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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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국제 해상교통

자연정화 2018. 6. 7. 19:09

고려의 국제 해상교통

선대의 항해기술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다

 

삼국과 가야가 개척한 해로 이용

 

고려가 해상교통을 장악해 중국·일본·동남아, 아라비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이전 고대한국 여러 나라들이 개척해 놓은 해상교통과 항해술, 그리고 조선술(造船術) 덕분이었다.

 

금관가야국은 서기 48년경 인도의 공주를 김수로왕이 왕비로 데려올 때 바닷길을 이용하는 국제해로를 개척했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4세기말 서해로 내려와 백제를 정벌해 황해의 뱃길을 개척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외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고, 특히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하면서 한·일간 해상교통을 열었다.

 

신라는 통일신라 말기에 와서 해상왕 장보고가 중국·남지나·일본까지 해적소탕과 교역 등으로 활발히 진출했고 중국 산동반도와 서해남양만 사이 황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했다. 발해는 동해 북쪽 훈춘에서 동해를 횡단해 일본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에 성공했다.

 

고려는 이처럼 고대 여러 나라가 개척한 항로를 활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해상 활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삼국과 발해가 개척한 해상교통로를 고려가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통일 때 선대 4국의 항해·조선 기술자들이 고려 백성으로 유입되어 고려의 해상교통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해상교통을 발전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한 것은 지방의 세도가인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큰 강이나 해안 지역에 살면서 상선을 가지고 중국·일본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했고 이는 고려가 해상교통을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운(漕運)제도가 발전시킨 해상교통

고려의 해상교통 발전에 또 하나 큰 도움이 된 것은 조운제도였다. 전국의 강과 해변에 설치된 13개의 조창 중 서해와 남해안에 주로 해창이 산재했는데, 고려는 해창에 입고된 세곡미를 개성의 중앙창고로 운송하는 해로를 개척하며 연안 해상교통을 발전시켰다.

 

각 조창에 배치된 세곡미 운송선인 초마선단이 개성까지 오가기 위해 개척한 해로 중에서 가장 멀리 위치했던 것은 남해안 창원의 석두창이었다. 여기에서 개경의 중앙창고인 광흥창과 풍저창까지 가는 해로는 남해와 서해를 통하는 바닷길로서 가장 길었다. 즉 경남 창원 석두창~한산도 해협~사량도~남해도 북방~전라 좌수영 남방~나로도 북방~완도 북방~보길도 북방~진도 북방~무안의 자라도 북방~임자도~지도해협~영광 법성진~옥구 서방~서천의 연도 동방~보령의 원산도 남방~서산의 안흥진 서방~당진의 대난지도 서방~월미도와 영종도 사이 해협~강화도~개경에 이르는 해로로서 돌아갈 때도 이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고려 조운과 역로

 

그런데 이 해로에서는 해난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미숙했던 항해기술과 간만의 차가 심하고 험한 바닷길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태안반도의 안흥량(만리포) 앞바다에서 가장 많은 좌초 해난사고가 일어났다. 이곳은 수많은 작은 섬과 암초투성이의 복잡한 해안선이 있어 간만의 차가 어느 곳보다 심하고 파도가 험했다. 여기서 생긴 사고 때문에 세곡미 수송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런 해상사고를 막기 위해 고려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태안반도에 남북으로 운하를 뚫고자 했다. 인종은 1132년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충신 정습명(鄭襲明)에게 안흥량 운하건설의 책임을 맡겼다. 어명을 받은 정습명은 수천 명의 군인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워낙 단단한 암반이 많아 10리 정도 굴착하고는 더 이상 파낼 수 없어 인종12년(1134)에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말기인 1388년 우왕14년에 정권을 잡은 이성계 장군은 조운제도가 쇠퇴해 국가제정이 어렵게 되자 조운을 다시 살리기 위해 안흥량 운하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조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조운재활에 큰공을 쌓았던 삼도수군도체찰사 왕강(王綱)을 시켜 다시 땅을 파게 했다. 왕강은 태안반도의 서산 남쪽 천수만에서 서산북쪽 대난지도 해협을 잇는 운하를 남북으로 파서 험한 암흥량 바닷길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암석투성이 바닥과 험한 조수가 공사를 방해해 운하건설 계획은 영원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국과의 해상교통

고려는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함경남북도 북부 땅을 여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고대로부터 중국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교류해온 고려는 여진의 방해로 두 나라 사이의 육로교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의 교류통로를 황해를 건너다니는 해상교통으로 바꿔갔다. 백제와 신라가 개척한 중국해로를 사용하는 한편 삼국시대 때보다 한층 더 교역을 활발히 하고 여진·원나라와 해상전투를 통해 중국과의 해상교통을 더욱 발전시켰다.

