣)은 현재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번한(番汗)’에 대한 또다른 기록으로 『삼국지(三國志)』에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로 인해 고조선이 서방 2천여리를 탈취당하고 경계로 삼았다는 ‘滿藩汗’이 있다.
‘滿蕃汗’은 기원전 3세기초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결과물인데 ‘藩汗’에 ‘滿’자가 붙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삼국지(三國志)』는 진(晋)의 진수(陳壽)가 저술한 것으로 저자는 연(燕)의 위만이 고조선 서방에 위치한 번한(藩汗)이란 군장자리를 찬탈한 사실을 이미 3세기전의 역사적 사실(史實)로 인식하고 서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衛滿의 藩汗’에 대한 표현을 ‘滿藩汗’이라 한 것이다. 이는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한 진수가 참고로 하였을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나 한(漢)의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에서도 이미 ‘衛滿’을 ‘滿’으로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番韓’과 ‘發朝鮮’,‘番朝鮮’등은 극히 당연한 그 지역의 세력집단에 대한 호칭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경(詩經)』한혁편(韓奕篇)에는, 서주(西周) 왕실을 방문한 한후(韓侯)를 칭송한 노래가 실려있다.
- 커다란 저 韓의 城은 燕國의 군사들이 완성시킨 것, 선조들이 받으신 天命을 따라 百蠻을 다스리신다. 周王은 韓侯에게 追族과 貊族까지 내려주셨다. 北쪽의 나라들을 모두 다 맡아 그 곳의 覇者가 되었다. 城을 쌓고 해자를 파며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 예물로 비휴가죽과 赤豹가죽, 黃熊가죽을 바치었도다. -
이 시에 보이는 한후가 추족과 맥족을 다스린 북방의 패자라는 것은 ‘韓’이 종족명이 아닌 지역명이면서 동시에 대군장의 호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농토를 정리하고 비휴나 붉은 표범, 황색곰 등의 짐승가죽을 예물로 바쳤다는 것은 농경과 함께 수렵도 상당부분 이루어졌던 지역을 뜻하는 말이므로 현재의 요서지역과 요동지역을 포함한 요녕지역을 일컫는다. 이 韓이 통치한 추족과 맥족 중 추족에 대해서는 ‘追’가 ‘畏’와 음이 같고 ‘濊’와 연결된다는 해석이 있는데, ‘濊’가 『사기』이후에 등장하므로 그 이전에는 ‘夷’나 ‘追’로 전음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주대(西周代)에 예맥족을 거느린 韓은 요동지역과 요서지역을 대표하여 서주왕실과 친교를 맺은 비파형동검기 고조선의 군장을 칭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황을 설명해 주는 내용으로, 동한(東漢=後漢)시대 왕부(왕부)의 『잠부론(潛夫論)』을 보면,
- 옛날 周의 宣王때에 또한 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燕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詩經』에서 말하기를 ‘커다란 저 韓의 城은 燕의 군사가 완성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韓의 서쪽에서도 또한 姓을 韓이라 하였는데 衛滿에게 攻伐당한 바 되어 海中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韓’은 둘이다. 하나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서주왕실과 친교를 맺은 한(韓)이고, 또 하나는 그 서쪽에 있으면서 위만에게 공벌당하여 바다로 이주한 한(韓)이다.
