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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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길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兒哈赤)

자연정화 2018. 6. 20. 14:44

아이신길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兒哈赤)

 

누르하치, 나는 오랑캐다

 

1583년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는 몸으로 백두산에 숨어든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가득 찬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갑병으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비록 그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13벌의 갑옷 밖에 없었지만, 이는 13명의 창업 동지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거병을 했어도 다른 동지들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족들도 외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 마저 나타났다. 얼마 지나자 그 밑에는 30여명의 동지들과 수하의 100여명의 부하가 생겨난다.

 

사나이는 이제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뜻을 펴고자 일어선다. 때마침 조선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동북아의 세력판도를 급변시켰고, 그는 이 틈을 타 사분오열되어 있던 자기 부족을 통합시켜 나간다. 그 후 사나이는 민주족 특유의 발 빠른 기마전술과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은 채, 신출귀몰하는 전술을 이용해 100만 명나라 대병을 대파한다. 이어 그의 아들은 창업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마침내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을 뛰어넘어 중원에 청(靑)의 깃발을 힘차게 내리꽂는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청(淸)태조 누르하치다.

 

 

누르하치는 1559년 건주여진이라 불리는 여진의 한 부장(部將) 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교챵가(覺昌安)라 하였고, 건주 우위(建州 右衛)의 추장 왕고(王杲)의 부하 무장(武將)이었으며, 아버지는 다끄시(塔克世), 어머니는 왕고의 딸로 이름은 에메치(厄墨氣)였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는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 있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란 이름은 천만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조부가 지어 준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어두운 밤에 태어났다. 운명적으로 야생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누르하치의 아명은 ‘한자(罕子)’다. ‘귀하다’는 뜻이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진 것은 누르하치가 태어날 때 불이 났는데, 불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중에 뭔가 큰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타죽지 않게 된 거라는 강한 믿음을 주었다. 불사신을 만들어 낸 믿음이었다. 우연히도 그의 이름이 뜻하는 ‘한(罕)’은 왕을 뜻하는 ‘칸’ (汗- 임금의 호령(號令)과 뜻이 같다. 결국 그는 이름처럼 칸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매우 총명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검술과 봉술에도 능하였다. 귀신같은 활솜씨 때문에 신전수(神箭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조부는 금나라를 건국하여 천하를 호령한 아구타(阿骨打)식 자식 교육법을 따랐다. 아구타는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사슴이나 돼지의 관절로 만들어진 인형인 ‘가추하’로 단련시켰다.

 

그 같은 것을 생각해 누르하치의 조부는 손자를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아구타나 칭기스칸과 같은 인물로 단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본받아야 할 벤치마킹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내면에 투영해 보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생각이 커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 점이 그가 한 족속의 인재로 커서 중원의 주인공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누르하치의 어린 시절은 참담했다. 그는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가『삼국지연의』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무순성의 장사 부호 동양성(冬養性)으로 부터였다. 동양성은 당시 제2의 제갈량이라 불렸던 사람으로 여진지리에 매우 밝았다.

 

이 무렵 누르하치는 ‘삼고초려’라는 고사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에게 인재를 얻음에 있어 이 같은 교훈은 아마 머릿속 깊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훗날 중국과 맞서 싸울 때 보여준 그의 지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 두 소설에서 받은 영감이 컸으리라고 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 자신은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총명하고 용감한 아들들과 조카가 있었다. 한 부족장의 지위는 결국 집안 내부의 튼튼한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누르하치가 거병 후 힘을 축적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데에는 수족과 같은 피붙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뒤따랐다.

 

알다시피 광활한 중국 대륙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천하를 재패하고자 수많은 영웅호걸이 북방에서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겨레의 광개토대왕,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여진족의 아구타, 몽고족의 칭기스칸 정도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영웅들의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일어나 중국을 지배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사실 여진족은 서주(西周)시대부터 수(隋), 당(唐)을 거쳐 송(宋), 요(遼), 금(金), 원(元)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민족으로써 고난과 즐거움을 반복한 역사였다. 여진족에게 고통과 쇠퇴의 시기는 대부분이 내부에 분열이 있어 서로를 죽이고 다툴 때였다. 누르하치 등장시기에도 여진은 건주부(建州部), 해서부(海西部), 동해부(東海部), 장백부(長白部) 등 네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다.