 

특히 11세기 초부터 12세기 후반까지는 빠르고 가까운 황해횡단 뱃길을 통해 송나라와 활발하게 사신·문화 교류, 교역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항해술이 미숙해 두 나라의 황해 연안을 따라 왕래를 했지만, 고려는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달시킨 덕분에 새로 개척한 황해 횡단 직행 해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가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서기 1019년이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사신 호부시랑 최원신(崔元信)이 황해도를 횡단해 중국의 산동반도까지 큰 사고 없이 도착했으나 상륙 항구인 등주 앞바다에서 험한 풍랑으로 배가 난파해 일행 90명이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후에는 계절풍을 이용해 황해 횡단 직항로를 오갔다. 고려에서 송나라로 갈 때는 늦가을에 부는 북동풍을 이용했고, 중국에서 고려로 올 때는 늦봄에 부는 남서풍을 탔다. 고려시대 중국과의 직항로는 크게 계절풍에 따른 네 가지 루트가 있었다.

 

신라의 무역교통로

 

첫째 해로는 개경에서 중국으로 가는 황해 중부 횡단 북해로인데, 개경의 벽란도항을 출발해 해주만을 지나 옹진반도로 북상한 다음 백령도에서 황해를 직선으로 황해를 횡단해 중국 산동반도 북해안의 등주항에 도착하는 길이다. 이 항로는 만 2일 걸렸는데 고려시대 전기에 사신들이 주로 이용하던 루트로서 늦가을에 부는 북동풍을 타면 비교적 쉽게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루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백령도가 황해 중부 횡단항로에서 중요한 등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올 때도 남서풍을 타고 같은 해로를 이용했으나 백령도 북쪽 장산곶은 급하고 험한 파도 때문에 파선이 잦아 이곳에서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곳이 바로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다.

 

둘째는 개경에서 중국으로 가는 황해 중부횡단 남해로다. 개경의 벽란도항구를 출발해 경기만을 지나 북상한 다음 옹진반도 앞바다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황해를 횡단하면 산동반도 남쪽 청도만에 도착한다. 여기서 송나라 북방의 최고 무역항인 판교진(자오센)항구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 해로는 늦봄에 부는 북동 계절풍을 타고 무역상들이 고려중기부터 주로 이용했다.

 

셋째는 동중국해 사단해로다. 이 뱃길은 중국에서 고려로 올 때 이용했다. 송나라의 최대 항구였던 명주(닝뽀)를 출발해 주산열도 앞의 보타도로 나와 비스듬히 사선으로 고려를 향해 북상한 다음 흑산도와 군산 앞바다의 고산군도를 지나 경기만을 거쳐 벽란도항에 도착하는 길이었다.

 

이 해로는 주로 남서 계절풍이 부는 늦봄에 중국서 출발할 때 이용했는데, 순풍일 때는 5일이나 걸렸지만 가장 안전한 해로였다고 고려를 다녀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고려여행기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록하고 있다.

 

넷째는 황해 남부 사단해로로 고려에서 송나라의 명주 항구로 가는 바닷길이다. 북서계절풍을 타기 위해 주로 늦가을에 벽란도 항구를 출발해 황해 중부횡단 남해로를 이용해 청도만까지 건너가서 다시 중국해안을 따라 남하한 다음 주산열도에서 명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일본과의 해상교통

고려가 일본과 바닷길로 처음 교류한 것은 태조 2년인 서기 937년이었다. 일본 사기인 <일본기략(日本記略)>을 보면 고려사신이 가지고 온 태조의 편지를 일본 왕이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2년 후인 서기 939년에 일본의 태재부가 고려의 사신을 돌려보냈고 광종 25년(974)에 일본의 교역사가 고려에 입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을 보면 고려가 건국 초기부터 일본과 해상교류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일본간의 교역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문종 10년(1053년) 이후부터 나타난다. 일본 무역선이 처음으로 개경에 온 것은 문종 27년인 서기 1073년이었다. 이때 일본측은 상품을 진상하고 양국간 교역을 청했다. 이후 의종 때인 1170년까지 24회나 일본상선이 고려에 들어와 상거래를 했다는 기록이 <일본기략>에 있다.

