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의 상(商) 정벌 목야대전 (牧野大戰)
목야대전 牧野大戰 | ||
시기 |
기원전 1046년(추정) | |
장소 |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화이허 강(淮河) 지류 | |
원인 |
상나라에 대한 주나라의 정벌. | |
교전국 |
상 商 |
주 周 |
지휘관 |
제신 |
주무왕 |
병력 |
700,000여명 |
400,000여명 |
피해 |
방어군 궤멸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주(周)의 대승, 제신 사망 | |
영향 |
상(商)의 멸망과 주(周)의 천자국 지위 획득 |
중국사 최초의 결전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이 주나라 무왕과 싸운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상나라의 멸망이 확정되었다. 혁명이란 말의 기원이기도 하다.
목야대전의 배경
사기에 따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은 흉악한 폭군이었다. 제신은 주지육림·포락지형 등의 혹형을 만들며, 주나라의 제후인 희창을 잡아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를 요리해서 먹게 하는 등 잔악한 행동을 벌였다. 또한 각지를 정벌하여 원성이 가득해졌다.
희창은 주나라에 돌아온 후, 인근 국가를 병탄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또한 상나라에 원한이 깊은 제후들에게 손을 써서 주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희창은 노령이었고,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발(發)이 주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무왕이다.
혁명을 선언한 무왕의 군대는 상나라의 허를 찔러 공격을 시작하고, 여러 제후들이 가세하여 순식간에 대군이 되었다. 상나라는 멸망할 듯이 보였지만, 무왕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한 차례 군사를 물렸다.
목야대전의 전개
몇 년 후, 무왕은 다시 상나라를 공격했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무왕은 분노하여 황하의 신 하백에게 "천명은 이미 내려졌다, 어째서 방해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신에게 호통치는 대륙의 기상 그러자 폭풍우가 멎어 주나라 군대는 강을 거널 수 있었다.
이 때 배 안에 뱅어가 뛰어들어 왔는데, 흰색인 뱅어는 상나라를 상징하는 색이므로 상서롭게 여겨졌다. 주나라 군대와 상나라 군대가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에 가까운 목야(牧野)에서 마주치자 또 다시 폭풍우가 불었지만, 무왕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찌른 명조(鳴条) 전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것은 상서로운 일'이라고 격려하였다.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상나라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70만 대군을 동원했다. 주나라는 동맹국의 군대를 더해도 40만이었다. 하지만 상나라 군대에는 전장에서 길흉을 점치는 신관이 포함되어 있었고, 복속된 작은 국가의 군대들까지 섞여 있어 질이 나빴다.
상나라 군대의 전열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줄배신을 때리고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는가 하면, 아예 창을 거꾸로 들고 뒤에 있던 본진을 공격하기도 했다. 중국의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 병사들 가운데 노예들까지 섞여 있었다고 추측하며, 제신은 이런 병사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이 믿는 상나라의 정예병은 뒤에 배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평소 불만이 많았을 노예나 항병(降兵)들은 주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상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혹은 강태공이 이미 이렇게 되도록 음모를 써서 계략을 꾸며 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전투는 상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상나라는 궤멸된다.
목야대전의 결말
주나라 군대는 제신을 쫓아 조가까지 쳐들어 갔다. 제신은 왕궁에 불을 질러 죽었으며, 무왕은 제신의 시신에 세 개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쳐서 잘라 벌했다. 이로서 상나라는 멸망하고, 혁명군의 맹주였던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어 제후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돤 갑골문을 보면 주왕 제신이 동방으로의 팽창 정책을 취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여기서의 동방이란 것은 고조선과 관련된 민족 집단이 아니라 중국의 황해 연안 지방으로 지금의 산둥 성 남부와 장쑤 성 일대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시점에 대해, 이러한 상황을 기습적으로 이용했다는 설들이 있다.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유사에서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왕(虎王)이라고 적었다. 똑같이 요(堯)도 정종의 휘를 피하기 위해 고(高)로 적었다.
