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퉁구스계 민족 말갈(靺鞨)

자연정화 2018. 7. 9. 10:04

퉁구스계 민족 말갈(靺鞨)

 

말갈(靺鞨; 중국어: 靺鞨, 병음: Mòhé, 뭐허)은 6~7세기경 중국의 지린 성, 헤이룽장 성과 한국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고대 중국어: Miut Kit)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중세 중국어: Muat ɣat)이라 부른다. 이후 말갈 7부는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통제를 받았으며, 속말말갈은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의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 후위 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다. 이 말갈은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부터는 여진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말갈임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들 국가와 교전한 "말갈"은 예(濊, 동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위치상 강원도의 영동, 영서에 있어서 영동말갈, 영서말갈로도 표기하나 퉁구스/숙신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僞)말갈(혹은 가짜말갈)"로 표기한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 때문에 강원도나 중부지방 내륙 등 한반도에도 말갈이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언급했듯이 동예 등 예맥계 주민이었거나 혹은 말갈이라고 불렸던 가짜말갈이며, 한반도로 내려온 말갈들은 극소수에다가, 대부분 한반도의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평안도 북부나 함경도 대부분의 경우는 고려, 조선 초기까지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들이 존재했으나 4군 6진 개척이후 이곳의 말갈, 여진족들은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압록강, 두만강 북쪽으로 도망쳐서 그곳에 살게 되었다.

 

말갈의 7부족

▷ 속말말갈 (중국어 정체자: 粟末靺鞨, 병음: Sùmò Mòhé)

지린 시

▷ 백산말갈 (중국어 정체자: 白山靺鞨, 병음: Báishān Mòhé)

지린 성 (吉林省) 지방

▷ 우루말갈 (중국어 정체자: 虞婁靺鞨, 병음: Yúlóu Mòhé)

▷ 불열말갈 (중국어 정체자: 拂涅靺鞨, 병음: Fúniè Mòhé)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지방

지금의 지시 시 (鷄西市) 및 무단장 시 (牧丹江市)

▷ 철리말갈 (중국어 정체자: 鐵利靺鞨, 병음: Tiělì Mòhé):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지방

지금의 하얼빈(哈爾濱, 러시아어: Харбин)

▷ 월희말갈 (중국어 정체자: 越喜靺鞨, 병음: Yuèxǐ Mòhé)

▷ 흑수말갈 (중국어 정체자: 黑水靺鞨, 병음: Hēishuǐ Mòhé)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 지방

지금의 솽야산 시 (雙鴨山市), 자무쓰 시 (佳木斯市), 허강 시 (鹤崗市), 이춘 시 (伊春市)

하바롭스크 지방 (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지방

지금의 비킨(러시아어: Бикин), 뱌젬스키 군 (러시아어: Вяземский) , 라조 군 (러시아어: имени Лазо), 하바롭스크 (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

▷ 이외에도 백돌부(伯咄部)[1], 안거골부(安車骨部)[2], 불열부(拂涅靺鞨)[3], 호실부(号室部)[4] 등이 있었다.

 

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직, 간접지배를 받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속말말갈(粟末靺鞨)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반농반수렵(半農半狩獵)을 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물길이 차지한 옛 부여 지역의 송화강 일대에 거주하는 물길 7종 하나인 속말말갈은 숙신계에 일부 예계가 혼합 되어있었고, 자주 고구려를 약탈하다가 581년~600년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복속되었다. 이때 속말말갈 궐계부(厥稽部)의 만돌과 그의 동생 돌지계는 홀사래부(忽賜來部)·굴돌시부(窟突始部)·열계몽부(悦稽蒙部)·월우부(越羽部)·보호뢰부(步護賴部)·파해부(破奚部)·보보괄리부(步步括利部) 등 8부의 정예병 수천여 명을 이끌고, 부여성 서북으로부터 부락을 거느리고 관새를 향하여 수나라에 내부하였다. 조양에서 출토된 토우 2점의 족속을 속말말갈로 추정하기도 한다.

