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 국가 상(商)나라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나라 : 중국의 고대 국가. 한자는 商. 국성은 자(子). 수도는 은허. 은(殷)나라라고도 부른다. 한때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은(殷)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은 반경(盤庚) ~ 제신(帝辛)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인데, 당대에는 의(衣) 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주대 성립부터 은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들 자신들은 자신을 상이라고 하였지 은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주 시대 초 기기록에도 상이라고 등장한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1]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衣와 殷은 고대 중국어에서 소위 음양 대전의 관계로서, 같은 지명에 대한 다른 방식의 두 가지 가차자이다. 상인, 상업 등의 商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은주 역성 혁명으로 망했지만 상의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무왕은 주의 아들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분봉해 봉국으로 삼았다. 그게 송나라. 하지만 무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주공단의 섭정에 반기를 들고 무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주나라에게 진압당하면서 송나라를 봉지로 받은 미자계의 후손만 제후 신분으로 남고 나머지는 전부 몰락하고 만다.
왕조 역사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에 의해 건국되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나타난다. 다만 갑골문에서는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다.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하나인 제곡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 다시 말해서, 삼황오제와 상나라 사이에 하나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3]
상나라 왕의 선조
묘호 |
칭호 |
성명 |
- |
설(契) |
자설(子契) |
- |
소명(昭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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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토(相土) |
자상토(子相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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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약(昌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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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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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冥) |
자명(子冥) |
고조(高祖) |
왕해(王亥) |
자해(子亥) |
- |
왕항(王恒) |
자항(子恒) |
- |
상갑미(上甲微) |
자미(子微) |
- |
보을(報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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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병(報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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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정(報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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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임(示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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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종(夔宗) |
시계(示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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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이후 상나라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번 천도를 하게 되는데, 현재 발굴되어 확인된 상대의 수도로는 중기의 수도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은의 유지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우리가 아는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출토가 드물다.
기원전 12세기의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기에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4][5]으로 서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섬서성 지역의 주나라(周)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만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의 한 명이었던 미자 계에게는 공작이 수여되어 제후국인 송(춘추전국시대)에 봉해졌다. 공자 또한 이 미자의 후손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는 의고파가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나라의 실존은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되었다.
상나라 역대 임금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사기명 |
갑골문자명 |
재위기간 |
1대 |
태조(太祖) |
태무(太武王) |
자리(子履) |
탕(湯) |
당, 대을(唐, 大乙) |
BC1600년~1589년 |
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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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왕(哀王) |
자승(子勝) |
외병(外丙) |
복병(卜丙) |
BC1588년~1587년 |
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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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懿王) |
자용(子庸) |
중임(仲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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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586년~1583년 |
4대 |
태종(太宗) |
문왕(文王) |
자지(子至) |
태갑(太甲) |
대갑(大甲) |
BC1582년~1571년 |
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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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왕(昭王) |
자순(子絢) |
옥정(沃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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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570년~1542년 |
6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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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宣王) |
자변(子辯) |
태경(太庚) |
대경(大庚) |
BC1541년~1517년 |
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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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왕(敬王) |
자고(子高) |
소갑(小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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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516년~1500년 |
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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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왕(元王) |
자밀(子密) |
옹기(雍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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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499년~1487년 |
9대 |
중종(中宗) |
경왕(景王) |
자주(子伷) |
태무(太戊) |
대무(大戊) |
BC1486년~1422년 |
1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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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왕(孝成王) |
자장(子莊) |
중정(中丁) |
중정(中丁) |
BC1421년~1401년 |
11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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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왕(思王) |
자발(子發) |
외임(外壬) |
복임(卜壬) |
BC1400년~1386년 |
1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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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평왕(前平王) |
자정(子整) |
하단(河亶甲) |
전갑(戔甲) |
BC1385년~1377년 |
1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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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왕(穆王) |
자등(子滕) |
조을(祖乙) |
차을(且乙) |
BC1376년~1358년 |
14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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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왕(桓王) |
자단(子旦) |
조신(祖辛) |
차신(且辛) |
BC1357년~1342년 |
1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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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왕(僖王) |
자유(子踰) |
옥갑(沃甲) |
강갑(羌甲) |
BC1341년~1337년 |
16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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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莊王) |
자신(子新) |
조정(祖丁) |
차정(且丁) |
BC1336년~1328년 |
1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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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왕(頃王) |
자경(子更) |