목야대전과 관련한 여담
▷ 천하장사 악래(惡來) 역시 이 싸움에 출진했으나 죽었다고 한다.
▷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주와 함께한 제후군은 용(庸)·촉(蜀)·강(羌)·모(髳)·미(微)·노(纑)·팽(彭)·복(濮) 등이다.
▷ 상서에 따르면 주왕을 제거한 날의 간지는 갑자(甲子)였다고 하는데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된다.
▷ 근래의 갑골문 연구에 따르면, 당시 제신은 상나라의 주력 군대를 동방으로 출진시키고 있었다. 목야의 싸움에서 노예나 항복한 병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상서 목서에서 주무왕은 제후들과 동맹을 선언하면서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지금 상나라의 군주는 여자 말만 듣고 현명한 사람의 말을 멀리하고…"라는 발언을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여기서 기원한 것이다.
무경의 반란
무경(武庚)은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아들이다. 무경(武庚)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기원전 1046년 무렵 상(商)의 주왕(紂王)이 허난성(河南省)의 목야(牧野)에서 주(周)나라에 패하고 죽었다.
상(商)이 멸망한 뒤 주 무왕은 상(商)의 민심을 달래고 유민(遺民)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경(武庚)을 상(商)의 도읍인 은(殷)에 봉분하였다. 주(周) 무왕(武王)은 무경(武庚)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주위에 자신의 형제를 봉분하여 관숙(희선), 채숙(희도), 곽숙(희처)을 봉분하여 무경(武庚)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희단(姬旦)의 형 관숙(管叔)-희선(姬鮮)을 허난성 정주(鄭州) 지역 관(管)의 제후로 봉했다. 동생 채숙(蔡叔)-희도(姬度)는 허난성 상채(上蔡) 지역 채(蔡)의 제후로 봉했다. 곽숙(霍叔)-희처(姬處)는 산시 성 곽주(霍州) 곽(霍)의 제후로 봉하였다. 이들은 무경(武庚)과 상(商)의 유민들에 대한 감시를 맡았기에, 세명의 감시자라는 삼감(三監)이라고 불렸다.[1]
기원전 1043년 무렵, 무왕(武王)은 주(周)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섭정(攝政)이 되었다. 왕이 갑자기 죽고 숙부등이 섭정을 하면 왕실의 권력 다툼로 인한 음모가 있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주공단이 성왕 즉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삼감은 주공(周公)이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을 사방이 퍼뜨리고, 무경(武庚)을 끌어 들여 삼감(三監)의 난(亂)을 일으겼다.
주공(周公)은 제후들을 단속하며 반란의 진압에 나섰지만, 상(商)의 유민들의 저항이 거세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3년이 걸렸다. 무경(武庚)은 주(周)의 군대에 사로잡힌 뒤 주살(誅殺), 관숙(管叔) 희선(姬鮮)은 처형, 채숙(蔡叔)은 유배, 곽숙(霍叔)은 벼슬에서 쫓겨났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국 문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상(商)나라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반경(盤庚)이 옮긴 마지막 도읍이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라고도 부른다.