 

건주부는 혼하(渾河), 소자하(蘇子河), 동가강(佟佳江) 일대에 살고 있었고, 해서부는 송화강의 서쪽, 요하의 동쪽에 살고 있었고, 동해부는 영고탑(寧古塔)의 동쪽에 살고 있었으며, 장백부(長白部)는 백두산에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삼위만 해도 혼하부(渾河部), 완안부(完顔部), 동고부(董鄂部), 저천부(哲陳部), 소극소호하부(蘇克蘇護河部)의 다섯 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여진족은 광할한 여진의 초원 지대에 펼쳐져 살고 있었으나, 그 무렵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통합되지 못했으므로, 힘을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방향 없는 힘은 동족간 상잔으로 이어졌다. 여기엔 한족(漢族)의 교묘한 이간책이 크게 한 몫 했다.

 

<여진족의 분포>

그러던 차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동북아시아에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의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의 옛 터전인 여진 허투알라에서 건주여진의 후예로, 누르하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군사력을 키워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를 위한 과정으로 그는 엄밀한 군사적 제도를 마련했다. 엄격한 군기를 앞세워 소수민족인 여진족을 통합하고, 마침내 그 여세로 중원으로 나아갔다.

 

25세에 독립하여, 68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40년에 걸친 누르하치의 생애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날이 새고, 해가 저물었다. 그의 정복전은 언제나 CEO가 앞장서는 친정(親征)이었다. 스스로 앞서서 나아감으로써 백성들이 따르게 했다. 여기에 바로 창업 CEO다운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누르하치,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섰던 사람이며, 동시에 21세기형 경영을 실천한 미래의 개척자였다.

 

<아이신길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兒哈赤) 연표>

1559 가정(嘉靖) 38년: 누르하치 탄생

1577 만력(萬曆) 5년: 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감

1583 만력 11년: 조부 교창가와 아버지 타쿠시가 구레성에서 전사, 누르하치 거병

1586 만력 14년: 원수 니칸 와이란 토멸

1587 만력 14년: 흥경(興京)에 구 노성(舊 老城) 축성

1593 만력 21년: 9국의 연합군 격파

1595 만력 23년: 명에 의해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봉해짐

1596 만력 24년: 조선 사진 신충일(申忠一)이 구로성 방문

1599 만력 27년: 에르데니와 가가이에게 명해 만주문자를 만들게 함(누르하치가 고안했다고도 함)

1603 만력 31년: 흥경 노성(老城)에 천도(허투알라성)

1613 만력 41년: 오랍부 정복

1615 만력 43년: 팔기(八旗)제도 완성

1616 천명(天命) 원년: 한(han: 王)에 오름

1618 천명 3년: 명에 7대한(七大恨) 천명. 무순성(撫順城) 공략

1619 천명 4년: 사르후 전투. 엽혁부를 멸함. 후금국 천명황제 인(印)을 사용

1621 천명 6년: 심양성(瀋陽城), 요양성(遼陽城) 공략

1625 천명 10년: 심양으로 천도(성경(盛京)이라 개칭)

1626 천명 11년: 영원성(寧遠城) 공격중 홍이포 파편을 맞고 부상당함. 심양성 외 23킬로미터 떨어진 애계보에서 사망

9월 1일: 태종(太宗) 홍타이지 즉위

 

 

여진 (여진어: 주션) 족

 

 

여진(여진어: 주션, 만주어: ᠵᡠᡧᡝᠨ 주션 문화어: 녀진, 중국어 정체: 女眞, 간체: 女真, 병음: nǚzhēn)은 중국의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과 한반도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 주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이다. 12세기에 들어 여진족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금나라를 건국했다. 17세기에 중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청 황제의 명에 따라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반도 함경도 북부에 거주하던 조선 귀화 여진족은 20세기 초까지 재가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한민족(韓民族)에 흡수되었다.