위만에게 공벌당한 韓은 ‘準’을 가리킨다. 준(準)은 은(殷)나라 기자(箕子)의 후손으로서 성이 자씨(子氏)인데 여기서 성을 韓이라 한 것은 맞지 않는다. 이는 韓이 군장을 뜻하는 호칭임을 왕부(王符)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하여간 韓이 둘씩이나 등장하는 것은 요서지역과 요동지역에 각각 대군장이 별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의 예족과 요서의 맥족을 통할하는 요동지역의 韓이 서주왕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서주를 방문하였던 기사가 바로 『시경(詩經)』의 내용이다. 한편 『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예조(濊條)에 보면,
- 衛滿에게 공벌당한 準은 箕子의 40여세 후손으로 자칭 王이라 하였다가, 衛滿에게 공탈된 후 左右宮人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韓의 땅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하고 그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도 韓人 가운데는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다. -
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고조선지역에 와서 그 40여세 후손인 준(準)이 자칭 왕이 되었다는 것은 『잠부론(潛夫論)』에서의 ‘한(韓)’이 된 것이다. 준(準)의 부친은 ‘부(否)’로 나와 있는데, 진(秦)의 몽염을 시켜 장성(長成)을 구축하여 당시 그것이 요동에까지 뻗쳐 있었고 그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하여 진(秦)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나 즐겨 조회(朝會)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秦國이 천하를 통일한 후 東으로 浿水를 건너 朝鮮을 滅하였다.”는 『염철론(鹽鐵論)』의 기록과도 사건전개상 일치한다. 부(否)의 아들 준(準)이 도망한 바다속의 한(韓)은 바로 한반도 서남부 충청남도일대의 마한(馬韓) 지역이었다. 한반도 서남지역에서 한국식청동검이라 하는 세형동검과 함께 요녕지역에서 유행하였던 청동기유물들이 갑자기 출현하는 양상은 이러한 문헌상의 기록과 합치된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한반도 서남부지방 충남일대는 기원전 3세기대에 급작스럽게 등장한 요녕지역과 연계된 청동의기류들은 준왕이 해중으로 도망하여 정착한 또 다른 한(韓)의 지역이고 이는 곧 마한(馬韓)으로서 『삼국지(三國志)』의 준(準)이 한왕(韓王)이 되었다는 구절의 주석에 보면,
- 그 아들과 親族으로서 衛滿朝鮮에 눌러 있는 사람들은 이어 姓을 韓氏라고 하였다. 準이 海中에서 王으로 있으면서 朝鮮과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이 이를 입증해 준다. 준왕은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을 정도의 격지로 이동해 간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위지(魏志)』를 인용하여,
- 魏(衛)滿이 朝鮮을 공격하니 朝鮮王 準이 左右宮人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南쪽 韓地에 이르러 開國하고 馬韓이라 불렀다. -
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준왕이 이주한 곳이 마한지(馬韓地)였다면 마한의 중심지역은 어디였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마한조(馬韓條)」에서 저자 일연(一然)은 “마한이 고구려, 진한이 신라”였다는 최치원의 설을 소개하고 주석하기를 고구려가 마한을 병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하였고 고구려땅에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는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태종춘추공조에서 “唐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대를 浿江(대동강)에서 격파하고 馬邑山을 빼앗아 兵營으로 삼고 마침내 平壤城을 포위했다”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평양지역에 마한이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양이 있는 대동강유역은 기원전 9~7세기경에 각형토기(角形土器)를 중심으로 하는 무문토기(無文土器) 문화권이었다. 평양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여지는 고식(古式)의 다뉴조문경(多紐粗文鏡)은 성천군(成川郡)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여지는 고식의 것과 함께 다뉴조문경의 거친 번개무늬 문양과 삼각문경(三角文鏡)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거친 번개무늬 문양이 시문되어 있어 오랜기간 이 지역에서 요녕식 청동문화권역을 이루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는데 문헌기록상으로 본다면 현 대동강유역에 마한의 중심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충남 부여 송국리 석관묘유적을 비롯하여 전남일대의 지석묘군은 비파형동검문화를 이룬 집단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에 다뉴조문경이 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고 청동검(靑銅劍) 또한 실전용(實戰用)이라기 보다는 의기화(儀器化)된 형태를 띠고 있어 대동강유역의 요녕식동검문화의 영향으로 전개된 문화권역으로 생각될뿐 비파형동검기의 마한의 중심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毫’,‘發’,‘番’등은 종족명칭이 아니고 지역명칭이며 ‘貊’은 종족명칭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貊族의 番朝鮮’이 성립되는 것이다. ‘發朝鮮’이 연칭되다가 한(漢)나라때 진번군(眞番郡)이 설치되면서 ‘진번조선(眞番朝鮮)’이 등장하는 것은 ‘發朝鮮’인 ‘番朝鮮’과 함께 ‘眞朝鮮’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는 요서지역의 요동군 번한현에 있었던 한(韓)과 함께 요동지역에 또 다른 한(韓)인 ‘진한(眞韓)’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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