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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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조 완안 아골타(金太祖 完顔 阿骨打)

자연정화 2018. 6. 28. 16:14

금태조 완안 아골타(金太祖 完顔 阿骨打)

 

금 태조 완안 아골타(金太祖 完顔 阿骨打, 1068년 ~ 1123년)는 금나라의 초대 황제(재위:1115년 ~ 1123년)이다. 중국식의 휘는 민(旻)이다. 완안(完顔)은 여진어(지금 현재의 만주어)로 'wo-on (g)ian'을 음차한 것이며 한어로 번역하면 '왕(王)'이라는 뜻이고, 아골타(阿骨打)는 여진어 'akutta'를 음차한 것이며, 너그럽고 넓은 아량이나 모양(寬闊 - 관활)라는 뜻이라고 한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이다. 생전 존호는 대성황제(大聖皇帝)이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여진 문자는 1119년에 금태조 아골타의 명에 의하여 완안희우(完顔希于)가 만들었고,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금나라 초대황제 완안 아골타 (재위 1115년 ~ 1123년)

 

생애

핵리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숙부와 형을 도와서 완안부가 영토를 넓히는데 크게 힘을 보탰다. 1113년에는, 동만주의 생여진과 고려 장성 밖의 여진을 통합했다. 1114년부터 납림하(拉林河)와 출하점(出河店)(일명 : 팔리성 전투)에서 요나라의 진압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요군을 영강주에서 격파했고 또 뒤이어 여러 주를 점령했다.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황제가 된 아골타는 여세를 몰아 요동 지역의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켰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인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70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대패를 당했다.

 

그는 요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으로 진출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동맹을 맺었다(해상의 맹약).

 

1120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1121년말에는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를 함락했다. 강남에서 일어난 방랍의 난으로 인해 그해에 겨우 북송은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천조제가 있는 연경을 공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요군에 연패를 당하고, 성과를 올릴 수 없자 송군의 지휘관 동관은 금에 원군을 요청.

 

 

해상의 맹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송나라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순식간에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맹약대로 연운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연운 16주의 백성들도 금나라로 이주시켰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는 세수를 징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또한 금은 연경 출병의 대가로 은 20만냥, 비단 30만 필, 전 100만관, 군량 20만석을 요구했고, 북송은 이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23년에 병에 걸려서 회령부로 가던 중에 객사했다. 후사는 금 태종이 계승하였다.

 

 

금(金)나라

 

대금(大金, 1115년~1234년) 또는 암반 안취운 구룬(여진어: Amban Anʧu-un Gurun, 만주어: Amba Aisin Gurun)은 여진족이 중국 동북지방, 몽골, 화베이 일대에 세운 왕조이자 동진국, 청나라와 더불어 만주의 제족 중 대표적인 퉁구스계 국가였다. 태조 아구다가 회령부에서 1115년에 건국했으며, 1153년에 해릉왕이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뒤 몽골 제국이 압박하자 1214년에 변경(汴京, 지금의 카이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몽골 제국과 남송 연합군에 멸망당했다. 태조부터 말제까지 10명의 황제가 재위했다.

 

국호

금의 국호는 금대 여진어로 암반 안취운 구룬(여진어: Amban Antʃun Gurun), 청대 만주어로는 암바 아이신 구룬(만주어: Amba Aisin Gurun)으로 읽는다.

 

완안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의 건의로 나라를 개국할 때 국호를 대금으로 삼은 이유는 복간수 완안부의 안출호수(按出虎水, 여진어: Anʧu-bira)에서 나는 금은 요나라의 국호인 빈철처럼 변괴하지 않고, 완안부의 색과 동일한 백색이었기 때문이다.

 

후에《흠정만주원류고》를 간행한 청대 학자들은 안출호(按出虎, 여진어: Antʃun)를 아륵초객(阿勒楚喀:(만주어: Alcuka로 읽으면서 안출호가 금을 뜻한다는 《금사》지리지의 기술을 원나라 사관의 억지로 판단하여, 금 시조 함보의 출자가 신라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았다고 추측했다.