명칭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상(商)'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에, '은(殷)'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개요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백성을 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역사 / 창업 이전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상나라 왕의 선조
묘호 |
칭호 |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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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契) |
자설(子契) |
- |
소명(昭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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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토(相土) |
자상토(子相土) |
- |
창약(昌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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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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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冥) |
자명(子冥) |
고조(高祖) |
왕해(王亥) |
자해(子亥) |
- |
왕항(王恒) |
자항(子恒) |
- |
상갑미(上甲微) |
자미(子微) |
- |
보을(報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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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병(報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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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정(報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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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임(示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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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종(夔宗) |
시계(示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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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치세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왕조는 다시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신(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주(西周)의 무왕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상나라 역대 임금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사기명 |
갑골문자명 |
재위기간 |
1대 |
태조(太祖) |
태무(太武王) |
자리(子履) |
탕(湯) |
당, 대을(唐, 大乙) |
BC1600년~1589년 |
2대 |
|
애왕(哀王) |
자승(子勝) |
외병(外丙) |
복병(卜丙) |
BC1588년~1587년 |
3대 |
|
의왕(懿王) |
자용(子庸) |
중임(仲壬) |
|
BC1586년~1583년 |
4대 |
태종(太宗) |
문왕(文王) |
자지(子至) |
태갑(太甲) |
대갑(大甲) |
BC1582년~1571년 |
5대 |
|
소왕(昭王) |
자순(子絢) |
옥정(沃丁) |
|
BC1570년~1542년 |
6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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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宣王) |
자변(子辯) |
태경(太庚) |
대경(大庚) |
BC1541년~1517년 |
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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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왕(敬王) |
자고(子高) |
소갑(小甲) |
|
BC1516년~1500년 |
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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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왕(元王) |
자밀(子密) |
옹기(雍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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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499년~1487년 |
9대 |
중종(中宗) |
경왕(景王) |
자주(子伷) |
태무(太戊) |
대무(大戊) |
BC1486년~1422년 |
10대 |
|
효성왕(孝成王) |
자장(子莊) |
중정(中丁) |
중정(中丁) |
BC1421년~1401년 |
11대 |
|
사왕(思王) |
자발(子發) |
외임(外壬) |
복임(卜壬) |
BC1400년~1386년 |
1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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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평왕(前平王) |
자정(子整) |
하단(河亶甲) |
전갑(戔甲) |
BC1385년~1377년 |
1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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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왕(穆王) |
자등(子滕) |
조을(祖乙) |
차을(且乙) |
BC1376년~1358년 |
14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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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왕(桓王) |
자단(子旦) |
조신(祖辛) |
차신(且辛) |
BC1357년~1342년 |
1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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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왕(僖王) |
자유(子踰) |
옥갑(沃甲) |
강갑(羌甲) |
BC1341년~1337년 |
16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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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莊王) |
자신(子新) |
조정(祖丁) |
차정(且丁) |
BC1336년~1328년 |
1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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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왕(頃王) |
자경(子更) |
남경(南庚) |
|
BC1327년~1322년 |
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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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悼王) |
자화(子和) |
양갑(陽甲) |
상갑(象甲) |
BC1321년~1315년 |
19대 |
세조(世祖) |
문성왕(文成王) |
자순(子旬) |
반경(盤庚) |
반경(般庚) |
BC1314년~1287년 |
20대 |
|
장왕(章王) |
자송(子頌) |
소신(小辛) |
|
BC1286년~1252년 |
21대 |
|
혜왕(惠王) |
자렴(子斂) |
소을(小乙) |
|
BC1251년 |
22대 |
고종(高宗) |
양왕(襄王) |
자소(子昭) |
무정(武丁) |
|
BC1250년~1192년 |
23대 |
|
후평왕(後平王) |
자약(子躍) |
조경(祖庚) |
차경(且庚) |
BC1191년~1148년 |
24대 |
세종(世宗) |
정왕(定王) |
자재(子載) |
조갑(祖甲) |
차갑(且甲) |
BC1148년 |
25대 |
갑종(甲宗) |
공왕(共王) |
자선(子先) |
늠신(廪辛) |
|
BC1148년 |
26대 |
강조(康祖) |
안왕(安王) |
자효(子囂) |
경정(庚丁) |
강정(康丁) |
BC1148년 |
27대 |
무조(武祖) |
열왕(烈王) |
자구(子瞿) |
무을(武乙) |
|
BC1147년~1113년 |
2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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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왕(匡王) |
자탁(子托) |
태정(太丁) |
문정(文丁) |
BC1112년~1102년 |
29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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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왕(德王) |
자선(子羡) |
제을(帝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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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01년~1076년 |
3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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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紂王) |
자수(子受) |
제신(帝辛) |
|
BC1075년~1046년 |
멸망 후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 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사회와 문화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정치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행정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유적과 유물 / 은허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
갑골문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연구 및 기타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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