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商나라 문화가 중국이 아닌 한국에 남아 있는 이유는?

자연정화 2018. 7. 6. 13:11

商나라 문화가 중국이 아닌 한국에 남아 있는 이유는?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10월호 《東夷 한국사》의 저자 이기훈 교사

 

⊙ 동이족이 동아시아 문자(한자), 음악, 종교, 예절, 청동기 문화 창조

⊙ 주나라에 망한 상나라(은나라) 유민들, 선조들의 땅인 조선으로 대이동

⊙ 한반도 토착 동이 세력인 왜, 한반도 대혼란 피해 일본으로 이주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우리 상고사(上古史) 많은 부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아직 시원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기존 강단 사학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려는 ‘강호의 고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여간 다행인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책미래)이라는 책을 펴낸 이기훈 교사도 그런 이 중의 한 명이다.

 

이기훈 교사는 그의 저서에서 “고대 중국 동부 문명을 이룬 동이(東夷)족은 문자(한자), 음악, 종교, 예절, 청동기 등을 최초로 창조한 고대 동아시아의 선도적 민족이었으며, 우리는 이런 동이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우리가 지금까지도 중국 동부의 고대 동이와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며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중문과를 졸업한 이 교사는 한자와 한국 문명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한 논문(〈은상 문명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으로 북경어언대학교(北京語言大學校)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그는 서울 명덕외국어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저자인 이기훈 교사를 만나 동이족의 기원과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는지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東夷는 中原 문명의 주인공

 

상나라(은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갑골문에 기록된 동이(東夷)의 글자 형태. 이(夷)는 오랑캐가 아니라 큰 대(大)와 사람 인(人)으로 이루어진 대인(성인)의 의미였다.

 

—‘동이’라고 하면 단순히 중국인들이 우리를 낮추어 부르는 용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초의 한자인 갑골문을 분석해 보면 동이(東夷)라는 말의 원래 뜻이 ‘해 뜨는 곳(東)의 큰 사람(大人)’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갑골문을 만든 3000여 년 전 상(商)나라(은나라) 사람들 역시 동이 사람들이었음은 중국과 한국 학계에서 이론 없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이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해온 중국 서쪽 내륙 사람들은 이 동이를 ‘적(敵)’ 혹은 ‘야만인(오랑캐)’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에서는 동이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이죠. 최근에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중국 최초의 문명을 이들 ‘동이’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동이 문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의 동북아시아에는 어떤 문명이 있었나요.

 

“8000년 전 한반도 곳곳에서 발해만 유역(대릉하, 요하유역) 동이 문명의 특징인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고 본격적인 신석기 혁명이 시작됩니다. 또한 이 시기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발해만 유역의 북방식 문명이 퍼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앞선 신석기 유물은 북경 근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 신석기 문명이 황화 문명의 시원지인 황하 중류(중원)보다 북부 발해만 유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이후 동이인들은 중국 내륙 문명과 구분되는 문명을 창조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신문화(BC 5300~BC 4500)’ ‘대문구문화(BC 4300~BC 2600)’ ‘용산문화(BC 2800~BC 2000)’”라고 설명했다.

 

“이들 문화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이 문화권에서 발전하다가, 이 문명의 후기에 속하는 용산문화(龍山文化)가 약 4800년 전 발생하여 그 영향 범위가 해안 지역을 넘어 중원 내륙까지 퍼집니다. 이 문명이 퍼지기 전 중원 내륙에는 중국 신석기 문명인 앙소문명(BC 5000~BC 3000)이 있었는데, 용산문명이 이 문명을 정복하면서 동이계 문명이 중국 내륙 깊이 들어서게 됩니다.”

 

—본격적인 중원문명의 발전도 동이족이 이룬 용산문화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동이족 황제 치우(蚩尤)가 바로 용산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기》에 중국인들이 시조로 여기는 황제(皇帝) 헌원과 치우가 전쟁(탁록대전)을 벌였는데, 중국에서는 이 전쟁을 BC 2600년 전으로 계산합니다. 이 연대는 용산문명이 시작되고, 치우가 다스린 시기와 대략 일치합니다. 치우가 중원을 점령할 때 중원 사람들은 ‘치우가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치우가 거느린 구려(九黎)족이 당시 중원 내륙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청동기를 소유한 발달된 문명이었음을 뜻하는 겁니다.”

 

 

中原을 점령한 東夷族 商나라

 

상나라가 멸망할 당시(BC 11세기) 기존에 없던 상나라계 청동기가 분포한 요서 지역. 이는 상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상나라의 주요 세력이 중원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뜻한다.