 

 

역사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당시 말갈족은 읍루의 후손으로 추측되고, 금나라 멸망후 만주에 남았던 여진족들은 정체성을 유지한 채 1635년까지 존속했다. 여진이라는 표현은 《요사》 902년 정벌기록에서 첫 등장하며, 여진족 언어의 "주션"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어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금나라의 황제들의 조상은 고려에서 온 함보라는 기록이 금사에 적혀있다. 여진족(女眞族)의 기원(起源)은 어디이며 누구인가를 쓴 《통고》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ᠮᠠᠨᠵᡠᠰᠠᡳ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ᡴᡳᠮᠴᡳᠨ ᠪᡳᡨᡥᡝ )에서는 함보가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하였다. 한국 재야사학자들은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하지만, 성과 이름이 다르며 마의태자 설화로 보아 마의태자는 한반도 내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경순왕과의 관계도 금사에 적혀 있지 않으므로 별개의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저 기록을 해석하면 여진계 신라인으로 추정된다.

 

여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하얼빈 동남쪽에 있었던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는 1115년에 요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상경회령부에서 금나라를 세웠다. 금은 요의 군대를 격파하며 영역을 확대하고, 북송과 동맹을 맺어 1125년 태종 때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후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베이 지역을 통치하려고 장방창(張邦昌)의 초(楚)와 유예(劉豫)의 제(齊)를 통해 간접 지배를 꾀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142년에 희종은 남송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따르면, 남송은 해마다 금나라에 세폐를 주고, 금의 황제는 송의 황제를 신하로 삼았다. 상경회령부에서 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뒤이은 장종은 중국 문화에 정통했지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데다 황하 범람과 몽골계 유목민이 침입해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실지 회복을 노리는 남송의 도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위소왕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선종 때인 1214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변경으로 옮겼지만, 한인과 불화가 깊어져 더욱 혼란에 빠졌다. 애종은 변경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뒤이은 말제도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은 10대 120년 만에 멸망했다.

 

정부기구

금나라는 초기에는 여진족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기존의 요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 희종과 해릉왕 때 정치제도 개혁을 단행했고, 세종 때 중국식 정치제도를 확립했다. 금은 기본적으로 송의 법제를 따르면서도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여진의 대표 관제는 발극렬(勃克烈/bogile)로, 약 20년 동안 시행하다가 중국 관제인 3성제를 도입하면서 폐지했다. 발극렬은 관장(官長), 관인(官人), 또는 부족 추장을 뜻하는데, 황제도 그 일원이었다. 초기에는 종실의 최고 실력자들을 발극렬에 임명해서 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요 사항을 결정했다. 3성제는 처음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다랐다가 해릉왕 때에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으로 통합했다.

 

금나라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데다가 여진족이 한족보다 적었다. 그래서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여진족을 보호·우대했고, 각 민족을 각각 분리 통치했다. 여진족·거란족은 맹안·모극을 통해 편성했고, 한족·발해인은 주현제로 통치했다. 주·현의 장관은 한인 관료를 임명해 자치를 권장했다.

 

지방은 전국을 19개 로(路)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府)나 주(州)를 두고, 다시 그 아래에 현(縣)을 두었다. 로에는 도총관(都總管), 부에는 윤(尹), 주에는 절도사(節度使)·방어사(防禦使)·자사(刺史), 현에는 지현(知縣)을 임명해 다스렸다.

 

금나라는 초기에는 여진족의 관습법에 따르다가 화베이를 점령한 후 1145년에 역대 중국법을 참고해 <황통조제>를 편찬했다. 해릉왕 때 <정융속황제조>를 만들어 귀족의 특권을 제한했고, 세종 때는 <대정중수제조>를 반포했다. 장종 때는 금의 기본법이 되는 <태화율령>을 반포했다.

 

군사제도

초기에는 군사도 독립된 제도 없이 맹안·모극이 통솔했다. 이후 태조는 항복한 요나라군에 요의 제도인 도총관제(都總管制)를 그대로 적용했다. 태종 때는 군사 최고 기관으로 도원수부(都元首府)를 두어 북송을 공격했다. 해릉왕은 도원수부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폐지하고 추밀원을 설치했다. 추밀원은 상서성에 속한 참모기관으로 군대 지휘권은 없었다.

 

몽골제국(원)과의 23년 공방전

 

여진족 우대

금나라는 한족을 통치하려고 여진족을 화베이로 이주케 한 다음 토지와 소를 지급하고 세금을 줄여 정착을 도왔다. 수백년 후에 등장하는 국가인 청나라처럼 여진족은 사회 지위도 일반 한족보다 높아서 형벌을 받을 때에도 유리한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여진족이 화베이로 이주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여진족과 한족의 관계가 나빠지고, 여진족은 국가의 보호만 믿다가 점차 몰락해 유랑민이 되었다.