남경(南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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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327년~1322년 |
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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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悼王) |
자화(子和) |
양갑(陽甲) |
상갑(象甲) |
BC1321년~1315년 |
19대 |
세조(世祖) |
문성왕(文成王) |
자순(子旬) |
반경(盤庚) |
반경(般庚) |
BC1314년~1287년 |
2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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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章王) |
자송(子頌) |
소신(小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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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86년~1252년 |
21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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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왕(惠王) |
자렴(子斂) |
소을(小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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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51년 |
22대 |
고종(高宗) |
양왕(襄王) |
자소(子昭) |
무정(武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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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50년~1192년 |
2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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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왕(後平王) |
자약(子躍) |
조경(祖庚) |
차경(且庚) |
BC1191년~1148년 |
24대 |
세종(世宗) |
정왕(定王) |
자재(子載) |
조갑(祖甲) |
차갑(且甲) |
BC1148년 |
25대 |
갑종(甲宗) |
공왕(共王) |
자선(子先) |
늠신(廪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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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48년 |
26대 |
강조(康祖) |
안왕(安王) |
자효(子囂) |
경정(庚丁) |
강정(康丁) |
BC1148년 |
27대 |
무조(武祖) |
열왕(烈王) |
자구(子瞿) |
무을(武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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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47년~1113년 |
2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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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왕(匡王) |
자탁(子托) |
태정(太丁) |
문정(文丁) |
BC1112년~1102년 |
29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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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왕(德王) |
자선(子羡) |
제을(帝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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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01년~1076년 |
3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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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紂王) |
자수(子受) |
제신(帝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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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075년~1046년 |
상나라의 역대 군주는 상나라/계보의 왕사 참조.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왕 시호(또는 이름?, 존호?)는 모두 십간으로 지어져 있다. 이것은 상나라가 제정일치적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순서가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도시 국가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상주단대공정으로 고고학적으로 하나라의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중국 외부에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중국 사학계 내부에서도 이런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한 비판이 있을 정도인데 이는 하나라 문서 참조. 이런 주장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 - 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정주 상성 유적지, 토벽으로 쌓은 상나라 성벽이 돌처럼 단단하게 보였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 왕조의 존재 자체의 근거가 희박한 상태이므로 다른 실체이거나 단순한 상 왕조 자체 내에서의 변화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갑골문에서는 탕왕이 하 왕조를 물리친 대역사의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 왕조의 창시자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아직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夏라는 글자조차 식별되지 않으며, 갑골문에서의 1년은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 구별했다.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다만 상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최고(最古)의 왕조이기는 하나, 상이 《사기》 등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중화 대륙의 단일한 중앙 집권적인 왕조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애초에 갑골문 기록에서 황하에 홍수가 나니 전 국토가 물에 잠겼다고 나왔을 정도고 본격 노아의 홍수 출토된 유물에 기반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상의 통치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 상의 통치 영역 바깥에는 그들이 남긴 문자는 없었지만 분명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심지어 주나라 후기인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으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성립하는 셈.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이를테면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즈음)를 거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땅이 밀림이었으며, 그곳에는 코끼리나 코뿔소, 호랑이 같은 맹수, 전설의 용의 원형이 되었을 악어 같은 대형 파충류나, 붕, 짐의 원형이 될 듯한 조류가 살고 있는 험악한 땅이었다. 레알 몬스터 헌터 이런 밀림 사이에 세워진 극소수의 '성읍 국가'가 이후의 중국 문명으로 이어지는 혹은 이어지지 않는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렇게 하니까 정황상 말이 되네" 수준일 뿐, 하나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또한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탕왕이 천하를 제패하는 대규모의 정복전은 없었던 듯하다. 그냥 하나라의 패권이 상나라로 옮겨온 정도.[6]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상 왕조를 전국을 통일한 국가로 인식하였을까? 사기 오제본기를 보면 천하가 9주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아도 한나라 행정 체계와 비슷함을 눈치챌 수 있다. 실제로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에도 사료 부족이 극심하여 오제본기에서 사마천이 사람들이 오제의 덕을 칭송하면서도 자료는 부족하다고 논평했다.
갑골문의 자료와 사기를 대조해서 보았을 때 사마천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지만, 사마천이 입수했던 자료로써는 상나라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에 주나라의 역사 왜곡과 천하를 주유하던 세객들의 입담 및 민간전승으로 인해 상 왕조에 대해 더욱더 골격을 잡지 못한 채 은본기를 써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의 기술과 문화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7]이 아로새겨진 청동기다.
이 시기의 청동기명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
상대의 청동 항아리
이러한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는 데 애를 먹게 한다. 이러한 청동기들의 주된 용도는 제사용이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오히려 청동기 주조 기술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으나, 이는 단순한 주조 기술의 후퇴라기보다는, 청동기의 용도가 단순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나라대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에 자신이 주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자랑에 대한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새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성은 오히려 주대의 것이 더 높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대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8] 자주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한 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자주 있어서, 건물을 짓기 전 희생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상대의 건축물 유적에서는 기둥 아래에서 사람의 해골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게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바로 당시의 궁전이다. (...)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제(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인신공양
정사일에 점을 친다.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 (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 갑골문합집 32161[9]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 갑골문합집 22594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 (甲子卜,㱿貞:妥以巫) 갑골문합집 5658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貞: 今丙戌燎ㅁ,[10] 有從雨?) 갑골문합집 9177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동쪽의 이(夷)족과 양을 치는 유목민들인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상나라는 훗날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다. 그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볼 수 있다.