 

이 교사는 “이후 북방에서 남하한 구려 사람들이 중원을 점령하고 동이문명(용산문명)을 창조한 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문명이 점차 동서로 분단되고, 황하 중류 지방에 하(夏·BC 2070~BC 1600)왕조가 들어서면서 중국 대륙에는 동서 간 다른 정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고 말했다.

 

이 교사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라는 왕조 건립 후에도 동방의 동이족에 지속적으로 시달렸고, 결국 북방 동이계 상(商)족에게 중원(황하 중류)을 빼앗겼다. 이 상족이 세운 상나라(은나라)가 중국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 최초의 왕조다.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殷·은허)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고도 부른다. 상나라, 즉 은나라 사람들이 북방 동이계라는 것은 중국 학계가 공인한 사실이고, 고고학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상나라 시기 문화적, 철학적으로 대대적인 발전을 이루며 한자(漢字)의 모태인 갑골문을 만들었다.

 

상나라가 세워지는 BC 16세기 무렵 중국 동부 지역은 치우의 구려국 문명인 용산문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동이가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화하계인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다시 회복하는 시기인 BC 1046년까지 600년 동안 중국의 문명은 커다란 동이 집단인 내륙의 상족과 그들과 대립관계를 보이던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의 동이(구이)에 의해 주도된다.

 

 

商유민들의 고조선 귀환

 

—《사기》에 따르면 상은 주나라(BC 1046~BC 256)에 멸망했는데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됩니까.

 

“《사기》에 보면, 상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주나라의 통치를 피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가거나 강제로 이주를 당했는데, 이들이 이주해 간 지역은 주로 자신들과 문화적 혈연관계가 깊었던 중국 동북 지역, 즉 (고)조선 땅이었습니다. 이는 상나라 멸망시기인 BC 11세기경 제작된 상나라 계열의 유물이 고조선이 있던 요서 지방에서 대거 발굴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서에 ‘기자(箕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키는지요.

 

“그렇습니다. 상나라 유민들이 이주한 곳이 바로 북경 부근에서 동쪽으로 요하 부근에 걸친 고조선 지역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땅으로 되돌아간 것이죠. 상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이곳은 독자적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있었는데, 이 문명이 바로 고조선 문명이라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나라(은나라)의 한반도 이주를 짐작게 하는 점치는 뼈(복골): 소나 양 등의 넓은 어깨뼈에 흠집을 내고 점을 치던 풍습은 처음에 발해만 북부에서 발전해 중원으로 내려간 뒤 다시 한반도, 일본으로 전파된다. 이를 통해 동이 민족의 이동을 짐작할 수 있다.

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BC 23세기 시작된 하가점하층 문명 지역(요서 지역 건평)에서 발견된 점복용 뼈.(요령성박물관)

② 상나라(은나라) 시기(BC 16세기~BC 11세기) 중원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 고조선 지역에서 황하를 타고 남하한 사실을 증명한다.(은허박물관)

③ 삼한시대에 한반도 남서부(전남 해남 군곡리)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 상나라의 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④ 삼한시대에 한반도 동남부(부산 기장)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국립경주박물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병립

 

—오늘날 출간되는 많은 역사서에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면서 단군(檀君)조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기자조선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나라에 쫓겨난 이들 상족 세력이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는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이루게 되자, 기존의 고조선, 즉 단군조선 세력은 요하 동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대체한 게 아니라, 기자조선과 단군조선 세력이 별도로 존재한 것입니다. 물론 같은 시기 중국 대륙 동쪽인 산동반도는 여전히 동이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사는 “하지만 철저히 동이와 원수로 지냈던 화하족은 상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으면서도 역사를 자기들 중심으로 기술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상나라를 제외한 중국 동부의 동이 역사는 소멸되거나, 화하족 역사로 편입 혹은 왜곡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을 분석하면 결국 상나라 유민이 세운 기자조선은 요하 동쪽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곧 요서지방의 동이계 정치체와 요동과 한반도에 다른 정치체가 존재했다는 의미입니다. 만주 요하를 기준으로 문명이 나뉜 셈인데 이 두 세력은 결국 BC 6세기경부터 스키타이 문명의 침입으로 하나로 섞이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요.

 

“이는 이 시기 북방계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은 비파형 동검이 요서 지방에서 점차 동쪽인 요동과 한반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스키타이는 BC 7~8세기 북방 유목민족이자 발달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북방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유목 기마민족화를 이룩한 북방 유목민족입니다.”

 

—요서의 기자조선과 동쪽에 있는 고조선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나요.