 

고려에서 일본으로 갈 때는 3가지 해로를 이용했다. 첫째 해로는 경남 창원의 합포를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규수로 들어가는 길인데 주로 남해안의 상인들과 일본 원정군이 이용했다. 서기 1274년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원정할 때도 합포~쓰시마~규수해로를 택했다.

 

다음은 개경의 벽란도항을 출발, 서해안으로 남하해 제주도 해협을 지나 유구(오키나와)를 가는 뱃길로 고려사신들이 일본으로 갈 때 주로 이용했다. 오키나와행 해로는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쿠로시오(黑潮)해류를 타고 이어졌다. 가까운 동해 횡단길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계절풍이 부는 기간이 짧고, 약하거나 강해서 이용하기가 어려다가 동해 파도가 험하고 폭풍도 잦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항해술

고려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백제·발해가 개척하고 발전시킨 항해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왕성한 해상교류를 통해 더욱 발달시켰다. 고려인들은 해마다 12월에서 2월까지 북동쪽에서 남으로 부는 계절풍을 돛으로 이용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962년부터 993년까지 중국으로 파견되는 견사들이 28회나 이 시기에 고려를 출발했다.

 

송나라 사신들은 고려로 올 때 남태평양에서 북쪽으로 5월과 8월 사이에 부는 남동계절풍을 많이 이용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후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보면, 5~8월 사이에 부는 남동풍을 타고 명주를 출발, 주산군도 앞바다에서 사선으로 황해 남부를 횡단 북상해 개경의 벽란도항에 도착하는데 20일이 걸렸으나 상선(商船)은 순풍일 때 7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도 항해술에서 계절풍 이용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5~8월 사이에 부는 남동계절풍은 풍향의 변화가 심해 고려에서 송나라 명주로 가는 시간보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송나라와 고려는 역풍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무역선 돛의 구조를 개선했다. 이후 송의 명주를 출발해 동중국해를 사단(사선으로 비스듬히 횡단)하는데 2일이, 고려 개경의 예성강 입구까지 가는데 모두 4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송사> 중 고려조에 있다. 견사선(遣使船)보다 무역선의 속도가 훨씬 빨랐는데,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는 중국과 고려 사이 바닷길이 빠르면 4일, 보통 7일이 걸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속도를 높이는 항해술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치·문화·상업적으로 밀접하고 왕성하게 교류했다. 따라서 항해술도 두 나라의 우수한 부분을 서로 도입해 발전시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했던 계절풍을 이용할 때 송나라 무역선은 돛을 조종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바람이 배 뒤쪽으로부터 불 때는 배가 전진하기에 가장 좋으므로 돛을 모두 올려 활짝 펴 빠르게 나아갔다.

 

항해하다가 바람이 일정하지 않을 때는 돛 양쪽에 달려있는 보조 돛인 뜸을 펼쳐 바람을 조절하고 키로 방향을 잡아 지그재그식으로 전진했다. 바람이 강하거나 약할 때는 돛 상단에 달린 풍향 조절용 돛 야흐범을 조종해 속도를 조절했다. 배가 전진할 수 없을 만큼 역풍이나 돌풍이 갑작스레 불어닥칠 때는 돛과 닻을 전부 내리고 배를 대피시켰다. 또 육지 가까이 급한 조류나 암초가 많은 해역을 지날 때는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전진했다.

 

이처럼 고려의 항해술은 발달해 있었지만 지금처럼 과학적 발달이 아닌 물리적 발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변화무쌍한 바다의 불가항력적 돌풍이나 태풍, 산더미 같은 파도에 많은 배들이 파손되고 사람과 재물이 수장되는 해난 사고도 자주 있었다. 고려 말 정몽주가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같이 갔던 10명의 사신 중 정몽주를 포함한 2명만 살아남았다.

 

계절풍을 이용하고 선박의 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변화무쌍한 황해를 쉽게 건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지리와 나침반 등 항해장비를 쓰거나 별·해·달의 이동을 측정하는 관측성항해법도 이용했다. 관측성항해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뱃길을 잘 아는 신라의 항해사인 암해자(暗海者)들과 달, 태양, 별의 이동을 나침반 등 기구로 관찰하고 측정해 항로를 바로잡는 발해의 천문생(天文生법), 그리고 배를 잘 조종할 줄 아는 선원인 백제의 해민(海民)들이 대거 고려 백성으로 유입된 데 힘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