인신 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이는 방법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卯)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고 갑골문 기록 중에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까? 하고 점치는 기록이 있다.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皿)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내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주왕 제신이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점은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으로 딱히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쓰기 시작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 공양을 줄이려 한 듯 하다. 포락 등의 기록은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전설로 남아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같은 전설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대의 잔악한 짓 일람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신 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다.[11]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 문자로 눈(目)을 상처내어 멀게 하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거기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12] 그리고 이 잘려진 머리들은 골기 공장(뼈 공장)으로 보내져 골기(뼈 그릇)를 만드는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에는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게다가 인신 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 솥 안에 삶아진 사람 머리가 들어있었다. 결국은 상나라의 멸망도 아즈텍 왕국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이런 잔혹한 인신 공양에 분노한 주변 민족들이 모두 주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 시대에도 상대와 비교해서 굉장히 줄어들기는 했어도 인신 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13]을 받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다가[14]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대체로 사라진다.
밀림 사이에 있는 도시 국가 + 주변의 이민족들 + 대규모 인신 공양이라는 상황을 놓고 볼 때, 아무래도 다른 대륙 및 역사 속에서 상나라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문명은 멕시코의 아즈텍이다. 당시 기록에는 상나라의 식인 행위도 자주 사료[15]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하동서설에 기초한 '용봉문화원류'라는 중국 책에서는 아즈텍을 중국과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정글'에 둘러싸인 자연 환경과, 기술적으로 지배 능력의 한계와 부양 인구의 한계가 있는 고대 도시국가의 한계가 나타나 비슷한 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신 공양 외에도 아즈텍과의 공통점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과 외부 민족들이 칭하는 명칭이 각기 달랐다는 점. 아즈텍은 스스로를 맥이곶(스페인식 발음 : 멕시카)라고 했고, 상 또한 주변 민족에 의해 은이라고 불렸던 점이 유사하다.
[주]
[1] 참고로 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
[2] 다만 상나라의 시조 설이 제곡과 연결되는 것처럼, 주나라의 시조 후직 역시 제곡과 연결된다. 이를 보면 제곡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그저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서에서야 이 당시의 중국이 일통된 국가인 양 묘사되는 것이고 당시 실상은 민족부터 다른 완전 별개의 남남인데 그냥 힘이 없어 부하 노릇하던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탕왕이 하나라를 박살내고 패권을 쟁취했다고 한들 그걸 건국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당장 사기에서도 상의 시조 설을 상나라에 봉한 게 순 임금 시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상나라는 이때 건국되었으되 하나라를 내쫓고 중원의 일인자인 천자가 된 건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라 시각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상의 뒤를 잇는 주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3] 사기에서는 하, 상, 주의 조상이 모두 황제로 나오는데, 이것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가장 이상한 경우는 주나라다. 황제에서 걸까지 총 20대, 황제에서 탕까지 총 17대로, 3대 차이는 300년 정도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황제에서 주까지 총 46대이고, 황제에서 무왕까지 총 19대다. 밀양박씨에서 약 천년 동안 약 20대가 벌어졌는데, 이를 적용하면 주나라는 직계에서 매우 먼 자손이 되어버린다. 황제부터 주까지 모든 사람이 스물에 자손를 낳았다고 해도 황제에서 무왕까지 모든 사람이 같은 나이에 낳았다고 하면 거의 쉰 살의 나이에 자손을 낳아야 가능하다. 주나라가 족보를 조작하진 않았을까?
[4] 오거가 (걱정하며)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상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 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 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 戎 翟叛 君其慎終" - 사기
[5] 이러한 사실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
[6] 주나라와 상나라의 관계만 보더라도, 주왕 이전에 이미 주나라가 상나라와 병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왕의 몰락 이후에도, 송으로 이름이 바뀌고 패권을 빼앗겼을 뿐 상의 세력은 주와 병존했다.
[7]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상상의 동물.
[8] 기와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9] 이해 편의상, 갑골문 원문을 한자로 치환해서 적었으며 해석은 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김경일 교수의 것을 참조했다. 다른 인용문도 같다.
[10] 女와 才가 붙은 글자인데, 일단은 임시로 '재'라 읽었다.
[11]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고 있다.
[12] 이를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보았지 머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상나라 시대에는 인식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볼 근거는 없다.
[13]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 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많은 지방에서 여전히 인신 공양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14] 대표적으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나라 양공. 그 외에 춘추오패에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받는 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같이 끌고 들어갔다.
[15] 은주왕 제신은 주문왕의 장자 백읍고를 죽이고 요리해서 그것을 주 문왕에게 먹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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