 

“기자조선은 서쪽의 연(燕)나라 및 중원 제국과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동쪽의 조선과 다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비파형 동검이 퍼지던 시기에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이라는 두 정치체 간에 군사적 문화적 연합이 공고해졌다고 보는 게 순리적입니다. 중국 사서에서 이 두 지역 사람들을 ‘예맥족(濊貊族)’으로 통칭하고 있는데, 이는 예족(단군조선)과 맥족(기자조선)이 서로 화합해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왜), 맥, 한으로 구성됐던 고조선

 

이 교사는 “하지만 이런 동북아 정세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BC 3세기부터 또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BC 3세기 연나라의 조선 공격으로 요서 지역에 있던 맥족(기자조선 세력)이 대거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의 예족 땅에 진출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예맥’으로 불렀고, 맥족이 동진해 오면서 요동에 있던 예족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한’과 섞이면서 ‘한예’ ‘왜한’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교사는 “이 무렵 중국 측 기록에 예(만주), 맥(요동, 한반도 북서부), 왜(한반도 동부, 남부), 한(한반도 서부, 남부)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거 조선을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했거나 적어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연나라의 침입이 고조선과 한반도의 판세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거네요.

 

“《삼국지》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 땅 2000여 리를 취했다’고 나옵니다. 이때 연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쪽 맥족 계열의 조선(기자조선)이 큰 피해를 입고 그 유민이 요동과 한반도로 대거 몰려들게 됩니다. 오랫동안 중국 대륙에 있던 ‘조선(기자조선)’이 한반도로 직접적으로 쫓겨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한반도에 정착한 세력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한반도에는 이미 BC 7~6세기에 한 차례 북방 동이계(예계, 왜계) 사람들의 유입이 있었습니다. 이후 앞서 말씀드렸듯이 BC 3세기에 연나라의 요서 침략으로 인해 조선(맥-흉노계의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한반도 이주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 요서 지역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상나라, 스키타이와 관계 깊은 중국 북방민족인 흉노계(맥계) 사람들로서 이후 낙랑, 백제, 신라 등지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합니다.”

 

 

‘倭’는 일본이 아닌 ‘예’, 즉 ‘부여’

 

—‘예족’을 ‘왜족’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반도 고대국가 동예의 예(濊)는 ‘부여’와 같은 말이자 지금은 고대 일본의 국호로 사용하는 ‘왜’와도 같은 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족(부여족, 왜족)은 맥족이 유입되기 이전 이미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했던 동이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고대사서와 유물로 증명이 됩니다. 왜족(예족)이 한반도에 있었던 가장 명확한 기록은 《후한서》에 ‘삼한(마한, 진한, 변진)은 동서에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고 남쪽에는 왜와 접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한국(삼한)은 동쪽과 서쪽 바다가 경계인데 남쪽은 바다가 아닌 ‘왜’국과 붙어 있다(接)는 말입니다. 이 ‘왜’는 한반도 원주민인 단군조선, 즉 예족(왜족)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북방의 혼란에 밀려 한반도 남단까지 축소되어 한반도 남부와 동부에 수많은 소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바로 ‘왜’입니다.”

 

—왜가 BC 3세기 이전 한반도에 먼저 정착했던 북방 부여계라는 주장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를 ‘예’로 발음했는데(일본어론 이에), 이는 왜와 예가 예족, 즉 부여족 사람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던 고유어였음을 뜻합니다. 저는 예(왜)를 ‘해’(日·일본어로 ‘히’)로 해석합니다. 예는 한반도로 유입된 북방 맥족(고조선, 낙랑, 마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 원주민인 예족(부여족) 사람들인데, 한반도 동부(동예)와 남부(가야)와 일본 서부(왜) 사람을 통칭해서 부른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교사는 “BC 3세기는 일본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일본은 이 시기부터 오랜 신석기시대를 마감하고 청동기시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는 곳은 한반도 남부와 가까운 구주(九州·규슈) 북쪽 지역입니다. 당시 연나라에 밀린 요서 지역 기자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 기자조선 유민에 의해 밀려난 예맥족(왜족)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초의 청동기 문명인 야요이문명을 창조하게 됩니다.

 

야요이인들은 한반도 남부 사람들과 유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이는 야요이문명이 예맥족(왜족)이 이주해 만든 문명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석기시대 남방계 원주민을 몰아내고 현재 일본의 주류 민족이 됩니다.”

 

결국 연나라의 대규모 침입은 고조선 연맹의 핵심 지역인 요서 지역의 동이 세력을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요서 지역 사람들과 한반도 북부와 요동에 있던 단군조선 세력(진조선, 부여, 예, 왜)까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다시 일본 열도로 건너가면서 일본의 고대 문명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倭’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확장

 