 

여진(女眞)은 본래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된 족이다. 삼국 시대 갈족과 선비족이 대륙에 침투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5호 16국 시대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6개의 부족이 강성하다가 탁발부가 5호 16국을 정리하고 화북을 통일 북위을 세운다. 이후 말갈, 갈족은 선비족의 예하 부대에 포함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적으로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갈족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략했을 때 그 예하부대에 갈족, 말갈족이 있었고, 유연을 죽이고 후조를 세운 석륵(石勒)도 갈족이었다. 북위, 북주 시대 갈족과 선비족은 융화 되었고 당나라 시대 거란족의 일파가 되었다가 요나라가 성립할 무렵에 요동에서 만주 동남부로 일부가 이동하였다.

 

 

이들은 금나라를 1115년과 1122년 사이에 세웠으며 이 왕조는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금나라가 거란을 통합하자, 거란과 여진의 민족 통합 과정이 있었다. 금나라는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로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이주시켰다. 이 시기에 거란의 일부가 여진으로 융화된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 여진(野人女眞), 해서 여진(海西女眞), 건주 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었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제국이 된다.

 

 

야인여진(野人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 중의 하나로의 4부족으로 구성된다.

 

여진족은 현대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지린 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 그리고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 파아손 (巴兒孫)

▶ 착화(著和)

▶ 홀라온 (忽剌溫) :1436년 (함경도)

▶ 호(胡), 오랑캐 (瓦爾哈/兀良哈三卫(泰宁、朵颜、福余)) =올랑합 ;이인(夷人);돌궐;이족(夷族);동이(東夷傳);蠻夷;戎狄;夷狄;서융(西戎);이제(夷齊); 남만(南蠻): 매독(每毒)

1436년 함경도

1460년 (세조)함경도 :북적(北狄) = 북쪽/북방 오랑캐

:낭패아한/낭발아한 (浪悖兒罕/浪孛兒罕); 동속로첩목아 (童速魯帖木兒)

ca. 1583-7년 : 이탕개/니탕개(尼湯介)& 번호(藩胡), 울지내(鬱只乃)

 

 

해서여진(海西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중의 하나로 4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명나라 말기에 개원, 길림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이다. 해서여진은 명나라 측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다른 부족들은 그들을 여진어(만주어)로 후룬 굴른(扈倫, 후룬국, 홀랄온 또는 호륜으로도 표기)이라고 불렀다. 후룬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 4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부족이며, 만주사에서는 후룬사부라고 불렀다.

 

명왕조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과 현대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길림 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해서여진(海西女直)은 16세기에서 17세기의 명말 청초 경에 개원, 길림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의 집단이었다. 해서여진은 명나라 측에서 분류한 이름으로 후룬국 (忽剌國, 扈倫)으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후룬국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의 4개 정치 체제로 구성되어있으며 만주사의 후룬 4부로 불렸다.

 

16세기 말에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자, 해서여진의 후룬 4부는 1593년 이후 후금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룬 4부는 상호 불화 때문에 협력하지 못하고, 건주여진을 통일 세력으로 정리한 누르하치 앞에서 각개 격파되어, 1599년에 하다, 1607년에 ‘후이파’, 1613년에 ‘우라’가 차례로 멸망되어 후금에 흡수되었다.

 

 

홀로 남아 있던 ‘예허’는 후룬 4부의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누르하치와 격렬하게 싸웠다. 명나라의 후원을 업고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지만,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예허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에게 패배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멸망당했다.

 

후룬 4부는 후금에 병합이후 팔기에 편성되어 청나라의 지배 민족인 만주인의 일부가 되어갔다.

 

▶ 울라 (烏拉 > 1613년)

▶ 후이파 (輝發 > 1607년)

▶ 예허 (葉赫 > 1619년) :

▶ 하다 (哈達 > 1601년) : 왕타이(萬汗/王台: 1548-1582년)

 

 

건주여진(建洲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로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과 현대의 흑룡강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길림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도리와 후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그는 몽골에 대해 동맹을 시도하였다.당시에 그들은 두만강 근처에 모여 있었다.

