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기자조선(箕子朝鮮)

자연정화 2018. 7. 6. 06:11

기자조선(箕子朝鮮)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군조선에 이어 서기전 1100년경에 건국한 초기국가. 한국 고대사회의 기원을 이루는 고조선의 하나로서, 서기전 195년위만(衛滿)에게 멸망될 때까지 900여 년 간 존속.

 

명칭 유래

기자조선의 명칭이 ‘기자(箕子)’라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과 ‘조선(朝鮮)’이라는 한국 역사상의 지역이 복합됨으로써 이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즉,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인『죽서기년(竹書紀年)』·『상서(尙書)』·『논어(論語)』등에는 기자가 은(殷)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인『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등에서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의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는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기자와 조선이 연결되었다.

 

따라서 기자동래(箕子東來)의 사실은 부인되거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기록인『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조선과 구분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으며,『제왕운기』에서는 후조선(後朝鮮)으로 표현해 기자에 대한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한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

 

기자조선에 관한 연구 동향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기자와 기자조선은 별개의 존재로서 근대 이후의 역사 연구에서는 재고(再考)의 대상이 되었다. 기자는 은나라 말기의 현인으로서 실재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기자와 결합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실체는 새롭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의 교통 사정, 군신간의 의리, 범금팔조(犯禁八條)의 성격, 그리고 기자릉의 허위성 등을 통해 기자동래설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또 이른바 기자조선의 대두를 토착 사회 내에서의 세력 교체로 보고, 춘추(春秋)에서 전국(戰國)으로 연결되는 시기에 한반도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한편 기자의 동래는 부인하나 기자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기자족(箕子族)의 평양 지역 이동설이 제기되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동이족(東夷族)의 일파인 기자족은 산서성(山西省) 태곡현(太谷縣) 일대에서 기국(箕國)을 세워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존재했는데 은(殷)·주(周) 교체, 춘추전국 같은 중국에서의 정치적 격동으로 말미암아 난하(灤河) 하류 지역으로 이동해 기자조선을 세웠고, 다시 요서(遼西)·요동(遼東)을 경유해 평양 지역으로 파상적인 이동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기자조선은 중국사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소국인 기자국일 뿐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으로서 기자가 봉해진 기국은 하남성(河南省) 적구현(適丘縣) 지역으로 은·주 교체기에 난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했고, 진나라 통일 이후 난하 중·하류 동부 연안으로 다시 이동해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고 보았다. 이 기자국을 위만이 멸망시킨 것으로 파악해 한국사의 인식 대상인 고조선과 무관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1973년 중국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북동촌(北洞村)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기후(㠱侯)’ 명문을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객좌의 ‘기후’명 청동기는 기자 집단의 이주 내지 건국과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서주(西周) 초기 북경 일대에 위치한 연국(燕國)이 객좌지역에 단기간 진출하였다가 남긴 연국 청동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조선은 자료의 해석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과 같은 정치적 사회의 재구성에는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료와 인류학 이론을 이용함으로써 합리적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인 카라스크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서기전 13세기경에 시작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성격은 무늬없는토기〔無文土器〕·고인돌·돌널무덤〔石棺墓〕, 그리고 비파형동검·세형동검·청동거울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비파형동검 등 청동 유물의 성격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기원 및 분포 지역과 관련해 주목되는 유물이다.

 

즉,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대릉하(大凌河) 중심의 요령(遼寧) 지방으로부터 한반도일대에 걸쳐 분포해, 선주민의 신석기 문화뿐만 아니라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도 이질성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주체인 주민 구성의 성격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양식 생산 단계로 진입한 예맥족(濊貊族)이 선주민인 양식 채집 단계의 고아시아족을 흡수, 동화함으로써 나타난 주민과 문화의 교체 결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서기전 7∼6세기를 전후해 시작된 철기문화는 위만조선이 건국되던 서기전 2세기경에는 다양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가 확대, 보급되어 전쟁수행 능력과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이것으로 보면 문헌 자료상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서기전 12∼2세기의 기간은 바로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계기적 발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주체는 양식 생산 단계에 있던 예맥족이었다.