이 교사는 “결과적으로는 한반도가 고조선 문명의 주요 계승자가 되었다”며 “요동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남하한 예인들은 이후 한반도의 예맥국인 한(韓)과 연합해 삼한을 정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고대 역사서에 ‘한’과 ‘예’를 하나로 묶어 ‘한예’로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오히려 과거에 한반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임나일본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왜는 사실 열도로 건너간 후의 왜가 아니라, 당시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토착 동이족 세력(예족)으로 봐야 합니다. ‘왜’라는 의미도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그냥 한자로 음차한 것일 뿐이고, ‘태양’이란 뜻입니다. 저는 이 ‘예’나 ‘왜’의 기원을 ‘해(일본어로 히)’의 색깔인 흰색을 숭배한 상나라(은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상나라’ ‘은나라’ 이렇게 부르지 않고 ‘위(衛·웨이)’ ‘의(衣·이)’로 불렀습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유민이) 조선으로 이주한 뒤 이 ‘왜’는 점차 요동(예·부여), 한반도(동예·왜=가야), 일본(왜)으로 이주하면서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따라서 초기 일본의 역사는 일본에서 한반도 쪽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 교사의 설명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사 초창기의 이야기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열도에 건너간 이후 자기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자기들이 당한 것을 빼고, 거꾸로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왜의 성격을 알면 임나일본부를 가지고 일본과 다툴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東夷 문화

 

중국 국무원에서 2009년 출간한 권위 있는 역사서 《중국역사상식》에 그려진 동이와 화하의 영토. 한국 사학계에서 설정하고 있는 동이 영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이 동이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서부와 남부의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 평야 지역이 동이의 활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동이족이 한반도로 유입된 과정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결과적으로 고조선 동이계의 문화를 계승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그동안 한국 학계는 동이의 영역을 굉장히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그냥 짐작만 하지 정확하게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 국무원에서 2009년 출간한 《중국역사상식》에 그려진 동이와 화하의 영토 지도를 보면 동이의 영역이 한국 사학계에서 설정한 것(산동반도)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실제 화하족이 살고 있던 서쪽 사막 지역이나 묘만족이 살던 남쪽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평원 곡창지대가 동이족이 살고 있던 땅입니다.”

 

—한국 사학계나 중국 학자 중에서도 중국 동쪽에 거주하던 동이 세력을 현재의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세력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미 설명드렸지만, 동이의 오랜 유물과 풍습이 고스란히 한반도로 이주해 온 흔적이 많습니다. 사람은 가만있는데 풍습이나 유물이 저절로 넘어올 수는 없는 것이죠. 제가 갑골문을 공부하면서 의아했던 점이, 갑골문에 표현된 풍습 중 상당수가 현대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고, 한국에는 남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배울 學(학), 가르칠 敎(교) 등의 글자에 들어가 있는 ‘효(爻)’ 자입니다. 효는 나뭇가지 네 개로 점을 치던 풍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글자입니다. 이 점치는 풍습이 오늘날 한국에서 윷놀이 형태로 남아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런 풍습이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가 은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민족이라면, 은을 우리 역사라고 하면 안 되는지요.

 

“제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만주에 있던 부여는 과연 우리 역사일까요? 중국 역사일까요? 물론 부여를 구성한 민족은 우리 동이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풍습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여를 이어 중국 북방에 등장한 동이족들이 4세기 이후 중원 문명의 지도자로서 중원을 1000년 이상 지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현재의 중국인들도 충분히 부여를 이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고대사를 무조건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라고 나눌 수는 없다고 봅니다.”

 

 

위대했던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

 

—그래도 어느 문명이나 민족의 주류(主流)를 이었다면 충분히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도 중국에 사는 수많은 조선족이 인종은 비록 한국인이고 언어도 우리와 같지만, 정체성과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잖아요. 현재도 이런데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한국 역사, 저것은 중국 역사, 또 저것은 일본 역사 이렇게 딱 구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결국 중원에서 밀려와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다가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자신들의 기원을 상나라(은나라)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다만 당시 존재한 나라의 풍습이 한국과 같았는지 중국과 같았는지를 보는 것이 그 나라를 현재 어느 나라가 계승하고 있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풍습은 당시의 중국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살면서 고구려와 풍습, 인종이 유사했던 선비, 거란, 몽고, 여진 등 많은 북방 민족이 중국을 오랫동안 지배하다 동화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중국은 수많은 민족의 용광로이기 때문에 풍습이나 인종으로 고대사의 정통성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와 갈등을 빚는 원인입니다.”

 

—그래도 자기 역사의 원류를 알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세우는 건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그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누구보다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 역사의 원류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그동안 중국의 변국(邊國)의 역사로 인식되어 세계 역사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중앙아시아, 심지어 유럽, 아메리카에까지 관련이 있을 정도로 광대했습니다. 저는 단언컨대 한반도가 이들 광대한 동이 문명의 결집체라고 봅니다.”

 

이 교사는 마지막으로 “제가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의 위대성을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보다 열린 시각을 갖고 주변국을 이해하며 좀 더 서로 가까워지자는 데 있다”고 말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