 

또한 여진족 사이에서도 계층간의 격차가 심해졌다. 더 나아가서 세종은 여진 정신을 고취하고 근면 검약한 생활을 유도했고, 한족의 토지와 여진족 권력자의 토지를 몰수해 여진족에게 나누어 주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차별정책으로 한족과 여진족 사이의 반목이 더욱 깊어져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경제

금나라는 영토는 넓었지만 경제 가치가 있는 곳은 화베이뿐이었다. 그러나 화베이지역도 물산이 풍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요 물자는 남송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송과 분쟁이 지속되면 전국민이 물자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다.

 

정부는 주로 조세로 국고를 충당했는데 여진족이 화베이로 이주하면서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 재정난에 직면했다. 그러자 세종은 재정을 확보하려고 물력전을 실시했다. 물력전은 한족을 대상으로 재산에 따라 부과했다. 그러나 이 제도로 한족은 정부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해릉왕 때 동전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교초를 발행했다. 그러나 교초는 장종 이후 재정 궁핍으로 남발해서 가치가 폭락했고, 정부는 신임을 잃어갔다. 재정 위기 때문에 돈을 받고 관직과 도첩 등을 파는 일이 잦았다.

 

문화

여진족은 이미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전부터 한족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북송 지역을 점령한 후 비교적 빨리 중국 문화를 수용했다. 그리고 화베이지역으로 이주한 후에는 점차 한족에게 동화해갔다. 태조는 여진 문화를 보존하려고 거란문자를 본떠 여진대자를 만들었고, 희종은 여진소자를 만들었다.

 

세종은 여진부학, 여진국자학 등의 학교를 세워 여진문자를 가르쳤고, 여진진사과를 설치해 여진족 관리를 양성했다. 또한 중국 고전을 여진어로 번역하고, 여진족이 중국식 성명을 쓰거나 한족의 복식을 입지 못하게 하는 등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여진족은 전통적으로 원시 샤머니즘을 숭배했다.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요나라에서 융성했던 불교를 들여왔는데, 화베이지역에서는 유학이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이 되자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대신 도교가 성행했는데 특히 왕중양은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를 개창했다. 전진교는 왕중양의 제자인 장춘진인을 교주로 해 화베이지역에서 발전했다.

 

금은 시·부 시험으로 관리를 채용했기 때문에 시사(詩詞)가 유행했다. 우문 허중, 고사담, 오철, 채송년과 아들 채규가 유명하다. 장종 때는 문운이 융성했는데, 중앙정부에서는 서화 명품을 수집·전시했다. 장종도 서예에 뛰어났으며, 북송 휘종의 글씨체를 흠모하며 모방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서예가로는 임순, 이조, 양방기 등이 유명하다.

 

 

통일국가 송나라(960~1279)의 역사

 

통일국가였던 당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5대10국 시대가 된다. 그 중 5대 최후의 왕조였던 후주(後周)의 근위대장군이었던 조광윤이 왕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세운다.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이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송나라의 북방 요나라와 서쪽 위구르에 탕구트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가 통일국가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은 당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04년 북쪽에 있던 요나라가 공격하자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굴욕적인 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개조이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상대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또한 송나라는 서쪽 탕구트족이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공격하자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는다.

 

여진족은 처음에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이라 했다. 송 휘종은 종전에 요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금나라로 보내면서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자, 금나라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1126년 멸망시킨다. 당시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했다. 워낙 전투력이 없었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자 금나라가 분노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다. 그러자 송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떠넘긴다. 휘종은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 군대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약조가 잘 지켜지지 않자 다시금 금나라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126년 11월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만다. 금나라는 송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무릎을 꿇리고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라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 금나라에게 치욕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고종이다. 1127년 금나라에게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를 남송으로 구분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아비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지위에 올라있던 터라 형인 흠종은 포로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친다.

 

남송은 장군 악비의 선전으로 한때 금나라를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으나 힘이 부친 남송은 전쟁 대신 강화를 간절히 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강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금나라의 강압에 남송의 진회는 악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린다. 악비가 죽고 얼마 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조건이 남송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할 것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할 것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칠 것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할 것

이로써 남송은 생명을 140여년 더 연장하지만, 결국 금·송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