 

따라서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설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이 기간 동안의 문화 복합체는 주민 구성에 따라 예맥조선(濊貊朝鮮)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정치 발전 단계상의 위치는 왕(王)·대부(大夫)·박사(博士) 같은 정치 조직과 범금팔조(犯禁八條) 같은 관습법의 존재로 볼 때 초기국가(初期國家, pristine state)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자조선(예맥조선)의 문화가 비파형동검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문화라는 사실은 대체로 공감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의 기원지 문제에 대해서는 요동설, 요서설 등으로 나뉘어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비파형동검의 기원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지역 북부와 남부 러시아의 일원에서 전개되었던 훼도롭(Fedrov) 문화(종래 안드로노보 문화)의 파인형(波刃形) 청동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한 새로운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자조선(예맥조선)의 문화 성격에 대해 기존 농경문화의 기반 위에 비파형동검과 함께 유입된 유목문화가 동화된 반농반목(半農半牧)적 사회 단계라고 보는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 (김정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0)

남북 학자들이 함께 쓴 단군과 고조선 연구 (단군학회 편, 지식산업사, 2005)

고조선사연구 (이종욱, 일조각, 1991)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김정배, 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한국고대사신론 (윤내현, 일지사, 1986)

고조선 (유 · 엠 · 부찐, 국사편찬위원회 역, 1986)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김정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고조선연구 (이지린, 1963)

「기자 관련 상주청동기 명문과 기자동래설」 ( 박대재 ,『선사와 고대』32,2010)

「한국 근현대 기자조선 인식의 변천」 ( 박준형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편-』,학연문화사,2009)

「대릉하유역의 은말주초 청동기문화와 기자 및 기자조선」 ( 이형구 ,『한국상고사학보』5,1991)

「기자고」 ( 천관우 ,『동방학지』15,1974)

「고조선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해」 ( 김석형 ,『고조선에 관한 토론논문집』,1963)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자에 관한 전승은 단편적이나마 중국의 선진시대(先秦時代) 여러 문헌에 보이고 있다.

 

≪죽서기년≫에는 기자가 은나라의 마지막왕인 제신(帝辛)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며, 은나라의 멸망 후 주나라 무왕(武王) 16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朝覲)했다고 전한다.

 

≪상서 尙書≫에서도 주왕에게 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기자가 무왕에 의해 풀려났으며,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한 뒤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하면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논어≫에서는, 기자는 은나라 말기 미자(微子)·비간(比干)과 더불어 3인의 현인 중 한 사람으로 폭군 주왕의 무도를 간언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척하며 종[奴]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선진시대의 문헌기록에서는 기자가 덕과 학문이 뛰어나고 어진 이로 기술되어 있을 뿐, 그가 조선땅으로 가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 중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 尙書大典≫이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왕 13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을 왔고, 이 때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을 물었다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송미자 세가(宋微子世家)에서도 기자를 제신의 친척이라고 하며, 비슷한 전승을 기술하였다. 단지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먼저 조선에 나라를 세우고 뒤에 봉함을 받았다고 한 데 비해, ≪사기≫에서는 그가 봉함을 받은 뒤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다.

 

이는 뒷날 기자에 대한 인식에서 논점이 되었다. ≪회남자 淮南子≫와 ≪대대례기 大戴禮記≫에서는 단지 기자가 미친척하며 몸을 숨겼다고 기술하였다. 이어 후한(後漢) 때의 ≪한서 漢書≫ 지리지에서는 낙랑지역의 민속을 기자와 연결시켜서술하였다. 즉, 조선의 순후한 풍습은 기자가 팔조금법(八條禁法)으로써 교화시킨 결과라고 단정하였다.

 

 

3세기의 ≪위략 魏略≫과 그것을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기자 이후 자손이 40여 대에 걸쳐 조선을 다스렸으며, 여러 차례 연나라와 충돌했고, 마침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씨의 조선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마지막왕인 준(準)이 위만에게 패배하자 바다로 도망가 한(韓) 땅에 건너가서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자처했는데, 그 뒤 준왕의 자손이 끊어졌으나 한인(韓人)들 중에 그를 제사지내는 이가 당시에도 있었다고 하였다.

