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여(東夫餘) / 옥저(沃沮) / 동예(東濊)
동부여(東夫餘)는 부여의 일부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세운 나라이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위치와 영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동부여는 410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역사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서기 285년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멸망을 당했다.
전해지는 이야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다.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夫台)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나 옥저로 도피했던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
결국 410년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고, 고구려에게 타격을 받고 494년 고구려의 문자명왕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동부여의 왕
왕호 |
이름 |
재위기간 |
해부루왕(解夫婁王) |
해부루(解夫婁) |
? ~ 기원전 60년 경 |
금와왕(金蛙王) |
해금와(解金蛙) |
기원전 60년 경 ~ 기원전 20년 경 |
대소왕(帶素王) |
해대소(解帶素) |
기원전 20년 경 ~ 22년 |
갈사왕(曷思王) |
? |
22년 ~ ? |
도두왕(都頭王) |
해도두(解都頭) |
? ~ 68년 |
부태왕(夫台王) |
해부태(解夫台) |
?, 2세기 |
위구태왕(尉仇台王) |
해위구태(解尉仇台) |
?, 2세기 |
간위거왕(簡位居王) |
해간위거(解簡位居) |
?, 2세기 ~ 3세기 |
마여왕(麻余王) |
해마여(解麻余) |
?, 3세기 |
의려왕(依慮王) |
해의려(解依慮) |
? ~ 285년 |
의라왕(依羅王) |
해의라(解依羅) |
286년 ~ ? |
현왕(玄王) |
해현(解玄) |
? ~ 346년 |
《삼국사기》(三國史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에 의거 |
위구태(慰仇太)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처음 나타나며, 삼국지 동이전에서 그 후계들이 자세하다.
현왕(玄王)은 사서에서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라는 기록으로 존재하나 여울은 단지 부여 왕자로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郞)을 지내고, 후연의 재상을 한 자라 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494년에 부여가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옥저(沃沮)
옥저(沃沮)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조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때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나 구루로 나타내었고 고구려어로 성(城)을 의미한다고 한다.
위치
옥저는 고대에서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 사회이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통설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6]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다른 의견
다음은 통설과 다른 소수의견이다.
윤내현 주장 - 옥저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한서》에서,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덕일은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변천
남옥저의 중심지역의 집단은 기원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108년, 다시 한의 군현에 소속되었다. 임둔군에 소속된 후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폐지되자 현도군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제2 현도군으로 이동하였을 때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고 여겨진다.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 관구검이 이끄는 위(魏)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어 사실상 옥저는 소멸되고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동옥저(東沃沮)
동옥저(東沃沮)는 개마산 동쪽에 있었던 한국의 옛 나라이다. 서기 57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주: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성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가 있고 남으로 예맥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성이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병전을 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장사는 큰 목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이에 들어간다. 나무에 '生'자를 새기어 죽은 자의 수를 헤아렸다.
기원전 5년, 동옥저 사신이 신라에 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따르면 고구려는 "4년(서기 57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옥저(北沃沮)
북옥저(北沃沮)는 개마산 동쪽에 있었던 한국의 옛 나라이다. 매구루라고도 한다. 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습이 모두 남옥저와 같다. 경계는 남으로 읍루이고, 읍루 사람이 배 타는 것과 노략질을 즐기니,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여 늘 여름에는 바위구멍에 숨어있다가 겨울에 이르러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와 읍락에서 살았다.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하나 얻었는데 그 모양은 보통사람 옷과 같으나 양 소매가 삼장이나 되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언덕 위에서 보니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데 목 복판에도 얼굴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죽었다. 또 말하길 바다 가운데에 여인국이 있어 남자가 없다. 혹 전하기를 그 나라에는 신의 우물(神井)이 있어 이를 보면 쉽게 아이를 낳는다. [주: 위지(魏志)에 관구검이 왕기를 파견하여 구려왕 '궁'을 쫓아 옥저 동쪽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어 전한 것이다.]
동예(東濊)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 ~ 3세기경에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른다.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으로는 강원도 강릉(명주)에 이르렀고 영서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하였는데, 서쪽의 마한 · 백제와 군사적으로 충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역사
지금의 원산에서부터 강릉까지 사이의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족 계열의 부족 국가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군현에 있다가 멸망했다.
멸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3가지 주요한 설이 있다.
자연 멸망설
동예의 정치형태는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군장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왕권이 한곳으로 모이지 못했다. 따라서 내부적인 분열, 반란 등에 의해서 스스로 멸망했다는 설이다.
고구려 복속설
가장 유력한 설이다. 고구려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지자 동예는 잠시 낙랑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병합하자 동예도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남정(南征)으로 동예의 대부분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확립되었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북진으로 신라에 병합되어 하슬라주가 되었다 ... 라는 설이다. 즉 고구려 미천왕대에 영토 확장을 실시하자 고구려에 의하여 복속당했다는 주장이다.
기타 요인설
고구려나 자연 내분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멸망했다는 설이다. 그 예로는 그 대에 다른곳에 살고있던 작은 목축민족이나 유목민 등에 의하여 멸망하였다는 설이다.
이렇듯 3가지의 주장이 있으나, 멸망 이후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위치
예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니 본시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위나라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나라 안에 옛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맥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신라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삼국지 부여전 등)에서 부여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라고 기술하여, 동예의 위치를 지금의 강릉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고구려 태조대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는가’라고 기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라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강릉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그 수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28만 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학회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두 사서의 예를 별개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정치·문화
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한편 책화(責禍)라는 씨족 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책화란 다른 마을을 침범할 경우에는 재물과 가축으로서 그를 보상한다는 제도이다. 또, 아래 족외혼에도 역시 씨족사회의 유습이 드러난다. 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특산물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5]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풍습
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족외혼),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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