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기자조선(箕子朝鮮) 후손
행주 기씨(幸州 奇氏)
행주 기씨(幸州 奇氏)는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마한의 국왕이었던 원왕(元王) 훈(勳)의 3남 우성(友誠)이며,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한다.
행주 기씨 족보에서는 기자조선을 연 기자(箕子)를 선계조라고 한다.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 및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의하면 마한(馬韓) 8대 원왕(元王) 훈(勳)의 아들로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友諒)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우성(友誠)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되었다고 한다. 행주 기씨 족보에서는 기우성(奇友誠)은 기자조선을 연 기자(箕子)의 48대손이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온조왕 기록에는 기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의 북쪽, 즉 행주(幸州)로 옮겨졌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기문유(奇文儒)의 아들로 고려 인종 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우성의 65세손[1]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한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동생 기윤헌(奇允獻) 집에 선계의 기록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688년(조선 숙종 14) 족보를 개편할 때 이곡(李穀)이 지은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 영안왕(榮安王) 기자오(奇子敖)의 행장(行狀)을 따라서 영안왕의 5대조인 기순우를 1세로 기록하게 되었다.
주요 집성촌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전라남도 장성군 / 전라남도 무안군 망운면 연리 /
황해도 금천군 좌면 암사리 / 인구(2015년) : 27,379명
청주 한씨(淸州 韓氏)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충청북도 청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한란(韓蘭)은 청주 방정리(方井里) 무농평(務農坪)을 개척하여 부농이 되었으며, 928년(태조11) 고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고 한다.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마한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각각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청주 한씨(淸州 韓氏),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되었다고 한다. 족보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한 기자(箕子)의 후예라고 주장하나, 이는 학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상계(上系)를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세계가 명확하지 못하여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고 있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0세 무렵에 현재의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方西洞)으로 이거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인근의 넓은 농토를 개척하여 부농이 되었다고 한다.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10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고 한다.
주요 집성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 전라북도 고창군 / 전라북도 순창군
인구(2015년) : 752,689명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는 기자조선을 기원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선우정(鮮于靖)은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냈다.
비조(鼻祖) 기자(箕子)는 주나라 무왕 때 기자조선을 세우고 그의 맏아들 기송(箕松)이 2대 장혜왕(莊惠王)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기중(箕仲)을 우산국(于山國)에 봉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조선의 선(鮮)자와 우(于)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로 삼았다고 한다. 기자가 식읍(食邑)을 하사받은 태원(太原)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하여 금마군(金馬郡)에 나라를 세워 마한(馬韓)이라 칭했으나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8대 원왕(元王)의 아들 기양(箕諒)이 평안남도 룡강군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창도(創都)하여 나라를 황룡(黃龍)이라 하며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기양의 10세손 기병(箕柄)이 고구려에 나라를 빼앗겨 서민(庶民)으로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세계가 명확하지 못하여 고려 고종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선우정(鮮于靖)을 1세조로 한다.
중시조 선우협(鮮于浹, 1588년 ~ 1653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중윤(仲潤), 호는 돈암(遯菴)이며, 평안도 태천(泰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숭인전감(崇仁殿監) 선우식(寔)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억수(億壽)의 딸이다. 38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 이황(李滉)이 남긴 장서 수백권을 열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학문을 질문하였다. 그 뒤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으며, 일생동안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사직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된 것을 비롯,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 등에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치심궁리(治心窮理)와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도를 내용으로 하는 상소문을 올려 시행하게 하기도 하였다. 심성이기(心性理氣)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주역』에 통달하였다. 당대의 석학 김집(金集)과도 학문적인 토론을 교환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이 관서부자(關西夫子)라 칭하여 존경하였다. 1883년(고종 20)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평양의 용곡서원(龍谷書院)과 태천의 돈암서원(遯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돈암전서』 7권 5책이 있다.
주요 집성촌 : 평안남도 대동군 / 평안북도 창성군 / 태천군 / 충청남도 공주시
인구(2000년) : 3,560명 (남한 632위)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선우씨의 80%는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대규모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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