 

≪위략≫과 ≪삼국지≫의 기록은 기자전설과 고조선의 역사 변천에 관한 전승이 어우러져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기본적인 뼈대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韓)과 기자조선과의 계승관계에 대한 전승을 기술하여, 뒷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의 논거를 제시하였다. 그 뒤 기자와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상서대전≫ 이후 ≪삼국지≫에 이르는 이상의 전승에 기본토대를 두고 윤색을 더해갔다.

 

기자에 대한 인식의 변천

삼국시대에 고구려에서 기자를 제사지냈음은 ≪구당서 舊唐書≫ 고려전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에 음사(淫祀)가 많아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과 더불어 기자신을 섬긴다고 하였다. 다만, 당시 기자에 대한 숭배가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기에는 기자가 별로 크게 중시되었던 것 같지 않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뛰어난 한문학자였던 최치원(崔致遠)도 기자가 동으로 와서 교화를 베풀었음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에 그쳐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기자조선이라는 실체의 한 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점차 기자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다. 이것은 관료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주도적인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동방 유교문화의 시원으로서 기자에 대한 숭앙심이 높아지게 되었던 결과였다. 1102년(숙종 7)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졌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1178년(명종 8)에는 기자묘에 유향전(油香田) 50결이 배당되었다.

 

이와 같이 기자동래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또 기자묘까지 설정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교화를 이 땅에 처음 행한 성현으로서의 기자 개인에 대한 숭앙이었을 뿐, 기자조선이라는 한 역사시대를 상정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고려 중기까지도 조선·기자·단군 등에 대한 인식은 있었지만, 이를 삼국의 역사와 연결시켜 고조선을 기원으로 하는 일원적인 상고사 인식체계가 확실히 정립되지는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30여 년의 몽고 항쟁을 거친 뒤, 몽고지배기 초에 저술된 ≪삼국유사≫·≪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원으로 제시했고, 단군에 이어 기자를 서술하였다.

특히, ≪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을,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나란히 노래하였다. 곧, 천손(天孫)인 단군은 민족적 독자성과 유구성의 표상이었으며,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을 교시해준 기자는 문명화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는 대몽항쟁기에 고양된 민족의식과 원나라에 복속되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정치현실이 교차되는 중에서, 궁극적으로 유교문명에 의거해 내일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이승휴(李承休)의 상고사 인식체계는 그 뒤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려 후기 주자학이 수용됨에 따라 동방 유교문화의 시원으로서 기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1325년(충숙왕 12) 평양에 기자사당을 세웠고, 1356년(공민왕 5)에 이를 중수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동향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나아가 고려 말에 안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고, 밖으로 원나라의 지배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하는 중에서, 단군과 기자 및 그로 상징되는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심화되었다.

신흥세력에 의해 개창된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이라 한 것도 그러한 인식의 소산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에서 국호 제정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로서의 처지를 천명하였다.

 

조선 초기 기자에 대한 숭앙심의 기저를 이룬 것은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자의 교화 사실은 조선이 중국에 못지 않게 일찍 문명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기자가 무왕에게 교시했다는 홍범과 고조선의 팔조금법을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이는 곧 유교이념에 입각해 조선사회를 재편성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현실적인 의식방향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 무왕에 의해 기자가 조선에 봉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역사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오랜 문명국인 소중화로서의 조선의 위치를 자긍함이었다.

 

이 시기 기자의 숭배현상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단군에 대한 인식의 고양이었다. 기자가 중시되면서 기자보다 앞서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단군의 위치 또한 상승시켜 인식하게 되었다. 왕조 초기 기자사당에 배향되었던 단군이 1425년(세종 7)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졌다.

 

나아가 국가의 제사에서 기자의 신위가 ‘조선후(朝鮮侯)’에서 ‘후조선시조’로 격상됨에 따라, 단군도 1430년 ‘조선후 단군’에서 ‘조선단군’으로, 그리고 1456년 ‘조선시조단군’으로 격상되었다.

 

1403년에 편찬된 ≪동국사략 東國史略≫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체계가 확고히 정립되었다.

 

기자숭배는 16세기 이후 재야 사림(士林) 사이에 널리 퍼졌다. 특히, 기자가 시·서·예·악 등을 가르쳐 중국의 문물과 삼강오륜을 알게 했고, 팔조금법으로 교화해 신의와 예절을 숭상하게 했다.