 

668년,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이에 고구려의 신민이었던 속말말갈도 당나라의 영주(營州)로 이주당했다. 696년 영주에서 이진충(李盡忠)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자 속말말갈 추장이자 고구려의 유장이었던 걸걸중상은 걸사비우가 지도하는 말갈인들과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고, 걸걸중상이 병사하자, 아들 대조영이 추장직을 세습하여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여, 진국을 건국하였고,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백산말갈(白山靺鞨)

백산말갈(白山靺鞨)은 말갈의 7부족중의 하나로 지린 성 (吉林省) 지방에 거주하였다. 속말부(粟末部)의 동남 쪽에 있으며 현재 지린 성 돈화(敦化), 연변(延辺), 파이산(白山)[1] 및 옌볜 조선족 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와 연해주 (러시아어: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지방 하산/하산스키 군 (러시아어: Хасан / Хасанский район)지방을 포함한다. 옛 북옥저 지역에 있는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백산말갈의 주민은 속말말갈과 같이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했다. 주민들은 반농반수렵(半農半狩獵)을 주로 하였다.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말갈족의 한 부족이다.

 

흑수말갈은 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지방에 거주하였다. 안차골부(安車骨部)의 동북에 있으며 현재의 동강(同江)에서 백력(伯力)까지의 흑룡강(黒龍江) 유역이다.

 

그들의 활동 지역은 지금의 솽야산(雙鴨山市), 자무쓰(佳木斯市), 허강 시(鹤崗市), 이춘(伊春市) 및 러시아 연해주의 하바롭스크 지방이며, 비킨(Бикин), 뱌젬스키 군(Вяземский), 라조 군(имени Лазо),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등을 포함한다.

 

725년 당나라 안동도호부의 설태(薛泰)는 흑수말갈에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한 뒤 그 수령을 도독으로 하고, 각 부 부족장을 자사(刺史)로 하였다. 후에 발해가 강성하게 되자 일부가 이에 복속하였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족에 의해 여진족(女眞)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분리되었다.

 

말갈(흑수말갈)이란?

○동이열전 말갈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괄이 되지 않는다. 모두 7종이 있는데, 그 첫째는 속말부(粟末靺)로서 고구려와 인접하여 정예의 병사가 수천 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늘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둘째는 백돌부로서 속말부의 북쪽에 있으며, 정예의 병사가 7천이다. 셋째는 안거골부로서 백돌부의 동북쪽에 있다. 넷째는 불열부로서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로서 불열부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부로서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백산부로서 속말부의 동남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정예의 병사가 3천에 불과한데, 흑수부가 가장 굳세다. 불열부로부터 동쪽 지역은 화살을 모두 돌촉으로 사용하니 이곳이 바로 숙신씨의 땅이다 - <수서>권81, 동이열전 말갈

 

○동이읍루에 관한 기록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기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부여와 비슷하고 언어는 각기 다르다). - <삼국지> 위서30 동이 읍루 / <후한서> 권85 동이읍루

 

○동이물길에 관한 기록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 <위서> 권100, 동이 물길 / <북사> 권94, 물길

 

○발해 건국자에 관한 두 기록(구/신당서)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高麗別種]이다. - <구당서> 권199하 북적, 발해말갈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니(발해본속말말갈부고려자대씨(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 성은 대씨大氏이다) - <신당서> 권219, 북적北狄, 발해전

 

○삼국사기의 말갈 온조왕 2년(B.C. 17) 정월에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B.C. 37년)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어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

 

○고구려 이타인 묘지명의 36부 말갈 사례 그 때에 공(이타인)은 "책주(책성주) 도독 겸 총 병마관 12주 고구려통 37부말갈"을 제수받았다.

 

○말갈로 불리었던 고구려인(안시성 주민) (고구려 보장왕 4年:645) 당왕이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아군과 말갈병 15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하려 하였다. [중략]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천 8백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군문(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당왕이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 5백명을 가려서 [당의]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야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사람 3천 3백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상

 

○구당서의 고구려와 말갈 연수[高延壽]와 혜진[高惠眞]이 15만 6천 8배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 오자, 태종은 우마출입구[轅門]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은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은 욕살 이하 추장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을 주어서 내지로 옮겼다. 말갈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평야로 돌려 보냈다. - <구당서> 권 199상, 동이열전, 고려

 

⊙말갈(흑수말갈)이란?

1) 흑수말갈을 가르키는 종족명(보통 같다고 칭하지만 말갈과 흑수말갈은 별개라는 이론도 있음)

2) 왕조 변방의 불특정의 반독립적 세력을 지칭

3) 남만주 지역의 주민을 넓게 통칭한 종족명

4) 발해국을 낮추어 부르는 왕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