 

아하추(阿哈出)는 후에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으며 후리가이의 부족장이었다. 1403년 그는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사령관이 되었다. 오도리의 먼터무(Mentemu, 孟特穆)는 건주 좌지휘사의 지도자가 되었고 중국인의 성씨인 동(童)을 하사받았다.

 

영락제는 북원에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마(馬)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홍치제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1500년대에 이르러 건주 여진의 세력은 점차 요동과 조선의 강역으로 확장되려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1586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 여진족을 다시 공격하여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기도 하였다.

 

같은해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나라(淸)의 기반이 된다.

 

▶ 오돌리 (Odoli, 斡都里, 斡朵里, 吾都里, 斡朵怜) (지금의 회령지방에 거주)

- 먼터무 (Mentemu, 孟特穆, 몽케 테무르, 猛哥 帖木耳, 1405년 ~ 1433년)

- 충샨 (充善, 1419년 ~ 1467년)

- 기오창가 (Giocangga, 覺昌安, ? ~ 1583년)

누르하치 (Nurhaci 努爾哈赤, 1559년 ~ 1626년), 기오창가의 손자이자 후일 청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 후리가이 (Huligai, 胡里改路)

- 아하추 (Ahacu, 阿哈出, ? ~ 1410년), 후일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다.

- 시기야누 (Šigiyanu, 釋加奴), 후일 이현충(李顯忠)으로 알려졌다.

- 이만주 (李滿住, 1407년 ~ 1467년)

▶ 도은 (桃温 혹은 桃溫)

▶ 발고강 (荸苦江)

▶ 탈알령 (脱斡怜)

- 우디거 (Udige, 兀狄哈, 영고탑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 왕고 (王杲, ? ~ 1575년)

- 아타이 (Atai, 阿台, ? ~ 1583년)

- 니칸 와일란 (Nikan Wailan, 尼堪外兰, ? ~ 1586년)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돌골과 훌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이리하여 여진족의 한화(漢化)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락제는 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말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뒤에 이일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여진족을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게 된다.

 

1586년 30년이 지나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명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의 기반이 된다.

 

 

여진족은 일반적으로 초기 조상들의 유목 전통을 따랐다. 거란과 몽골족들처럼 이들은 힘과 말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궁술과 사냥을 즐겼다. 그들은 샤먼 의식을 행하였으며 하늘 신(abka-i enduri, 압카이 언두리 또는 abka-i han, 압카이 한)을 섬겼다.

 

초기 여진 문자는 1120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完顔希尹)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은 거란 문자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거란 문자는 다시 한자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는 고립어이며 여진 및 거란의 언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 방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고 여진어는 입말로만 살아남게 된다. 이후 16세기 말까지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이용해서 문자생활을 하다가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어를 이용한 문자생활을 하게 된다.

 

여진 사회의 문화는 몽골족의 큰 영향을 받았다. 몽골족과 여진족 둘 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한"(Khan: 문어몽골어로는 qaɣan, 만주어로는 han으로 표기됨.)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왕이든 부족장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주 강력한 부족장은 "beile"(bəilə, 버일러)(귀족)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몽골의 "beki"(베키)와 터키 민족의 "beg"(베그) 또는 "bey"(베이)에 해당한다. 또한 몽골족과 터키 민족처럼 여진족은 맏아들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들 또는 사촌은 누구든지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명나라 시대 동안 여진족은 고대적인 씨족(姓: hala, 할라)의 소규모 씨족(氏: mukun, 무쿤, 또는 hala mukun, 할라 무쿤)적인 사회 단위에서 생활했다. 여진족 씨족의 일원들은 동일 조상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단일한 장(mukunda, 무쿤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모든 씨족들이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자주 분쟁과 합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여진 가정 (boo, 보오)은 하나의 가족 (booigon, 보오이곤)처럼 살았으며 일반적으로 혈연으로 맺은 다섯개에서 일곱개의 가족원들과 노예들이 살았다. 가정들은 소대 (tatan, 타탄)를 형성하여 사냥을 하며 음식을 구하였다. 전쟁 등의 대규모 활동을 위하여 기업 (niru, 니루)을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