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우리는 지금/우리 땅(대마도)

日, 1905년 ‘독도 = 한국 땅’ 알고도 강탈

자연정화 2008. 8. 27. 12:58

日, 1905년 ‘독도 = 한국 땅’ 알고도 강탈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1905년 2월 각의(우리의 국무회의에 해당) 결의로 당시 주인 없는 땅이던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서도 타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영토 편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 정부 관리들이 이미 독도가 한국의 강원도에 속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독도 편입 처음엔 거부당해=역사학자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시마네대 명예교수는 2006년 출판한 저서(공저) 『사적 검증 다케시마·독도』에서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나이토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독도 편입은 1904년 9월 어민 나카이 요사부로가 독도 근해에서의 강치잡이 어업권을 독점할 목적으로 ‘섬 전체를 빌려 달라’는 ‘대하원(貸下願)’을 내무·외무·농상무 대신에게 제출한 데서 시작됐다. 하지만 내무성은 “이 시기에 한국 땅이란 의심이 있는 일개 불모 암초를 취하면 우리가 한국 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고 각하했다.

그러자 나카이는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을 찾아갔다. 야마자는 “시국은 영토 편입을 급요(急要)로 한다”며 “망루를 건축하고 무선·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상 극히 유리하다”고 출원 제출을 재촉했다. 그가 말한 ‘시국’이란 러일전쟁을 말한다. 이후 독도 편입은 1905년 각의에서 공식 결의된다.


◇‘독도=한국 땅’ 알고 있었다=야마자 국장이 당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란 게 나이토 교수의 연구 결과다. 야마자는 1904년에 나온 『한국실업지침』의 서문을 썼는데, 이 책은 13장 ‘수산’편에서 양코섬(리앙쿠르)을 울릉도와 나란히 강원도 항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키 보쿠신 농상무성 수산국장도 마찬가지였다. 마키가 서문을 쓴 1903년판 『한해통어지침』 역시 ‘양코섬’을 강원도 편에 포함시켰다. 나카이에게 ‘독도=무주지’란 유권해석을 내린 일본 해군성 수로부의 기모쓰케 겐코 수로부장도 마찬가지다. 소속 부서인 수로부가 1899년 펴낸 ‘조선수로지’에는 독도가 나오는 반면, 1902년 펴낸 ‘일본 수로지’에는 독도가 나오지 않는다.

나이토 교수는 16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시 일본 각의가 독도 편입 결정을 하면서 ‘타국이 점령한 형적(形跡)이 없다’고 한 것은 극히 일방적인 단정”이라며 “무주지 선점론은 사실 관계로 볼 때 성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영준 기자

◇나이토 교수는=1929년생. 교토대 졸업. 시마네대 법문학부장을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 영토”란 일본 정부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