 

또한, 전쟁을 배격하고 덕으로 다스려 이웃나라와 화평하게 했다는 등 인현(仁賢)의 교화를 중시, 강조하였다. 이것은 기자의 동래 자체에서 더 나아가, 조선에서의 그의 치적을 강조한 것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두수(尹斗壽)의 ≪기자지≫, 이이(李珥)의 ≪기자실기 箕子實記≫, 한백겸(韓百謙)의 ≪기자유제설 箕子遺制說≫, 서명응(徐命膺)의 ≪기자외기 箕子外紀≫, 이가환(李家煥)의 ≪기전고 箕田攷≫ 등은 기자에 대한 인식의 심화에 따른 대표적 저술이다.

 

성리학이 발달하고 도학정치의 이상이 추구되며, 사림이 정치를 주도함에 따라 절의·인현의 인물이며 왕도정치를 구현한 성현으로서 기자에 대한 숭앙심은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기자조선의 정통성이 강조되었다.

 

17, 18세기 주자학자들의 삼한정통론도 그러한 입론에서이다. 나아가 종래까지 인정되지 않던 국내자료인 ≪한씨보 韓氏譜≫·≪기씨보 奇氏譜≫·≪기자통기 箕子通紀≫ 등을 이용해 기자세가(箕子世家)라고 하는 41대로 이어지는 기자조선의 왕계와 정전제(井田制)를 위시한 기자의 치적을 제시하였다. 이제 혈통적으로도 조선인과 기자를 연결시켰다.

 

개항 이후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상당기간 재래의 강목체(綱目體) 역사서의 삼한정통론적 처지가 지속되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기자를 중흥의 군주로 강조하였다.

단,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자가 무왕의 봉함을 받은 것을 부정하고, 백성들이 추대했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유교 중심의 문화의식에서 아직 이탈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민족주의 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하에서 중국문화 자체도 후진적인 것에 불과한 상황에서, 기자의 동래 자체를 부인하는 단계로 나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부정과 재검토가 시도되었다.

 

초기에는 기존 사료를 재해석하는 사론적(史論的)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점차 실증적인 연구로 진전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상고사 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기자조선의 실재성에 관한 논의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견해는 먼저 상황론적인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즉, ①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시기는 황하 유역과 고조선 사이에는 황량하고 광대한 지역이 가로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어 기자가 쉽게 왕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② 조선에는 당시 토착정치세력이 있었는데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기자가 이를 복속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점, ③ 주나라는 그 무렵 황하 유역에 한정되었으므로 조선땅에 기자를 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등이다.

 

다음은 문헌기록상으로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① 기자의 동래 기록은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에서 보이고,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점, ② 기자의 무덤이 오늘날의 허난성과 산둥성의 경계지역인 멍현(蒙縣) 또는 보청(薄城) 혹은 구이더부 상추현(歸德府商邱縣) 등지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점, ③ 은나라가 멸망 뒤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을 전수했다면, 기자는 황하유역에 있었던 것이 되고, 따라서 기자동래설과는 모순이 생기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부정하는 견해는 동북아시아지역과 황하 유역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문화양상이 다르며, 양자간에 깊은 교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즉, 기자의 동래에 따라 왕조 내지 지배세력의 교체가 있었다면, 고조선의 문화에 은나라·주나라 계통의 청동기문화의 유입흔적이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않으며, 기자동래설은 허구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부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기자동래설은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기술할 때, 이를 중국전설상 인물의 후예로 간주하는 중화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또, 주변 민족은 모화의식(慕華意識)에서 이를 받아들여 자기들의 시조를 수식했다고 보았다.

 

이런 부정론은 평양에 있던 기자묘가 후세에 만든 가공의 것이고, 기자의 치적이라는 평양의 정전터가 실제로는 고구려시대 수도의 도시계획의 흔적이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강되었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설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기자동래설이 발생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 발생과정을 통해 한국고대사의 일면이 이해될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거론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몇몇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동래설의 발생을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는 관념적인 추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천문 기록에서 볼 때, 요동 고조선 방향이 기성(箕星)의 방위와 일치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 중국인은 고조선과 기성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이 점과 중국인의 중화의식이 결부되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전설이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다음으로 위만집단의 이주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의 국명이 음운상으로 기자와 비슷한 소리가 나는데, 여기서 기자동래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최남선(崔南善)은 기자조선을 ‘ᄀᆡᄋᆞ지조선’이라고 하였다. ‘ᄀᆡ’는 태양, ‘ᄋᆞ지’는 자손의 뜻으로서, ‘ᄀᆡᄋᆞ지조선’은 태양숭배를 하던 유력씨족이 지배하던 시기였다고 풀이하였다. ‘ᄀᆡ’의 음이 ‘기(箕)’와 비슷해 중국인이 이를 기자에 끌어붙여 기자동래설을 낳게 했다는 주장이다.

