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국 조선전도(參謀局 朝鮮全圖 )
陸軍參謀局, 1894년,127.1×94.1cm.
이 지도는 1894년 7월 2일에 陸軍文?로서 인쇄된 것이지만 이것의 초판은 1875년 12월에 작성되어 이듬해 초에 간행된 바 있다. 그러니까 일본과 조선 사이에 국교가 재개되기도 전에 제작된 지도다. 參謀局이 이보다 한 해 먼저(1874년 10월) 제작한 <亞細亞東部輿地圖>(圖252)의 한반도 부분과 비교할 때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첫눈에 보이는 차이는 한반도 서남 해안선이 바로잡혔다는 것이다.
이 지도에 실린 예언 '例言'에 의하면 이 지도는 <朝鮮八道全圖><大淸一統輿圖>와 英美에서 간행된 측량해도(測量海圖)를 참조하여 만들었으며, 특히 함경도의 한 조선인에게 지리에 관한 자문을 하고 의문스러운 것을 물어 틀린 것을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조선과 중국의 지도들은 이미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서남해안 수정은 이 例言으로써 설명되기 어렵다. 지도를 둘러싼 그 1년 간의 환경 변화는 일본과 조선 사이의 일련의 사건에서 찾아야 한다. 그 사건이란 일본 군함 雲場號의 조선 海岸 測量과 江華島 포격으로 두 나라는 세계 속에서 대극적(對極的)인 길을 걷게 되는데, 이때 雲場號의 해안 측량이 이 지도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明治維新 이후 이 군함의 측량이 조선에 대한 첫 번째 지형 정찰은 아니다. 征韓論이 제기되던 1872년 명치 정부는 조선에 外相격인 外務大丞·花房義質 등을 使節로 파견하는데 정한론의 기수 서향융성(西鄕隆盛)은 일행 속에 자기의 부하를 합류시켰다. 당시 일본 정부의 참의, 육군 원수(元帥)와 근위도독(近衛都督)을 겸하고 있던 西鄕隆盛은 역시 참의이던 반환퇴조(板환退助)와 함께 花房義質 일행에 육군 中佐 北村重賴와 少佐 별부진개(別府晉介)를 수행시킨다. 9월에 부산에 도착한 花房義質은 대마도 宗氏의 ?館을 접수하고 조선 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몇 달 만에 물러갔다. 기록에 의하면 대촌중뢰(北村重賴)는 1872년 別府晉介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 옷을 입고 조선 모자를 쓴 채, 당시로서는 외국인 왕래가 금지된 조선 내지에 들어가 제반에 사정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정찰 결과도 이 지도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 隣接國家의 지리와 군사를 중심으로 한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힘썼던 것은 육군 參謀局이었다. 이들의 조선에 대한 공작은 1888년에 간행된 『朝鮮地誌略』으로 절정을 이루게 되지만, 참모본부의 활동은 조선뿐 아니라 淸國·캄차카·사할린·滿州·중국·沿海·太平洋諸島를 포괄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어서 참모조직은 1871년 兵部省에 설치된 육군 參謀局에서 비롯한다. 기무밀모 참획 "機務密謀에 參劃하고, 地圖政誌를 편집하며, 아울러 간첩통보(間諜通報) 등의 일을 관장한다"는 것을 임무로 한 참모국은 1874년, 7명의 장교를 청국에 파견하였으며, 그 밖에도 많은 군인을 유학시켜 유사시에는 정보수집에 나서게 한 바 있다.
참모국은 1878년 參謀本部로 확대·개편되어 일본 참모조직이 본격적으로 확립된다. 신생명치 정부에서 군부는 국정에 깊이 관여하여 흔히 정부를 앞질러 사건을 꾸몄다. 참모국은 정부의 결정도 없는 상태에서 대만(臺灣)에 원정하였으며, 강화도사건도 해군이 먼저 저질러 정부가 추인(追認)을 했으며, 또 이를 이용했다. 정부에 대한 군부의 우월권은, 1874년 제도화되어 "陸軍卿은 將官 중에서 임명한다"는 관계가 제정되었다. 더욱이 參謀本部가 설치되자 군사 관계의 모든 일에서 정부의 개입이 배제되었다. 천황에 직속된 참모본부는 陸軍省을 통하여 오히려 정부에 간섭할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戰略用 지도로서 필요 충분한 기능을 했을 이 지도는 민간에도 전파되어 더욱 작은 축척으로 편집되어 보급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범위는 조선과 遼半島 서남단, 山東半島에 이르는데, 앞에서 언급한 參謀局의 1874년판 <亞細亞東部輿地圖>와 마찬가지로 울릉도와 독도를 각각 竹島와 松島라는 이름으로 포함시켰다. '松島'는 오른쪽 외곽선에 닿아 있어 이를 조선지도에 포함시키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水深을 표시한 大同江·漢江口·釜山浦·영흥( )灣 지도가 삽도로서 그려 있어 조선에 대한 침투 전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874년 지도에 皇紀라는 국수적 연호를 쓴 참모국이 여기서는 明治 연호를 사용하면서 經度도 東京이 아니라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축척에 日本里尺과 朝鮮里尺을 나란히 표시하고, 지명에 한자와 더불어 현지 발음을 표기한 片假名을 기록한 것은 현장중심적 실용성의 추구를 보여준다.
이 무렵 참모국의 지도 製圖를 책임진 사람들 가운데는 저명한 화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덕분인지, 침략을 위해 제작된 이 지도는 장식성을 배제하여 단순 명확한 지도가 되었지만 당시의 어느 지도보다 균형감 있고 잘 짜여진 모습을 보여 준다. 세부 묘사나 지명에 보이는 필적도 뛰어나다.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제작한 본격적 외국지도인 이 記念碑的 日本爪의 지도가 戰略用 지도라고 한다면 戰術用 지도라 할 수 있는 1:5만 축척의 '軍用秘圖'라는 지도들은 19세기 말에 제작되었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용 지도는 일단 완성을 보게 되지만 이들은 간단히 統治用으로 용도전환(用途轉換)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영남대박물관 소장