 

정인보(鄭寅普)는 ‘기(箕)’는 ‘검’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며, ‘검’은 임금의 뜻이니, 기자조선을 ‘검조선’이라 하였다. 안재홍(安在鴻)은 고대에 수장(首長)의 칭호가 ‘크치’였고, 기자조선은 ‘크치조선’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기자의 음운을 검토해 제기한 설이나, 우리 나라와 중국의 고대음운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한편, 이병도(李丙燾)는 기자조선을 ‘한씨조선(韓氏朝鮮)’으로 바꿔 이해하였다. 이는 ≪위략≫에서 기자의 후손이라는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한지역(韓地域)으로 가 한왕이라 칭했다.

 

또한, 조선에 남아 있던 준왕의 친족들이 그로 인해 한씨성을 칭했다는 기록과, 후한시대 왕부(王符)의 ≪잠부론 潛夫論≫에서 준왕을 지칭해 성을 ‘한’이라 했다는 기록에 의거한 견해이다. 즉, 준왕은 기준(箕準)이 아니라 ‘한준(韓準)’이니, 기자동래설은 부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도 문제는 있다. 왜냐하면, ‘한’은 ‘한(汗)’·‘간(干)’·‘가(加)’ 등으로 표기되는 족장·군장·왕의 뜻이며, 족장 또는 왕을 뜻하는 ‘한’을 중국인이 그들 사회의 관행에 따라 성(姓)으로 잘못 이해해 기술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낙랑지역의 세력가인 한씨 집안에서 가계를 과시하기 위해 기자를 끌어붙여 자신들의 시조로 삼았고, 이를 중국인들이 사실로 기술해 기자동래설이 파생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왜 하필이면 기자를 시조로 삼았겠느냐고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대체로 20세기초 이래로 기자동래설은 부정되어왔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다시 제기되었다. 이는 몇 가지 점에 기본적인 입론의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 기자동래설에서의 기자는 자연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족속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기집해 史記集解≫에 의하면 ‘기(箕)’를 국명으로 보고 ‘자(子)’를 작위로 풀이한 견해는 일찍이 후한 사람 마융(馬融)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선진의 문헌에서 기국(箕國)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한국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론에 입각해 고찰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나는 동이(東夷)나 보다 구체적으로 한(韓)·맥(貊)·예(濊)의 존재에 주목하게 되고, 그들 종족집단들이 동으로 이동해왔을 경우를 상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비록 이동론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중국 고대문헌에 보이는 한·예·맥 및 동이족에 관한 기록에 주목한 바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전후삼한고 前後三韓攷≫에서 조선족이 요하강 유역일대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했음을 논술하였다. 김상기(金庠基)는 이를 북중국방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이동상을 개진하였다.

 

그는 동이족이 상고시대에 중국의 북변에서 동으로 이동해, 한 줄기는 중국 산둥반도 방면(島夷·萊夷·淮夷·徐戎 등)으로 내려가고, 한 줄기는 다시 동으로 나와 만주와 한반도일대(韓·貊·濊 등)에 분포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동론에 입각할 때, 기자집단도 초기에는 화북지방에 있다가 점차 동으로 조선 방면에 이동해왔을 수 있고, 그에 따라 기자동래설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성립될 수 있다.

 

셋째, 구체적으로 ‘기후(箕侯)’·‘기(箕)’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은나라·주나라시대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고, 갑골문에서 기후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다.

 

요녕식 비파형 동검. 중국 요서·요동지방과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청동무기로 고조선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특히, 1951년 산둥성(山東省)황현(黃縣) 난푸촌(南埠村)에서 8점의 ‘기기(기器)주 03)’가, 1969년 산둥성 옌타이시(烟臺市)교외에서 ‘기후정(기侯鼎)’이, 그리고 1973년 요령성 객좌현(喀左縣)에서는 기후의 명문이 있는 방정(方鼎) 등이 출토되었다.

 

이동론의 시각에서 기자동래설을 긍정한 설로서는, 먼저 천관우(千寬宇)의 견해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자족을 동이족 안에 있었던 하나의 씨족단위로 보고, 이들이 산시성 타이구현(山西省太谷縣)일대를 시발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타이구현일대에서 기국을 세우고 있던 기자족이 은나라 말기에 제후국이 되었다가, 새로 일어난 주나라의 압박을 받아 그 주력이 동으로 이동해 허베이성 롼허강(灤河江) 하류지역에 도착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자조선이라는 것이다. 그 뒤 기자족은 다시 이동해 요서와 요동을 거쳐 평양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시대를 인정해 이를 청동기시대의 개막과 일치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롼허강 유역에서 출토된 청동기(箕侯方鼎)가 명백히 은나라 및 주나라 계통의 것으로서,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와는 계통을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동지방이나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에 황하 유역 청동기문화의 영향은 약하고, 그것도 보다 시대가 내려와서야 나타난다는 점이 지적된다.

 

중국 랴오닝성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다뉴뇌문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조선 문화의 표지유물 중 하나로 꼽힌다.

 

한편, 윤내현(尹乃鉉)은 기자집단의 동쪽으로의 이동은 긍정했으나, 기자조선시대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즉,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인 ‘다자(多子)’출신의 제후로서, 성은 ‘자(子)’였다. 은나라의 피복속민집단인 기족을 통치하기 위해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 불렸다.

 

즉, 기자는 기족을 통치하는 이가 띠었던 작위의 명칭으로서 ‘기후’·‘기공(箕公)’·‘기백(箕伯)’ 등으로도 불리었다. 기자가 봉했졌던 기국(箕國)은 지금의 허난성 상추현 부근으로 여겨진다.

 

은나라의 멸망 후 기국의 통치권과 지위를 상실한 기자는 일족과 함께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허베이성 옌산(河北省燕山)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 뒤 기자국은 롼허강 동부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는데, 서기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패해 롼허강 서쪽 땅을 상실하였다. 롼허강 서쪽을 빼앗김으로써 기자국은 롼허강 동부지역에서 요령성 서남부에 걸치는 조선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중국인들은 기자국의 통치자를 ‘조선후 기자’로 부르게 되었다. 즉, ‘조선국의 제후인 기자’ 또는 ‘조선에 있는 제후인 기자’라는 뜻이다.

 

서기전 195년 위만이 롼허를 넘어 기자국에 망명오자,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그를 신임했다가 오히려 위만집단에게 축출당하게 되어 기자국은 망하였다.

 

이상의 논리에 의해, 기자국은 어디까지나 당시 중국의 변방에 있었던 소국이었을 뿐이고, 말기에 고조선의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고조선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은 되지 못했으므로,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시대를 설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貝水)의 위치가 롼허강이었고, 고조선의 중심지역은 시종 요하강 지역 일대였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많은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로서, 적어도 고조선의 마지막 중심지는 평양이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과 상충되는 바이다.

 

이상 현재까지 논의된 견해들을 볼 때, 대체로 기자 또는 기자집단의 동래에 따른 한국사에서의 한 역사시대로서의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위만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고조선의 실체가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될 때 한국고대사에 있어 기자동래설 및 기자조선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확실히 될 수 있겠다.

 

그와 함께 기자동래설이나 기자조선이 역사적 사실로서는 부정되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사실로 믿어왔다는 점은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이다. 한국사학사(韓國史學史) 및 정신사에서 기자동래설이 지녔던 의의와 실상은 마땅히 중시되어야 하고, 앞으로 계속 연구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記)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

기자지(箕子志)

기자실기(箕子實記)

해동역사(海東繹史)

기자유제설(箕子遺制說)

기자외기(箕子外紀)

기전고(箕田考)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尙書)

시경(詩經)

논어(論語)

사기(史記)

상서대전(尙書大典)

회남자(淮南子)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은허서계전편(殷虛書契前篇)

소둔은허문자갑편(小屯殷虛文字甲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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